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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영화 <깊은 북쪽으로 가는 좁은 길> 2025년

by 노용헌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와 이 영화는 허구이지만, 1942~1943년에 있었던 역사적인 버마 철도 건설을 주제로 하고 있다. 조너선 테플리츠키 감독의 영화 <레일웨이 맨>(2013)에서도 포로들의 철도 건설 현장에서의 고통스런 작업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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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The Narrow Road to the Deep North>는 소설 속에서 나카무라 소령과 고타 대령 두 사람이 렌카와 와카, 하이쿠, 또 철로에 대한 일본인의 정신을 공유하면서 등장하는 대화 속에 나온다. 두 사람은 17세기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기행산문 시집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일본 정신의 천재성이 요약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은 1689년 마쓰오 바쇼가 제자 가와이 소라와 함께 일본 동북부의 오지를 여행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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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초에는 항상 빛이 있는 걸까? 도리고 에번스에게 최초의 기억은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던 교회 안으로 햇빛이 쏟아지던 모습이었다. 나무로 지은 교회. 눈부신 빛. 자신을 반기는 그 초월적인 빛 속을 아장아장 들락거리다가 여자들의 품에 안기던 자신. 그를 사랑하던 여자들. 바다에 들어갔다가 해변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슷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P13)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P15)


그는 이상한 데서 놀라움을 느꼈다. 돌로 지어진 그들의 집. 그들이 사용하는 식기의 무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무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 그는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가장 잘한 일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업적인지 그가 제대로 알아보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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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자신이 전쟁영웅이 된 것을 그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유명한 외과의였으며,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이었고, 전기와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숭배의 대상, 위인전의 대상, 아첨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외모 중 일부, 그리고 습관과 과거사 중에 그 전쟁영웅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아니었다.(P32)


이 책의 배경이 된 이야기는 1942년 2월 15일에 시작된다. 싱가포르의 함락으로 한 제국이 끝나고 다른 제국이 일어선 날이다. 하지만 1943년 무렵 능력 이상의 일을 벌인데다가 자원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패색이 짙었으므로, 이 철로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다. 연합군은 중국에 있는 장제스의 국민군에게 버마를 통해 무기를 제공해주고 있었고, 미군이 바다를 장악했다. 일본은 적군인 중국군과 이어진 이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고 버마를 통해 인도를 손에 넣기 위해 양국 지도자들의 미친 꿈처럼 반드시 육로로 버마군에 인력과 물자를 제공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철로를 지을 만한 돈도 기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전쟁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일본 제국에게는 자국이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적의 일본 정신, 서구에는 없는 바로 그 정신을 믿은 것이다. (P40)


그날 낮에 그 책을 훑어보다가 도리고 에번스는 한 작품에 사로잡혔다. 18세기의 하이쿠 시인인 시스이는 임종을 앞두고 마침내 임종 시를 써달라는 요청에 응해 붓을 들어 시를 그리고는 숨을 거뒀다. 충격에 빠진 그의 추종자들이 종이에서 발견한 것은 그가 그린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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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이의 시는 도리고 에반스의 잠재의식을 구르듯이 지나갔다. 갇힌 허공, 끝이 없는 불가사의, 길이가 없는 너비, 커다란 바퀴, 영원한 회귀, 원은 선의 안티테제였다.

뱃삯으로 망자의 입에 물려주는 은화. (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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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리넷 메이슨과 함께 호텔 방에 누워 있을 때, 침대 옆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중년에 다시 독서 습관을 들인 그는 어디에 있든 항상 그렇게 책을 놓아두었다. 그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은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고, 위대한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다시 읽어봐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가 읽은 책 중에 그런 책은 드물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드물어졌다. 그래도 그는 찾아 헤맸다. 자신이 영원히 향하게 될 이타카를 한번 더 찾아내려고, 그는 오후 늦게 책을 읽었다. 밤에는 어떤 책이든 거의 바라보지 않았다. 그 시간에 책은 부적이나 행운처럼 물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꿈의 세계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지켜주는 친숙한 신과 같았다. (P44)


