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바리안(Waiting for the Barbarian) 2021년
그는 낯선 가구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몸을 움직인다. 그럼에도 검은 안경을 벗지 않는다. 그는 자리에서 일찍 일어선다. 그는 이 여관에 묵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가장 좋은 숙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중요한 방문객이라고 여관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졸 대령님은 제3국에서 파견 나온 분이오. 제3국은 요즘 보안청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라오.” 여하튼, 수도에서부터 우리에게 뒤늦게 들려오는 소문은 그렇다. 여관 주인은 머리를 끄덕이고, 하녀들은 머리를 숙인다. “우리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하오.” (P8)
졸 대령이 한가할 때 그를 다시 만나게 된 자리에서, 나는 고문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만약 죄수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끔찍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고, 더 이상 굴복할 수도 없는데, 더 굴복하라고 윽박지른다고 상상해보세요! 심문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 않겠어요! 대체 사람이 진실을 얘기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특정한 말투가 있습니다.” 졸은 말한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그걸 알고 있죠.”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라고요!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런 말투를 가려 낼 수 있다는 건가요? 제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나요?”
지금까지의 우리 사이에서 가장 허물없는 순간이다. 그는 손을 약간 저으며 이를 물리친다. “아닙니다. 저를 오해하셨네요. 저는 지금 특별한 상황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진실을 찾기 위해 압력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합니다. 아시죠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이죠. 그리고 압력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하죠. 거기에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다 압력이 더 가해지면 그때에야 진실을 얘기합니다. 그게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고통은 진실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 이게 내가 졸 대령과의 대화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나는 이런 상상을 계속 해본다. 손톱을 뾰쪽하게 잘 다듬은 손에 엷은 자주색 손수건을 들고, 늘씬한 발에는 부드러운 구두를 신은 졸 대령이, 돌아가고 싶어 안달난 수도로 돌아가서 연극을 보다가 막간에 극장 통로에서 친구들에게 뭔가 속삭이는 모습을 말이다. (P13-14)
나는 이런 일에 얽혀들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다. 나는 교구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여기에 있는 유일한 관리인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 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야만인들 사이에 불안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들이 수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전한 길을 여행하던 장사꾼들이 야만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약탈을 당했다고 했다. 가축의 도난이 빈번해지고, 그 수법도 더 대담해졌다고 했다. 통계청 관리들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얕은 무덤에 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순시중인 지방 치안판사에게 총격이 가해졌다고도 했다. 국경순찰대와의 충돌도 있었다고 했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테니 제국이 사전에 예방책을 강구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이 같은 불안한 징후를 전혀 보지 못했다. 나는 경험을 통해, 한 세대에 한 번씩은 꼭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경에 사는 여자치고 침대 밑에서 야만인의 시커먼 손이 불쑥 나와 발목을 잡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남자 치고 야만인들이 집에 쳐들어와 술에 취해 흥청거리며 법석을 떨고, 접시를 깨뜨리며 커튼에 불을 지르고 자기 딸들을 강간하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수도에서 염려하는 점은 북쪽과 서쪽의 야만인 부족들이 마침내 연합전선을 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관리들이 변방을 시찰하도록 파견되고, 일부 수비대들은 강화되었다. 원하는 상인들에게는 무장 호위대를 파견해줬다. 보안청의 제3국 경찰들, 즉 국가의 수호자들이며 폭동 전문가들이고 진실의 신봉자들이며 취조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이곳저곳에 신경을 약간 쓰기만 해도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굴러가, 밤이 되면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었던 편한 시절은 끝나가는 듯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터무니없는 두 죄수를 대령에게 넘기며 ‘여기 있소, 대령님. 