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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윌리스의 <벤허: 그리스도 이야기>

영화 <벤허> 2016년

by 노용헌

영화 <벤허>(1959), <벤허>(1962), <벤허>(1925), <벤허>(2003), <벤허: 레저렉션>(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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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에 출판된 <벤허>는 미국 남북전쟁의 루 월리스 장군이 쓴 예수의 이야기를 다룬 흥미진진한 책이다. 예루살렘의 한 집안의 장자인 벤허는 어린 시절 친구 메살라에 의해 억울하게 노예가 되었다가 구제되어, 명예를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운명의 주인공이다. 19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책으로 300만부 이상 팔렸다. 해리엇 비쳐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1852)도 능가한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은 성서를 다룬 소설과 영화에 많은 영감을 주었고, 1936년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출현 이전까지 계속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있던 소설이다. 1959년 MGM 사의 영화로 수천만 명이 관람했고 윌리엄 와일러(1902-81) 감독의 이 영화는 이듬해 11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벤허’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바로 영화에서 주인공 유다 벤허와 그의 소꿉친구이자 원수인 메살라가 목숨을 걸고 대결하는 전차 경주 장면이다. 하지만 루 월리스가 쓴 소설에선 전차 경주 장면이 단 11쪽에 그친다. 영화 《벤허》의 가장 큰 상징이 된 이 장면이 전체 분량 550쪽에 달하는 원서에선 미미한 부분만을 차지하는 셈이다. 작가 캐럴 월리스는 이 점에 주목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전차 경주 장면을 소설에서 더욱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게 살려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 결과 11쪽이던 전차 경주 장면은 32쪽 분량의 한 챕터로 재탄생했으며, 소설을 읽으면서도 영화 못지않은 긴장감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예로 전락한 벤허가 노를 젓다 또 한 번 운명이 바뀌는 해전 장면, 루 월리스의 《벤허》와는 다른 장면으로 표현된 새로운 에필로그, 좀 더 진취적으로 벤허를 대하는 여성 인물 등, 캐럴 월리스의 《벤허》에는 원작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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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러분 중에는 <벤허>와 함께 성장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부활절마다 한자리에 모여 영화 <벤허>를 시청했던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았더라도 각종 TV 시상식에서 그 유명한 전차 경주 장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튜브만 뒤져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니까. 지금 머릿속으로 거대한 바윗돌 같은 서체로 쓰인 ‘벤허’라는 1959년판 영화 제목을 선명히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벤허>와 함께 자랐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내 고조부님께서 원작을 쓰셨기 때문이다. 1880년에 출간된 <벤허>는 이후 50년이 넘도록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꼽혔다. 그 덕분에 우리 집 곳곳에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다양한 판본의 <벤허>가 굴러다녔다.

(중략)

원작에서는 그 유명한 전차 경주가 분명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분량이 11쪽에 지나지 않으며, 책을 3분의 2쯤 읽은 후에야 등장한다. <벤허>에는 그것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유대 벤허의 진심과 영혼이 위기에 처하는 내용이.

나는 작가로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은 고조부의 책에 잠재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나치게 장황한 부분을 정리하고, 재배열하고, 여성 캐릭터를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속도감을 살리고, 현대의 언어로 다듬는다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해서 1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흥분과 깨달음을 준 이 작품이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캐럴 월리스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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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었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게중심을 옮기자, 낙타는 그것을 멈추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한숨을 내쉰 것은 낙타였을까?

아니다. 낙타는 흠잡을 데 없는 인내심으로 험한 언덕 꼭대기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장난을 걸자, 하니스(말과 낙타를 타거나 부리는 데 쓰는 기구)에 달린 방울에서 사금파리 소리가 났다. 하우다(코끼리나 낙타 위에 얹는, 두 사람 이상을 위한 좌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발타사르의 귀에 그밖의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다. 낙타가 걸음을 멈추기 전 마지막으로 디딘 곳에서 자갈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하우다 차양이 펄럭거리는 소리, 또 뭐가 있지?

바람소리. 그 외에는 없었다.

발타사르는 손으로 얼굴 위에 그늘을 드리우며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부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대지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오르내렸다. 가시덤불은 땅바닥에 붙어 자라고 있었다. 모래흙 색깔은 상아빛에서 잿빛으로 변했다가,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래로 풍화된 암석의 광물질로 인해 다시 황갈색으로 물들었다. (P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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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지키고 있던 로마 병사들 중 한 명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와, 발타사르의 발등에 먼지가 풀썩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창을 꽂았다. “당신은 누구요?” 그가 물었다. “예루살렘에는 무슨 일로 왔소?”

발타사르의 풍모는 로마 병사를 압도했지만, 그 이집트인은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우리는 유대의 왕으로 태어난 분을 찾고 있소.” 발타사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헤롯은 카이사르가 임명한 왕이잖소. 우리가 찾는 왕은 헤롯이 아니오.”

“그가 유대의 유일한 왕이오.”

“우리 세 사람은 우리가 찾는 왕의 별을 보았소.” 발타사르가 설명했다. “우리는 그분을 찾아가 경배를 드리고 싶소.”

로마 병사의 사납던 기세가 의구심과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군. 정 그렇다면 도시로 들어가 신전을 찾아가보시오. 아니면 헤롯 왕에게 직접 물어보든가. 유대의 왕이 그 말고 또 있다면, 누구보다도 헤롯 왕 본인이 가장 잘 알 것 아니오.” (P47)


이른 시간이었다. 마당에는 아직 볕이 들지 않았고, 정원사들이 뿌린 물도 서늘한 공기 때문에 증발하지 않았다. 유다 벤허는 거대한 계단 밑바닥에 고인 물을 껑충 뛰어넘었다. 벌써 열일곱 살이니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닐 나이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메살라가 돌아왔다! 지금 나가면 약속 시간보다 너무 빨리 도착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집 안의 여인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보고서 어디에 가느냐고 묻기 전에 집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유다”. 어렸을 때부터 그를 돌봐준 하녀 암라가 부엌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일찍 어디 가세요?”

“아무데도 안 가요.” 유다가 대답했다. “그냥 나갔다 오려고요.”

“어머니도 아세요? 언제 돌아올 건데요?”

