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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헤이독의 <욕망의 불꽃, 에곤 실레와 뮤즈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2016년

by 노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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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Adele]

‘그’가 이름을 부르던 말투가 생각났다. 이름을 속삭여 줬을 때의 전율과 한때 그 안에 담겼던 약속과 그녀도 알고 있는, 그것이 일으켰던 욕망. 이 환상의 소리는 오래도록 마비되어 있던 부분을 건드렸다. 환희를 일으키는 부분 말이다.

“아델?”

누군가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볼 때, 그녀는 벅차오르는 가운데 자기 이름을 기억해 냈다.

“아-데-르.”

의식을 점점 잃으면서 그녀는 반복해서 그 이름을 말했고, 피투성이에 찢긴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맞아, 그거야. 굳이 알고 싶다면, 내 이름은 아델이야. 아델 하름스. 절대로 잊어버리지 마.”

(P15)


아델이 빈에서 맴도는 가십을 넌지시 알아보자 추잡한 루머들이 귀에 들려왔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그 루머들은 부모님의 귀에도 닿았다.

“우리가 ‘화가’ 집 건너편에 살고 있단 걸 알고 있었나요?” 무티가 소리쳤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제자라고들 하던데.” 아빠는 수염을 잡아당기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질 건 없어요.” 엄마가 나무랐다.

아델은 흥분을 잠재우려 애썼다. 그 남자는 ‘앙팡 테리블’로 관습에 저항하고 규칙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인 셈이었다. 스릴 있는 스캔들도 있었는데, 그 정도는 그녀도 수집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그녀 같은 위치의 여성에게는 금기시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에 관한 이런 평판은 원래 느껴야 할 거부감 대신 그녀의 욕망을 더욱 깊게만 했다. 아델은 그가 전통을 벗어버리고 미래를 포용할 유형의 남자일 거란 걸 알았다.

이를 깨닫자 아델은 가슴이 부풀어 올랐고 계속해서 남자를 지켜봤다. 남자에게는 정해진 일상의 틀이 없는 듯 보였다. 며칠씩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는 거실 창 근처 자기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델은 그가 작업 중이라고 추측했다. 예쁜 아가씨들이 수없이 오가서 아델은 질투로 몸부림쳤다. 그와의 만남을 이루어낼 수만 있다면. (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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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 주에 무티는 히칭에 있는 갤러리에서 열리는 새로운 전시회 개막식 초대장과 함께 딸들도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델은 처음에는 평소처럼 거부하는 척했으나, 그 화가가 이런 장소를 즐겨 다닐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따라나설 준비를 했다.

갤러리는 불이 환히 켜져 있고, 문이 거리를 향해 열려 있어 늦여름의 마지막 산들바람이 들어왔다. 빈 미술 아카데미 수강생들인 듯한 여남은 명의 젊은 남자들이 스파클링 와인이 담긴 긴 술잔을 맴돌며 혹시나 그 화가가 그들 중에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 했다. 그들은 액자 속 그림들을 보러 흩어졌고, 아델도 그들을 따라가 열의도 없이 작품들을 바라봤다.

바로 옆 전시실에서 에디트는 어떤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 남자는 아델에게 등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델은 어디서든 그 실루엣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생은 바로 그 화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에디트는 마치 구조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계속 다른 쪽을 쳐다봤다.

“예술의 아름다움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구나”하며 아델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도 감동받지 않았니, 에디트?” 아델은 동생 가까이 걸어가 “아, 끼어들어서 정말 미안해요.”하며 이제야 화가를 알아챈 것처럼 덧붙여 말했다.

그녀가 갈망해 온 대상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존재로 전시실이 고동치는 듯 보였다. 그의 손가락 마디 뼈는 무척 두드러져서 피부 사이로 허옇게 드러났다. 셔츠와 주머니에는 잉크가 묻었고 치아는 흡연으로 변색된 것이 조금 전에 담배를 피운 게 분명했다. 아델은 몸을 좀 더 기울여 그가 핀 담배의 잔향을 길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전 당신의 이웃입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P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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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가 또 그 짓을 했다는데요.” 미술상 네이선슨 씨가 아빠에게 말했다.

아델은 입을 다문 채 찬찬히 음식을 씹으면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좀 더 기울였다.

“우리의 존경스러운 국민 예술가가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한 건가?”

“<처녀(The Virgins)> 말이에요.” 네이선슨 씨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맙소사! 지난번처럼 야하고 외설적이란 말이야?”

“시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구스타프의 황금기도 완전히 끝났다고들 하더군요.”

“구스타프는 <더 키스(The Kiss)>가 인기를 얻은 뒤로 우리의 호의를 두고 도박을 하고 있어.” 아빠가 격분했다. “나는 그런 아르누보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아. 어째서 수백 년간 이어온 완벽하게 훌륭한 전통을 망치려는 거지?”

“그렇다면 구스타프의 영락없는 계승자라고 불리는 그 젊은 친구도 좋아하지 않으시겠네요.”

“그 실레라는 친구 말이지?” 아빠는 생각에 잠긴 채 와인을 마시며 물었다.

“네, 그 사람입니다. 그 젊은 청년이 부르주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가 우리 집 바로 건너편에 살고 있다네.”

“이런!” 미술상은 자신의 포크로 공기를 갈랐다. “그자는 작년에 지방법원에서 판사와 대면해야 했어요. 죄가 있단 걸 인정받았고요. 유죄를 선고받은 범죄자의 맞은편에 사시다니요!”

