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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그린마일>

영화 <그린마일The Green Mile> 1999년

by 노용헌


사건은 1932년에 일어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주 형무소는 콜드마운틴에 있었다. 그곳에는 당연히 전기의자도 있었다.

재소자들은 그 의자를 두고 농담을 던졌다. 그것은 두렵지만 달아날 길이 없는 흉물 앞에서 늘 해 대는 농담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철 스파크 아니면 대형 녹즙기라고 부르면서, 전기료가 어떻느니, 그해 가을 무어스 교도소장이, 골골해서 요리조차 할 수 없는 마누라를 데리고 추수 감사절 요리를 어떻게 만들었느니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잘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정작 그 의자에 앉아야 할 처지가 되면 그런 농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콜드마운틴에 근무하는 동안 형 집행을 일흔여덟 번 주관했다(이것은 확실한 숫자다.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형수가 자기에게 닥칠 일을 실감하는 것은 발목이 고철 스파크의 단단한 떡갈나무 다리에 고정되는 순간이다. 얼마 안 가서 내 다리의 생애도 종착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일종의 담담한 체념이라고나 할까, 사형수의 눈빛에서 고개를 드는 그런 깨달음을 읽는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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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동 한복판의 넓은 복도 바닥은 녹색의 낡은 리놀륨이었다. 그래서 다른 교도소에서는 라스트 마일(마지막 길)이라고 부르는 곳을 콜드마운틴에서는 그린 마일(푸른 길)이라고 불렀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아래에서 위까지, 내 계산으로 예순 걸음은 된다. 아래에는 구금실이 있었고 맨 위는 T자로 갈렸다. 왼쪽으로 꺾어지면 살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부대끼는 것도 사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이렇다 할 부작용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그렇게 잘도 살아 냈다. 절도범, 방화범, 강간범은 자기네끼리 나불거리고 걸어다니고 뒷거래를 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사정이 달라졌다. 사형수는 내 방(여기도 카펫이 녹색인데 바꿔야지 바꿔야지 하다가 결국 못 바꾸고 말았다)으로 들어와 책상 앞까지 왔다. 책상 왼쪽에는 미국 국기가 있고 오른쪽에는 주기가 있었다. 양 옆으로 더 멀리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나와 E동 간수들이(가끔은 무어스 교도소장도) 사용하던 조그만 화장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또 하나는 창고 같은 곳으로 통했다. 그린 마일로 걸어온 사형수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문이었다. (P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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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편히 지내느냐 고생스럽게 지내느냐는 자네 하기에 달렸어.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우릴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자네 신상에도 좋을 거란 말을 하기 위해서야. 꼬장을 부려도 소용없어. 우린 자네한테 응분의 대우를 해 줄 거다. 질문 있나?”

“밤에도 불을 켜 둡니까?” 마치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는 정색을 했다. E동에 새로 들어온 죄수들한테서 별별 해괴망측한 질문을 다 들어 보았고, 한번은 내 마누라의 가슴 크기를 물어 온 놈도 있었지만,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커피는 겸연쩍게 웃었다. 한심한 놈으로 보이리라는 걸 자기도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밤에 좀 겁이 날 때가 있어서요. 잘 모르는 데 가면.”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무지막지한 체구를 쳐다보았고,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누구라도 나처럼 감동을 받았으리라. 아주 악질이라면 대장간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악마처럼 공포심을 뭉개 없애느라 저렇게 애쓰지는 않으리라.

“여긴, 밤새 아주 환해. ‘그린 마일’의 전등 가운데 절반은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매일 켜 두니까.” 그러고 나서야 나는 미시시피의 밑바닥에서 굴러먹던 친구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 리 만무하다고 여기고 서둘러 덧붙였다. “복도 말이네.”