유다는 베일로 가려진 그녀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어머니는 모르세요.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나가 있을 거고요.” 유다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 같아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메살라가 돌아왔어요. 암라. 그래서 지금 만나러 나가는 길이에요. 저녁때나 올 거예요.” 유다는 암라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서 문지기 사드락 영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육중한 대문을 빠져나왔다.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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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 도시들이 그래야만 하는데?”

“예를 들어 황금을 생각해봐. 로마는 야만인들보다 황금을 훨씬 더 잘 활용할 수 있어. 로마가 다스리면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법률이 생기고, 도로와 건물이 생기고, 물을 관리할 수도 있어. 걸핏하면 싸우기나 하는 종족들을 보호해줄 수도 있고.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고.”

“그래도 현지 사람들이 로마의 지배를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유다가 물었다. “로마가 지배하면 평화가 온다고? 예를 들어 이곳, 예루살렘을 생각해봐. 여기도 야만인들이 사는 곳은 아니야. 로마가 늪지였을 때부터 도시가 있었다고.”

“유다, 네가 몰라서 그래.” 메살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예루살렘은 전초기지에 지나지 않아. 그나마 아주 중요한 곳도 아니지. 여기에 뭐가 있어? 신전. 말라비틀어진 언덕. 틈만 나면 다투는 종족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교의와 법령들. 사람들은 수염을 흔들어가며 세로 열로 늘어놓은 낙후된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읽으면서 예언자가 어떻고 법규가 어떻고 헛소리를 지껄이지. 유대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게 다야. 미술도, 음악도, 춤도, 수사학도, 운동경기도, 위대한 지도자나 탐험가도, 아무것도 없잖아. 이름도 없는 신과 미치광이 같은 예언자뿐이라고.”

“미치광이라고?” 벤허가 쏘아붙였다.

“아, 덤불이 불타고 바다가 갈라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늘어놓잖아.”

“그게 통치자를 신으로 숭배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야?”

“로마와 제국을 통치하는 건 신들이 할 일이지.” 메살라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너도 예루살렘에 처박혀 있으면 한 치 앞도 못보는 랍비가 되어 등을 활처럼 구부린 채 책이나 들여다보게 될 거야.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유다, 여기에는 너 같은 청년이 할 일이 없어.”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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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벤허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허 가문의 궁전에는 그의 기분을 알아챌 날카로운 여자의 눈이 너무 많았다. 지금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걷기로 마음먹었다.

과연 메살라의 말이 옳은가? 예루살렘은 일개 지방 도시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면 정말로 선택받은 백성들의 본거지일까?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설령 지방 도시가 맞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유다는 여행을 많이 해보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딱 한 번 바다를 본 적 있었다. 아버지의 배를 보러 욥바에 갔다가 수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메살라는 욥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유다도 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메살라는 로마제국의 먼 변방을 탐험하고 정복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유다도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이국적인 기후에서 살아가는 이국적인 종족들, 그런 사람들조차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메살라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예루살렘은 전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을 기르는 도시였다. 전쟁은 언제나 잘못된 것일까?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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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투스가 내일 예루살렘 입성 행사를 연다더구나.” 나오미가 말했다. “행렬이 우리 궁전 문 앞을 지나갈 거다.”

“로마인들은 자기네 영광 속에서 살아요.” 유다가 말했다. “그들의 북, 깃털 장식, 말, 칼, 창과 함께요.” 유다는 잠시 정자 안을 서성이며 청동 꽃병과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황금 접시, 어머니의 숄 등 이제는 자신의 손만큼이나 익숙한 물건들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나오미 곁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어머니의 발치에 걸터앉았다. “우리의 영광은 뭐죠?”

“주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 나오미가 즉시 대답했다. “그걸 생각해라. 유다! 그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붙들어봐. 네 친구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수많은 부족과 국가들이 있어. 하지만 우리의 하느님이야말로 유일한 진짜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 소중히 아끼시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유대인이야. 오직 우리뿐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비하면 칼 따위는 쓰레기나 다름없잖니.”

유다는 이 말을 받아들이려 애쓰며 침묵했다. “하느님께서 유대인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왜 다른 민족이 우리를 박해하도록 내버려두시는거죠? 왜 예루살렘에 로마인들이 들끓는 거예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거니?” 나오미가 쏘아붙였다. (P76-77)


유다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호위대가 지나갈 때 그들이 방패를 어떻게 들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방패 안쪽에 손잡이 두 개가 달려 있을까? 유다는 손으로 난간 너머의 기와를 짚었고, 그 순간 기왓장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기왓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지붕은 물체가 곧장 거리로 떨어질 만큼 경사져 있었다. 유다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사이, 기왓장은 허공을 가르고 떨어져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이마를 때리며 박살 났다.

모든 사람의 고개가 일시에 돌아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아직도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옥상에 서 있는 젊은이를 똑똑이 목격했다.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그라투스는 피를 흘리며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당황한 말은 앞발을 치켜든 채 울부짖었다. 호위대 가운데 일부는 서고 일부는 쭈그려 앉아 방패로 총독을 가린 채 대형을 유지했다.

유다는 꼼짝하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손을 아래로 내렸지만, 이미 모두가 본 다음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유다가 기왓장을 던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총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죽었을까? (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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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가 아주 젊군요.” 랍비가 말했다.

“나이는 젊지만 아주 흉악한 범죄자요.” 장교가 대답했다.

“무슨 죄를 저질렀소?”

“암살법이오.” 장교는 죄수를 힐끗 쳐다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 젊은이는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자신을 두고 뭐라 수군거리는데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이오?” 랍비가 물었다.

“유대인이오.” 장교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네 종족을 잘 모르지만, 듣자 하니 명문가 출신이라더군. 혹시 허 가문의 이다말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왕자의 이름을 들어보았소? 헤롯 시대 사람인데, 몇 해 전에 죽었다고 들었소.”

랍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만난 적이 있소.”

“이자는 그의 아들이오.”

마을 사람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아직 소년티를 다 벗지도 못한 이 청년이 어떻게 암살자란 말인가? 게다가 이 초라한 몰골의 죄수가 왕자의 아들이라고? 속삭임이 웅성거림으로 번지자, 장교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자는 불과 이틀 전에 예루살렘 거리에 있는 가문의 궁전 옥상에서 기왓장을 집어 던져, 하마터면 고귀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총독의 생명을 앗아갈 뻔했소. 그 벌로 갤리선의 노예가 되라는 판결이 내려졌소.”

