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이지 밀러Daisy Miller> 1974년
헨리 제임스가 살아 있는 동안 『데이지 밀러』는 3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여인의 초상』이 1만 3500부 정도 판매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데이지 밀러』는 단연 헨리 제임스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데이지 밀러』는 당시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여성들 사이에서 데이지 밀러의 패션이 유행한 것은 물론이고, 『데이지 밀러』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유럽에서는 ‘데이지 밀러’라는 말이 아주 매력적이지만 뻔뻔스럽고 교양 없는 부류의 젊은 미국인 아가씨를 지칭하는 보편적 용어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다. 헨리 제임스조차 『데이지 밀러』가 거둔 성공과 명성 때문에 자신의 후기 작품들이 홀대당하는 것을 우려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작가적 위상을 확고히 다져, 이후에 이어진 그의 눈부신 문학적 경력의 기반이 되었다.
제임스 자신도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고 2년이 지난 후에 한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결국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요점은, 가볍고 가녀리고 꾸밈없고 예측하기 힘든 한 존재가 정작 자신과는 별로 관련도 없는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짧은 비극인 셈입니다.’ (P14, 서문)
“이 아이와 저는 친구가 되었답니다.”
그는 대단히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제네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젊은 남자가 젊은 미혼 여성에게 마음대로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 브베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P60)
데이지 밀러 양은 대단히 순수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인 아가씨들이 정말 말할 수 없이 순진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두고 보면 결국 그렇지 않다고 했다. 윈터본의 생각에는 데이지 밀러 양이 바람둥이, 어여쁜 미국인 바람둥이 아가씨인 것 같았다. 그는 여태껏 이런 범주에 속하는 젊은 아가씨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여기 유럽에서 두세 명의 여자들을 알고 지낸 적은 있었다. 데이지 밀러 양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적 체면을 위한 남편도 거느린 대단한 요부들, 일단 관계를 맺게 되면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그런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여자들을 말이다. 하지만 이 젊은 아가씨는 그런 부류의 요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혀 때가 묻지 않았고 그저 예쁜 미국인 아가씨일 뿐이었다. 윈터본은 데이지 밀러 양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틀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P71)
그는 아주머니의 말투로부터 데이지 밀러 양이 속한 사회적 위치가 매우 낮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
“아주머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
그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천박해.”
코스텔로 부인은 단언했다.
“그런 부류의 미국인들은 절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란다.”
“아, 그러면 아주머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는 겁니까?”
청년이 말했다.
“그럴 수가 없구나, 프레더릭.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P78)
데이지 밀러 양은 매우 솔직하고 귀여운 태도로 젊은이를 소개했다. 코스텔로 부인의 말처럼 과연 그녀는 ‘천박’했다. 그러나 그 천박함 속에 자신만의 독특하고 섬세한 우아함을 지녔다는 사실이 윈터본에게는 하나의 경이였다. (P90)
윈터본은 그들의 뒷모습을 좇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말 어리둥절했다. 그는 15분 동안이나 호숫가를 서성이며 갑자기 친근하게 굴었다가 금방 변덕을 부리곤 하는 이 젊은 아가씨의 불가사의한 태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가 도달한 단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은, 어디로든 그녀와 함께 ‘달아난다’면 정말 끝내주게 좋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P100)
그는 그녀가 천박하다는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과연 그녀는 그런 여자일까? 아니면 그가 단지 그녀의 천박함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일까? (P102)
데이지가 소리쳤다.
“난 산책을 갈 거예요!”