당신이 전문가니까 알아서 처리하시오’라는 식으로 처신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며칠 강 위쪽으로 사냥이나 다녀와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어보지도 않거나 읽더라도 무관심하게 대충 훑어보고 수사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돌 밑의 악령처럼 그 저변에 있는 게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그의 보고서에 직인을 찍었더라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어쩌면 나는 지금쯤 도발이 끝나고 변경에서의 불안감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냥이나 매사냥을 하고 정욕이 잔잔하게 요동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말을 타고 떠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연장을 보관하는 곡물창고 옆 오두막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막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불을 들고 들어가서 직접 보았다. (P18-20)
그녀는 머리를 젓는다. 망각의 저편 가장자리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던 내 손가락에 이쪽저쪽으로 난 매맞은 자국이 느껴진다. 나는 중얼거린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쁜 건 없는 법이다.” 그녀가 내 말을 들었다는 낌새도 없다. 나는 소파 위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그녀를 내 곁으로 끌어당기고 하품을 한다. “나한테 얘기해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일을 수수께끼로 만들지 마라,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팔로 감싸고, 입술을 그녀 귀의 우묵한 곳에 대고 말을 하려 몸부림을 친다. 그때 어둠이 내려온다. (P56)
올해에는 야만인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겨울이 되면 유목민들이 집단으로 찾아와 담벼락 바깥에 천막을 치고 양모, 동물 가죽, 펠트, 가죽제품 등을 면직물, 차, 설탕, 콩, 밀가루 등과 맞바꾸곤 했다. 우리는 그들의 가죽제품, 특히 그들이 만든 질긴 구두를 귀하게 여겼다. 나는 과거에는 그 거래를 장려했지만 돈으로 값을 치르는 일은 금지시켰다. 또한 그들이 술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독한 술의 노예가 된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도시 주변에 기생충처럼 정착하는 걸 나는 무엇보다도 원치 않는다. 예전에 이들이 상점 주인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신들의 물건을 시시한 장신구와 교환하거나 술에 취해 도랑에 드러눕고, 결국 그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더럽고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올해에는 변경의 모든 지역에 장막이 쳐져 있다. 우리는 성벽에서 황무지를 노려본다. 우리보다 더 날카로운 눈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교역은 끝났다.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 따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는 지침이 수도에서 내려온 이래로, 우리는 기습과 경계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다. 칼날을 세우고 경계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P66-67)
이 여자한테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게 그녀를 고문했던 자들이 비밀을, 그들이 그게 무어라 생각했든 간에, 추궁하며 느꼈던 걸까? 처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메마른 동정심을 느낀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얼마나 자연스러운 착각인가!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다. 하지만 굳이 침대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연인처럼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서 잠든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팰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P74)
왜 내 몸의 한 부분이 불합리한 욕구와 잘못된 기대감과 더불어, 욕망의 통로로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내가 왜 너를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네가 다리 없이 태어나서 그러냐? 네가 나 대신 개나 고양이한테 뿌리를 박고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P78)
“사령부 주변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말한다. “봄에 야만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변경에서 산악지역으로 몰아붙일 거라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 때문에 나의 회상은 끊기고 만다. 나는 말다툼을 하며 이 자리를 끝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응수한다. “그건 분명히 소문일 뿐이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요.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유목민들이오. 그들은 매년 저지대와 고지대를 오가며 살고,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죠. 그들은 결코 산악지방에만 갇혀 있지는 않을 거요.”