그는 살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라고 해도 과연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옥사 철조망에 달린 200와트 전구들은 볼 수 있었으리라. (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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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트는 것’은 사실 우리 일의 핵심이었다. 그때는 나도 미처 몰랐지만 이렇게 어색하리만큼 나이를 먹고 그만큼 유리한 위치에서 되돌아보니, 그 일이 중요했다는 걸 절감한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것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아가듯이 그것이 너무나 크고 우리 일의 중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뜨내기들이야 아무리 ‘말문을 트는’ 재주가 좋아도 소용없었지만, 나나 해리, 브루털, 딘에게는 중요했다. 퍼시 웨트모어가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재소자들은 그를 미워했고 간수들도 그를 미워했다. 모두들 그를 미워했다. 그의 정치적 연줄과 퍼시 자신, 그리고 아마도 (그야말로 아마도) 그의 어머니만 빼놓고서는 말이다. 그는 웨딩케이크에 흩뿌려진 한 줌의 하얀 비소 같았다. 나는 그가 말썽을 불러일으킬 존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다. 그놈은 언제 일을 벌일지 모르는 사고뭉치였다. 사실 우리도 사형수의 감시인 노릇이 아니라 상담인 역할이야말로 교도관 본연의 임무라는 생각에는 비웃음을 보냈을 터이고 지금도 여전히 비웃지만, 말문을 트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다들 하고 있었다...... 말문을 트지 않았을 경우 고철 스파크를 코앞에 둔 사람들은 심한 정신 착란을 일으키곤 했다.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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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음을 뚝 그쳤다. 갑자기 살을 뚫고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를 느꼈던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지만(자기를 얼간이처럼 보이거나 들리게 만들 말을 엉겁결에라도 내뱉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나머지에 대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이 점에 대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나는 나 자신이 그 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간수로서가 아니라 그린 마일에 있는 또 하나의 사형수로서 말이다. 형이 확정된 사형수로서 아득히 높아만 보일 책상과(언젠가 우리가 볼 하느님의 심판석도 틀림없이 그렇게 아득해 보일 것이다) 파란 제복을 입고 굵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책상 뒤의 거인들을 감연히 올려다보는 사형수, 거인들은 쥐를 보면 공기총으로 쏘고 빗자루로 갈기고, 작은 구리판 위에 놓인 치즈를 갉아먹기 위해 쥐가 ‘승리자’라는 상표 위로 살금살금 기어올 때 등뼈를 분지르는 덫으로 잡았다. (P68-69)


지금 내가, 어지러이 흩어진 내 마지막 기억의 다발을 모으고 있는 이곳은 조지아 파인스 양로원이다. 애틀랜타에서는 6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는 200광년쯤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여생을 이런 곳에서 보내지 않으려면 단단히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못 살 동네는 아니다. 케이블 TV가 있고, 나오는 음식도 괜찮다(씹을 수 있는 게 워낙 적어서 탈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콜드마운틴 교도소의 E동이 늘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 지내자면 포충병(捕蟲甁)에 갇혀 있는 듯 숨이 막힌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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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적당한 시간에 추장과 만났다. 그는 자기의 첫 아내 이야기도 했고 첫 아내와 함께 몬태나에 지었던 오두막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물이 얼마나 맑고 차가운지 마실 때마다 입안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보시오. 에지콤 씨. 만약에 사람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 거기서 영원토록 살 수 있을까요? 천국이 그런 델까?”