그리고 서로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이쿠를 읊어주었다. 시 자체보다는 시에 대한 서로의 감수성이, 시에 깃든 천재성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서로의 지혜가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시를 안다는 사실보다는 시가 자신들과 일본 정신의 고귀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이 더 감동적이었다. 그 일본 정신은 이제 곧 철로를 따라 매일 버마까지 이동할 것이고, 버마에서부터 인도까지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세계를 정복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인 거야. 나카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 거지. (P163)


어떡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을 정말 원해.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꼴사납게 보일 정도로 저 사람을 원해. 자신이 수치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마음속에 못된 생각이 들어찬 것 같고, 온 세상이 그녀에게 벌을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다른 생각에 밀려났다. 수치심도 모르고 못된 내 심장이 온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용감해. 순간적으로 자신이 맞서서 물리치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더욱더 들뜨고 용감해졌다.(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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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돌아온 뒤 그녀는 그의 몸에 손을 대지도 그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눕곤 했다. 그러면 그는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여 몇 번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어쩌면 당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에게서 어떤 신호를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니며 그녀가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는 신호. 그가 그녀를 생각하듯 그녀도 그를 생각한다는 신호, 하지만 그런 신호는 전혀 없었다.

에이미는 등뒤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의 몸을 느끼며 사랑은 선(善)도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스와 함께 있을 때 반드시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고에 대한 감정이 항상 딱히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에이미에게 사랑은 우주에 닿는 것, 한 사람 안에서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절이었다.

그녀는 누워서 등뒤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키스를 느끼며, 사랑은 기쁨과 즐거움만큼이나 불행과 잔인함과 망각에 힘을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끝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렇게 누워 뱃속에서 깨진 유리 파편들이 굴러다니며 베고, 베고, 또 베는 것을 느꼈다. (P202)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수가 줄었지만, 처음에 에번스의 J부대로 싱가포르 창이를 떠난 포로 천 명(자바에서 항복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사람, 싱가포르에서 항복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사람, 침몰한 구축함 HMAS 뉴캐슬 호의 생존자, 기타 실패한 군사작전에서 잡힌 소수의 빅토리아주 출신과 뉴사우스웨일스 출신 포로들, 그리고 공군 몇 명)은 여전히 에번스 J부대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고, 이곳을 떠날 때도 그럴 것이다. 천 명으로 구성된 에번스의 J부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에 이 막사에서 걸어나가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도. 그들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한의 것,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믿음만 남은 채 모질고 힘든 세상을 이겨낸 생존자들이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믿음에 더욱더 강하게 매달린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놓아버리면 그들의 삶 또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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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고 에번스는 인부에게 고갯짓을 해서 불을 붙이라고 지시했다.

니네베, 티루스, 하느님조차 버리신 시암의 철로, 도리고 에번스가 말했다. 불꽃의 그림자들이 그의 얼굴에 호랑이 같은 줄무늬를 만들었다. 키플링의 시가 모든 것은 잊힌다는 내용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른 것을 어찌 기억할 수 있을까?

시는 법칙이 아닙니다. 운명이 아니에요. 대령님.

그렇지, 도리고 에번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는 시가 대략 운명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저 그림 말입니다.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그림 말이에요, 대령님.

그림이 뭐, 보녹스?

토끼 헨드릭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그림들은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그래서 세상이 알게 될 거라고요.

그래?

기억이 진정한 정의입니다. 대령님.

아니면 새로운 공포의 창조자일 수도 있지, 기억은 정의와 비슷할 뿐이야. 보녹스, 사람들에게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또 하나의 잘못된 생각이니까.

보녹스 베이커는 인부를 시켜 스케치북을 펼치게 했다. 일본군이 싱가포를 점령한 뒤 중국인들의 목을 잘라 장대에 꿰어서 줄줄이 세워놓은 모습을 먹으로 그린 그림이 나왔다.

여기에 만행이 그려져 있습니다. 보세요. (P305-306)


어둡고 음산한 정글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지미 비글로는 이번에도 고래처럼 변해버린 혀를 비껴 숨을 쉬며 임시변통으로 연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명을 질러대는 신경을 속이기 위해서는 그저 음표를 하나하나 연주하는 데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이 정글에 남아 있게 된 사람들을 위해 한 번 더 힘을 내야 했다. 그런데 연주를 하면서 눈물이 흘러나와서 그는 당황했다. 어제나 그저께 다섯 번이나 장례식 연주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역시 무슨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연주를 하면서 몸이 느끼는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간단한 곡을 하나 연주하는 것이 힘든 시련이 되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거나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나약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재빨리 돌아섰다.