처음으로 랍비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 죄수를 본 뒤, 장교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라투스가 죽었소?”

“그건 아니오.” 장교가 대답했다. “만약 그랬으면 저 녀석도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거요.” 그는 죄수에게 다가가 발로 등을 밀어 굴렸다. 죄수는 한쪽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눈 위를 덮은 상태였다. 입술도 다 갈라져서는, 겨우 반쯤 벌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노잡이로는 제법 쓸 만할 거요.” 장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부하들을 돌아보니, 말을 구유에서 떼어내 올라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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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0미터, 폭 9미터의 주 선실은 배의 심장부였다. 갑판의 격자무늬 개구부를 통해 들어온 사각형 모양의 햇살 한 줄기가 아래를 비춰주었다. 중앙에서 약간 뒤쪽으로 어마어마한 돛대가 선실을 수직으로 꿰뚫었고 그 주위의 원형 그물에 도끼와 작살, 창이 빽빽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갑판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시다 내려온 아리우스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역시 냄새였다. 이 냄새를 잊고 있었던 자신에게 놀랄 정도였다. 씻지 않은 예순 명의 남자들이 교대로 여섯 시간씩 무거운 노를 저어야 하니, 그들이 흘리는 땀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방도, 몸을 씻을 물도, 시간도, 휴식도 주어지지 않으니, 그들이 뿜어내는 악취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뱃고물 제일 끝에는 노잡이들을 통솔하는 감독관인 오르타토르(‘독려자’라는 뜻의 라틴어)가 나지막한 단 위에 노예들과 마주 보고 앉아, 커다란 사각형 나무망치로 노 젓는 속도에 맞추어 탁자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노잡이들의 등짝을 좌우로 바라보며 감독관을 향해 다가갔다. 노잡이들이 그 무거운 노를 잡아 당겨서 수평 상태에서 방향을 돌려 곧 다가올 파도를 향해 물살을 가를 때마다 피부 아래서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람과 노, 나무와 물, 배와 바다 사이에서 끝없는 투쟁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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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는지, 새삼 절망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 삼 년간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끝없는 나락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고된 노동이 고통을 줄여준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단 한 마디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이미 세상에서 잊힌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자였던 허 가문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지워져버렸습니다. 모두 제 행동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리우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태양을 바라보았다. “잊혔을지 몰라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은 제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는 눈길로 저를 돌아보며 끌려갔습니다.” (P119)


“사고가 나기 전날 밤, 저는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을 겁니다. 설령 유대인이라해도 그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으니까요.”

“로마의 체육 학교!” 아리우스가 외쳤다.

벤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마의 군사훈련소입니다.”

“그러려면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해.” 아리우스가 말했다. 그때 뱃사람 한 명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리우스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 배의 사령관인 그는 노예와 앞날에 관해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눈에 띄는 노예라 해도, 이 자는 최고의 노잡이다. 배는 최대한 빨리 키테라로 가서 로마 함대와 합류해야 했고, 그 누구도 전쟁 도구 이상으로 대우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 생각해보게. 로마 시민이 아닌 이상 군인으로서 영광을 누릴 수는 없어. 유대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란 말일세. 하지만 검투사가 되면 출신을 막론하고 영광과 부를 누리며 황제에게 인정받을 수 있지. 이제 자네 자리로 돌아가서 노를 젓도록 해.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숙고할 필요는 없네. 가외 휴식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갑판 밑으로 내려가는 유다 벤허의 가슴속에는 한 줄기 희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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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는 불현 듯 사태를 파악했다. 해적들이 이 배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스트라이아호와 선체를 맞댄 배는 해적선이었다. 갑판에서는 지독한 전투가 이어졌다. 시끄러운 소음, 처절한 비명에 이어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로마 병사 세 명이 선실로 밀려 내려오다가, 전열을 정비해 다시 치고 올라갔다. 그사이에도 오르타토르는 노잡이들을 위해 박자를 맞춰 망치를 계속 두드렸다.

하지만 노예들은 노를 다시 들지 않았다. 공황 상태가 규율을 이긴 것이다. 벤허는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노예가 어떻게 하면 탈출하거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위에 있는 아리우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얼음송곳 같은 공포가 벤허의 마음을 꿰뚫었다. 아리우스는 그를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 주었다. 그랬던 호민관이 죽거나 부상을 입으면 어떻게 될까? 야만인 같은 해적들이 그를 생포하면 어떻게 될까?

벤허는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행동을 시작했다. 아리우스가 그의 발목에 사슬을 채우지 않은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노예 신분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아리우스가 죽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아리우스가 살아남으면 그에게도 미래가 생길 것이다. 벤허는 계단을 뛰어오르며 오랜 세월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장면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의 비명을 지르는 동안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어머니와 누이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정신을 잃은 어머니와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여동생을 무표정하게 끌고 갔다. 벤허는 로마 사령관의 도움 없이는 평생토록 그 장면을 지울 수 없을 터였다. (P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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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는 아리우스가 말없이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마주치자 호민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령관으로서 내 운이 다한 모양이군. 포르투나의 제단에 그렇게 많은 제물을 바쳤는데 말이야. 어떻게 된 건가?”

“아스트라이아호가 침몰했습니다.” 벤허가 대답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저는 갑판으로 올라갔다가 물에 빠졌는데, 근처에 이 널빤지가 있어서 붙잡았습니다. 그 후에 호민관님을 발견했고요. 제가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다른 노예들처럼 발목이 쇠사슬로 묶였더라면 저도 죽었겠지요. 그러니 호민관님이 제 목숨을 구하신 겁니다.”

“자네는 나를 바다에서 건져 내 목숨을 구했으니, 피장파장이로군.” 아리우스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고개를 들어보려 했지만, 이내 눈을 감고 다시 드러누웠다. “내가 머리를 다쳤나?”

“네. 귀 위에 큰 상처가 생겼어요.”

“상처에는 소금물이 좋다고 하던데.” 아리우스가 말했다. “전투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네가 본 걸 말해주겠나?”

“아스트라이아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로마의 갤리선이 해적선과 함께 침몰했는데, 그건 호민관님도 직접 보셨을 겁니다. 우리가 가라앉기 전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밤늦게까지 전투가 계속되는 것 같았는데, 거리가 멀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부서진 잔해만 봐서는 어느 쪽이 이겼는지 알 수가 없고요.”

“근처에 배는 안 보이나?”