그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오늘밤 처음으로 나는 장벽이 내려오는 걸 느낀다. 군인과 일반인 사이의 장벽.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로 그게 전쟁입니다. 우리가 강요하지 않으면 선택을 내리지 않을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죠.” 그는 사관학교를 나온 젊은이답게 오만하고 솔직한 눈초리로 나를 살핀다. 나는 그가 지금쯤 멀리 퍼졌을 나에 관한 소문을 들었으리라 확신한다. 내가 제3국 소속의 경찰에게 비협조적이었다는 얘기 말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나를, 수년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맞춰 살다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 관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P84-85)
그들은 자기들 땅에 정착지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고 해요.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땅을 되찾고 싶어하고요. 전에 하던 대로, 자신들의 가축을 몰고 초지에서 초지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싶은 거요.“ 지금이라도 말을 끝내면 너무 늦은 건 아닐 게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 커지고, 나는 유감스럽게도 화까지 냈다. ”제국의 안보가 걸려 있기 때문에, 아니면 그렇게들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근에 그들을 이유 없이 공격하고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그 며칠 동안에 일어난 피해를 복구하려면 몇 년은 걸릴 거요. 하여간 그 얘기는 그만두고, 내가 행정관으로서 실망스럽게 느끼는 바를 얘기해주겠소. 국경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평화로운 시기에도 실망스러운 일은 있었소. 유목민들은 일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시장에 있는 가게에 들러보면, 어느 쪽이 어느 쪽한테 저울 눈금을 속이고 고함을 치고 협박을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소. 군인들한테 희롱을 당할까 두려워 천막에 여자들을 두고 와야하는 그들의 처지도 분명히 알 수 있소. 취해서 도랑에 드러누워 있는 게 누구이며, 거기에 누워 있는 자에게 누가 발길질을 하는지도 분명히 알 수 있소. 내가 지난 이십 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열한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야만인들을 상대로 보여준 모욕과 경멸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게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면, 그 경멸을 어떻게 근절할 수 있겠소? 내가 때때로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야만인들이 들고 일어나 우리에게 본때를 보여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쳤으면 좋겠소. 우리는 이곳이 우리 소유이고, 우리 제국의 일부이며, 우리의 전진기지이자 정착지이고 중앙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이 사람들, 즉 야만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는 백년도 넘게 이곳에 있었소. 우리는 사막을 농토로 개간하고 관개시설을 만들고 들에 곡물을 심고, 탄탄한 집을 짓고 도시 주변에 벽을 쌓았소.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잠시 머무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들 중에는 이 오아시스가 전에 어땠는지 부모가 얘기해줬던 걸 기억하는 노인네들도 있다오. 이곳은 겨울에도 방목을 할 수 있는 목초지가 많은, 호숫가의 알맞게 그늘진 곳이었다는 거요. 지금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있소. 어쩌면 지금도 이곳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오. 마치 이곳의 땅이 한 삽도 파헤쳐지지 않고 벽돌 하나도 다른 벽돌 위에 쌓이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듯 말이오. 그들은 우리가 조만간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우리의 고향으로 가버리고, 우리가 세운 건물들이 쥐나 도마뱀의 서식처가 되고, 자신이 기르는 짐승들이 우리가 일궈놓은 비옥한 들에서 풀을 뜯어 먹게 되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소. 지금 웃는 거요? 얘기 하나 해주리다. 호수 물이 해마다 조금씩 염분이 많아지고 있소. 이유는 간단하오. 구대여 얘기하진 않으리다. 야만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소. 바로 이 순간,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요. ‘조금만 참자. 조만간 곡식이 염분 때문에 말라 죽기 시작할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떠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소. 자신들이 우리보다 더 오래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P86-87)
나는 생각한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내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 없이 말을 만들고 다시 만든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건지 모른다.’ (P108)
나는 소금 지대를 터벅터벅 걸으며, 내가 그처럼 먼 곳에서 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P125~126)
나는 내가 우쭐한 이유를 안다. 제국의 수호자들과의 연대는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관계가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누군들 웃지 않으랴?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 구원을 받는 게 그렇게 쉬워서도 안 되는 법이다. 내가 반대편이 된 일의 이면에 무슨 원칙이라도 있는가? 내 책상을 강탈하고 내 서류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새로운 유형의 야만인들 중 하나를 보고 감정이 격해져 그랬던 건 아닐까?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지난해, 전보다 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다. 나는 정말로 무제한적인 자유를 즐겼던 걸까? 예를 들자면, 나에게는 그 여자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내 변덕에 맞춰 그녀를 아내, 첩, 딸,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존재,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감정을 제외하면 그녀에 대한 의무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로부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금을 당함으로써 생기는 자유를 환영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반대편이 된 일에는 영웅적인 면은 전혀 없다. 한 순간도 그 점을 잊지 말자. (P130-131)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나를 심문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을 얘기하고, 야만인들을 찾아갔을 때 했던 말을 단어 하나까지 자세히 얘기한다 해도, 그들이 나를 믿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해도, 그들은 끔찍한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극단적인 수다를 동원해야만 최종적인 진실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신조다. 나는 고통과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도피 계획도 없다. 갈대밭에 숨어살게 되면, 일주일도 안 돼 굶어죽거나 연기에 쫓겨 나오게 될 것이다. 진실을 얘기하자면 나는 편안함을 찾고 있을 뿐이고, 부드러운 침대와 따스한 품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있을 뿐이다. (P159)
나는 감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도 아무 효과도 없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위해서, 나 혼자를 위해서라도, 서늘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열쇠를 구부려버리고, 피에 굶주린 애국심으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에 귀를 막고 입을 닫고 다시는 말문을 열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 제화공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지 않도록 콧노래를 부르며 구두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주부들은 부엌에서 콩깍지를 까며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그들을 모른다는 게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P171-172)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P172)
내가 말한다. “당신이 오기 전에는 국경 문제 같은 건 전혀 없었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당신은 실상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오. 당신은 과거 속에 살고 있소. 당신은 우리가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유목민 집단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조직이 잘 돼 있는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요. 만약 당신이 원정대와 함께 작전을 나갔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거요.”