“내가 철석같이 믿는 게 바로 그거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내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거짓말이었다. 영원의 문제를 나는 어머니의 어여쁜 무릎 위에서 배웠다. 그리고 내가 믿는 것은 성서가 살인자에 대해서 한 말, 곧 살인자는 영생을 못 누린다는 가르침이었다. 살인자는 곧바로 지옥으로 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이 가브리엘에게 심판의 나팔을 불라고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불속에서 모진 고통을 겪는다. 나팔 소리와 함께 그들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아마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비터벅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나는 그런 믿음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그걸 알고 있었으리라. ‘네 동생은 어디 있느냐, 지하에서 그의 피가 나에게 울부짖는구나.’ 하느님이 카인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하느님의 말을 듣고도 카인이라는 문제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인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피의 흐느낌을 들었을 거라고 나는 장담한다. (P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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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분에게 존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몸이 워낙 커서 발이 침상 밖으로 그냥 비어져 나오다 못해 바닥까지 쑤욱 내려가는 사나이를 언제까지 독방에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미처 몰랐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이 그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알겠는가? 나는 여러분이 그를 지켜보기 바란다. 자기 감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팔을 얼굴 위에 올려놓는 그 모습을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의 소리를 듣기 바란다. 흐느낌처럼 떨리는 그의 한숨, 간간이 새어 나오는 물기 어린 신음을. 그것은 이따금 우리가 E동에서 들었던 고뇌와 후회의 소리도 아니었고 회한의 파편이 담겨 있는 날카로운 외침도 아니었다. 젖어 있던 그의 눈처럼 그 소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통으로부터 묘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말이 얼마나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지 나도 안다.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가슴속 진실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가 느꼈던 것은 온 세상에 대한 슬픔, 남김없이 삭여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었던 듯하다. 이따금 나는, 모든 사형수에게 그랬듯이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말했듯이 대화는 우리한테 가장 크고 중요한 소임이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려고 노력했지만 크게 위로가 된 것 같지는 않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히려 그가 겪는 괴로움을, 뭐랄까, 즐기고 있기도 했다. 그는 고통을 겪어도 싸다는 생각이었다. (P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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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겨, 퍼시! 갈겨!” 해리가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악을 썼다. 그러나 퍼시는 눈만 사발만큼 휘둥그렇게 뜨고 곤봉을 손에 쥔 채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찾아왔다고. 그 점호 방망이를 활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러분은 생각하겠지만, 방망이를 휘두르기에 그는 너무나 겁에 질려 있었고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공포에 떠는 왜소한 프랑스 인도 아니었고 늘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덩치 큰 흑인도 아니었다. 이건 미쳐 날뛰는 악마였다.

워턴의 감방에서 나온 나는 서류판을 떨어뜨리고 38구경 권총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두 번째로 나의 몸 한가운데를 달구던 요도염을 잊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워턴의 얼빠진 표정과 흐리멍덩한 눈에 대해서 말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본 워턴의 모습은 달랐다. 내가 본 것은 짐승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지능을 가진 짐승이 아니라 교활함과 야비함...... 자기만족으로 똘똘 뭉친 짐승이었다. 그렇다. 그는 원래 자신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장소와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또 하나 내가 본 것은 빨갛게 부풀어 오른 딘 스탠턴의 얼굴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워턴은 권총을 보고 딘을 앞으로 내세웠다. 나는 한 사람을 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도 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딘의 어깨 너머로 이글거리는 파란 눈동자가 나에게 어서 쏘라고 악을 쓰고 있었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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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렸다시피......”

“호기심이라 그랬죠. 호기심이야 누구한테나 있지요. 저도 그건 압니다. 하느님께 그 점에 대해서 감사드리고픈 심정입니다.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없다면 전 직장을 잃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판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지만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80킬로미터를 달려왔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더군다나 마지막 30킬로미터는 비포장 길이었는데 말입니다. 왜 저한테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 겁니까, 선생? 당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드렸으니 제 호기심도 충족시켜 주시지요.”

글쎄,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음, 저는 요도염을 앓고 있는데 존 커피가 제 몸에 손을 대고부터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어린 소녀 둘을 강간하고 살해한 그 남자가 말입니다. 당연히 그 사람한테 의문이 생겼지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호머 크리버스 보안관과 로브 머기 부보안관이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 사람한테 불리한 증거가 한 둘이 아닌데도 그쪽으로 생각이 가더라고요, 아마 대부분은, 손에 그런 엄청난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아이들을 강간하고 살해할 부류의 인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이 먹혀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제가 궁금하게 여기는 건 두 가집니다. 하나는, 전에도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있느냐.” 내가 말했다.

