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년
서른 한 살의 저널리스트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안정적인 직장, 번듯한 남편, 좋은 집까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언젠가부터 이게 정말 자신이 원했던 삶인지 의문이 생긴다. 그녀는 결국 진짜 자신을 되찾고 싶어, 용기를 내어 정해진 인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보기로 결심한다. 일과 사랑, 심지어 가족까지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무작정 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동안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 여행은 일련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내 여행의 형태는 그 질문에 대한 개인적 답변이 반영된 것이다. 당신의 여행은 내 여행과 다른 형태일 테지만 본질적으로 우리의 질문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질문이며,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난 무엇을 하려고 태어났는가?
내게 삶의 진로를 바꿀 자격이 있는가?
나는 누구와 함께 그 진로를 개척하고 싶은가?(만약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즐거움과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날 즐겁고 평화롭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유사 이래로 여자들에게는 이런 강력한 질문들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마침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방송국에서 한 남자가 내게 “당신이 여자들을 망쳐 놨어요! 당신 때문에 여자들이 다 떠났다고요! 내 누이도, 여자 친구도 모두 떠났어요!”라고 말하며 화를 낸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P20-21)
인도 특히 성지와 아쉬람을 여행하다 보면 목에 염주를 걸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매서운 눈초리의 비쩍 마른 요가 수행자들(가끔은 통통하고 다정하며 방실거리는 요가 수행자들도 있지만)이 나체로 찍힌 옛날 사진에도 그런 염주가 등장한다. 구슬을 꿰어 만든 이 염주는 자파 말라(japa mala)라고 하는데 수세기 동안 독실한 힌두교와 불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동안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 왔다. 즉 한 손에 염주를 들고 손가락으로 한 알씩 굴리며 한 바퀴를 돌리는데 한 알을 굴릴 때마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이치다. 종교 전쟁을 위해 동방으로 갔던 중세 십자군은 그곳의 신도들이 이 자파 말라를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기법에 감탄했다. 그리하여 고향인 유럽에 같은 개념을 도입해 묵주를 만들었다.
전통적인 자파 말라는 108개의 염주알로 이루어져 있다. 동양 철학에 보다 정통한 학자들 사이에서는 108이 가장 상서로운 숫자로 간주된다. 3의 배수로 완벽한 세 자리 숫자인 데다 각 숫자를 더하면 3의 세 배인 9가 되기 때문이다. 주일 학교에서 삼위일체를 배웠거나 혹은 삼발이 의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듯이 3이라는 숫자는 궁극의 균형을 상징한다. 이 책 또한 인생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내용이기에 자파 말라처럼 구성하기로 결심하고, 내 사연을 108개의 염주알에 해당하는 108개의 이야기로 나누었다. 그 이야기들은 다시 자아를 탐색하며 내가 방문했던 나라인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이렇게 3부로 나뉜다. 이 분류대로라면 각 나라마다 36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셈이다. 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 구성이 마음에 드는데,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현재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기 때문이다. (P29-30)
[이탈리아]
조반니가 키스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 하지만 그게 왜 끔찍한 소원인지 말해 주는 이유는 너무 많다. 우선 조반니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데다 대부분의 20대 이탈리아 남자들처럼 아직도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연애 상대로는 자격 미달이다. 더구나 난 이제 막 실패한 결혼과 길고 지독한 이혼 과정을 거친 후, 결국에는 가슴 아픈 실연으로 끝나 버린 열정적인 연애까지 겪은 30대 중반의 전문직 미국 여성이다. 이 엎친 데 덮친 격의 불행은 날 슬픔에 빠진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고, 난 7000살 먹은 노파가 된 기분이다. 처량 맞고 부서질 대로 부서진 늙은이 주제에 사랑스럽고 때 묻지 않은 조반니를 더럽히려니 양심에 걸렸다. 무엇보다도 마침내 나는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의 연하 애인과 헤어진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현명한 해결책인지 의구심이 드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몇 달째 혼자 지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아가 올 한 해 동안 금욕 생활을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 말에 어느 현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대체 이탈리아에는 왜 갔습니까?” (P35-36)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도를 계속했다.
“아시다시피 전 기도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제발 절 좀 도와주세요. 전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해답이 필요해요.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세요.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세요.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세요.....”
그리하여 내 기도는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세요, 라는 단순한 간청으로 좁혀졌고, 나는 그 말에 반복했다. 얼마나 애걸했는지 모르겠다. 목숨을 간청하는 사람처럼 아주 절실한 기도였다. 그리고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뚝 멈춰 버렸다.
불현 듯 내가 더 이상 울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한참 울던 도중에 눈물이 멈춰 버렸다. 불행이 몽땅 빨려 나간 듯했다. 난 바닥에서 이마를 들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앉아 혹시 내 울음을 가져가 버린 위대한 존재가 나타나려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분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나로서는 침묵의 막 --너무도 희귀한 침묵이라 행여나 사라져 버릴까 봐 숨조차 들이쉬고 싶지 않은--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뭔가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고요함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지 마시길. 이건 할리우드 성서 영화에 나오는 찰턴 헤스턴의 목소리가 아니면, 우리 집 뒷마당에 야구장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단지 내 안에서 들리는 내 목소리였다. 하지만 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였지만 완벽하게 현명하고 차분하며 인정이 넘쳤다. 내가 평생을 사랑과 확신 속에서만 살았다면 내 목소리도 그러했을 것이다. 신에 대한 의심을 영원히 불식시킬 대답을 해 준 목소리, 거기에 깃든 따뜻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침대로 돌아가, 리즈.