“하나도 안 보입니다.” (P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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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이는 매사에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아리우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가 아주 영특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는데, 아리우스의 이 젊은 피보호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모든 것을 유심히 보고 들었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더할 나위 없이 기민했다. 아리우스의 집에서 사용하는 라틴어의 어법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중단됐던 학업을 다시 시작했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주로 그리스어로 공부했다. 옷도 로마 사람처럼 입었다. 신앙도 아리우스의 방식을 따랐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아리우스는 그를 양자로 입적했고, 이 젊은이는 아리우스 2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리우스는 사람들의 동기를 캐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노예 출신인 이 젊은이가 자기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한 적은 있었다. 고마움 때문일까? 책임감? 야심? 혹은 달리 갈 데가 없어서? 아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허 가문 사람들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정보도 돌아오지 않았고, 심지어 사람을 써서 조사해보기까지 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양자에게도 로마 생활은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P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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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며, 무예도 열심히 갈고 닦았다. 다른 한편으로 메살라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메살라는 아직 군인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지 못해 오지를 전전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수명이 다한 아리우스는 세상을 떠나면서 벤허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준비를 갖추며 몇 달을 보냈다. 미세눔에 있는 아리우스의 저택은 관리인에게 맡겼다. 그가 유대인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로마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주위 사람들이 정치에 입문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로마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는 로마의 군사훈련을 받으며 오 년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제 허 궁전 앞에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가 쓰러진 뒤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배를 구해 동쪽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는 동방의 비단과 향료가 지중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안디옥에 시모니데스라는 관리인을 두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어머니와 디르사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벤허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먼 길을 떠났다. (P165-166)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구나.” 그가 말했다. “그 어렸던 유다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어. 얼마나 모진 고난을 겪었을지!”

“유다라고요?” 에스더가 되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잖아요.”

“그의 아버지에게서 많이 들었다. 아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는지 몰라.”

에스더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생각해보거라. 에스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다면 그가 네 주인이 되는 거다. 나도 그렇고, 이 방과 아래층과 부두와 항구에 있는 모든 것, 멀리는 서해의 항구에 있는 것들까지 다 마찬가지다. 그가 네 주인이 되는 거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만약 그가 정말로 유다 벤허라면, 내가 할 일은 끝나는 셈이니까. 하지만 네 앞날을 생각하면, 그가 외모뿐만 아니라 성품까지 자기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해야만 한다. 말룩을 불러다오. 유다를 뒤따라가라고 해야겠다. 안디옥에 처음 왔으니 다프네의 숲을 찾아가겠지. 사람의 도덕심을 시험해보기에 그보다 더 좋은 곳도 없을 게다.” (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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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함께하기를.” 청년이 대답했다. “혹시 방금 트럼펫 소리가 들렸습니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겁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명한 팡파르가 다시 울려 퍼졌다.

“들은 대로입니다.” 말룩이 말했다. “한 번 더 울릴 겁니다.”

“왜 울리는 거지요? 군대에서나 들리는 소리인데.”

“경기장으로 오라는 신호예요.” 말룩은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한창 더울 때 잠시 눈을 붙였더니 어느새 선선해져서 경기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어떤 경기인가요?” 말룩은 청년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서 가뿐하게 일어서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차 경주 말입니다. 이 숲에 처음 오셨습니까?”

“예, 혹시 경기장이 어느 쪽인지 아십니까?”

“아, 물론이지요. 나는 이곳 안디옥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말룩이고, 상인이지요. 괜찮다면 나하고 같이 가봅시다.”

“나는 유다라고 합니다.” 키 큰 청년이 말했다. “지난 오 년 동안 로마에 살면서 전차 모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지역의 말들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그들은 두 언덕 사이, 삼나무로 에워싸인 공터에 자리한 경기장을 향해 다가갔다. 늦은 오후의 태양이 먼지 가득한 경주로 절반에 걸쳐 햇살을 드리웠고, 관중을 위한 두 개의 커다란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로마의 경기장과 유사하군요.” 유다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요. 키르쿠스 막시무스(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전차 경기장)를 본떠서 만든 경기장이니까요. 이곳이 비록 로마제국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는 곳이니까.”

“그렇군요.” 유다가 중얼거렸다. 그때 말 네 마리가 나란히 서서 끄는 전차 한 대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말이 네 마리군요. 저런 전차를 몰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할 텐데요.”

“로마의 기준을 따르는 거지요.” 말룩이 어깨를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기, 다른 전차가 들어오는군요. 자, 앉읍시다.”

두 사람은 경기장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람석의 윗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유다는 감탄하기도 하고, 비교하기도 하고,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기도 하며 출전자들 전부를 관찰했고, 말룩은 그런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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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원수는 지금도 잘 먹고 잘 사는 게 분명했다. 시간은 메살라의 편인 모양이었다. 벤허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말들이 얼마나 비싼지 잘 알고 있었다. 경기장에 네 마리를 데리고 나왔으니, 아직 훈련을 시키고 있거나 부상에서 회복 중인 말들은 더 많을 터였다. 메살라의 금박 입힌 버들가지 전차는 아주 가볍다는 장점이 있지만 부서지기도 쉬웠다. 말들을 한 번 훈련시킬 때마다 전차도 한 번씩 바꿔야 할 것이다. 그 밖에 마구간을 유지하고, 관리자와 조마사를 부리고, 각종 마구를 조달하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살라는 조금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관중의 환호성을 즐기는 눈치가 역력했다. 평생을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살아온 사람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고통을 당하거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위험에 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벤허 자신이 겪은 노예 생활은 그렇다 치자.

그 처절한 외로움도 그렇다 치자.

어머니와 동생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자.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을 가져다준 장본인이 바로 메살라라는 사실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날 예루살렘의 허 궁전 안뜰에서 친구였던 벤허를 살인자로 몰며 체포하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메살라였다. 지금 벤허의 어머니와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을 가장 유력한 사람 역시 메살라뿐이었다.