나팔로 끔찍한 죽음의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온몸이 타는 듯이 아픈데도 그는 계속 연주했다. 매번 노래가 새롭게 들렸지만, 노래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싫었고, 자신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이 노래를 계속 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연주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 노래는 사람들이 하는 말, 그러니까 병사들이 이제 일을 모두 마치고 쉴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상관이 없었다. 일은 무슨 일? 왜? 어떻게 사람이 쉴 수 있지? 지금 그가 연주하는 노래는 이런 것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런 질문들을 계속 연주했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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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느님한테 아무런 이의가 없다. 도리고 에번스는 보녹스 베이커와 함께 장작을 밀고 쑤셔서 시체들이 불길에 골고루 감싸이게 하며 말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도 귀찮아. 내가 지긋지긋하게 싫은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이런 식으로 끝을 내는 게.

이런 식이라니요?

하느님 방식. 하느님이 이랬네 하느님이 저랬네 하는 것.

사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씨발 놈의 하느님이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씨발 놈의 하느님. 그 씨발 놈의 이름, 앞으로도 영원히 씨발. 평생 동안 씨발 놈. 우리를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여기를 돌아보지 않고, 저 씨발놈의 대나무 위에서 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P312-313)


경비병들이 돌아가며 가디너를 발로 차는 동안, 나카무라는 잇사의 하이쿠를 중얼거렸다. 후쿠하라가 의문이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통역해라, 나카무라가 말했다.

그래, 통역해라. 나카무라가 말했다.

후쿠하라는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자는 시를 좋아해. 나카무라가 말했다.

일본어로는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후쿠하라가 대답했다.

통역해.

영어로는 아닐 것 같습니다.

통역해.

후쿠하라는 바지 옆선을 손으로 매끈하게 펴면서 오스트레일리아 대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목이 훨씬 더 길어 보이도록 몸을 똑바로 편 뒤 시를 통역하기 시작했다.

고통의 세상

벚꽃이 피면

그 세상도 꽃을 피운다.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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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지켜보는 도리고 에번스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삼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사람을 세 명이 망가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이렇게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동의했고, 저 진동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도리고는 가장 먼저 박자를 맞췄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한 일이 거의 없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동의한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됐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너무나 기묘하고 압도적이어서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리고 에번스의 머릿속에서 이런 감정이 잠시 허우적거리다가 사라져버렸다. 뒤에서는 나카무라가 자리를 뜨고 있었다. 나카무라 역시 너무 혼란스럽고 동요가 심해서 자신의 생각을 붙드는 건 고사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 좀더 마음이 놓이는 편안한 생각들, 임무와 천황 폐하와 일본국과 내일의 철로공사라는 더 현실적인 걱정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그리고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얌전히 수행하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P36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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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라인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세계적인 일본제국을 세우겠다는 꿈이 방사능에 날아가버린 뒤 철로 건설은 이제 목적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일본인 기술자들과 경비병들은 수감되거나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남아 있던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주도 되지 않아 라인은 자신의 종말을 반기기 시작했다. 먼저 타이인들이 라인을 버리고 가버렸고, 영국인들이 라인을 해체했으며, 부족민들이 그 잔해를 가져다 팔았다.

시간이 더 흐르자 라인은 휘어지고 틀어지기 시작했다. 양옆에 쌓은 둑과 다리가 물에 쓸려가고, 바위를 깎아서 낸 길이 다시 메워졌다. 방치는 변형으로 이어졌다. 한때 죽음이 은밀히 활보하던 곳에 생명이 돌아왔다.

