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2024년
2024년 8월 16일부터 2024년 10월 4일까지 MBC 단막극 〈나는 돈가스가 싫어요〉의 후속으로 방영된 MBC 금토 드라마.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 『너무 친한 친구들』, 『깊은 상처』에 이은 타우누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출간 사흘 만에 독일의 대표 시사지 「슈피겔」이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했고 독일 아마존에서도 무려 32주 동안이나 판매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이후 『바람을 뿌리는 자』, 『사악한 늑대』, 『여우가 잠든 숲』, 『잔혹한 어머니의 날』, 『영원한 우정으로』.
공간을 둘로 나눈 병풍을 치우자 좁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녀가 보인다. 긴 머리카락을 까만 부채처럼 머리 위로 넓게 펼치고, 두 손을 배 위에 얹은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침대 옆에는 신발 한 켤레가, 머리맡 작은 탁자 위에는 시든 백합이 꽂힌 유리 화병이 놓여 있다.
“백설공주, 안녕?”
인사를 건네는 그의 이마에 어느새 땀방울이 맺혔다. 방 안 공기가 참기 힘들 정도로 후덥지근하지만 그녀는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도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그는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봤다. 그가 그녀를 위해 직접 걸어놓은 것이다. 그 옆에 다른 그림을 더 걸고 싶지만 아직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녀가 기분 좋을 때를 골라 말을 꺼낼 생각이다.
그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자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순간 그녀가 움직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그녀는 움직이는 일이 없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누렇고 뻣뻣해진 피부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있다. 더 이상 장밋빛 도는 부드러운 피부는 아니지만 입술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름답다. 그를 향해 재잘거리고 미소짓던 그 입술 그대로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들었다.
“이제 가봐야 해.”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할일이 많거든.”
그는 화병에서 시든 백합을 빼 들고 나서 그 옆에 놓인 병에 콜라가 가득 있는지 확인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알았지?”
그는 이따금 그녀의 미소가 못 견디게 그립다. 그럴 때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만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P7-9)
토비아스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삶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지난 10년이 부모님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면회를 왔을 때도 부모님은 마치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그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분노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리고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며칠만 부모님 곁에 있다가 알텐하인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던 그의 계획은 소리 없이 무너졌다.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집, 이 레스토랑, 이 마을, 아무 죄도 없는 부모님을 그토록 괴롭힌 이 빌어먹을 마을에 남을 것이다. (P22)
토비아스가 5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듯 돈을 받은 뒤 인사 한마디 없이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그녀의 표정은 남태평양도 얼릴 것처럼 살벌했지만 토비아스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종류의 힘겨루기는 교도소에서도 충분히 겪었고, 이긴 적도 많았다.
“난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겁니다.”
토비아스가 사람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당황해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들이 좋든 싫든 그건 내 알 바 아닙니다.” (P52)
포더타우누스의 작은 마을 알텐하인에 소재한 한 레스토랑의 사장 아들인 토비아스 S.에 대한 소송에서 살해된 두 여학생의 부모는 공동원고로서 법정에 섰다. 그러나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토비아스 S.는 시체를 어디에 버렸냐는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안드레아 W.와 베아테 S.의 간곡한 부탁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략인가, 방자함인가? 자백할 경우 스테파니 S.에 대한 살인죄를 치사죄로 바꿔주겠다는 판사의 제안에도 청년은 침묵할 뿐이었다. 어떤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에 법정 경험이 많은 방청객들도 혀를 내둘렀다. 검사 측은 증거가 충분하고 범행 과정을 빈틈없이 추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죄를 확신했다. 토비아스 S.는 처음부터 여러 사람들은 모함했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법정은 그런 궤변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는 형이 언도될 때에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으며 재판에 대한 상고는 각하됐다. (P56-57)
즉 이 사건의 발단은 세 남녀의 삼각관계였다. 토비아스는 스테파니 때문에 로라와 헤어졌고 스테파니는 다시 토비아스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 일로 토비아스는 피로 얼룩진 살인사건을 저질렀고 이때 엄청난 양의 술이 촉매로 작용했다.