해머스미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흥미를 느꼈는지 그의 눈에서 돌연 총기가 감돌았다. 나는 그가 똑똑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수재형의 인간인지도 몰랐다.

“왜요?” 그가 물었다. “짚이는 데라도 있습니까, 에지콤 씨? 본인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전혀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대개 보면 전과가 있어요. 거기에 맛을 들이거든요.”

“옳습니다. 그래요. 확실히 그래요.”

“그래서 얼마든지 꼬리를 밟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제 머리를 스치더군요. 덩치도 덩치지만, 검둥이 아닙니까. 추적이 어려울 리 없지요.”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틀렸습니다. 아무튼 커피의 경우는 그래요. 제가 압니다.”

“알아봤나요?”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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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깨일 만큼 깨인 사람입니다. 에지콤 씨, 볼링그린에서 대학물도 먹었어요. 역사와 저널리즘을 전공했죠. 철학도 조금 공부했고요. 저는 스스로 깨인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북부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제자신은 그렇게 생각해요. 억만금이 생긴다 해도 노예제는 부활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도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똥개는 기회만 생기고 그러고 싶다는 마음만 들면 언제든지 깨물 거라는 사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검둥이도 기회만 포착되면 언제든지 깨물 거라는 사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온몸에 흉터가 난 당신의 울보 커피 씨가 정말로 범인인지 알고 싶다고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사람 짓이에요. 의심은 금물입니다. 그 친구를 싸고돌지 마세요. 한 번을 저질렀는지 백 번을 저질렀는지 천 번을 저질렀는지 그건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내 앞으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들을 엄지에 대고 빠르게 맞비벼 딱 소리를 내고는 손 모양을 깨무는 입처럼 만들었다. “아시겠소?”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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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 나는 어서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퍼시를 닮아 갔다. 1932년 가을 그린 마일에 온 망나니 윌리엄 워턴이 한번은 퍼시를 붙들어서 겁을 주어 바지에 오줌을 싸게 만든 적이 있었다. “누구한테든 입만 뻥긋해봐.” 퍼시는 그 일이 있은 뒤,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일주일 안에 모가지를 날려 버릴 테니까.” 그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내 귀에는 브래드 돌런의 입에서 거의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어조로 들려오는 듯했다. 지난 일들에 대해서 글을 쓰다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차마 입에 담기 싫은 문의 자물쇠를 내가 푼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문을 통해서 퍼시 웨트모어는 브래드 돌런에게, 재니스 에지콤은 일레인 코널리에게, 콜드마운틴 형무소는 조지아 파인스 양로원에 연결되었다. 오늘 밤 보나마나 나는 그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P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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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교도관님. 좋아요.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아버지가 함께하시건 하지 않으시건, 성모마리아가 보살피시건, 보살피지 않으시건. 나는 그의 눈에서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녹색 카펫의 나머지 부분을 지나 작은 문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즈음이면 거의 모든 사형수가 두려움을 느꼈다.

“바닥에서 멈추시오.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가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낮게 귀띔했지만 그것은 불필요한 조언이었다. 그는 계단 발치에서 멈추었다. 물론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퍼시 웨트모어가 단 위에 떡 버티고 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퍼시의 한쪽 발 옆에는 스펀지가 든 양동이가 있었고 오른쪽 허리 너머로는 주지사에게 연결된 전화기가 살짝 보였다.

“농(안 돼), 농, 농, 저 사람은 안 돼!” 들라크루아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걸어요. 우리 두 사람만 쳐다보고 있으면 된다니까. 저 친구는 의식하지 마요.” 브루털이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들키지 않고 몸만 살짝 움직여서 들라크루아의 왼쪽 팔꿈치를 꽉 잡고 있을 수 있었다. “침착해요.” 나는 들라크루아만, 어쩌면 부르털까지도 들을 수 있게 살짝 말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앞으로 당신에 대해서 기억한다면 그건 당신이 최후를 어떻게 맞이했는가요. 그러니 의연함을 보여야죠.”