라인은 비와 햇빛을 환영했다. 많은 사람들이 묻힌 묘지의 머리뼈와 넙다리뼈와 부러진 곡괭이 자루 사이에서 씨앗이 싹을 틔우고, 레일을 고정하는 대못과 빗장뼈 옆에서 나란히 덩굴손이 자라나서 티크 침목과 정강이뼈, 어깨뼈, 등뼈, 종아리뼈, 넓다리뼈 주위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라인은 노예들이 흙과 돌멩이를 운반해서 쌓아놓은 둑에 잡초가 파고드는 것을 환영했고, 노예들이 나무를 잘라 운반해서 세웠으나 이제는 무너진 다리를 흰개미들이 파고드는 것을 환영했으며, 노예들이 길게 늘어서서 어깨에 지고 옮긴 철로용 쇳덩이에 녹이 스는 것을 환영했다. 라인은 썩어가는 폐허를 환영했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더위와 비구름, 벌레와 새와 동물과 식물밖에 없었다. 그들은 과거를 알지도 못하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은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수십 년이 흘렀다. 과거의 기억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라인의 일부를 조금씩 발굴해냈고, 그렇게 발굴된 구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묘하게 부활해서 어디와도 연결되지 않은 동떨어진 선이 되었다. 관광지이자 신성한 장소이자 국가적인 장소였다.

라인은 망가졌다. 모든 선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모든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의미와 희망을 갈망했지만, 과거 기록은 오로지 혼란만이 가득한 흐릿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도 없이 이어져 땅에 묻힌 그 거대한 폐허로부터 고독하고 한결같은 정글만이 멀리멀리 뻗어나갔다. 제국의 꿈과 죽은 사람들이 남긴 것은 길게 자란 풀밭뿐이었다. (P374-375)


신주쿠 라쇼몽의 들쭉날쭉한 꼭대기에 참깨씨처럼 흩어져 있던 까마귀들은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에 깜짝 놀라서 도쿄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도쿄는 아직 잿더미가 된 과거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기 전이었다. 그들의 날갯짓 아래 도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까마귀들은 불길에 휩쓸린 도시에 흔하게 널려 있던 시커먼 시체들로 만찬을 즐겼다. 하지만 지금 하늘을 날고 있는 그들 아래에 펼쳐진 것은 불에 타고 엉망으로 뒤집어진 광활한 평원뿐이었다. 괴상한 토끼굴과 미로처럼 생긴 건물들 안에서는 미망인들과 고아들, 망가지고 불구가 된 전직 군인들, 미친 자들, 죽어가는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런 그들 앞을 가끔 미군 지프가 지나갔다. (P379)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두려움과 50엔의 봉급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생각을 막기 위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처형당할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위대한 조선 만세! 한 조선인은 처형장까지 운명의 열세 걸음을 걸어가며 이렇게 외쳤다.

위대한 조선이라니 무슨 소리야? 최상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 50엔은 어디 있어? 난 조선인이 아니야. 난 일본인도 아니야. 난 식민지 백성이야. 내 50엔은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농부인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지만 먹고 살기가 힘든 형편이라서, 그는 소학교에서 삼 년 동안 일본 신화와 역사를 약간 배운 뒤 어떤 조선인 가정에 하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집에서는 그에게 숙식과 매달 2엔의 봉급. 그리고 정기적인 매질을 제공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열두 살 때 그는 일본인 가정의 하인이 되었다. 그들은 그에게 숙식과 매달 6엔의 봉급. 그리고 가끔 한번씩의 매질을 제공했다. 열다섯 살 때 그는 일본인들이 제국 내의 다른 지역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일할 사람들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봉급은 매달 50엔이었다. 열세 살이던 여동생은 일본인들에게 비슷한 돈을 받고 정신대가 되어 만주국으로 갔다. 병원에서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될 거라며 몹시 기뻐했다. 동생은 글을 전혀 몰랐으므로, 그는 그뒤로 동생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지금은 동생처럼 떠난 여자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그는 동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도 생각이 날 때는 동생 자신을 위해서라도 동생이 이미 죽었기를 바랐다. (P42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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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이 끝날 때가 가까워지면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알아요? 사토가 물었다.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 그의 지친 얼굴이 점점 어둑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땅의 정신없는 흔들림이 멈추면, 모든 것이, 그러니까 벽에 걸린 그림, 거울, 창문, 고리에 걸어둔 열쇠 등 모든 것이 부르르 떨면서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밖에서는 당신이 친숙하게 알던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고요.

그거야 당연하죠. 나카무라가 말했다.

마치 세상이 그 어렴풋한 소리를 내는 것 같죠?

맞습니다. 나카무라가 말했다.