그레고리아나가에서부터 핀초 언덕의 저편 끝에 있는 그 아름다운 공원까지는 사실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날따라 날씨가 아주 화창해서, 차와 보행자, 산책을 나온 수많은 사람으로 거리는 만원이었다. 결국 젊은 미국인 남녀는 걸음이 지체되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자신의 기이한 처지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지만, 윈터본은 이 일을 매우 바람직하게 여겼다. 나른하게 주위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던 로마 거리의 사람들은 그의 팔을 잡고서 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외국인 여성에게 관심 어린 시선을 집중했다. 윈터본은 동행 하나 없이 사람들의 시선 앞에 자신을 노출하려 했던 데이지의 의중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녀 쪽에서 보면, 그의 임무는 분명 그녀를 조바넬리 씨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분이 흐뭇하기도 한 윈터본은 그따위 임무 같은 것은 수행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왜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나요?” (P120)
윈터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 여자가 과연 교양있는 아가씨인가 하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교양 있는 아가씨라면 아무리 나이 어린 바람둥이 미국인 아가씨라고 하더라도, 천한 출신처럼 보이는 외국 남자와 밀회를 할 수 있을까? 사실 이 경우는 환한 대낮에, 그것도 로마에서 가장 번잡한 곳에서 이루어진 밀회이긴 하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를 택한 것이 오히려 극단적인 냉소주의의 한 증거라고 볼 수는 없을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윈터본은 이 젊은 아가씨가 아모로소와 만나는 자리에 자신이 함께 있어도 별로 초조해하는 기색조차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를 완벽하게 품행이 단정한 아가씨로 보기란 불가능했다. 그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섬세함 같은 것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들이 ‘자유분방한 열정’이라고 부른 그런 감정의 대상으로만 그녀를 대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그녀가 그를 따돌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라도 보인다면, 그녀를 더욱 가볍게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녀의 태도도 훨씬 덜 곤혹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데이지는 계속해서 뻔뻔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의 불가사의한 결합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P126)
데이지는 그 예쁜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럼, 그분이 젊은 아가씨에게 어디를 산책하자고 했겠어요? 게다가 핀초는 길거리가 아니고, 저 역시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나라 여자가 아니에요. 이 나라의 젊은 아가씨들은, 제가 알기로는, 끔찍할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런데 왜 제가 그들을 위해서 제 습관을 고쳐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그 습관이란 게 바람기 같은 것은 아닐까 걱정입니다.”
윈터본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그녀는 다시 생긋 웃으며 잠깐 그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소리쳤다.
“전 무섭도록 끔찍한 바람둥이예요! 멋진 아가씨치고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하지만 당신은 제가 멋진 아가씨가 아니라고 말씀하실 테죠!” (P141)
“어머! 고마워요. 정말 고마운 말씀이군요. 하지만 저는 당신과 놀아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신은 너무 뻣뻣해요.” (P142)
“이곳 사람들을 상대할 때에는 이곳의 풍습을 따라야 합니다. 시시덕거리는 것은 순전히 미국식 풍습이죠.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머니도 동반하지 않은 채, 조바넬리 씨하고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P142-143)
그는 이제 데이지가 정말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매우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꼭 그녀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름답고 개방적이며 자연스러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무질서의 범주 속에서 천박한 자리로 내던져지는 이야기를 듣기가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P151)
이후에도 데이지는 결코 집에 있는 법이 없었다. 윈터본은 두 사람이 공통으로 아는 지인들의 집에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매정한 사람들이 그녀가 도를 넘어섰다고 완전히 단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를 더 이상 초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완고한 유럽인들에게, 비록 데이지 밀러 양이 젊은 미국인 아가씨이긴 하지만 그녀의 행실은 미국 여성의 전형이 아니며 같은 동포들의 눈에도 비정상적으로 비친다는 중대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시사한 셈이었다. 윈터본은 그녀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려 버린 이 모든 차가운 어깨들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때로는 그녀가 이런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데이지가 너무 가볍고 유치하고, 너무 교양 없고 분별없으며, 또 너무 편협하여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것을 반성하지 못하거나, 혹은 아예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다가도 또 다른 순간에는, 그녀의 우아하고도 무책임한 그 작은 몸 안에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인상에 대해, 반항적이고 정열적이며 완벽하게 예민한 의식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데이지의 반항적인 태도가 자신의 순수성을 의식하려는 데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분별없는 부류의 어린 여자라는 데서 오는 것인지 자문해 보았다.
데이지의 ‘순수함’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윈터본에게는 점점 더 미묘한 신사도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이 젊은 아가씨에 대해 억지 논리나 펼치는 처지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그는 그녀의 별난 행동들이 어디까지가 일반적이고 민족적인 성향이며, 어디까지가 개인적인 특성인지에 대해 직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짜증스러워졌다. 어느 쪽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그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너무 늦었다. 그녀는 조바넬리 씨에게 넋이 나가 있었으니. (P153~155)
1877년 가을 동안 로마에 머물 때였다. 그곳에 사는 한 친구가 지난해 겨울에 만난 순진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느 미국인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부인에게는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한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어머니를 따라 이 호텔, 저 호텔을 떠돌던 도중 우연히 신분이 모호한 이탈리아 미남 한 명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사귀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 일은, 지금은 내가 자세한 내용을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권위도 없는 약간의 사회적 제약, 혹은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어떤 사건이 있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P171~172)
결국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요점은, 가볍고 가녀리고 꾸밈없고 예측하기 힘든 한 존재가 정작 자신과는 별로 관련도 없는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짧은 비극인 셈입니다. (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