나는 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돌연 분명해졌다. 그 외의 다른 대답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넌 이혼해야만 해! 라든가, 절대 이혼해선 안 돼! 라고 말하는 목소리였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진정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혜란 바로 그 순간에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만을 주며 그날 밤,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은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침대로 돌아가, 라고 이 전지전능한 내면의 목소리는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11월의 어느 목요일, 새벽 3시에 최종적인 해답을 알 필요는 없으니까, 침대로 돌아가, 왜냐하면 난 널 사랑하니까, 침대로 돌아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해답을 알게 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고, 자신을 잘 돌보는 일이니까, 침대로 돌아가, 그래야 폭풍우가 닥쳤을 때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질 테니까, 그리고 그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어. 아주 굉장한 놈이, 금방 닥칠 테지만 오늘 밤은 아니야, 그러니까, 침대로 돌아가, 리즈. (P49-51)
이런 욕망들은 모두 서로 상충하고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와 인도 간의 갈등이 심했다. 어떤 게 더 중요할까? 베네치아에서 송아지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 아니면 새벽이 되기 전에 일찌감치 깨어나 아쉬람의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명상과 기도의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 위대한 수피교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미는 제자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 세 가지를 적어 보라고 충고했다. 그중 하나라도 다른 것과 상충하면 인생이 불행해질 테니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양극단 사이에서 조화롭게 사는 삶이 주는 혜택도 있지 않을까? 얼핏 부조화하는 듯한 두 극단이 공존하며 어느 것 하나도 제외되지 않는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층 광범위한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면? 발리에서 주술사에게 말한 대로 나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고 싶었다. 인간 삶의 이중적 영광인 세속적 즐거움과 신성한 해탈 모두를 원했다. (P72-73)
그리하여 어디로 갈까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하는 고민을 그만두고 마침내 내가 세 나라 모두를 여행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각 나라마다 4개월씩, 총 1년. 물론 이건 ‘내게 새 필통을 사 주고 싶어’보다 조금 야심 찬 꿈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바였다. 또한 이 여행을 글로 쓰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각 나라를 철저히 탐색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이미 다른 사람들이 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각 나라와 연관된 내 내면의 특질을 철저히 탐색하고 싶었다. 각 나라마다 전통적으로 뛰어난 분야가 하나씩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쾌락의 기술을, 인도에서는 신을 섬기는 기술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이 둘의 균형을 찾는 기술을 탐색하고 싶었다. 이런 꿈을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이 나라들이 모두 알파벳 ‘I(나)’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자기 탐색의 여행을 암시하는 상서로운 징조가 아닐까. (P74)
그날 오후에 도서관을 발견했다. 내가 죽고 못 사는 공간. 게다가 로마답게 도서관마저도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건물에는 예쁜 안뜰까지 있었는데 밖에서 볼 때는 그런 안뜰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정원은 완벽한 사각형으로 군데군데 오렌지나무가 심겼고 중앙에는 분수가 있었다. 그 분수를 본 순간, 로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수의 또 다른 후보가 되리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봤던 분수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대리석을 깎아 만든 분수가 아니라 이끼가 낀 녹색의 자연 친화적 분수였다. 마치 물이 새어 나오는 덥수룩한 양치류 덤불 같았다. (사실 인도네시아의 늙은 주술사가 그렸던 그림에서 기도하는 형체의 머리를 뒤덮은 야생 잎사귀 덤불과 똑같았다.) 꽃이 핀 덤불 한가운데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는 다시 비가 되어 잎사귀 위로 떨어졌고, 정원 전체에 서글프면서도 사랑스러운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오렌지나무 아래 놓인 의자를 발견하고, 어제 구입한 시집을 꺼내 들었다. 루이스 글뤽 시집이었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적힌 시를 읽고, 그다음에 영어로 읽었다. 그러다가 이 구절에 이르렀을 때 잠시 멈췄다.
Dal centro della mia vita venne una grande fontana........
내 삶의 중심, 그곳에는 거대한 분수가 있다.........
나는 시집을 무릎에 내려놓고 안도감으로 전율했다. (P90-91)
그로부터 서너 달 뒤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어가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으로 아름다운 언어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닌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유럽이 한때 라틴어에서 파생된 수많은 방언들로 아수라장을 이루다가 점차 소수의 분리된 언어, 즉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로 형태를 갖춰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의 경우에는 유기적 진화가 있었다. 가장 발전한 도시의 말이 점차로 그 나라의 공식 언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중세 파리의 방언이며, 포르투갈어는 리스본의 방언, 스페인어는 마드리드의 방언이다. 가장 부유한 도시의 말이 결국 한 나라의 언어로 결정되었으니 일종의 자본주의적 승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다르다. 결정적 차이점은 이탈리아가 아주 오랫동안 통일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상 꽤 늦은 시기에 통일을 이루었고(1861년) 그 전까지는 잘난 지방 군주나 다른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으며 여러 도시가 대립하던 반도에 불과했다. 이탈리아의 일부는 프랑스에, 일부는 스페인에, 일부는 성당에, 일부는 누구든 지방 요새와 궁전을 차지한 자들에게 속해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런 침입에 굴욕감을 느끼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다른 유럽 국가에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먹고살수만 있다면 프랑스가 됐건, 스페인이 됐건.(Franza o Spagna, purche se magna.)"이라고 말하는 심드렁한 군중은 언제나 존재했다. (P99-100)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언을 찾기 위해서는 200년 전인 14세기 피렌체로 거슬러 가야 했다. 이 지식은 회합이 가장 적절한 이탈리아어라고 결정한 언어는 다름 아닌 피렌체의 위대한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언어였다. 1321년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신곡>을 발표했을 때 그게 라틴어로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문학계에 큰 충격이었다. 단테는 라틴어가 타락했으며 엘리트들만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진지한 산문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하는 이야기를 귀족 교육이라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무언가, 즉 돈으로 사야만 하는 무언가로 만들어 ‘문학을 창녀로 전락시키는 꼴’이라고 했다. 그 대신 단테는 거리로 돌아가 시민들(여기에는 보카치오나 페트라르카와 같은 총명한 동시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사용하는 진정한 피렌체어를 수집해 그걸로 이야기를 썼다.