말룩과 함께 다프네의 숲을 걷고 있는 유다 벤허는 나무도, 샘물도, 풀밭도, 사원도, 아름다운 여자들의 유혹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복수심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P197-198)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와 닿는가 싶더니, 말 한 마리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과수원의 가장 좋은 점은 말들이 이곳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해마다 여기로 돌아오면 말들은 풀밭을 구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경주는! 오늘 경기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말들이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뒤에서 또 무슨 기척이 느껴졌다. 유난히 호기심이 강해 무엇 하나 놓치는 법이 없는 다른 말 한 마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하지만 이 말들을 누가 몬단 말인가? 그 로마인을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기수의 다리가 부러졌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마음속 깊이 경주에서 이기기를 갈망했다. 이렇게 완벽한 말들을 가져본 건 그도 처음이었다. 로마를 제외하면 안디옥만큼 관중이 많이 모이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밑에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그의 밑에는 말들의 존경심을 이끌어낼 줄 아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일데림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앞을 살폈다. 손님인가? 요즘 들어 부쩍 멀리 떨어진 물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걱정거리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P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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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일데림도, 벤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발타사르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여기에 있네.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꿈에서 어떤 계시를 받았어. 그래서 헤롯 왕을 찾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지.”

“잠깐만요.” 벤허가 끼어들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이신 분’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발타사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라고 했네.”

“헤롯은 로마가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발타사르는 어깨를 슬쩍 들었다 놓았다. “그리하라는 계시를 받았으니 해야지 어쩌겠나? 우리는 아기에게 경배를 드린 뒤 예루살렘을 떠났다네.”

“그게 언제쯤 일어난 일입니까?” 벤허가 물었다.

“자네는 지금 몇 살인가?” 발타사르가 되물었다.

“스물다섯입니다.” 벤허가 대답했다.

발타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대인의 왕도 자네 나이쯤 되셨을 거야. 그가 정말로 우리를 인도하실 분이라면, 지금쯤 때가 되었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분은 이제 어른이 되었고, 앞으로 오랜 세월을 통치할 수 있을 만큼 젊지. 나는 머지않아 그분이 스스로를 드러내실 거라고 믿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집트에 처박혀 있을 수가 없더군, 이라스는 불같이 화를 냈네. 그 애는 내가 죽을 날을 앞두고 망령이 난 거라고 생각한다네. 그 애가 나를 따라온 이유는 순전히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라네. 물론 이 여행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기는 하지만.” 발타사르가 희한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는 그분의 시간이, 그분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믿네, 그런 일이 이집트에서 벌어질 리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유대로 가야하네. 꼭 가고 싶어. 죽기 전에 그분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네.” (P232-233)


“시모니데스와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네.” 일데림이 말했다. 에스더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미루어, 이 주제를 놓고 이미 많은 토론을 거쳤을 거라고 짐작했다. “헤롯이 아닌 사람이 유대의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헤롯의 후계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봤습니다.” 시모니데스가 말을 이었다. “결론은 로마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무기, 군대, 법률..... 결국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지요. 그러니 새로운 유대의 왕이 통치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역시 군대와 법률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힘을 길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게 바로 그 부분이지요.”

“군대를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일데림이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자네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 유대의 왕이 실권을 장악하려면 군사력을 기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시모니데스가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드디어 대화가 본론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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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는 일어나서 몇 걸음을 옮겼다. 에스더는 그가 대중 연설을 준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삶은 달랐습니다. 나는 믿기 힘든 불운에 시달렸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반드시 이유나 결과를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 혹은 신들의 존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인생이 좋든 싫든 우연의 연속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러다가 불타는 바다에서 아리우스를 구출해 그와 함께 로마로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유일한 의미를 찾자면 그런 변화가 마침내 내게 그토록 원했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복수의 기회 말입니다.

나는 로마에, 또한 어느 특정한 로마인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로마를 벌주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쉴 새 없이 육신과 마음을 단련했습니다. 나 자신을 무기로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이제 두 분은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만약 새롭게 나타날 왕이 진정한 유대의 왕이라면, 그는 로마를 무찔러야 합니다. 유대인은 유대 땅을 되찾지 못하는 한 절대 번영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어쩌면 이것이 나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왜 그토록 모진 고난을 겪었는가? 만약 새로운 왕이 나타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면, 나로서는 기꺼이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P292-293)


말들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소음이 엄청났다. 이 말들은 이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달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벤허는 마구를 확인하면서 이 생각을 진작 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하다못해 일데림 족장의 유목민들을 연습 경주로로 데려가 고함을 지르며 뭔가를 휘두르게 해서라도 이런 상황에 대비했어야 했다. 벤허는 그나마 넷 중 가장 차분한 리켈에게서 물러서며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리켈이 거칠게 머리를 흔들자 검은 갈기가 허공을 가르더니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 옆의 안타레스는 연신 히힝 하며 울었는데, 그러자 바로 옆방의 다른 말이 비슷한 울음소리로 화답했다. 벤허는 아마 밤색 말 세 마리와 얼룩무늬 회색말 한 마리로 이루어진 코린트인의 말들 중 한 마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갈색 말들보다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녀석들이었다. 그게 중요할까?

경주로를 일곱 바퀴 돌아야 하는 장거리 경주였다. 어쩌면 다른 말들과 충돌할지도 모른다. 무조건 속도가 빠르다고 이길 수 있는 경주가 아니었다. 지구력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전략이었다. 일곱 바퀴를 도는 동안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벤허는 로마에서 그런 광경을 너무 자주 목격했다. 최고의 훈련을 받은 최고의 말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전차,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완벽한 전술조차 단 한 번의 불운으로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반대의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말 네 마리와 인간 한 명이 힘을 합쳐 이전까지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엄청난 기량을 발휘한 끝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움켜쥐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일을 신들의 은총으로 치부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석판에다 그토록 강한 계명을 내린 여호와가 전차 경기의 결과에까지 관영할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널따란 통로에 신호음이 울려 퍼지고, 바깥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경기 시간이 된 것이다. (P32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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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살라의 전차는 바닥이 벤허의 것보다 훨씬 높고 바퀴도 커서, 메살라는 벤허의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유다.” 메살라가 관중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례하며 말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벤허는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기를 기대하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은 자신을 배신한 옛 친구의 메살라라는 인간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무엇을 느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때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를 이기는 데만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이 순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말들을 훈련했고, 내기를 걸어 그들의 대결에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로마인과 유대인에게 이번 대결은 목숨을 건 싸움이라는 사실을, 경기장 안에 모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P330)


벤허의 관점은 달랐다. 그는 넉 대의 전차를 물리쳐야 했고, 지금은 그들 모두 벤허보다 앞서 있었다. 사실 출발은 그의 의도와 맞아 떨어진 셈이었다. 과시욕이 강하고 멀리까지 내다보는 시야가 부족한 메살라는 처음부터 선두로 치고 나갈 게 분명했다. 맨 앞에 있는 메살라는 아테네 기수의 전차 바퀴가 조금씩 삐걱거리는 걸 볼 수 없었다. 코린트 기수의 말들이 지금 같은 기세로 하루 종일 달려도 끄떡없을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메살라는 선두로 나선 대신, 자기 말들만 볼 수 있었다. 기습적인 상황에 대처하기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이제 메살라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염탐꾼이나 안디옥에 떠도는 소문을 통해 입수한 정보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메살라에게 바람의 아들들이 어떤 말들인지 제대로 보여줘야 할 때다. 그러려면 초반부터 일찌감치 상대에게 부담감을 심어줘야 했다.