그 순간 가장 요란한 천둥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터졌고 그 소리가 어찌나 큰 지 헛간의 양철 지붕이 다 흔들렸다. 퍼시는 누구한테 엉덩이라도 찔린 사람처럼 팔짝 뛰었고 들라크루아는 가벼운 경멸의 미소를 보냈다. “조금만 더 컸으면 바지에 또 쉬를 하겠네. 가죠. 일을 끝냅시다.” 들라크루아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쭉 폈다. 펴 보아야 그 어깨가 그 어깨였지만.

우리는 단으로 걸어갔다. 들라크루아는 걸어가면서도 불안한 눈길로 이번에는 스물다섯 명쯤 되는 증인들을 둘러보았지만, 브루털과 딘, 나는 줄곧 의자만 바라보았다. 만반의 준비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면서 퍼시한테 눈썹으로 질문을 던졌다. 퍼시는 ‘준비가 끝났냐 이 말이죠? 아무렴요.’ 라고 말하듯이 씩 웃었다.

나는 그의 판단이 옳기를 빌었다.

들라크루아가 단 위로 올라섰을 때 브루털과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팔꿈치로 손을 뻗었다. 바닥에서 겨우 12센티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인생의 그 마지막 계단에 올라설 때 열에 아홉은 부축을 받아야 했다.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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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아침 나의 관심은 온통 퍼시와, 그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와일드 빌 워턴의 문제에 쏠려 있었다. 수송 문제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해리 터월리거는 먹다 남은 두 번째 샌드위치를 집었다가 잠시 보더니 도로 내려놓았다. “만약 우리가 이 정신 나간 짓을 정말로 결행할 거라면, 내 픽업트럭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트럭 뒤에 태우면 되니까, 그 시간이면 오가는 차도 없거든요. 자정 한참 지나서 결행하는 거 맞죠?”

“그래.”

그때 딘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나도 커피가 여기 온 후로 아주 얌전히 굴었고 주로 침상에 누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는 건 압니다. 그렇지만 그는 살인범이에요. 게다가, 덩치가 보통이 아니라고요. 해리의 트럭 뒤 칸에서 도망가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린 쏴 죽이는 것 말고는 저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45구경 총으로도 그런 거인을 죽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그 친구를 막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모가지가 달아나는 것도 괴롭지만 형무소에 가는 건 죽기보다 싫어요. 나한테는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는 좋다고 쳐요. 만약 또 다른 소녀가 희생당한다면 난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런 일은 안 생길 거야.” 내가 말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확신이 내게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를 도운 것은 브루털이었다.

“그가 결백하다고 보는 거죠? 그 느림보가 무죄라고 보시는 것 같아요.” 브루털이 말했다.

“나는 그가 결백하다고 생각해.” 내가 말했다.

“어떻게 자신할 수 있죠.”

“두 가지야. 그중의 하나가 내 구두일세.” 나는 앞으로 다가앉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P35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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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일이란 게 다 그렇지만 시동 걸기가 가장 어렵다. 엔진이야 내가 키를 사용하건 크랭크를 사용하건 개의치 않는다. 일단 시동만 걸리면 엔진은 어떤 방식을 거쳤건 대체로 부드럽게 굴러간다. 어제 나는 그런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단어들이 작은 뭉텅이로 튀어나오더니 이윽고 온전한 문장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다시 급류로 바뀌었다. 글은 아주 특수하고, 뭐랄까 소름 끼치는 회상의 하나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글은 강간처럼 온몸을 파고든다. 쭈그렁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지만(내가 없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 같은 느낌을 나는 간혹 받는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연필과 기억이 만나면 거짓말 안 보태고 일종의 마력이 생기는 것 같다. 마력은 위험하다. 존 커피를 알았고 그가 쥐와 사람들에게 한 일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력은 위험하다.