해부실 천칭의 스테인리스 접시가 미국인의 심장 때문에 떨릴 때가 꼭 그랬습니다. 마치 세상이 떠는 것 같았어요.(P438)


기운이 다 빠져버린 공허가 그를 에워쌌다. 뚫을 수 없는 공허가 사교성 좋기로 유명한 이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벌써 다른 세상에 가서 살고 있는 듯했다. 한없는 꿈 또는 끝나지 않는 악몽을 풀었다 되감기를 영원히 반복하면서. 꿈과 악몽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거기서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다시 불을 켤 수 없게 된 등대였다.(P483)


현실적이고도 다정하게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것, 함께 보낸 세월, 수십 년 동안 쌓인 두 사람만의 대화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소한 일들, 그러니까 잠에서 깨었을 때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체취와 아이가 아플 때 상대의 떨리는 숨소리, 서로가 앓은 병, 슬픔과 관심, 서로 기대하지도 않고 말해본 적도 없는 애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더 확실하며 더 강하게 두 사람을 묶어주는 것 같았다.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엘라에게 묶여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도리고 에번스는 무엇보다 완전하고 확실한 고독을 느꼈다. 그 고독의 메아리가 어찌나 큰지 그는 징징 울려대는 그 적막을 깨고 싶어서 자꾸만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 생기가 새어 나갈 때도 그는 돈키호테 같은 바람둥이 행각에 힘을 기울였다. 어디에도 진심이라는 것이 없다면, 여러 면에서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더 좋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고독의 비명이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기만 했다. (P489)


그는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매며 평생 가장 놀라운 꿈에 사로잡혔다. 빛이 흘러넘치는 교회에 그가 에이미와 함께 앉아 있었다. 눈이 멀 것같이 밝고 아름다운 빛이었다…… 그동안 온 나라는 미리 그를 애도할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청년들의 타락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전 세대의 숭고한 영웅들과 지금 세대의 비열하고 살인적인 범죄성을 비교했다. 정작 그는 자신의 삶이 이제 막 시작했음을 깨닫고 기가 막혔다. 이미 오래전에 깨끗이 개간된 멀고 먼 티크 정글에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시암이라는 나라에서,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남자가 마침내 잠들었다.(P528~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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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끄러움과 상실감을 느꼈다. 자신의 삶에는 언제나 부끄러움과 상실감뿐인 것 같았다. 마치 이제 불이 꺼지고,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아들! 얘야! 하지만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지옥으로.

리넷 메이슨의 잠든 얼굴이 기억났다. 떠나기 전 자신이 마셨던 글렌피딕 위스키 미니어처가 생각났다. 토끼 헨드릭스가 그린 다키 가디너의 그림이 생각났다. 다키가 앉아 있는 화려한 안락의자 사이로 작은 은빛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그 의자가 놓인 시리아의 마을에서는 얘비버로스와 그의 뾰족뾰족한 머리가 시리아의 흙먼지 속으로 녹아들기 직전이었다. 그 그림이 살아남아 한없이 복제되는 현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얘비 버로스는 죽었고, 이제는 그의 삶에 미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파란색 제복 차림의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도리고는 미안하다고 그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면 침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어쨌든 그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치는 사람들, 물건들, 장소들 속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등부터 끌려가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면서, 이미 잊었거나 반쯤 잊은 것들, 이야기들, 시구들, 얼굴들, 잘못 이해했던 몸짓들, 퇴짜를 놓았던 사랑, 빨간 동백꽃, 우는 남자, 나무로 지은 교회 안, 여자들, 그가 태양에게서 훔쳐온 빛 등등이 점점 자라서 슬퍼하며 춤추는 폭풍 속으로 깊게 깊게 빠져들어갔다.

또다른 시가 생각났다. 그 시의 전체 모습이 보였지만,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론의 불타는 눈이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 보였지만, 그는 카론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동전이 자신의 입에 억지로 물려지는 맛이 나고, 자신이 허공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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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병원의 수단인 일꾼이 목격한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전진하라, 제군들, 창턱으로 돌격하라.

올가미가 그의 목을 더 단단하게 죄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한쪽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다리는 일이 초 동안 경련하며 침대의 강철 골격을 쿵쿵 때리다가 그대로 멈췄다. (P53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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