게다가 이 말들은 남들 뒤에서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벤허는 아주 살짝 고삐를 늦추며 체중을 바깥쪽으로 실었다. 말들이 한 몸이 되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말들은 방향을 오른쪽으로 약간 트는가 싶더니, 곧 시돈 기수의 전차를 따라잡았다. (P33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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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인가? 모든 경주에서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질문이었다. 지금이 마지막 남은 기운을 전부 쏟아부어야 할 시점인가? 선두와의 거리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껏 결단을 내렸는데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면? 너무 빨리 승부를 거는 게 아닐가? 벤허는 침착하게 말들의 기색을 살피며 정보를 수집했다. 말들의 귀가 앞으로 쫑긋 뻗었다. 땀을 흘리기도 했다. 머리가 아래위로 흔들리지도 않고, 서로 보조를 맞춰가며 열심히 달렸다. 말들의 입에서 벤허의 손으로 뭔가가 전해졌다..... 바로 욕망이었다. 바람의 아들들은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녀석들이었다. 야자나무 과수원에서 훈련할 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말들은 코린트인의 전차를 추월하고 싶어 했다. 벤허는 아직 망설였다. 이미 경주로 바깥쪽으로 많이 달린 탓에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긴 거리를 뛰었다. 코린트인을 추월하려면 또다시 바깥쪽을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코린트인은 제쳐야 했다. 결국 승부는 그와 메살라의 양자 대결로 압축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가 오래전부터 그토록 원했던 게 아닌가?

벤허는 고삐를 잡은 손을 조금 내렸다. 지금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마치 말들에게 큰 소리로 얘기하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너희들은 달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가자, 조물주가 너희에게 허락한 최고 속도를 내봐. 저 사람들에게 바람의 아들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줘.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들은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오른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며 코린트인의 밤색과 회색 말들을 추월했다. 벤허가 돌아보니 코린트인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의 말들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남은 경주는 로마인과 유대인의 승부가 될 터였고, 그것이 순리인 듯했다. 이제 코린트인에게는 말들을 안전하게 마구간으로 유도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유대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는 로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곱 번째 돌고래가 떨어졌다. 이제 반 바퀴가 남았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P352-354)


그것은 곧 예술이었다. 살아 있는 예술. 고삐를 잡은 손의 감촉만으로 속도를 늦추고, 동시에 관성력을 되살린다.

메살라는 예술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유다가 턱밑까지 쫓아왔다. 메살라는 경주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아라비아 말들은 여전히 팔팔했다! 메살라는 다시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 말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곡선주로를 돌 때는 원심력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메살라는 전차가 바깥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있는 힘을 다해 고삐를 왼쪽으로 당겼지만, 말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사이에 그의 오른쪽으로 유다가 따라붙었다. 메살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한때 자신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유다가 거기에 있었다. 유다는 어려서부터 왕자 대접을 받으며 자라 버릇없는 철부지였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 곧 유대인이 하찮은 무리라는 걸 깨달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다가 턱밑까지 쫓아온 건 현실이었다. 메살라는 침을 뱉었다.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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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당신에게 채찍을 휘둘렀잖아요. 말들에게도.”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에스더. 나는 말룩에게 메살라의 전차 바퀴의 높이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내 전차의 축이 쇠붙이로 보강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요. 그 쇠붙이는 메살라의 상아 바퀴를 칼로 치즈 자르듯 자를 수 있었어요.”

“그의 전차가 망가지면 뒤따라오던 다른 전차에 짓밟히겠지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말하는 에스더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벤허는 눈을 뜨고 코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빼더니 돌아섰다.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어요.”

벤허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압니다.”

“아니요.” 에스더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몰라요. 이미 익숙해졌으니까요. 사람이 죽는 걸 몇 번이나 봤나요?” 벤허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봐요, 당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여자들은 이야기가 다르지요. 우리는 남자들에게 군대가 어떠니 칼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뿐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현장을 목격하는 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다니! 당신들은 서로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경주라는 이름으로, 상금을 걸고서 말이에요!” 에스더는 몇 걸음 물러나 젖은 수건을 손으로 쥐어짰다. (P371)


그들은 벤허를 죽이러 온 자객이었다. 둘 중 키가 더 큰 남자는 옅은 금발의 색슨족이었는데, 전날 레슬링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자였다. 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칼을 가졌고, 키가 동료보다 약간 작았지만 몸은 동료 못지않게 단단했다. 그들은 벤허에게 등을 보인 채 주전자를 든 여인의 조각상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조각상이 마치 살아 있는 여자라도 되는 양 희고 매끈한 대리석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덩치가 좋은 금발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벤허는 그가 누군지 더 자세하게 생각났다.

그의 이름은 토드, 로마에서 벤허에게 레슬링을 가르친 남자였다! 어제 우승자들이 행진을 벌일 때 월계관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그의 모습을 보았다.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명확해졌다. 이 두 사람도 벤허처럼 이 궁전에 처음 온 것이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고서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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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동안 폭력을 배웠고, 그것을 그냥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폭력은 그의 일부가 되었다. 이데르네 궁전에서 죽은 남자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할 메살라와 함께, 불타는 바다에 떠 있던 시신도 떠올랐다. 그가 저지른 최초의 살인이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익숙해져야 할 현실이었다. 냉정한 선제공격, 목적에 따른 학살, 예전에 사람을 죽인 이유는 자기방어를 위해서였다. 메살라를 상처 입힌 이유는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의 대역 노릇을 하게 된 남자를 죽인 것은 무자비한 공격성의 발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신은 그의 이름표를 달게 되었고, 그가 사라질 수 있게 해주었다. 기분이 이상하고 마음이 걸렸지만, 아주 유용한 상황이었다. 시모니데스는 공개적으로 그의 행방을 찾아 나설 테고, 새로운 집정관 막센티우스에게 그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라고 주장할 것이다. 메살라는 빠른 시일 내로 벤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에 있는 호민관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갈 테고, 그러면 아무도 그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지지만,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된다.