그는 스스로 방언의 ‘달톰하고 새로운 스타일(dolce stil nuovo)'이라고 명명한 언어로 자신의 걸작을 저술했고, 그러는 동안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에 영향을 미쳤듯이 단테도 그 방언에 영향을 미치며 새롭게 만들어 나갔다. 후대의 민족주의자 지식인들이 단테의 이탈리아어가 공식 이탈리아어가 돼야 한다고 결정한 것은, 19세기 초 어느 날 옥스퍼드 학자들이 모여 앉아 이 순간부터 영국 국민들은 순수한 셰익스피어 영어로 말해야 한다고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결정은 성공을 거두었다. (P101-102)
종이 위에서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혹시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걱정은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듣는 목소리는 신일 수도 있고, 날 통해 말하는 구루일 수도 있고, 날 돌보는 수호천사일 수도 있다. 초자아일 수도 있고, 고통으로부터 날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이 만들어 낸 생각일 수도 있다. 성녀 테레사는 이렇게 신성한 내면의 목소리를 ‘환청’이라고 불렀다. 즉흥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가 우리 언어로 옮겨지며 천상의 위안을 주는 초자연적 세계의 말들. 이런 영적 위안에 대해 프로이트가 뭐라고 했을지는 뻔하다. 이성적이며 “신뢰할 가치가 전혀 없다. 살다 보면 이 세상이 유치원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도 동의한다. 세상은 유치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험난한 곳이기에 가끔씩 우리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곳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위안을 찾아 더 높은 힘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영적 실험의 초기 단계에서 나라고 늘 이 지혜로운 내면의 목소리를 믿은 건 아니다. 한번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이 비밀 노트를 펼쳐 들고 내면의 목소리, 내면의 신성한 위안에게 한 페이지 가득 대문자로 이렇게 휘갈겨 쓴 적도 있다.
“난 너 따위는 좆도 안 믿어!!!!!!!!”
잠시 후, 여전히 씩씩거리던 나는 가슴속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어느새 내 손은 여전히 차분하고 즐거운 목소리의 답변을 써 내려갔다.
그럼 넌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P115)
내 경우 쾌락을 추구하는 데 최대 장벽은 뿌리 깊이 박힌 청교도인의 죄의식이다. 내가 정말 이 쾌락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이 역시 지극히 미국인다운 생각이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될 만큼 열심히 일했는지 아닌지 불안하다. 미국의 광고업계는 이렇게 확신이 부족한 소비자들에게 ‘그래, 당신은 특별한 대접을 누릴 자격이 있어.’라고 확신을 심어 주는 전략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맥주는 당신을 위한 거야! 당신은 오늘 하루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어! 당신은 소중하니까! 그동안 수고했어! 그러면 불확실한 소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고마워! 이따가 맥주 한 상자 사러 갈 거야, 젠장! 까짓것 그냥 두 사장 사 버리지, 뭐! 그러고는 그동안 참아 온 부작용으로 미친 듯이 먹고 마신다. 이런 식의 광고 전략은 아마도 이탈리아 문화에서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늘 하루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이탈리아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 그래서 오늘 정오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당신 집에 가서 당신 마누라랑 자려는 거 아니겠어. (P129-1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어 공부는 전반적으로 충분히 영양가 있는 일이며 대개는 순수한 즐거움이 되어 준다. 조반니와 나는 서로 영어와 이탈리아어의 새로운 숙어를 가르쳐 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요전에는 슬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영어로 ‘I've been there.'라는 표현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조반니는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 보다니, 어딜 가 봐요?”
“깊은 슬픔은 때때로 특별한 장소가 되기도 해요. 시간이라는 지도상의 한 좌표처럼요. 그 슬픔의 숲에 서 있노라면 도저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죠. 그럴 때 누군가가 자기도 거기 가 봤고 이제는 빠져나왔다고 말해 주면 희망이 생기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슬픔이 장소군요.”
“거기서 몇 년씩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번에는 조반니가 상대를 위로하는 이탈리아어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L'ho provato sulla mia pelle. '나도 피부로 겪었어.‘라는 뜻이다. 나 역시 그렇게 데고 흉터가 생겼으니 지금 네가 겪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
하지만 지금까지 배운 이탈리아어 중에서 내가 발음하기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흔한 단어다.
Attraversiamo.
‘건너가자.’라는 뜻이다. 친구들끼리 길을 걷다가 맞은편으로 건너가야 할 때 쓴다. 다시 말해, 정말로 길을 건널 때 쓰는 단어인 것이다. 특별한 뜻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단어가 마음에 꽂혀 버렸다. (P145-146)
“제발 이 피자 가게에 가요. 가서 더블 모차렐라 마르게리타 피자를 주문해요. 나폴리에 가서 이 피자를 먹지 않는다면, 제발 부탁이니 그냥 먹고 왔다고 거짓말이라도 해 줘요.”
그리하여 소피와 나는 피제리아 다 미켈레(Pizzeria da Michele)로 갔고, 한 사람당 한 판씩 먹으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사실 난 이 피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 피자도 날 사랑할 거라고 믿는 환각 상태에 빠져 버렸다. 나는 이 피자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불륜과도 같은 연애를, 그동안 소피 역시 눈물을 글썽이며 피자를 먹고 있었다. 그녀는 형이상학적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 “대체 스톡홀름에서는 뭐하러 피자를 만드는 걸까? 아니 스톡홀름 사람들은 뭐하러 굳이 음식을 먹는 걸까?”