그는 재판 마지막 날까지도 두 여학생의 실종에 관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법정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증인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토비아스에게 불리한 증언뿐이었다.
바로 이 점이 아멜리의 호기심을 키웠다. 그녀는 공평하지 않은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녀 자신만 해도 불공평하게 의심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토비아스의 무죄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아멜리는 이 사건을 좀 더 조사해보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선 토비아스 자토리우스와 말이라도 한번 섞어봐야 할 일이었다. (P58)
여자는 누굴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려 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온몸의 뼈가 부러져 구급차로 실려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은 그렇게 순식간에 바뀐다. 잘못 디딘 한 걸음, 잘못된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뭘 원한 걸까? 단순한 강도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높다. 보텐슈타인은 여자가 손가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방을 안 들고 다니는 여자는 없어. 게다가 장까지 봤잖아. 장을 봤다면 돈을 냈을 거 아냐. 돈을 냈다면 지갑이 있었을 거라고.”
“오후 5시 반에 북적거리는 플랫폼에서 강도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피아가 철로 좌우를 번갈아가며 살폈다. (P64)
“아, 그럼 토비아스 자토리우스 씨인가요?”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더니 곧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예, 그 살인자 맞습니다.”
토비아스는 위험한 매력을 풍겼다. 왼쪽 귀밑에서 턱까지 길게 뻗은 허연 흉터는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흠을 낸다기보다는 흥미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의 시선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피아는 그게 뭘까 하고 생각했다.
(P78)
“알아요. 티스한테 다 들었어요. 거기 원래는 백설공주가 살았다면서요?”
그 말을 들은 토비아스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거짓말 아니에요.” 아멜리는 거세게 부인했다.
“거짓말이잖아. 티스는 말 안 해. 아무하고도,”
“나하고는 해요. 가끔이지만. 내 친구거든요.”
토비아스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담뱃불에 그의 얼굴이 환히 비쳤다. 아멜리는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친구 아니에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그냥 내 가장 친한 친구예요. 그리고 유일한 친구기도 하고요.” (P89)
“이렇게 성공하다니 굉장해.” 토비아스가 말했다. “친구로서 정말 자랑스러워.”
“고마워.” 나디야가 웃으며 한쪽 다리를 접어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그래, 못생긴 나탈리가 이렇게 유명한 영화배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옛날에도 예뻤어.” 나디야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의아했다.
“어쨌든 넌 나한테 관심 없었잖아.”
둘 다 조심스럽게 피해오던 주제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넌 항상 내 가장 친한 친구였어. 내가 맨날 너랑 어울려 다닌다고 질투하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하지만 나한테 키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장난기를 가득 담아 말했지만, 그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좋아하는 남자에게 애인이 아닌 그저 친한 친구로 남고 싶은 여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토비아스는 왜 한 번도 나디야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지 생각해보았다. 늘 옆에 있는 여동생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둘은 사실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같은 유치원에 다녔고 같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토비아스에게 그녀는 공기처럼 언제나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녀가 달라졌다.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신의와 의리로 똘똘 뭉친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선머슴 같던 옆집 여자애가 아니라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다. 그가 지금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면, 나디야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성적 호감을 표시하는 중이다. 그녀는 진정 그에게 우정 이상을 원하는 것일까?
“왜 결혼 안 했어?” 토비아스가 불쑥 물었다. 목이 잠겼는지 쉰 소리가 나왔다. (P103~104)
“전화해줘서 고맙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에슈본에서 유골이 발견됐다. 토비아스 자토리우스가 알텐하인에 돌아와 있다. 그의 어머니가 괴한에게 습격당했다. 호프하임 강력계의 열혈 형사가 옛날 문건을 뒤지고 있다. 제길! 비싼 위스키의 맛이 쓰기만 했다. 술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그는 급히 2층 침실로 올라갔다.