아델은 냅킨에 대고 캑캑거려서 소스라치게 놀란 무티의 눈초리를 받았다.

“맙소사! 그게 그자였단 말인가? 같은 사람일 줄이야. 전혀 생각 못했네. 아주 수치스럽군.” 아빠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동의하고는 무티에게 고개를 돌려 속삭였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야.”“사람들은 그를 빈의 포르노그래퍼라고 불러요.” 네이선스 씨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그 남자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무티가 아델을 쳐다보며 말했다.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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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혼자 있을 때, 아델은 이웃집 다락방에 들어간 자신을 상상했다. 저녁 식사 때 들은 대화는 그녀의 욕망을 더 부추겼을 뿐이다. 아델은 마음속으로 그 화가를 위해 취할 어깨를 곧게 펴고 손목으로 무릎을 감싼 자세를 그렸고, 그녀의 우아한 자세를 향해 그가 쏟아내는 감탄과 그가 그림을 그릴 때 그녀의 피부에 닿는 그의 눈길을 즐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정적인 공상에 질려버렸고, 아델의 상상력은 그녀를 바닥에 깔린 천에서 간이침대 위로 더 멀리 떠밀었다. 화가에게 손짓하자 그는 굴복했다. 아델은 화가가 사용하는 붓털을 핥아 물감이 입술을 뒤덮게 둔 뒤 그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왔다. 목 안에서 백악질의 안료 맛이 났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교양 있는 여인들은 결코 음흉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델은 그의 금지된 손길에 대한 상상으로 고조되었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입술, 양 볼, 가슴, 허벅지 안쪽, 발바닥은 그의 색채들로 더렵혀졌다. 화가가 붓으로 그녀의 몸을 탐색하는 상상을 할 때 아델의 뜨거운 하체에서 중독적인 따끔함이 일었다. 그를 자신의 몸 안에서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에 아델은 놀라고 말았다. 그를 밀어붙였다가 벗어나기 위한 싸움을 하고 싶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아델은 탐욕스러웠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온몸을 훑는 감촉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생각했다. 급격한 흥분을 느꼈다. 흥분이 세차게 몰아쳤다. 어디선가 미지의 세계에서 색채가 폭발하고 격렬한 리듬이 쏟아져 나왔다. 아델은 불타올랐다. (P59)


“우리도 너처럼 놀랐어.” 아빠의 늘어진 턱살이 바르르 떨렸다. “너도 알다시피 그 젊은이는 내 딸 중 누구의 신랑감으로도 내가 먼저 선택할 사람이 아니란다. 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꼴 좀 봐라, 제국은 우리 발밑에서 무너지는 중이고, 전쟁은 우리를 파괴하고 있어. 게다가 우리 재정 상태는......” 아빠는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는 첫째 딸인 네가 더 적절할 거라 제안했지만 그 사람은 뜻을 굽히지 않더구나. 요즘 젊은 남자들은 관례나 일 처리를 하는 데 뭐가 올바른 방식인지 같은 건 신경 안 쓰잖니. 그러니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 그 사람은 확고하게 에디트를 요구했단다.”

아빠는 아델의 어깨를 토닥이려 한 손을 들었고, 아델은 확 깨물어 버리려 했다.

“미안해.” 그제야 에디트는 입을 열었다. 에디트의 얼굴은 회색빛이 돌고 두 볼은 눈물로 얼룩졌다.

“실레 씨는 네 동생과 결혼하고 싶어 해.” 아빠는 천천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고선 막내딸에게 다가가 팔로 어깨를 감싸주었다. 저 배신자, “그리고 에디트도 승낙했어. 선택에 신중하려고 오늘 아침에 우린 오래 대화를 나눴다. 에디트는 처음엔 너를 위해서 청혼을 거절했어. 네 동생은 너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진심으로 신경 쓴단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아델 너도 받아들여야지. 결혼식은 한 주 조금 지나서 곧 열 예정이다. 전쟁으로 일을 좀 급하게 진행하게 됐구나. 그러니 제발 네 동생이 늘 너를 위하듯이 너도 이 애를 축하해 주렴.”

세상이 다시 한번 요동쳤고, 아델은 거친 숨을 폐 안으로 들이쉬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델은 분노에 휩싸여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아델은 가족들의 동정하는, 조소하는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이게 다 네 탓이야!” 아델은 긴 샴페인 잔을 에디트를 향해 내던졌다.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유리잔은 동생의 가슴에 정통으로 부딪히고는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져버렸다.

에디트는 마치 총에 맞은 듯 몸을 움켜잡고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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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고는 제 아내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어요.”

아델은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에디트는 외로워요.” 그가 말할 때 다람쥐 한 마리가 휙 지나갔다. “에디트는 지루해하고 때로는 우울해합니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걸 고통스러워했고 자기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했어요. 에디트가 방황하는 걸 저도 알아요. 그녀와 제 동생 게르트루드는 잘 맞지 않았어요. 오랜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죠. 그들 중에는 엄마로서의 생활로 바쁜 이들이 많았는데 이게 오히려 에디트의 괴로움을 악화시키기만 했어요.” 에곤은 잠시 멈춰서 낙엽을 걷어찼다. “에디트와 당신 사이가 복잡하다는 거 알아요. 그 일로 저 자신을 탓하곤 합니다. 저는 어렸고 어리석었어요. 더 잘 처신했어야 하는데, 제 사과를 받아주겠어요?” 에곤은 아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에디트를 위해서 과거와는 선을 그을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델이 말했다. “이제 부부가 빈으로 돌아왔으니, 나는 에디트의 삶에 함께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아델은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중간에 에곤이 있는 한 그녀와 에디트의 미래는 어찌 될까?