피제리아 다 미켈레는 좁은 홀과 쉬지 않고 피자를 구워내는 오븐 하나가 전부인 협소한 가게다. (P159)
우리를 말라죽게 하는 건 감정적 위축,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충격, 그리고 자신이 집단의 일원이라는 위안 --이것이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전통적 삶을 고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을 잃는 데서 오는 허탈감이다. 배우자와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은 한 개인이 미국(혹은 어느 나라든) 사회에서 연속성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나는 미네소타 주에 사는 우리 외가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 아울러 다들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얼마나 큰 안도감을 얻는지도. 처음에는 어린아이였다가 청소년이 되고 신혼부부에서 부모가 된 다음 퇴직자를 거쳐 조부모가 된다. 각 단계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의무가 무엇이며, 그런 모임에서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알게 된다. 어릴 때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앉았다가 다른 청소년들과 앉게 되고 다른 신혼부부들, 다른 퇴직자들과 함께 앉는다. 그러고는 마침내 다른 90세 노인들과 함께 그늘 아래 앉아 흡족한 마음으로 후손들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누구일까? 고민할 필요 없다. 당신은 바로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사람이다. (P185)
그런 다음 줄리오는 영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손동작을 섞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도시에는 그 도시를 정의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어가 존재해요. 어떤 도시나 거리에서 당신을 스쳐 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대다수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 그게 바로 그 도시의 단어예요. 만약 내 개인적 단어가 그 도시의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난 거기 속한 사람이 아닌 거죠.”
“로마의 단어는 뭔데요?”
“섹스.” 그가 선언했다.
“하지만 그건 로마에 대한 선입견 아닌가요?”
“아뇨.”
“하지만 분명 로마 사람들 중에도 섹스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뇨, 모든 사람이, 하루 종일, 섹스만 생각해요.” 줄리오가 우겼다.
“바티칸은요?”
“거긴 달라요. 바티칸은 로마가 아니죠. 그곳 사람들은 다른 단어를 가지고 있어요, 권력.”
“신념이 아닐까요?”
“권력이요. 내 말 믿어요. 로마의 단어는 섹스예요.” (P201)
그런 환경에서 오로지 맛있게 먹을 끼니만 생각한다면 약간 천박한 일일까? 아니면 이 고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루이지 바르치니는 1964년에 쓴 걸작 <이탈리아인들>(그는 이탈리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쓰는 것에 질려서 마침내 이 책을 썼다고 한다.)을 통해 자국 문화의 진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왜 이탈리아가 그토록 위대한 예술가와 정치가, 과학자 들을 배출하고도 아직까지 강대국이 되지 못했는지 해답을 찾으려 했다. 왜 언변 외교의 달인들이 국내 정치에는 그토록 서투르기 짝이 없는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따지면 용맹함이 하늘을 찌르는데 왜 군대를 만들면 그토록 오합지졸인가? 개인적으로는 실리에 밝은 상인들인데 어째서 한 나라로서는 그토록 비효율적인 자본주의 국가인가? (P219-220)
[인도]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닭을 키웠다. 늘 열두 마리를 유지했기에 한 마리라도 없어지면 --매, 여우에게 물려 가거나 알수 없는 병에 걸려 죽거나-- 아버지는 즉시 사라진 닭을 대체하기 위해 근처 농장으로 차를 몰고 가서 자루에 닭 한 마리를 담아서 돌아왔다. 문제는 새 닭을 닭장 속에 넣을 때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닭장에 던져 넣었다가는 기존의 닭들이 새 닭을 침입자로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닭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새 닭을 몰래 닭장 속에 넣어야 한다. 횃대에 닭을 놓아두고 살그머니 빠져나오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닭들이 깨어나면 그들은 신출내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저 닭은 분명 계속 저기 있었을 거야.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라고만 생각한다. 더 웃긴 건 닭장 안에서 깨어난 신출내기 닭도 자신이 여기 새로 왔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고 “난 계속 여기 있었던 게 분명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인도에 도착한 것도 정확히 이런 식이었다. (P225-226)
“우리는 왜 요가를 할까요?”
뉴욕에서 꽤나 어려운 요가 수업을 듣던 중에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모두 옆으로 삼각형 자세를 만드는 힘든 동작을 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어느 누구도 더는 원치 않을 만큼 오랫동안 이 자세를 유지하게 했다.
“우리는 왜 요가를 할까요?” 그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유연한 몸을 갖기 위해서? 아니면 더 고귀한 목적이 있는 걸까요?”
산스크리트어인 요가(Yoga)는 ‘합일’이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원래 어근인 유즈(yuj)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멍에를 씌우다’라는 뜻으로 무소처럼 우직하게 당장 해야 할 일에 몰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요가에서 말하는 당장해야 할 일이란 합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 간에, 한 사람과 신 간에, 생각과 그 생각의 근원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심지어는 우리 자신과 몸이 뻣뻣하기 그지없는 이웃들 간에도, 서양인들은 주로 요가가 신체를 위한 요상한 동작의 운동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요가 철학의 한 분파인 하타 요가일 뿐이다. 고대 인도인들이 이 운동을 개발한 이유는 개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근육과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P229)
요가는 인간이 자기 내면의 신을 경험하려는, 아울러 그 경험을 영원히 지속하려는 노력이다. 자기 수련이며 과거에 대한 끝없는 상념과 미래에 대한 쉼 없는 걱정에서 우리를 끌어내 영원한 존재의 장소를 찾아내려는 헌신적인 노력이다. 오직 그곳에서만 우리는 균형 잡힌 태도로 자기 자신과 주위 환경을 주시할 수 있다. 오직 평온한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질을 볼 수 있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진정한 요기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신의 창조적 에너지가 평등하게 발현된 것으로 본다. 남자, 여자, 어린이, 순무, 빈대, 산호, 이 모두가 신이 위장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요기들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만 신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무, 빈대, 산호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깨달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기회가 있다.