아무튼 어제 나는 하루 종일 글을 썼다. 단어들은 내 안에서 술술 흘러나왔으며, 곱게 단장한 양로원의 일광욕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숱한 나의 문제아들이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박았던 그린 마일 끝의 헛간과 도로 밑의 터널로 이어진 계단 밑바닥이 나타났다. 그곳은 내가 딘, 해리, 브루털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는 에두아르 들라크루아의 주검 앞에서 퍼시 웨트모어와 담판을 벌였고, 퍼시에게서 브라이어리지 주립 정신병원으로 전근 신청을 내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받아 낸 곳이었다.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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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결백하다고 보는 거죠? 그 느림보가 무죄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브루털이 말했다.

“나는 그가 결백하다고 생각해.” 내가 말했다.

“어떻게 자신할 수 있죠?”

“두 가지야. 그중의 하나가 내 구두일세.”

“구두요? 존 커피가 쌍둥이 자매를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와 구두가 무슨 상관 있다는 겁니까?” 브루털이 어이없어했다.

“어젯밤에 나는 구두 한 짝을 벗어서 그 친구한테 줬어. 집행이 끝나고 어수선한 분위기도 웬만큼 가라앉았을 때 말이야. 그걸 철창 사이로 들이미니까 그 큼지막한 손으로 받아 들더군. 나는 커피한테 구두끈을 묶어 보라고 했어. 확인할 게 있었거든.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의 문제아들은 대부분 슬리퍼를 신지. 마음 독하게 먹고 정말로 자살할 생각이 있으면 구두끈으로도 얼마든지 자살을 결행할 수 있거든.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 구두를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끈 끄트머리를 제대로 엇갈려 놓더라고. 하지만 거기서 막혀 버렸어. 어렸을 때 누군가가 시범을 보여 줬을 때는 분명히 알았다고 하더군. 아마 아버지였든가, 아니면 아버지가 죽은 다음 어머니가 사귀던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테지. 커피는 요령을 잊어버린 거야.”

“저도 브루털과 동감입니다. 커피가 데트릭 자매를 죽였는지의 여부와 구두끈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딘이 말했다. (P37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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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봐. 참말 희한하지. 아무리 흑인 부랑자한테 범죄를 뒤집어씌우지 못해 배심원이 환장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존 커피가 그 사람이란 걸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음식으로 개를 얌전히 만든 뒤 목을 비튼다는 발상은 커피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야. 커피는 트라핑거스 강 남쪽 기슭 이상으로는, 그러니 까 데트릭 농장에는 한 발짝도 접근하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10킬로미터 이상은 떨어져 있었다는 소리지. 커피는 부질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던 거야. 철로 변을 따라 걷다가 화물칸에 올라타 어디론가 가려고 했는지도 몰라. 철교 끝에서는 기차가 속도를 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올라탈 수 있거든. 그때 북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살인마?” 브루털이 물었다.

“살인마. 이미 강간은 했을 거야. 어쩌면 강간할 때 커피가 들은 건지도 모르고, 아무튼, 풀밭의 핏자국은 살인마가 일을 치를 때 생긴 거야. 그런 다음 소녀들의 머리를 맞부딪쳐서 쓰러뜨린 뒤 내뺐을 테지.”

“북서쪽으로 내뺐군요. 너구리잡이 개들이 가려고 했던 방향.” 브루털이 말했다.