두려워할 것 없어. 우연일 뿐이야. 속으로 계속 되뇌었으나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지친 몸을 침대에 뉘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이러헥 단 한 번의 작은 실수가 이런 엄청난 결과를 몰고 온단 말인가.
눈을 감으니 피로가 파도처럼 온몸을 덮쳤다. 생각은 점점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꿈과 기억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흑단처럼 검어라…. (P121)
“난 누가 로라랑 스테파니를 죽였는지 몰라. 하지만 절대 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마치……… 머리에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아. 그때 법정에서 심리학자가 말했어. 충격이 심하면 잠시 기억상실이 올 수도 있다고. 하지만 뭔가 흐릿하게라도 기억이 나야할 것 아냐. 로라를 트렁크에 싣고 어딘가로 갔다면 풍경이든 뭐든 조금이라도 기억이 나야 할 것 아니냐고. 정말 모르겠어. 내가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스테파니가 더 이상......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순간이야. 그러다 어느 순간 펠릭스랑 외르크가 문가에 서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보드카 때문에 속이 너무 안 좋았던 기억밖에 없어. 그리고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서는 내가 로라랑 스테파니를 죽였다는 거야!”
나디야는 녹색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그의 목소리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다시 찾아온 고통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더 이상 실연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나디야와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게 날 끊임없이 괴롭혀. 정말 내가 죽인 걸까?”
(P164)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두려운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러다 상체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어 아멜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멜리는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티스는 그녀의 손을 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신체 접촉을 견디지 못했다. 아멜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 백설공주를 지켜주지 못했어.” 그의 쉰 목소리는 긴장한 탓에 불안정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지킬 거야.”
그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뭔가 위협적인 존재라도 있는 것처럼 자꾸 숲길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멜리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순간 머릿속의 퍼즐 조각들이 단번에 하나로 맞아떨어졌다.
“네가 봤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본 거지?” 아멜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티스가 몸을 홱 돌려 걸으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고서 진창이 된 도랑으로, 무성한 잡초밭으로 마구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속도를 늦췄지만 골초인 데다 운동량이 적은 아멜리에게는 그마저도 너무 힘들었다. 티스는 아멜 리가 돌에 걸려 넘어져도 절대 손을 놓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잡아끌기만 했다. 그들은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발밑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졌고 키 큰 전나무 위에서 까치가 울었다. (P219)
“가면 경찰이 체포할 거야!” 어느 정도 진정된 나디야가 손등으로 뺨의 눈물을 닦았다. “빤하잖아. 일단 잡히면 더 이상 희망은 없어.”
그녀의 말이 옳다. 그도 안다. 끔찍한 과거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도 착유실 세면대 밑에서 발견된 로라의 목걸이가 증거로 사용됐었다. 토비아스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찰에게 있어 자신보다 이상적인 범인은 없다. 그들은 아멜리의 휴대전화가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됐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나타나자마자 목을 죄어 올 게 틀림없다. 문득 오래전에 느꼈던 고통이 되살아났다. 오래된 상처가 다시 곪아터지고 있었다. 상처의 고름 같은 회의가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뇌의 고랑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그들은 그가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믿을 때까지 끊임없이 그 말을 주입시켰다. 그는 나디야를 쳐다보았다.
“나 안 갈 거야.”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한 일이면 어쩌지?” (P279)
“페라리예요!” 경찰 하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것도 599 GTB 피오라노! 전 자동차 전시회에서 딱 한 번 봤거든요!”
보덴슈타인이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진짜였다. 주차장 맨 끝에 새빨간 페라리가 전조등 불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열다섯 명쯤 되는 경찰들이 경외심 가득한 얼굴로 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들 고급 스포츠카의 배기량, 마력, 타이어, 휠, 토크, 가속도에만 열을 올릴 뿐 그 안의 시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사람 팔뚝만 한 배기통에서 창문까지 호스가 연결되어 있고 창문은 절연테이프로 꼼꼼하게 막은 상태였다.