“따라서 이번 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의 눈을 다시 건강하게 해서 그 눈으로 신을 보는 것이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소 요기 같은 발언을 했다. (P231-232)
대부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나는 불교에서 ‘원숭이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내 생각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쉼 없이 넘어가고, 오직 몸을 긁거나 침을 뱉거나 소리를 지를 때만 멈춘다. 내 마음은 먼 과거에서부터 알 수 없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헤치고 마구잡이로 옮겨 간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1분에 수십 가지의 생각을 건드리면서, 꼭 이것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생각에 동반되는 감정이다. 행복한 생각은 날 행복하게 하지만, 아악! 내 마음은 금세 다시 강박적인 걱정으로 옮겨 가서 기분을 망쳐 버린다. 그런 다음에는 화나는 순간들이 기억나면서 다시 분노에 휩싸여 씩씩거린다. 그러면 내 마음은 지금이 자기 연민에 빠질 때라고 결정하고 금세 외로움을 느낀다. 인간은 생각의 산물이다. 감정은 생각의 노예고, 인간은 감정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P247)
라코타 수족(Sioux)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는 반편이라고 했다. 고대 산스크리트어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제대로 명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징후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새들이 우리를 무생물로 생각하고 머리 위에 와서 앉는 것이다.” 분명히 난 아직 그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 뒤로 40분 정도 몸은 사원에, 마음은 자괴감과 자격지심에 꼼짝없이 갇힌 채 가능한 한 고요히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주위 수행자들은 완벽한 가부좌를 하고 완벽하게 눈을 감고 완벽한 천국으로 이동하며 차분함이 흘러넘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슬픔이 울컥 치밀어 올랐고, 눈물의 위로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예전에 구루가 했던 말을 기억하며 눈물을 참았다. 구루는 자신에게 절대 무너질 기회를 주면 안 된다고 했다. 한번 무너지면 습관이 되어 자꾸, 자꾸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 대신 씩씩한 마음을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P254)
함-사(Ham-Sa).
산스크리트어로 “나는 그것이다.”라는 뜻이다.
요기들은 함-사가 가장 자연스러운 만트라로 인간이 태어날 때 신에게 받은 만트라라고 한다. 그것은 호흡의 소리다. 함은 들숨, 사는 날숨. 살아 있는 한 계속 호흡하게 되고 따라서 이 만트라를 반복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다. 나는 신성하다. 나는 신과 함께 있다. 나는 신의 표현이다. 나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한 개인의 한정된 환상이 아니다. 함-사는 언제나 발음하기 쉽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우리 요가의 ‘공식’ 만트라인 옴 나마 쉬바야보다 명상하기 쉽다. 며칠 전 나는 스님에게 이 일을 의논했고, 스님은 명상에 도움이 된다면 계속 함-사를 사용하라고 했다. “마음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걸로 명상하세요.”
따라서 오늘은 그 만트라를 사용할 것이다.
함-사.
나는 그것이다. (P262)
백 살이 다 된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런 말을 했다. “역사상 인간이 싸움을 벌이는 문제는 딱 두 개뿐이야. 날 얼마나 사랑해? 그리고 여기서 누가 대장이야?” 그 외의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과 통제에 관한 이 두 가지 질문은 우리 모두를 몰락시키고, 실수를 유발하며, 전쟁과 슬픔, 괴로움을 일으킨다. 불행히도(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아쉬람에서 내가 씨름하는 것도 바로 이 두 질문이었다. 침묵 속에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면 오로지 욕망과 통제의 문제만 떠올라 날 동요시킨다. 이 동요가 내 발목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P288)
신앙심이 독실한 사람들은 어떤 보답을 받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어도 의식을 수행한다. 물론 수없이 많은 경전과 수없이 많은 성직자가 열심히 수행하면 보상을 받을 거라고 약속(혹은 타락에 빠질 경우 어떤 처벌이 우리를 기다릴지 협박)한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신념의 행위다. 우리들 중 누구도 결말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확신 없는 근면함이다. 신념은 ‘네, 전 이 우주의 조건들을 미리 받아들이고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미리 포용합니다.’라고 선언하는 행위다. 맹신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종교와 관련된 개념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성의 영역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건너뛰는 도약이다. 각 종교의 학자들이 경전을 들이밀며 자기들의 신앙이 얼마나 이성적인지 열심히 설명해도 난 관심없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념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그건 신념의 정의에 어긋난다. 신념이란 보거나 증명하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신념이란 어둠을 향해 정면으로, 전속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 신의 본질, 영혼의 운명에 대한 답을 모두 미리 알고 있다면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 아니며 인류의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단지...... 신중하게 작성한 보험 증서에 불과하다. (P317-318)
1.인생의 은유는 신의 명령이다.
2.당신은 방금 계단을 올라와 지붕 위에 섰다. 당신과 무한한 신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지금 놓아 버려라.
3.하루가 저물고 있다. 아름다웠던 것들이 또 다른 아름다운 것으로 변해 가는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 놓아 버려라.
4.해결을 바라는 마음이 곧 기도다.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이 곧 신의 응답이다. 놓아 버려라. 그리고 외부와 내면 모두에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아라.
5.진심으로 은총을 구하라. 그리고 놓아 버려라.
6.진심으로 그를 용서하라. 너 자신을 용서하라. 그리고 그를 놓아 버려라.
7.네 의도를 쓸데없는 고통으로부터 풀어 주어라. 그리고 놓아 버려라.
8.낮의 열기가 서늘한 밤으로 변해 가는 것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놓아 버려라.
9. 남녀 관계의 업보가 다하면 사랑만이 남는다. 이젠 안전하다. 그러니 놓아 버려라.
10.마침내 과거가 떠나면 보내 주어라. 그런 다음, 계단을 내려가 남은 인생을 시작하라. 크나큰 기쁨으로. (P332)
“신은 네 안에 머문다. 네 모습으로.”
네 모습으로.