“에디트는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저희 둘 다 그랬죠.” 에곤이 말했다. “나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아델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당신을 위해 이걸 가져왔어요.” 에곤은 손가방에서 감청색으로 장정되고 금이 새겨진 얇은 책을 꺼냈다. (P114)


에곤은 스승인 이 남자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가느다란 턱수염이 달려 있었다. 그의 가슴을 받쳐주는 갈비뼈는 함몰된 듯 보였고 그는 약하게 쌕쌕거렸다.

아델은 돌로 쪼개어 만든 맨가슴의 여인상 옆 구석에서 기다렸다. 에곤이 클림트의 손을 잡고 엄지에 입을 맞춘 뒤 천을 꺼내서 땀으로 번들거리는 클림트의 이마를 닦아주는 걸 지켜봤다. 젊은 화가가 조용히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부자연스러운 리듬의 호흡이 그가 복받치는 슬픔을 참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이제 끝났네. 몇 주, 어쩌면 며칠 남았을지도 모르지.” 클림트가 속삭였다. “나는 위대함을 알아. 자네 기대만큼 달콤하진 않네. 하지만 쓰지도 않지.”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안 끝났어요. 아직 생명이 있으시잖아요.” 에곤은 애정을 담아 말했다. “저는 느낄 수 있어요. 선생님은 황소처럼 강하신걸요.”

“그렇다고 해도 나는 죽음이 두 팔 벌려 춤추는 걸 느낄 수 있다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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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은 급히 바닥을 가로질러 뛰어와서는 손을 아델의 오른쪽 종아리에 갖다 댔다. 그의 손길은 짜릿했다. 그는 아델의 두 다리를 조심스레 당기며 다리 사이를 넓혔다.

“불편하세요?” 에곤이 물었다.

아델은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중심부가 은밀한 관찰로 파열된 듯, 노출된 듯 느껴졌다. 허벅지 안쪽을 따라 피부가 따끔거리고 스타킹과 속옷의 주름 사이 노출된 부분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전혀요.” 아델은 거짓말을 했다.

“완벽해요.” 에곤이 칭찬했다. “이제는 저를 쳐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델은 눈을 들어 그를 봤다.

그래, 이거였다. 아델의 변화는 더할 나위 없었다. 여기 이 순간, 아델은 한 화가의 모델이 됐다. 트럼펫이나 팡파르가 울리진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화가가 작업을 하면서 내는 리드미컬한 연필 소리뿐이었다. 그는 아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신의 형태에 익숙해져야겠어요.” 에곤은 아델에게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말했다. “당신의 얼굴선과 몸 선 말이에요. 색으로 다시 칠하기 전에요.”

모델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아델은 에디트가 대체 뭘 불평해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에곤의 아내로 정말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어쩌면 에곤도 마침내 깨달은 게 아닐까?

“아델, 집중하세요.” 에곤이 굵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아델은 공상에서 벗어났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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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아델은 그 젊은 여인이 침대 프레임 밑으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벽에다 대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름다웠고 그가 나를 그렸지. 나는 부자였고, 우리는 춤을 췄어.”

“누군가 이 여인의 과대망상을 치료해야만 해!”

아델은 정신과 늙은 간호사들이 전극을 부착하고 그녀가 몸부림치는 걸 지켜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었다.

“환자분도 본인의 정신을 믿을 수 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 여기가 환자분이 속한 곳입니다.”

하지만 물론 마음과 관련된 문제들은 결코 치유될 수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나고, 정신적 쇼크가 계속되어도 에곤은 잔존했다. 죽어가는 깊은 무의미함 속에서 아델은 에곤에게 사로잡히고 붙들려 있던 느낌, 그 화가가 그녀, 아델을 영원한 존재로 만들었던 찬란함을 떠올렸다.

그러다 아델은 다시 현재의 이 삭막한 현대식 병원 병실로 돌아왔다. 빛이 환하게 비쳤고, 풀을 먹인 유니폼에 작은 모자와 새하얀 옥스퍼드 편상화를 착용한 쾌활한 간호사가 휘파람을 불면서 약이 든 컵으로 빽빽한 카트를 밀고 병실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 중 하나라도 진짜가 있었을까? 그 화가와 동생 에디트, 한때 아델이 알던 삶이? 그리고 만약 그 일들이 실제 일어났던 거라면, 그럼 아마도 아델을 수치심과 괴로움으로 가득 채우던 그 끔찍하고 불완전한 기억들도 마찬가지로 실제로 일어났겠지?