“이거 25만 유로는 줘야 사요.” 젊은 경찰 하나가 말했다. “엄청나죠?”
“하룻밤 새에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졌겠군.” 보덴슈타인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요?”
“운전석에 시체 누워 있는 거 안 보여?” 보덴슈타인은 새빨간 스포츠카 앞에서 이성을 잃는 부류의 남자가 아니다. “번호판 조회해본 사람 없어?”
“있습니다.” 뒤에서 한 여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 또한 주변의 남자 동료들이 난리 치는 걸 이해 못하는 것 같았다. “프랑크푸르트의 한 은행 소유로 돼 있습니다.”
“음.” 보덴슈타인은 사진을 다 찍은 크뢰거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운전석 쪽 문을 여는 모습을 지켜봤다.
“경제 위기의 첫 번째 희생양이로군.” 누군가가 비아냥거렸다. 그러다 곧 페라리 피오라노의 할부금을 내려면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를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순찰차 한 대와 민간 차량 두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P346~347)
“아멜리!”
보덴슈타인이 허공에 대고 외쳤다. 누군가 뒤에서 손전등을 비췄다. 놀랍게도 무척 넓은 직사각형 공간이 드러났다.
“옛날 벙커네요.” 크뢰거가 그렇게 말하며 벽의 스위치를 딸칵하고 누르자 형광등이 몇 번 깜박이다가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켜졌다. “전기 배선이 따로 돼 있어요. 그러면 밖에서 전기가 끊겨도 안에서는 사용할 수 있죠.”
지하실에는 가구가 별로 없었다. 소파와 스테레오 장치가 달린 책장이 전부였다. 안쪽은 고풍스러운 병풍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멜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발 늦은 걸까?
“휴우.” 크뢰거가 중얼거렸다. “무지 덥네.”
보덴슈타인이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의 이마에서도 땀이 났다. “아멜리!”
병풍을 옆으로 치우자 좁은 철제 침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숨을 삼켰다. 소녀의 시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는 하얀 베개 위에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있고 손은 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메마른 미라의 입술에 칠해진 빨간 립스틱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침대 아래에는 신발 한 켤레가, 그 옆 협탁 위에는 시든 꽃이 꽂힌 화병과 콜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보덴슈타인은 침대 위의 소녀가 아멜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백설공주!” 보덴슈타인 옆에 서 있던 피아가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P384~385)
“유치장에 있는 거 아냐?”
“전 못 봤는데요.”
“저도 못 봤습니다.”
카트린과 오스터만이 동시에 말했다.
보덴슈타인이 피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늘 낮에 자토리우스 농장에서 현장 출동한 사람들한테 지시해서 경찰서로 데려가겠다고 했잖아요.”
“아니, 난 라우터바흐한테 가라고 했는데.... 자네가 다른 경찰을 부른 거 아니었어?”
“전 반장님이 이미 부른 줄 알았어요.”
“오스터만, 토비아스 자토리우스한테 전화해서 지금 바로 이리로 오라고 해.”
보덴슈타인이 사진을 집어 들고 회의실을 나섰다. 피아가 혼자 눈을 흘기며 그 뒤를 따랐다.
“들어가기 전에 사진 좀 봐도 돼요?”
피아가 부탁하자, 보덴슈타인은 걷는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은 채 말없이 사진을 건넸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수사 상황이 급변할 때면 흔히 생기곤 하는 오해였다. 심문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보덴슈타인이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그가 짜증을 냈다.