요가에 하나의 신성한 진실이 있다면 아마 이 문장에 담겨 있으리라. 신은 우리 자신. 정확히 내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머문다. 영적인 사람은 이러할 것이다, 라는 선입견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 걸 신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신과 가까워지려면 자신의 성격을 엄청나게, 극적으로 바꿔 개성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개념이 박혀 있는 듯하다. 이는 동양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오산(誤算)’이다. 스와미지는 매일 새롭게 버릴 것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평화가 아닌 절망을 얻을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특질을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신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만 버리면 된다. 신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 그 외에는 타고난 성격대로,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P343)
그리하여 아쉬람에서 보낸 마지막 주에 난 그 단어를 보았다. 요가에 관한 고서를 읽던 중, 고대의 정신적 구도자를 묘사한 대목을 읽게 되었다. 그 단락에 안테바신(Amtevasin)이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적혀 있었다. ‘경계에 사는 자’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그 의미 그대로 쓰여서 복작거리는 속세를 떠나 영적 구도자들이 사는 숲 가장자리에 사는 사람을 일컬었다. 안테바신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면서 가정을 꾸리지 않았기에 더는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지의 깊은 숲속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사는 현인들처럼 속세를 초월하지도 않았다. 안테바신은 그 중간이고 경계인이다. 양쪽 세상이 다 보이는 곳에 살지만 시선은 미지로 향해 있다. 그리고 학자이기도 하다.
안테바신을 묘사한 대목을 읽을 때 너무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짧은 동의의 탄성을 질렀다. 드디어 내 단어를 찾았노라! (P362)
[인도네시아]
우붓은 발리의 중심지로 산속에 위치하며, 계단식 논과 수많은 힌두교 사원에 둘러싸여 있다. 밀림의 깊은 계곡 사이로 강이 빠르게 흐르고, 지평선에는 화산이 보인다. 우붓은 오랫동안 발리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졌으며 발리의 전통 그림, 춤, 조각, 종교적 의식이 발달했다. 근처에 해변이 없는 관계로 우붓에 오는 관광객은 문화에 관심이 많고, 다소 품위 있는 사람들이다. 해변에서 피냐콜라다를 마시는 것보다 고대 사원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더 좋아하는 부류인 것이다. 주술사의 예언이 어떻든 간에 이곳은 당분간 머물기에 꽤 좋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원숭이와 전통 복장을 한 발리인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 작은 마을은 태평양에 있는 산타페 같았다. 맛집과 멋진 서점도 있다. YWCA가 생긴 이래로 미국의 멋진 이혼녀들이 그랬듯이 이런저런 강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염색, 드럼, 보석 만들기, 도자기, 전통 인도네시아 춤과 요리 등 흥미로운 강의들이 가득하다. 내가 묵는 호텔 맞은편에는 ‘명상 가게’라는 곳도 있는데 매일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공개 명상회가 열린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평화가 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팻말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호텔에 여장을 풀 무렵에는 아직 초저녁이었으므로 산책이나 하면서 2년간 못 본 이 마을을 다시 눈에 익히기로 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주술사를 찾아야 할지 생각해 보자. 아마 며칠, 몇 주가 걸리는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일단 나가는 길에 프런트 데스크에 들려 마리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마리오는 이 호텔 직원이다. 아까 체크인을 하면서 벌써 친해졌는데, 그의 이름 덕분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난 마리오라는 이름의 남자들이 많이 사는 나라를 여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 작은 체구에 다부지고 활기가 넘치며, 실크 사롱을 입고, 귀 뒤에 꽃을 꽂은 발리 남자는 없었다. 난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이 정말 마리오예요? 인도네시아 이름 같지는 않은데.”
“본명은 아니에요. 진짜 이름은 뇨만이죠.”
아, 왜 그걸 몰랐을까. 마리오의 본명을 맞힐 확률이 25퍼센트나 된다는 걸, 잠깐 옆길로 새자면, 발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성별에 관계없이 네 개의 이름 중 하나를 붙여준다. 와얀, 마데, 뇨만, 끄뜻. 번역하자면 그냥 첫째, 둘째, 셋째, 넷째라는 뜻이며 여기에는 출생 순서가 내포되어 있다. 다섯 번째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와얀 제곱’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쌍둥이를 낳았다면 출생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발리에는 기본적으로 이름이 넷뿐이므로(계급이 높은 최상류층 사람들은 직접 이름을 지을 수 있다.) 와얀이 와얀과 결혼하는 일이 가능하고도 남는다. (가능할 뿐 아니라 꽤 흔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의 첫 번째 자녀 역시, 당연히 와얀이다. (P380-382)
발리는 지구상에서 이슬람교도가 가장 많은 국가인 3218킬로미터의 인도네시아 군도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섬으로 주민들은 힌두교를 믿는다. 그렇게 신기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섬이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섬이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이 섬의 힌두교는 자바 섬을 통해 인도에서 수입되었다. 인도 상인들은 4세기경에 자신의 종교를 이 동방으로 전파했다. 자바의 왕들이 건립한 강력한 힌두 왕조는 오늘날 보로부두르에 있는 인상적인 사원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유적이 거의 없다. 그러다 16세기경 이슬람교도들이 일으킨 폭동이 인도네시아 전역을 휩쓸었고, 시바 신을 숭배하는 힌두교 왕족들은 자바 섬을 탈출해 떼 지어 발리로 도망쳤다. 이를 ‘마자파힛 대탈출’이라 부른다. 자바의 상류층은 가족들뿐 아니라 장인(匠人)과 사제들까지도 데려갔다. 따라서 발리 사람들은 모두 왕이나 사제, 예술가의 자손이라는 말이 딱히 과장은 아니며 발리인들은 그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는다. (P393-394)
발리의 개념 자체가 하나의 매트릭스, 즉 영혼과 길잡이, 길, 관습이 모여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격자를 이룬다. 발리인들은 상대가 이 거대하고 형체 없는 지도에서 어디에 속해 있고,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거의 모든 발리인들에게 붙여지는 네 가지 이름만 봐도 그렇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이 이름은 가족 내에서 언제 태어났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 상기시킨다. 아이들의 이름을 동, 서, 남, 북이라 짓는다면 그토록 명확한 사회적 매핑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친구 마리오는 자신이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차점, 완벽한 균형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자신이 신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이곳 지상에서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균형이 무너지면 힘도 잃는다.