“맞아. 존 커피는 소녀들이 있던 장소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오리나무 군락으로 들어갔지.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을 테니까. 거기서 소녀들을 발견한 거야. 둘 중 하나는 아직 살아 있었는지 몰라. 어쩌면 둘 다 살아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 물론 얼마 안 가서 숨이 끊어졌겠지만. 존 커피는 소녀들이 죽은 줄 몰랐을 거야. 그건 확실해. 그가 아는 거라곤 자기 손에 치유력이 있다는 사실뿐이야. 커피는 그걸 써서 코라와 캐시를 살려 내려고 애썼다. 생각대로 안 되니까 낙심하고 울면서 히스테리를 부린 거야. 그때 사람들한테 발각된 거지.” (P375-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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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니리지에 있는 핼 무어스 소장의 집까지는 40킬로미터였지만, 해리 터월리거의 털털거리는 농가 트럭으로는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으스스한 여행이었다. 지금이야 그 여행의 모든 순간 순간이, 돌고 튀어 오르고 푹 꺼지던 모든 순간과 두 번인가 맞은편에서 트럭이 나타났을 때의 숨 막히던 순간이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지만, 내가 존 커피와 함께 뒤칸에 앉아서 해리가 신통하게도 미리 준비해 둔 낡은 담요를 덮고 인디언처럼 나란히 붙어 있으면서 든 느낌은 필설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다.

길 잃은 미아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디선가 길을 잘못 접어들었는데 도로 표지판은 하나같이 낯설고 어디로 가야 집이 나오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아이가 느끼는 막막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나는 그날 밤 죄수와 함께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것도 보통 죄수가 아니라 두 소녀를 죽인 혐의로 재판정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였다. 우리가 붙잡힐 경우 그가 결백하다는 나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모두 투옥되고 어쩌면 딘 스탠턴까지 걸려들지 모른다. 한 번의 처참한 사형 집행 때문에,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는 허우대만 좋은 굼벵이가 한 여자의 치료되지 않은 뇌종양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나는 평생 다닌 직장과 가슴에 지녔던 신조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별을 쳐다보는 존 커피를 쳐다보면서 나는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더 이상 내게 그런 믿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감했다. 나의 요도염은 이제 너무 먼 과거의 일이라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아무리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일단 지나가면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 아닌가 말이다(전에 나의 어머니께서는 여자가 첫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을 끝내 잊어버리지 못한다면 둘째 아기는 절대로 갖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딸랑 씨만 하더라도, 퍼시가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한 게 틀린 판단이지는 않았을까? 다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커피가 정말로 일종의 최면을 걸 줄 알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혹시 우리가 전혀 보지 않은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현혹시킨 건 아니었을까? 거기다가 핼 무어스 소장도 문제였다. 내가 예고 없이 사무실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수전증에 걸려 눈물 짜는 노인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자기를 찌르겠다고 덤비던 주정뱅이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집행조에 누가 들어가건 가지 않건 들라크루아의 불알은 어차피 익는다고 감정을 전혀 섞지 않은 채 냉소적으로 나에게 말하던 게 무어스 소장의 본모습이었다. 그런 핼 무어스 소장이 순순히 옆으로 비켜서서 아이를 죽인 사형수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사모님에게 손을 대게 하도록 우리를 호락호락 놔둘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P41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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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11시경 나는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모두 했다. 다음날 아침이라고 쓸 뻔했지만 물론 그것은 같은 날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날처럼 긴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이 글에서 쓴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아내에게 들려주다가, 윌리엄 워턴이 침상에 누워 있다가 퍼시가 지닌 총에서 발사된 탄환으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최후를 맞이한 대목에 가서 끝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퍼시의 몸에서 나온 벌레인지 뭔지 모를 그 물질까지는 이야기를 했다. 아내에게도 차마 옮기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나는 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내는 블랙커피를 잔에 절반쯤 채워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내 손이 몹시 심하게 떨려 잔을 가득 채웠다가는 엎지르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에는 떨림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서, 달걀이나 수프 정도면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우리는 누구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바로 그 덕분에 살아났어.”