아무도 아닌 존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P392)


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올 무렵, 언덕 위에 걸린 태양은 점점 붉어졌고, 도시의 가장자리로만 이동하던 벤허는 예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골목을 지나 여러 해 전에 메살라를 만났던 궁전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는 성전의 마당으로 접어들었다가 차분하게 있지 못하고 얼른 빠져나오기도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그는 올리브 산 중턱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발이 아프고 옷자락에는 먼지가 묻어 지저분했다. 마음은 보고 들은 것들로 들떴지만, 그 모든 게 하나의 단어로 정리되었다. 샬롬. 바로 평화였다. 유대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사말은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이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정중히 “당신에게도 평화가 함께하기를”이라고 대답했다.

평화, 유대인에게 평화란 무슨 의미일까? 그에게는? 평화라는 것이 가능할까? 메살라는 ‘팍스로마나’에 대해 언급했다. 로마제국이 점령지에 선사하는 평화가 바로 팍스로마나였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평화일까?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평화란 말인가?

그 평화를 깨뜨릴 수 있을까? 유다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가 어둠에 물드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모니데스와 일데림 족장의 주장이 굉장히 설득력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연 그들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 정말 로마라는 멍에를 떨쳐버릴 때가 온 건가?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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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도 길에서 묻은 옷자락의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나는 하느님이 내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말했다. “내게는 욥이나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이해할 능력이 없어.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실 자비일 수도 있지. 혹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지도 몰라. 나는 그저 하느님의 뜻을 기다릴 뿐이야.”

디르사는 허리를 굽혀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좋아요. 그럼 어디에서 기다릴까요? 그 장소를 뭐라고 부르죠?”

“우리는 ‘물의 문’을 통해 이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 우리 집 벽을 따라 반대편으로 나가면 좁다란 내리막길이 나와, 내가 그 길을 안다.”

“좋아요. 그게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데요?”

“나도 가본 적은 없어. 소문만 들었을 뿐이지. 우물이 있고, 그 주위의 언덕에 동굴들이 있다더구나. 우리는 그 동굴 속에서 살 거란다.” 그녀는 그 동굴들이 과거에 무덤으로 쓰였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흔히 ‘사자(死者)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P422-423)


그는 허리를 숙여 백부장의 몸에 꽂힌 칼을 뽑고는, 상체를 일으켜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로마군 장교에게 말했다. “이건 정정당당한 싸움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 인정한다.”

“그럼 이 칼과 방패는 내가 갖겠다.” 벤허가 말했다. “로마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것도 당신의 권리다.” 장교가 대답했다.

벤허는 대문 앞에 있던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칼에서 대리석 바닥으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갑시다.” 그가 말했다. “이제 정말로 가야 합니다. 지금은 안전하다 해도,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그는 붉은 머리칼의 지도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에게, 아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고자 하는 모든 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밤에 베다니의 숙소로 와서 나와 만납시다. 얼굴을 몰라볼 수도 있으니 이 칼과 방패를 가지고 오세요. 오늘은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싸우면 이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벤허는 칼과 방패를 갈릴리인 지도자에게 넘긴 뒤,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로 붐비는 좁은 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가던 말룩은 헤롯 궁전에서 로마인과 싸워 승리를 거둔 유대인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벤허였고, 그의 역할은 크게 부풀려졌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말룩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로마 백부장의 죽음은 단지 피로 얼룩진 과시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토록 태연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벤허는 대체 어떤 지도자가 되려는 것일까? (P48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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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발타사르는 구세주를 만나야 한다고 하니, 견해 자체가 다른 셈이었다. 왕은 헤롯이나 카이사르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구세주는 그런 세속적인 권력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발타사르가 생각하는 구세주란 사랑의 힘으로 영생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들은 왕도, 구세주도 만나지 못할 수 있었다. 말룩의 편지에는 단지 예언자만 언급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벤허는 아주 중요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꿈은 발타사르와는 달리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 노인이 또렷한 음성을 들었다면, 벤허가 본 것은 단편적인 장면뿐이었다. 왕관, 빛나는 군대, 어마어마한 알현실과 아리우스 같은 권력자들이 참석하는 의회, 화려한 복장과 정돈한 검은 수염은 동방 남자들의 특징이었다. 벤허 자신은 그런 장소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군대를 지휘한 적도, 의회에서 연설을 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이라스의 모습도 보였는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알데바란이 커다란 도마뱀을 보고서 머리를 흔들었고, 벤허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P499)


벤허는 발타사르의 얼굴에 기쁨과 감사 그리고 그를 인정하는 마음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가 싶더니, 예언자의 목소리가 똑똑히 울려 퍼졌다. “바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오.”

하느님의 아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심지어 공기조차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 태양은 여전히 빛났다.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듯했다. 어떤 소리가, 천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물론 사람들이 위엄과 희망, 따뜻함과 믿음에 압도되어 일순간 환청을 들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이 지나갔다. 로브를 입은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예언자는 군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발타사르는 흙바닥에 고꾸라져 있었고, 시간이 흐르자 하우다로 옮겨졌다. 주위에선 사람들이 무심히 오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특별한 광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말을 탄 채 강가로 내려가던 벤허는 모르는 사람을 향해 물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그 남자는 누구였습니까?”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느님의 아들이겠지요. 하지만 나사렛에 사는 어느 목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그제야 벤허는 기억해냈다. 그의 얼굴이, 그의 얼굴이 주는 느낌이 웬지 낯익다 싶었다. 평화와 인내와 힘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P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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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밀집한 인파를 눈으로 좇던 벤허는 바위투성이인 언덕길을 가로질러 예수를 따라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사렛 예수가 연설을 할까? 혹시....... 명령을 내리지는 않을까?

그가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까? “드디어 때가 왔노라. 나의 백성들이여! 우리가 로마의 멍에를 벗어버릴 때가 왔노라!” 혹은 “예루살렘은 해방될 것이다!” 그가 당나귀에 앉은 채로 갑자기 허리를 쭉 펴고 두 팔을 올리며 승리의 함성을 외치지는 않을까?