따라서 발리인들을 균형의 도인이라 불러도 그다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들에게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곧 예술이자 과학이며 종교다. 나는 내 삶의 균형을 잡고 싶었기에 이 무질서한 세상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발리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에 대해 더 많이 읽거나 볼수록 내가 그 격자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는지 깨달을 뿐이었다. (P396-397)
끄뜻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밥에 오리고기나 생선을 섞은 간단한 발리식 전통 식사다. 또 매일 설탕을 넣은 한 잔의 커피도 즐겨 마시는데 그저 자신이 커피와 설탕을 살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이런 식사법으로 쉽게 105세까지 살 수 있다. 그의 말로는 자신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매일 잠들기 전에 명상을 하며 우주의 건강한 에너지를 중심부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몸이 다른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물(아파), 불(테조), 바람(바유), 하늘(아카사), 흙(프리티위)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 사실에 집중하면서 명상하면 이 근원으로부터 에너지를 받게 되고 언제나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간혹 자신이 정확히 아는 영어 관용어 실력을 뽐내며 그가 말했다. “한 티끌이 온 우주를 머금지. 티끌이 불과한 우리 인간이 실은 이 우주와 똑같은 존재야.” (P421)
“끄뜻, 세상은 왜 이리 요지경이죠?” 다음 날, 나는 주술사에게 물었다.
“Bhuta ia, dewa ia."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사람은 악마다. 사람은 신이다. 둘 다 진실이라네.”
이는 내게 익숙한 개념이다. 매우 인도적이며 매우 요가적이다. 우리 구루가 여러 번 설명했듯이 이는 인간이 축소와 확장의 잠재력을 똑같이 가지고 태어난다는 개념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빛과 어둠의 요소가 공존하고 어떤 것을 발현할지, 선인지 악인지 결정하는 건 개인(혹은 가족, 혹은 사회)에게 달렸다.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 내면에서 선한 균형을 이루는 데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결과가 곧 광기다.(집단적 차원에서든 개인적 차원이든.)
“그럼 이 세상의 광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내버려 둬.” 끄뜻은 킬킬 웃었지만 친절함이 밴 웃음이었다. “그게 세상 이치고, 숙명이야. 자기 광기만 걱정하면 돼. 자기 자신이나 평화롭게 하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죠?”
“명상, 명상의 목적은 오직 행복과 평화야. 아주 쉽지. 오늘은 새로운 명상법을 가르쳐 주지.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거야. 이름하여 네 형제 명상법이라네.” (P435-436)
나는 행복에 대한 구루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복을 일종의 행운, 좋은 날씨처럼 그냥 운이 좋은 사람에게 뚝 떨어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행복은 그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행복은 개인이 노력한 결과다. 행복을 얻기 위해 싸우고 노력하고 주장하고 때로는 행복을 찾아 세상을 떠돌기도 해야 한다. 행복이 발현되는 과정에 무지막지하게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으면, 그것을 유지하는 걸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행복을 향해 영원히 헤엄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내면의 만족감은 쉽게 빠져나갈 것이다. 고통에 처했을 때 기도하는 건 쉽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기도하는 건 봉인 작업과 같다. 우리의 영혼이 그 훌륭한 성취를 꼭 붙들고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발리의 노을 속을 마음껏 누비며 나는 이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리고 신과 조화를 이룬 이 상태를 음미하며 맹세에 가까운 기도를 했다. ‘제가 붙들고 싶은 게 바로 이거예요. 제발 이 만족감을 잘 기억해서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 행복감을 국민연금공단만이 아닌 내 영혼의 네 형제들이 수호하는 은행 같은 곳에 잘 넣어 두고 싶었다. 미래의 시련을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서, 나는 이 수련을 ‘부지런한 기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부지런한 기쁨에 집중하는 동시에 예전에 친구 다시가 했던 말도 잊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난은 불행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다는 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세계적인 거물들만이 아니라 일개 소시민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만 봐도 내 인생의 불행한 사건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과 괴로움, 불편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행복 추구는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고, 나만 이롭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에게 주는 자비로운 선물이기도 하다. 앞길을 가로막는 불행을 깨끗이 털어 내라,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말라. 그런 후에야 비로소 타인에게 봉사하고,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P450-451)
힌두교에서는 카르마의 관점에서 우주를 본다. 따라서 우주는 끝없는 순환의 과정이고, 인간은 생을 마칠 때 실제로 지옥이나 천국을 가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지구에 되돌아온다. 전생에 끝내지 못한 인간관계나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끝내면 이 순환 과정을 마치고 허공 속에 녹아 버린다. 카르마의 개념은 천국과 지옥이 오로지 지상에만 존재함을 암시한다. 지상에서만 우리의 운명이나 성격에 따라 선행과 악행을 저지르며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카르마의 개념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그러니까 내가 전생에 클레오파트라의 바텐더였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좀 더 상징적인 차원에서 좋아한다. 윤회의 개념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번 생만 봐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똑같은 중독과 강박 관념에 부딪히고, 똑같은 불행을 계속 만들어 재앙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것이 카르마(혹은 서양 심리학)가 주는 최고의 교훈이다. 즉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에 모든 걸 망쳐서 다시 고통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고통의 반복이 곧 지옥이다. 그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나 새로운 깨달음의 단계로 가는 것, 그것이 곧 천국이다. (P453)
매일 아침 일출과 함께 섬을 한 바퀴 돌았고, 일몰에도 한 바퀴 돌았다. 나머지 시간에는 그냥 앉아 바라보았다. 내 생각을 바라보고, 내 감정을 바라보고, 어부들을 바라보았다. 요가의 현자들은 인간사의 모든 고통은 기쁨과 마찬가지로 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정의하는 말을 만들고, 이 말들은 거기에 수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감정은 끈에 묶인 개처럼 우리 주위를 맴돈다. 우리는 자기가 만든 만트라에 빠져들고(나는 실패자다..... 나는 외롭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외롭다.....) 그 만트라의 기념비가 된다. 따라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의 힘을 약화하는 것이며, 말에 의해 숨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고, 질식할 듯한 만트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데 한참이 걸렸다. 말을 멈춘 후에도 나는 여전히 언어로 웅웅거렸다. 말의 기관과 근육들 --뇌, 성대, 가슴, 목덜미-- 은 내가 말하는 걸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말했을 때의 여운으로 진동했다. 머릿속은 언어의 잔향으로 진동했다. 마치 낮에 다녀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고함으로 계속 메아리치는 실내 수영장처럼, 이런 말의 진동이 완전히 사라지고, 소음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기까지는 놀랍도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흘쯤 걸린 것 같다.