아델은 흐느꼈다.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부탁이에요. 뭐든지 할게.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아델은 하소연했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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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드Gertrude]

“에곤 오빠, 내 심장이 미쳤나 봐.” 게르트루드는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게르트루드가 하는 말의 형상이 차가운 공기 중에 나타났다가 어두운 밤 안으로 가라앉았다. 촛불이 몇 시간 전 꺼져버린 바람에 이 작은 소녀는 평평하고 얼굴 없는 어둠 속을 응시해야 했다. 게르트루드는 모직 담요를 코 위로 가져다 댔다. 담요는 거칠고 말 냄새가 났다. 게르트루드는 짖는 소리, 쿵 하는 소리에 이어 긁는 소리에 잠이 깼었다. 두려움으로 심장이 방망이질해 대고 귓속은 웅웅거렸다. 무언가가 소녀를 잡으러 오고 있다. 그 무언가는 문밖에 있다.

에곤만이 게르트루드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빠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중이었다. 게르트루드는 그들의 침대 사이 틈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어 이불 밑으로 오빠의 팔꿈치를 찾아냈다. 멜라니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반듯이 누워 두 팔을 침대보에 올려놓고 잠들어 있었다. 멜라니는 맏이었다. 게르트루드는 4월에 다섯 살이 되고 에곤은 여덟 살, 멜라니는 다음 달에 열세 살이 된다. 멜라니는 너무 심술궂어서 게르트루드나 에곤이 시끄럽게 할 때마다 버럭 화를 냈다. 게르트루드와 에곤이 너무 빈번하게 벌을 받는 것도 멜라니 때문이었다. (P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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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 깊이 빠져 게르트루드는 찬란한 여름날 아침의 열기와 빛을 느꼈다. 오빠는 연말인 데다 이사를 도와주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게르트루드는 최대한 빨리 몰래 집을 떠나 오빠와 탈출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둘이서 기차선로를 따라 기어가고, 다뉴브강 언저리를 지나면서 낮게 내리쬐는 눈부신 햇빛 속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고는 옷을 벗고 차가운 강의 얕은 곳에서 첨벙거리고 물밑으로 서로를 빠뜨리며 수영을 했다. 그런 다음 물수제비를 뜨고 지나가는 구름을 세었다. 에곤은 풀밭에 누워 게르트루드를 관찰했다.

이 희망찬 날의 따스함으로 게르트루드는 잠에서 완전히 깨버렸다. 그때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쪼개지고 격렬하게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 앉은 게르트루드는 열기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차갑고 어두운 공기를 뚫고 열기가 부풀어 올랐다. 흙을 그을리고 고무가 타는 타르질의 톡 쏘는 냄새가 났다. 에곤의 침대 옆 벽이 환해지면서 매끄러운 벽 표면을 가로질러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무늬가 이리저리 생겨났다. (P211-212)


아빠는 1월의 밝은 하늘 아래 묻혔다. 게르트루드와 가족은 상복을 입었는데, 에곤은 단을 낸 긴 바지를 입고, 부츠는 박박 닦아 빛이 났다. 멜라니는 게르트루드의 머리에 검정 리본을 매주었고, 엄마는 베일이 달린 필박스 모자를 빌려 썼다.

툴른의 오래된 공동묘지는 묘비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아빠의 관은 ‘파밀리에 실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묘비 앞에 묻힐 것이었다. 게르트루드와 에곤이 지난번에 다녀간 뒤로 묘비에는 파리한 이끼가 글자들을 덮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에곤은 다시 와서 묘비를 깨끗하게 문질러 닦겠다고 맹세했다. 엘비라의 이름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관은 며칠간 집에 놓여 있었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관 속에 꽃들을 두었다. 아빠의 옛 동료들이 기차를 타고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 왔다. 그들은 객실로 들어와 모자를 벗고 눈을 내리깔며 엄마의 두손을 꽉 쥔 채 앞날을 약속했다. 아빠는 철도청 고위 간부의 갈라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아빠가 다리 밑에서 발견된 뒤로 원상복구 되지 못한 그 빳빳한 붉은 재킷은 제외했다.

게르트루드는 그 붉은 재킷에서 빼낸 빛나는 단추를 몰래 지닌 채 만지작거렸다. (P223-224)


이 주 뒤, 게르트루드는 편지 하나가 가족의 우체통 안에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뒤집어 보니 빈 미술 아카데미의 파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편지는 남매의 후견인 ‘치하체크 씨 앞’으로 되어 있었다. 게르트루드의 심장은 방망이질해 댔다. 자신의 미래가 이 봉투 안에 봉인된 것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게르트루드는 마치 거미 천 마리가 목 안에서 거미줄을 감는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서 문가에 있는 잎이 무성한 양치류 화분 옆에 멈춰 섰다. 손가락으로 화분의 흙을 깊게 파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흙은 축축했고 손가락을 빼내자 질퍽한 흙가루로 범벅이 되었다. 게르트루드는 봉투에 흙가루를 마구 문지르고 이름과 주소를 지우고, 우편 요금을 가리고 미술학교의 공식 도장을 엄지로 눌렀다.

그때, 바닥이 삐걱거렸다. 게르트루드는 충동적으로 흙에 구멍을 더 깊이 판 다음 그 구겨진 편지를 안에다 넣고 흙으로 덮은 뒤, 치마 뒤로 손을 닦아냈다.

“우편물 온 거 있어?” 오빠는 동생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왔어.” 게르트루드는 죄책감을 감추고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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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이 방과 침대 위에서 게르트루드 본인도 할 수 있을 줄 몰랐던 다양한 자세, 즉 매트리스에서 척추를 뒤로 젖혀 배꼽이 가느다란 선처럼 당겨지게 하고, 두 팔을 오래 머리 위로 높이 교차하면서 손가락은 활짝 피는 등의 자세를 취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에곤의 종이와 연필 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게르트루드의 아주 뚜렷한 두 눈이 자신을 돌아봤다. 두 눈에서 빛나는 도전이 느껴졌고 입술에 활기를 주는 자신의 미소에서 장난기가 보였다.