피아는 침묵했다. 11년 동안 스테파니 슈네베르거의 시체를 지켜온 티스 테를린덴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아버지가 시켰나? 라르스 테를린덴은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그런 편지를 쓰고 자살했을까? 화살은 왜 불탄 거지? 누가 백설공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티스의 그림을 노렸나? 만약 그렇다면 지난번 바바라 프뢸리히에게 가짜 경찰을 보낸 사람과 동일 인물일 것이다. 아멜리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티스는 아멜리에게 백설공주의 미라를 보여준 뒤 고이 돌려보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멜리가 일기를 쓸 수도 없었을 테니까. 아멜리는 왜 사라진 걸까? 혹시 아멜리의 실종이 토비아스 사건과 상관없는 건 아닐까?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들이 뇌혈관 속을 흘러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직 이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줄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P386-387)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아멜리의 시선이 문 앞에 가닿았다. 순간 그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문틈으로 정말 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흥분한 아멜리는 티스를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네 발로 기어서 문가로 갔다.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개처럼 물을 핥아 먹으며 기뻐했다.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절망에 찬 그녀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그녀가 목말라 죽지 않도록 신이 지켜주신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물이 문틈으로 흘러들어 왔다. 문에서 이어지는 세 개의 계단 위로 작은 폭포처럼 자꾸만 흘러내렸다. 아멜리는 웃음을 거두고 일어나 앉았다.
“이제 물은 그만 주셔도 돼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신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물은 점점 불어나 시멘트 바닥에 시내를 이루었다. 아멜리는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그토록 원했던 물이지만 이렇게 많이는 아니다! 잠에서 깬 티스가 양파로 무릎을 감싸고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던 아멜리는 다급한 마음에 책장을 흔들어봤다. 녹이 슬긴 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들을 이곳에 가둔 누군가가 물을 틀어놓은 게 분명했다. 이 방은 지하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할 것이다. 바닥에는 배수구도 없고 가느다란 빛줄기가 흘러들어 오는 곳은 천장 바로 밑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물이 들어온다면 방은 금세 범람할 게 뻔했다. 들쥐처럼 물에 빠져 죽으라는 소리다!
아멜리는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젠장! 미치지 않고 잘 버텼는데, 굶어 죽지도 않고 목말라 죽지도 않고 지금까지 잘 버텨 왔는데 이제 와서 물에 빠져 죽으라니! 그녀가 티스의 팔을 거칠게 흔들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일어나, 티스! 어서 날 도와달라고! 매트리스를 저 책장 위로 올려야 돼!”
뜻밖에도 그는 상체를 앞뒤로 흔들던 동작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힘을 합쳐 무거운 매트리스를 책장 위로 올렸다. 물이 책장 높이까지 차지 않는다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할 가능성도 더 커질 것이다. (P429~430)
아멜리는 철거촌과 부랑자 숙소, 베를린의 뒷골목에서 세상의 모든 악을 봤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 평화롭게만 보이던 알텐하인에, 그렇게 지루하고 심심하게만 느껴지던 촌구석에 이렇듯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들이 선량한 시민의 가면을 쓰고 살고 있었다니!
아멜리는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평생 동안 절대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티스의 부모는 상냥한 이웃집 의사 선생님이 자기 자식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눈치를 못 챘단 말인가. 어떻게 죄 없는 청년이 10년씩이나 감옥에서 썩고 진범들은 거리를 활보하는 데도 마을 전체가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어둠 속에서 티스는 그동안 알텐하인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하나하나 들려줬다. 그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라우터바흐 원장이 티스를 죽이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원장이 바라는 대로 될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혹 찾아낸다 해도 제때 찾지는 못하리라. (P488-489)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지. 보텐슈타인 계장, 수고!”