그러자 모든 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침묵의 상태가 되자 모든 미움과 두려움이 올라올 공간이 생긴 것이다. 나는 재활 치료를 받는 마약 중독자처럼 몸 안에서 올라오는 독으로 경련했다. 울기도 많이 울고, 기도도 많이 했다. 힘들고 두려웠지만 내가 여기에 있고 싶다는 사실, 다른 누구와도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난 이 일을 해야만 했고, 혼자서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P557-558)
침묵한 지 9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밤에는 해가 지는 동안 해변에서 명상을 시작했고, 한밤중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내 마음에게 말했다. ‘바로 이거야, 리즈. 지금이 기회야. 지금까지 슬펐던 일을 모두 보여 줘. 내가 다 살펴볼게. 어떤 것도 감추지 마.’ 슬픈 생각과 기억들이 하나씩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체를 밝혔다. 나는 각각의 생각, 각각의 슬픔을 바라보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며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날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려 하지 않고.) 그런 다음, 슬픔에게 말했다. “이젠 괜찮아. 널 사랑해. 널 받아들일게. 내 가슴으로 들어와. 이제 끝났어.” 실제로 슬픔이(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내 가슴으로 (마치 이곳이 진짜 방인 것처럼)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다음 타자?’라고 묻자 슬픔의 다음 조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걸 응시하고 경험하고 축복한 뒤, 역시 내 가슴으로 초대했다. 내가 가진 슬픈 생각이 --수십 년 전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 이 떠오를 때마다 그렇게 했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에게 “네가 가진 분노를 모두 보여 줘.”라고 말했다. 살면서 분노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라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부당한 일, 배신당한 일, 상실감, 분노,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존재를 인정했다. 마치 그 일이 지금 일어난 것처럼 분노의 조각들을 완전히 느끼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 가슴으로 들어와. 거기서 쉴 수 있어. 이젠 안전해. 다 끝났어. 널 사랑해.” 이 일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고, 나는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갔다. 다시 말해 한순간 뼈에 사무치는 분노를 느꼈다가, 분노가 내 가슴으로 들어가 형제들 옆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싸움을 포기하자 완벽한 평온을 되찾았다.
다음은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네 수치심을 보여 줘.” 내가 마음에게 말했다. 그 순간의 공포란, 내 모든 실패, 거짓말, 이기심, 질투, 오만의 가엾은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난 어느 것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최악의 모습을 보여줘.” 가장 수치스러운 일들을 가슴으로 초대하자 그들이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냐, 넌 날 원치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난 네가 들어오길 원해. 정말이야. 여기서는 너도 환영이야. 괜찮아. 넌 용서받았어. 넌 내 일부야. 이젠 쉬어도 돼. 다 끝났어.”
이 과정이 전부 끝나자 난 텅 비었다. 더는 내 마음 속에서 아무것도 싸우지 않았다. (P560-561)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불교신자들은 떡갈나무가 세상에 나오는 데 동시에 두 개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선 떡갈나무의 시발점인 도토리가 필요하다. 모든 약속과 잠재력이 담긴 이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는 데는 다른 힘도 존재한다. 바로 미래의 떡갈나무다. 미래의 나무는 어서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도토리가 빨리 싹을 틔우도록 밀어주고, 묘목이 쑥쑥 자라도록 끌어주며, 무(無)에서 성숙함으로 진화하도록 안내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신자들은 떡갈나무의 근원인 도토리를 창조한 것은 다름 아닌 떡갈나무라고 말한다.
지금의 내 모습과 삶은 내가 늘 꿈꾸고 바라 왔던 그대로다. 이렇게 되기까지 참았던 과정을 생각하니 지금보다 더 젊고, 더 혼란스럽고, 더 힘들었던 시절에 앞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를 끌어 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나, 행복하고 균형 잡히고, 인도네시아인이 모는 낚싯배의 갑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내가 잠재력으로 가득 찬 도토리였다면, 지금까지 시종일관 “옳지, 어서 자라! 변화해! 진화해! 여기서 나를 만나자, 이곳에서 난 이미 온전하고 성숙한 존재야! 어서 자라 내가 돼!”라고 말해 준 존재는 더 나이 든 나, 이미 존재하는 미래의 떡갈나무가 아니었을까? 아마 4년 전 욕실 바닥에서 흐느끼던 젊은 주부의 주위를 맴돌며 그 절박한 여인에게 “침대로 돌아가, 리즈.....”라고 상냥하게 속삭였던 건 꿈을 이룬 지금의 나이리라. 미래의 나는 모든 게 좋아질 것이며, 결국 우리가 합쳐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여기에서 난 늘 평화롭고 만족한 상태로, 그녀가 도착해 나와 하나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P564-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