“그래도 몇 가지는 빠트린 거죠.”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부분은 사소한 거지만, 당신이 기결 살인범을 형무소 밖으로 빼낸 얘기, 그 사람이 죽어 가던 여자를 살려 낸 얘기, 퍼시 웨트모어의 목에다 뭘 넣어 가지고 정신 나가게 만든 얘기, 그게 뭐더라. 물컹물컹한 뇌종양을 집어넣었다고 했나?” (P48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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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님하고 하월 씨하고 모두들 나한테 잘해 주셨습니다. 걱정이 있다는 거 잘 압니다. 그런 걱정일랑은 이제 하지 마세요. 나는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었다. 그가 다음에 한 말은 내가 그의 입에서 들어 본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길었다.

“괴로움을 느끼고 듣는 데 난 지칠 대로 지쳤어요. 비에 젖은 새처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데도 지쳤고요. 같이 다니면서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나한테 말해 줄 길동무 하나 없었어요. 서로에게 비열한 짓을 일삼는 사람들 모습을 보는 데도 지쳤고요. 내 머릿속에 꼭 유리 조각이 들어 있는 느낌이에요. 돕고는 싶었지만 결국 도움이 못 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젠 지쳤어요. 어둠 속에서 지내는 데도 지쳤어요. 괴로움이 많습니다. 사방에 깔려 있어요.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내 능력으론 벅차네요.”

‘그만.’ 나는 그 말을 하려고 애썼다. ‘그만, 내 손 놔주게. 안 그러면 난 익사할 거야. 익사하든가, 폭발하든가.’

“폭발은 안 할 겁니다.” 커피가 내 생각을 읽고 웃으며 말했지만...... 손은 놓아주었다. (P5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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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들어가요.” 아내가 말하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함께 기도를 마친 뒤 존 커피가 나를 일으켜 세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들어가서 커피 한 잔 마셔요.”

나는 그렇게 했다. 첫 아침이 지나갔고, 첫 오후가 지나갔으며, 첫 교대 근무가 다시 지나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시간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모든 것을 앗아가서, 결국 남는 것은 어둠이다.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찾아내지만, 거기서 다시 사람들을 잃기도 한다. 주 형무소가 아직 콜드마운틴에 있던 1932년에 그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외에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물론 전기의자도 있었다. (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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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나는 그날 존 커피의 감방에서 그렇게 말했다. “내 손 좀 놔주게. 안 그러면 난 익사할 거야. 익사하든가, 폭발하든가.”

“폭발은 안 할 겁니다.” 커피는 내 생각을 읽고 웃으며 말했다. 끔찍한 것은 그때도, 그 후에도 나는 폭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노인성 질환은 하나 있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늦은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이곳에 사는 노인들이 말년을 향해 더욱 깊숙이 빠져 들어가면서 내뱉는 축축한 절망의 기침 소리를 듣는다. 어떤 때는 초인종 소리, 복도에서 신발 끄는 소리, 재빗 여사가 틀어놓은 소형 텔레비전의 심야 뉴스 소리도 듣는다. 여기 누운 채로 창문에 달이 나타나면 그것을 바라본다. 여기 누운채로 나는 브루털을, 딘을 생각한다. 심지어는 ‘그렇다, 검둥아. 꼴리는 대로 생각해라.’ 하던 윌리엄 워턴의 말이 생각날 때도 있다. ‘보세요, 에지콤 교도관님. 딸랑 씨한테 새로운 묘기를 가르쳤어요.’ 하던 들라크루아의 말도 생각한다. 일광욕실 문 앞에 서서 브래드 돌런한테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호통치던 일레인도 생각한다. 어떤 때는 선잠이 들었다가 비 오는 지하도를 보고 그 그늘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존 커피의 모습도 본다. 그 꿈속에서 내가 본 것은 절대로 착시 현상이 아니다. 나의 거인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 누워서 기다린다. 나는 재니스를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잃었고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손가락 사이로 피를 흘리며 달아났는가를 생각하면서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갚아야 할 빚이다. 예외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어떨 때는, 후, 그린 마일이 너무도 길기만 하다. (P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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