아니다. 벤허는 왜소한 나무를 돌아 나사렛 예수를 지켜보았다. 어마어마한 인파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당나귀와 몇몇 제자들이 길가에 멈춰 서더니 곧 예수가 내렸다. 인파가 소란스러운 데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릴 만큼 거리가 가깝지 않았지만, 이 광경은 벤허에게 익숙했다. 이것이 이 나사렛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는 기꺼이 그들의 짐을 덜어주었다. 지금도 그는 예루살렘 입성을 코앞에 두고서 환호하는 군중을 외면한 채 누군가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길가의 반짝이는 하얀 바위 옆에, 하녀로 보이는 작고 검은 여인과 나환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병세가 심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눈물로 예수의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그 나사렛 사람은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윽고 그가 뭐라고 말했지만, 벤허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들리지 않았다. 다른 환자가 두 손으로 절망적인 몸짓을 이어갔다. 예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뭐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손을 들어 나환자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을 돌렸고, 다시 당나귀에 올랐다.

나환자들, 벤허의 가슴속에 절망과도 같은 어떤 것이 파고들었다. 단 두 명의 나환자를 위로하기 위해 저 많은 군중에게서 등을 돌리다니, 그런 사람도 왕이 될 수 있을까? 저래서야 어떻게 로마를 몰아낸단 말인가? (P524-525)


벤허는 문득 그의 심정을 알 듯했다. 예전에 자신도 재앙에 휩싸여 죄수 신세가 되었을 때 적대적인 병사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끌려갔다. 그 극도의 절망과 고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때 그에게 희망을 안겨준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그는 조금 더 속도를 높여 예수의 바로 옆에서 걸었다.

예수의 얼굴은 머리칼로 가려져 있었고, 벤허가 소리 낮춰 불러도 그를 보지 않았다. “선생님!”

때마침 갈림길이 나와 행렬이 잠시 분산되었다. “선생님.” 벤허는 다시 예수를 불렀다. “제가 군사를 데려와 구출해드리면...... 우리의 도움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저 남자는 누구야? 우리 일행인가?”

벤허는 얼른 군중 속으로 섞여들었지만, 이미 군인들의 눈에 띈 다음이었다.

“아닙니다! 우리 일행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가 외쳤다. “저 놈을 잡아. 잡아서 이리 끌고 와!”

벤허는 팔을 움켜잡는 병사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의 튜닉 자락을 붙잡았지만, 벤허는 튜닉의 목 부분부터 찢어내려 상대의 손에 천 조각만 남긴 채 벌거벗은 상태로 탁트인 들판을 내달렸다.

“잡아라! 따라가!” 누군가가 외쳤지만, 근엄한 목소리가 그 소란을 정리했다. “우리는 이자를 빌라도 총독에게 데려가야 하오.” 대제사장이 주장했다. “경계를 더 강화해 아무도 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얼른 갑시다. 지금 빨리!”

그래서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벤허는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어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행렬이 점점 멀어져 예루살렘 성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걸 보았다. 이내 어둠 속에서 깜빡거리는 횃불만 어렴풋이 보일 뿐,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다. (P54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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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셔야 합니다!” 한 사람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구해주지 않으면 그 나사렛 사람이 오늘 죽습니다!”

“죽다니?” 벤허가 되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들이 어젯밤 그를 잡아 와 재판에 넘겼습니다. 제사장들이 그에게 신성모독죄를 물어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는 판결을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제사장들과 그 추종자들이 강하게 몰아붙여 결국 유죄라 선고했습니다. 그래서 처형에 쓸 십자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 안 돼!” 벤허가 소리쳤다. 그는 손을 뻗어 하인에게 지시했다. “내 칼과 방패를 가져와라. 알데바란에게 안장을 얹어라.” 그는 장교들을 돌아보았다. “막아야만 한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 보였다. 예수를 구해내야 한다. 골고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하지만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기습 작전을 펼치면 예수의 결박을 풀고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안 됩니다. 형제여.” 갈릴리인 장교 한 명이 그의 환상을 깨뜨렸다. “우리는 싸울 수 없습니다.”

칼집을 두르던 벤허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지?”

장교 두 명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지금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장교가 대답했다. “남은 병력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수백 명이 있잖은가!”

“나머지는 모두 제사장들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입니다.”

벤허의 손이 아래로 축 처졌다. “모두 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P55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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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기와 군사전략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벤허가 말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순순히 잡히신 다음에도 말입니다. 우리 힘으로 그분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벤허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로마는 제게 늘 복수에 대해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지요. 저는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만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오랜 시간을 두고서 끊임없이 그의 가르침을 배워야 해요.” 에스더가 말했다.

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 며칠 뒤에 저는 갈릴리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거든요. 그들에게서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어땠는지도 확인하고 싶었고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호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호숫가를 찾아갔지요. 그들은 어부였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제가 호숫가에 다다르니 배가 한 척 떠 있더군요. 그들 중 몇 명,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잡고 있었어요. 저는 물가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밤이었어요. 별들이 얼마나 밝던지! 배가 물이 꽤 깊은 곳까지 나갔는데도 똑똑히 보이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더군요. 그들은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익숙한 일을 하는 게 마음이 편안해질 때도 있으니까.” 시모니데스가 말했다.

“그 후 새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호숫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았습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는데도 그들 모두가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분이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고기가 있느나?’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자, 배 위로 끌어 올리기가 힘들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배가 물가로 다가와 제가 도와주고 나서야 그물을 끌어 올렸지요. 그렇게 예쁜 물고기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유다가 이야기를 이었다.

“그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눈에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도 저와 똑같이 안심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돌아오셨으니까요! 그분은 우리를,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제자가 아닌 저까지도 말입니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서 유다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피워놓은 불과 갓 구운 따뜻한 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리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물고기의 배를 갈라 불에 구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침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침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바람이 잦아들고, 호수 표면이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아래위가 온통 빛으로 이루어진 그릇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수께선 우리에게 손수 음식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우리를 만지기도 하셨지요. 손바닥에 못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되풀이했던 그 질문이었지요.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답을 품고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그때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따르려 애씁니다 그분은 베드로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을 먹여라. 내 양 떼를 보살펴라. 나를 따라라.’” (P575-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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