“당신이 데리고 온 한심한 저 포로들 말이로군. 그들이 내가 두려워 해야 하는 적이란 말인가? 그게 당신이 하려는 말인가? 대령, 적은 바로 당신이야!” 나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친다. “당신이 적이란 말이야! 당신이 전쟁을 했고, 당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소. 그것도 지금 시작된 게 아니고 당신이 더럽고 야만스러운 짓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일 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거요!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줄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사는 없을 거요. 이건 너무 사소한 일이거든.” (P188)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육체 속에서, 육체로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쥐어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토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로서 말이다. (P190)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거요. (P207)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구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부드러운 호숫바닥 진흙을 밟으며 물살을 가르고 있는 나도, 충성스러운 졸 대령보다 그러한 생각에 덜 감염된 건 아니다. 끝없는 사막에서 적을 쫓아다니고, 칼집에서 칼을 꺼내 야만인들을 연거푸 베어 쓰러뜨리다가, 동료들이 박수를 치고 공중에 축포를 쏘아대는 가운데 ‘여름별궁’으로 통하는 청동 문을 기어올라, 영원한 지배를 상징하는 뒷발로 선 호랑이가 받치고 있는 지구의를 쓰러뜨릴 운명을 타고난 야만인(당사자가 아니라면 그의 아들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의 손자)을 마침내 찾아내 죽이는 상상을 하는 졸 대령보다 내 감염의 정도가 덜한 건 아니다. (P219-220)
나는 편안한 시절에 지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 통치술의 양면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이름 없는 이 지역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P223)
그는 어머니와 누이들이 보고 싶어서 탈영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훈계를 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모든 법을 따라야 한다. 법은 우리 중 누구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너를 이곳으로 보낸 치안판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도 법에 복종해야 한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그의 뒤쪽에는 건장한 경비병 두 명이 있었고, 그의 두 손은 뒤로 묶여 있었다. “네가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 때문에 처벌받는다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이해한다. 너는 네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나도 이해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남자, 여자, 아이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아니 어쩌면 물레바퀴를 돌리는 가엾은 늙은 말조차도 매순간 무엇이 옳은 지 알고 있다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해 원초적인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불쌍한 죄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건 차선의 세계다.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이렇게 훈계를 한 후, 그에게 벌을 내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처벌을 받아들였고, 경비병이 그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그때, 마음이 편치 않고 수치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법정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될 때까지, 식욕도 없이 저녁 내내 어둠 속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해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치안판사 직을 내려놓고, 공직 생활을 은퇴하고, 작은 과수원이나 하나 사서 가꾸며 살아볼까 하고 생각해본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직위에 임명되어 수치스러운 공무를 감당하게 될 테고, 결국 아무것도 변할 게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될 때까지 내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P228-229)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며, 그가 내 입술에서 그걸 읽는 모습을 지켜본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나는 얘기한다. 나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거듭 끄덕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내 가슴과 그의 가슴을 가리키며 그 말을 반복한다. 그는 내 입술을 바라본다. 그의 얇은 입술이 그 말을 따라하며 움직인다. 아니, 어쩌면 나를 조롱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또 다른 돌이 천둥처럼 큰소리를 내며 마차에 떨어진다. 이번에는 더 무거운 돌이다. 어쩌면 벽돌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깜짝 놀란다. 줄에 매인 말들이 홱 움직인다. (P241)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