그는 그녀가 복도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그는 예상치 못한 짜릿한 행복감에 젖었다. 맞바람을 피움으로써, 그것도 코지마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의 상관과 잠자리를 같이함으로써 드디어복수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한한 자유를 느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렇게 자유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몇 주 동안 깊은 상처와 슬픔을 끌어안고 자기 연민에 시달렸던 그는 어젯밤 자신의 미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정에 매인 유부남은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가능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지마에게매여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결혼 생활의 실패가 인생의 끝을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쉰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니....... 그는 그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P496)
토비아스는 나중에 자동차보험증서를 찾으려고 아버지 사무실을 뒤지다가 금고에서 유언장을 발견했다. 그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일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왜 아버지의 금고에 빌헬름 테를린덴의 유언장이 들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생애 첫 번째 차를 등록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 후로 세월과 함께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일이 갑자기 생생하게 떠오른 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이 불러온 충격이 그의 머릿속 비밀의 문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가요?”
아멜리의 목소리에 토비아스는 우중충한 옛 기억에서 깨어났다. 그는 아멜리의 손을 잡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녀의 검은 눈에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피어싱을 빼고 머리도 자연스럽게 놔두니 참으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스테파니보다 백배는 더 아름다웠다.
아멜리는 그가 아직 해치워야 할 일이 있다고 하자 즉각 그를 따라나섰고, 둘은 함께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멜리는 괜히 겉으로만 무례하고 까칠하게 굴었을 뿐이었다. 크나큰 실망과 배반을 겪은 토비아스는 그녀의 곧고 솔직한 성품을 대할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집에 잠깐 들렀다가 테를린덴한테 가서 할 말이 있어. 넌 그동안 차에 있는 게 좋겠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
“내가 혼자 가게 놔둘 줄 알아요? 우리 둘이 같이 가면 함부로 어쩌지 못할 거예요.”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토비아스는 웃음이 나왔다. 용감하기까지 한 아가씨다. 그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불꽃이 일었다. 안개와 어둠 속을 비추는 작은 촛불과도 같은 희망이었다. 이 모든 게 지나가면 그에게도 미래가 생길지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P522~523)
그때 피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피아는 대기 근무 중이었다.
“‘그다음’이 궁금한데?”
피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크리스토프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토비아스 자토리우스라는 사람이 7분 전에 신고를 했습니다.” 본부 직원이 알려왔다. “알텐하인에 있는 테를린덴 회사에 있다고 합니다. 라우터바흐라는 여자도 함께 있답니다. 순찰차는 이미 한 대 보냈는데.....”
“빌어먹을!” 피아가 상대방의 말을 끊고 외쳤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춤을 춰댔다. 왜 라우터바흐 원장이 거기 있는 거지? 토비아스는 왜 갔고? 많은 일을 겪은 토비아스는 움직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지시를 내렸다. “순찰 나간 차에 연락해요. 경광등 절대 켜지 말고 사이렌도 울리지 말라고 해요. 그리고 반장님이랑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요!”
“무슨 일이야?”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피아는 보덴슈타인의 번호를 누르며 짧게 설명했다. 다행히 신호가 가자마자 보덴슈타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크리스토프는 레스토랑 주인을 불러 나중에 와서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주인과 잘 아는 사이였다.
“내가 태워다 줄게. 외투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마구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왜 토비아스는 범죄 신고 회선을 사용했을까? 무슨 일일까?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P532~533)
“사람은 체스 말이 아니에요.” 피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과연 그럴까요?” 테를린덴이 반박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내리기 힘든 결정을 대신 해주고 그들의 보잘것없는 인생을대신 책임져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주 좋아합니다. 전체 그림을보고 필요할 때 조치를 취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그의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목소리는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틀렸어요!” 전모를 파악한 피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아니라 다니엘라 라우터바흐죠. 당신 또한 체스판 위에서 그녀의뜻에 따라 움직이는 졸이었을 뿐이에요.”
테를린덴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우리 반장님이 다니엘라 라우터바흐를 잡아 오기만 비세요. 안 그러면 혼자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신문 1면을 차지하는 것도, 여생을 감옥에서 썩는 것도 모두 혼자 하게 될 거예요.” (P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