에곤이 밤에 그린 그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대담했다. 게르트루드는 이상한 힘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신비로운 존재,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둘 다 매끄러운 피부, 표면 아래의 봉오리들, 짙은 털들 같은 변화에 놀라워했다. 에곤은 원하던 결과들을 얻으려고, 채찍질을 가하는 서커스 단장처럼 촛불 옆에서 게르트루드를 강하게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게르트루드는 처음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몸을 돌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비록 끝내는 기진맥진해졌지만 말이다.

에곤이 게르트루드의 몸을 맘껏 그리려고 보호막이 되는 이 방에서 둘만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P260)


“우리가 어렸을 때는 내가 모델을 하곤 했잖아.”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여기 빈에서도 많이 했고, 그 바보 같은 모자 기억나?”

“안 돼.” 에곤은 또다시 거절했다.

게르트루드는 바짝 마른 붓으로 에곤을 찔렀다.

“오늘 나타나길 바랐던 여인만큼 내가 예쁘지 않다는 거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에곤이 냅다 화를 냈다.

“그럼 왜?”

“나는 누드가 필요하단 말이야. 네가 옷을 다 벗어야 해. 전부 다.”

게르트루드는 멈칫했다. “그것도 예전에 했었잖아.”

“그때는 우리가 아이였고 철이 없었잖아. 이 작품은 곧 있을 쇼를 위한 거야. 사람들이 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네 평판에 막대한 손상을 입힐 거야.”

“무슨 평판?” 게르트루드가 콧방귀를 꼈다.

“빈 상류층이 볼 예술 작품 속에서 널 과시하는 건 미래의 구혼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않을 거야.”

“꼭 엄마처럼 얘기하네!” 게르트루드는 비웃었다. “그걸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부류의 남자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을 거야.”

“이 일이 마음에 안 들걸. 넌 너무 조급하고 산만해.” 에곤이 반박했다.

“아니야, 나는 조각상 같다고.” 게르트루드는 다리를 올리며 자세를 취했지만 이내 비틀거렸다.

에곤은 풋 하고 웃었다.

“나는 심각해. 의뢰받은 건 누드라고.”

“난 하고 싶어.”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오빠를 위해서,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아무도 나인 줄 모를 거야.” (P27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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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바보 같았어? 오빠는 어떻고? 오빠의 모델이었던 릴리아나는? 루머가 내 귀에까지 닿지 않았다고 착각하지 마. 엄마는 그 모든 걸 모르는 척하셨어. 적어도 안톤은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해. 아기의 아빠가 될 거야. 그것만 봐도 오빠보다는 나아.” 게르트루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성녀가 아니야. 하지만 남자들이 결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뭐든지 하는 동안 우리 여성들은 완벽하고 순결해야 한다고 요구받지.”

에곤은 반격하려 했으나 게르트루드는 할 말이 더 남았다. (P283)


게르트루드가 말을 꺼냈지만, 에곤은 게르트루드와 안톤 바로 다음에 도착한 젊은 아가씨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인은 무표정하고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눈을 마주쳤을 때 게르트루드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충격적인 기운을 느꼈다. 이 빨간 머리 소녀를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이 사람을 너랑 너무나도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 발리라고 해.” 에곤이 여인을 소개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스튜디오에서 발리를 처음 만났어. 발리는 나를 위해 모델을 해줬는데, 가만있자, 이제 오륙 개월 됐나?” 여인은 에곤에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됐지. 발 리가 빈에서 나를 아주 잘 보살펴 줬고, 여기에도 와 줘서 너무 기뻐. 내 일과 삶에 굉장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야. 발리, 감히 말하건대, 네 덕분에 내 미술 경력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어.” 에곤은 발리를 보며 말했다.

“나는 동생이에요.” 게르트루드가 오빠의 팔을 잡고 끼어들었다.

“동생이 있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이 젊은 여인은 에곤에게만 말했는데, 목소리가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게르트루드가 있어서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여인도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얘는 게르티야. 당연히 당신한테 얘기했었어.”

여인은 그런 기억이 없는지 천천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얘는 내 첫 모델이었어. 아름다움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건 이 아이한테 배웠지.” (P279-280)

아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모두 에곤에게 위대한 영감을 주길 바랐어. 하지만 확실히 발리는 그의 작품을 빛내는 원동력이었지. 내가 인정했던 것보다 더 좋은 여인이었어.”

“발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도 몰라. 그저 나보다는 더 운이 좋았길 바랄 뿐이야.”

아델은 그림 속 여인을 자세히 관찰했다. 한때 품었던 그 모든 질투는 희미해졌다.

“어쩌면 발리가 결국엔 행복을 찾았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에곤과의 만남에서 상처 없이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했지.”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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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Vally]

“소개할 사람이 있네. 실레 군. 다름 아닌 노이질 양이야. 태양만큼이나 자네를 눈이 부시게 할 거라고 약속하네. 다만 그녀의 중심부를 오래도록 응시하지는 말게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창백한 얼굴의 아가씨를 어둠 속에서 밀어냈다. “정말 보석 같은 존재야. 그렇지 않나?”

발리가 클림트의 거처에서 실물 모델 일을 위해 따로 마련된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커튼을 통과했을 때, 불길의 충만한 온기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의 흥미로워하는 시선도 자신에게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잘 아는 이 공간에는 항상 이젤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물감이 바닥에 형형색색의 별자리를 층층히 이루고, 캔버스가 회반죽이 그대로 드러난 맨벽에 늘어서 있었다. 발리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목에 달린 단추로 손을 올려 구릿빛 머리카락 한 올을 쓸어냈다. 발리는 이번 모델 일을 위해 준비할 틈이 부족했다.

“사랑스러운 스위트피 같은 발리, 옷을 벗기 전에 우리 손님에게 인사부터 해라.”

나이 든 화가는 잿빛 수염을 잡아당겼는데, 못마땅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젊은 여인은 허리를 똑바로 펴고 젊은 남자의 눈을 마주쳤다. (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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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들의 작업이 끝났다. 발리는 팔을 들어 옷을 집고 이마와 목과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발 리가 옷을 입는 동안 에곤은 붓을 --흑담비 머리털로 만든 비싼 붓이란 걸 발리도 알았다-- 통에 넣었다. 에곤은 비누로 손을 문지른 뒤 붓마다 묻은 물감을 엄지로 밀어냈다.

에곤이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발리는 살그머니 두거운 커튼 뒤로 나갔다.

“아, 우리 에곤, 작업 시간은 어땠나?” 나이 든 화가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면서 굵은 목소리로 묻는 소리가 들렸다. 발리는 숨을 죽였다.

“그 여자분에게 고맙다고 말할 기회가 없었네요. 이름이 뭐였죠?”

“발부르가 노이질. 발리라고 하지.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경솔하군. 우리를 위해 모델들이 오랜 시간 고생하는데 이름은 기억하는 게 예의 아닌가.”

“발리는 고집쟁이처럼 완고하던데요.”

“하지만 꽤 아름답지! 그 부리부리한 눈과 커다란 입술...... 여자들의 완강한 고집 정도는 용서할 수 있잖은가.”

“왜 선생님이 발리를 뮤즈로 여기시는지 알겠어요.” 에곤이 동의하며 말했다.

“내 뮤즈?” 구스타프는 재밌어하는 듯했다. “발리는 여러 가지로.......”

발리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의 뮤즈다.

“제 말은, 발리가 예술을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에곤이 말했다. “예술에 대한 직감이 있더라고요.” (P305)

발리 엄마의 불만은 여자로 태어났다는 저주와 가난하게 태어났다는 저주, 아예 태어났다는 것 자체의 저주에 있었다.

“엄마가 언젠가 명료한 순간에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발리는 엄마의 거칠고 붉은 두 손을 떠올리며 말했다. “평범한 남자의 아내가 되지 말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들의 엄마가 되거나 집안일들로 고생하며 세월을 보내지 말아라. 내 삶에는 존엄이란 게 없어. 기회가 보이면 붙잡고, 용기를 갖고,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걸 했다고 해서 절대 자책하지 말아라.” 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충고를 따르려고 해요. 결혼과 모성은 저와는 상관없어요.”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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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는 전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문 앞에서도 목격했고 에곤의 작품에서도 나타났듯이 에곤과 게르티 사이에는 매우 음울한 무언가가 있어서, 발리는 분명 그들이 연인 사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남매간의 이런 질투심과 열렬함이라니, 그것은 더 문젯거리였다.

“동생이 늘 이런 식으로 기꺼이 자세를 취해줬나요?”

“알다시피, 화가들이 가족을 모델로 쓰는 건 굉장히 평범한 일이에요.” 에곤이 말했다. “게다가 그림 속 여인이 게르티인 줄은 아무도 몰라요. 얼굴을 어떻게 돌렸는지 보이죠?”

“하지만 전라인데요.”

“내 동생이에요. 우리는 함께 자랐다고요. 부적절할 것도 없어요.”

“그림에 보이는 친밀함은......”

“그건 게르티의 아이디어예요. 그 애는 나를 위대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싶어 했죠.”

“확실히 당신은 빈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남자예요.” 발리도 인정했다.

“그들이 저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타락한 것도, 변태도, 포르노그래퍼도 아닙니다. 이걸 기대했던 거예요.” 에곤은 그림들을 들어 보였다. “나는 열여섯 살 때 여자 형제나 엄마가 아닌 모델을 처음 썼어요. 추한 모델도 있었고, 출산할 때가 임박해서 배 속 아기가 움직이는 모델들도 봤어요. 내가 그들 모두를 고맙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그들이 나한테 준 신뢰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말아요. 아, 그래요. 나는 세상에 충격을 주고 싶어요. 그게 내가 이런 도발적인 자세들을 취한 내 모습을 그린 이유죠. 하지만 나를 이끄는 건 예술에 대한 추구이지 섹스가 아니에요. 나는 규칙을 만들지 않았어요. 나는 빈 사람들이 바라는 걸 주고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거예요. 위선자가 그렇게 많은 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이 말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신의 작업을 늘 지지해요.” 발리가 말했다.

“만약 내가 사회를 과격하게 만들고 민감한 부분을 지나치게 건드리는 거라면, 내가 실수를 저지르는 거라면, 내 말은, 그게 오로지 내 탓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에곤은 자기방어를 해댔다.

“그저 조심하기나 해요.” 발리가 말했다. “그들은 당신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 해요.” (P3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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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서류들을 정리했다. 이 화가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름은?” 판사가 물었다.

“제 이름은 에곤 실레입니다.”

에곤은 일어서서 수갑이 채워진 양손을 마치 넥타이를 바로 하듯 위로 들어 올렸다. 발리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업은 뭐죠?” ‘직업’이라는 단어가 판사의 입에서 가볍게 흘러나왔다.

“화가입니다.” 에곤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기회를 잡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십일 일간 구금됐습니다. 판사님, 오백사 시간 동안이죠. 판사님께서는 그 긴 시간 동안 자유를 양보하시겠습니까? 제 행위를 조사한 결과 뭐가 드러났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어떤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판사가 눈을 들었다.

“에곤 실레. 당신은 아주 심각한 고발을 당해 오늘 1912년 5월 4일 법정에 있는 겁니다.”

에곤은 피고석 난간에 흔들리는 몸을 고정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고발장에 대해 더 집중해서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기댔다.

“당신은 외설죄로 고발됐습니다. 즉, 당신이 스튜디오에 에로틱한 그림들을 부주의 혹은 고의로 아이들이 볼 수 있게 전시했고, 이는 아이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리는 에곤이 체포되던 날 경찰관들이 발견한 침대 벽에 꽂혀 있던 노골적인 그림들을 떠올렸다. 티타아나는 집으로 찾아왔던 밤에 그 그림들을 봤다.

“더 나아가서.” 하고 판사는 이어 말했다. “당신은 미성년자를 유혹하고 납치했다고 고발당했습니다.”

법정에서 열띠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곤은 두 눈을 감았다. 나무 난간을 붙잡은 그의 손이 허옇게 질렸다. 발리는 발밑에서 땅이 움직이는 것철검 느껴졌다. 터무니없는 고발이었다. 옆에 앉은 여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쯧쯧거렸다. (P38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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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말이 그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지 발리도 알았다.

“당신 마음이 아픈 건 알지만 나도 그래.” 에곤은 좌절하며 말했다.

“내 스튜디오로 와, 제발, 내가 그리고 있는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를 보여주고 싶어. 당신과 나를 그린 거야. 그림 속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가야만 하는 걸 알고 서로에게 매달려 포옹하고 있어. 당신을 잃었다는 생각에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건” 하며 에곤은 계약서를 다시 들었다. “우리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의미야. 당신은 내 모델이자 뮤즈가 될 거야. 발리, 내가 당신을 부당하게 대했고, 당신은 그런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었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당신을 늘 사랑했어.”

발리는 그 종이를 빼앗았다.

몇 초간 발리는 희망, 안심, 승리가 에곤의 얼굴에 스치는 걸 봤다. 이내 발리는 에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종이를 단호하게 반으로 찢었고, 이어서 찢고 또 찢어 종이는 다시는 절대 붙여놓을 수 없을 만큼 자잘한 가루가 되어버렸다.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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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Edith]

일부 하객들은 에디트가 최근에야 만난 사람들이었다. 에곤의 많은 동창들이 징병을 갔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행도 점점 어려워져 머무는 기간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방문하러 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에곤의 부유한 후원자들과 유명한 친구 구스타프 클림트는 빈에 남아서 성원을 보여주려 결혼식에 와주었다. 그들은 모두 에곤보다 나이가 많았다. 맨 앞줄에서 실레 부인이 치마를 매만지고 에곤의 누나 멜라니가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게 보였다. 에디트는 불과 며칠 전에야 그들과 알게 되었다. 두 여인은 에곤이 청혼을 했다는 소식에 살짝 충격을 받긴 했지만 에디트를 따뜻이 반겨주었다. 신도석에 앉아 에디트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에곤의 고모부 레오폴드는 에곤이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고상한 아가씨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가족들이 기뻐했다고 에디트에게 말해주었다.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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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는 네 신랑감으로 선택하기에는 한참 먼 사람이야.” 아빠는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청년들은 싸움터로 보내졌지. 결혼하면 너는 머물 곳이 생기는 거야. 결혼하지 않으면 너는 군인들이 돌아올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려야 할지 몰라.”

“그럼 그 화가와 결혼해야 하는 거죠?” 에디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고 싶니?” 아빠는 고개를 들고 마치 에디트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것처럼 쳐다봤다.

에디트의 마음속 방들이 서로 충돌하는 욕망 사이에 끼어 줄어들었다. 한쪽 방에는 언니를 향한 깊은 사랑이 있었다. 에디트는 이런 행동이 얼마나 아델에게 상처를 줄지 알았다. 결혼을 승낙하는 것은 아델을 나무처럼 잘라내 버리는 것이었고, 날카로운 도끼를 휘두르는 건 에디트였다. 다른 방에는 에곤과 그와 함께 하는 미래가 있었다. 에디트는 자신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 그녀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낡은 생각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자신이 보였다. 지금 아빠에게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은 그 여인의 싹을 잘라내고, 거부하고, 그녀가 끌린 빛의 근원을 빼앗는 것이었다. 에디트는 자신의 충성심을 가늠해봤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자신의 일부를 잃게 될 것이다. 언니와의 관계와 에곤과의 관계 모두를 갖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선택을 해야만 했다.

에디트는 아빠의 눈을 보고 말했다. “네, 하고 싶어요.”

그 말을 한 뒤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P449-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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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자세를 취해주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일하고 창조해 내지?”

“기꺼이 하려는 다른 여인들도 있잖아요.”

“당신은 집에 돌아왔을 때 모델이 여기서 옷도 입지 않고 있는 걸 보고선 내 캔버스를 거의 부러뜨리려 했잖아.” 에곤도 기분이 나빠졌다. “내 구매자들, 후원자들은 내 과격한 스타일, 누드 그림을 원해. 내가 만약 그린 그림들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른 화가에게 갈 거야. 드레스를 입은 정숙한 여인은 누구든 그려낼 수 있어. 이런 그림 같은 충격을 주지 않아.”

“하지만 나는 당신 아내예요! 내가 당신의 그림들을 전달하고 후원자들과 말하고 그들과 악수하죠. 차마 내가 다리를 활짝 벌린 그림들을 그들의 벽에 걸어놓으라고 전달할 순 없단 말예요.”

“당신 말고는 아무도 그렇게 그림과 당신을 연관 짓지 않아.”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우리는 알려져 있어요. 그들이 내 이름은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 얼굴은 알아요. 그들은 이 그림은 발리이고, 저 그림은 당신 동생인 걸 안단 말예요. 당신이 우리 평판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생각해 봐요.”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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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Egon Schiele]

에곤의 머리 옆 베개가 축축했다. 베개에서 열기가 올라 춥고 밝은 방 안에서 연기처럼 뿌옇게 보였다. 에곤은 곁에 있는 에디트의 상태를 살폈다. 눈거풀은 잿빛이고 누런 피부에 광대뼈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입술은 바싹 말랐다. 에곤은 가능한 한 에디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무릎을 당겨 침대 가장 먼 구석으로 물러났다.

맙소사,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살아 있는 건가?

에디트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에디트는 살아 잇지만 독감에 걸렸다. 이 끔찍한 질병이 늘 그에게 닿으려고 했던 걸 에곤도 알고 있었다. 에곤이 어렸을 때 미술에 엄청난 끌림을 느꼈던 것처럼 분명하게 이 질병을 뼛속까지 느꼈다.

에곤은 이 질병에서 결코 탈출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에곤은 아연실색했다. 공포와 두려움과 분노에 질려 구역질이 났다. 감히 아내를 만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아내에 대한 혐오가 자신을 덮쳐오자 수치스러웠다. 에디트는 이 질병을 여기, 그들의 집, 그들의 침대로 가지고 왔고, 그는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아내가 나아지게 돌보고 살아남도록 기도를 해야 했다. 아내는 도망쳤을 때 에곤과 아기 생각은 하지도 않았나?

세상이 갑자기 극히 작아 보였다. 세상은 더 이상 태양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질병 주위를 돌았다. 에곤은 아내를 빤히 쳐다봤다. 이미 얼마나 많이 손상된 걸까? 에곤은 삶이 층층이 벗겨지는 걸, 아내가 잠을 자면서 무게를 줄어드는 걸 생각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중력에 영향을 받은 아내는 점차 소멸해 가고 있었다. (P557-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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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기.” 에디트는 손으로 배를 짚으며 훌쩍였다. “아기가 움직이는 게 안 느껴져.”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곤은 에디트의 목에다 속삭이고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 사랑을 불어넣었다. 에디트는 몸이 찢어져라 기침을 했다. 에곤은 손수건을 그녀의 입에 갖다 댔다. 손수건을 떼자 피가 묻어나왔다.

“나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품고 있네.” 에디트가 속삭였다.

에곤은 숨 쉬기가 힘들었지만 에디트가 계속 말하도록 이 말을 해야만 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고, 그것만이 중요한 거야. 살아줘. 살아줘. 나를 위해서, 당신을 사랑해.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어. 우린 모든 걸 가졌어.”

그들은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봤다. 에곤은 감각이 마비되었지만 끔찍하게도 살아 있었다.

에곤은 연필 끝에 침을 발라 빈 종이 위에 놓고 망설이며 에디트의 목부터 쇄골까지의 곡선, 특유의 점을 그렸지만 모든 게 잘못되었다. 그의 예술이 그를 떠나버린 것이다. 연필을 움직이는 게 고통스러웠다. 연필과의 연결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그는 할 것이다. 계속 노력할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에디트는 그의 눈을 보면서 에곤이 그녀를 그리기 쉽게 머리를 뒤로 꺾었다. 에디트는 미소를 지으며 애썼지만 종이 위의 그림은 찡그린 표정에 가까웠다. 아름다운 아내 에디트를 그는 포착해낼 수 없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는 눈앞에 있는 것을 포착해 내지 못했다. 그는 눈이 멀었다. 에디트 안에 있는 무언가가 사라졌다. (P568-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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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내 말 좀 들어봐!” 여인의 목소리였다. “문 좀 열어봐.”

하지만 에곤은 그럴 수 없었다.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그를 보러 온 것이다. 문이 문틀에서 떼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에곤이 그의 궤도 안으로 들어왔던 수많은 것들을 떼어버린 것처럼.

에곤은 몸을 떨고 움직이지 못했다.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에곤의 눈은 거칠어지고 보랏빛이 되었고, 장기들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으며, 입술은 일그러졌다.

에곤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멈췄다.

인생은 늘 그저 이 숨만큼이다. (P57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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