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체> 2024년
중국의 작가 류츠신이 지은 SF 장편 소설. 2006년 5월에 중국의 SF 잡지인 커환시제(科幻世界)에서 연재를 시작하여 200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중국에서 300만 부가 팔렸으며, 2015년 휴고상 장편 소설부분 수상작으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하다. 1부: 삼체문제, 2부: 암흑의 숲, 3부: 사신의 영생이다.
1년 전, 왕먀오는 ‘중화 2호’ 고에너지 가속기 프로젝트의 나노 부품 분야 책임자였다. 어느 날 오후, 량샹(良湘) 현장에서 잠깐 쉬던 왕먀오는 눈앞 풍경의 구도에 매료되었다. 풍경 사진 애호가인 왕먀오에게는 현실 풍경이 종종 예술적인 구도로 보였다. 왕먀오를 매료시킨 것은 그들이 설치하고 있던, 공정이 절반쯤 진행된 3층 높이의 초전도 코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금속 덩어리와 초저온 냉각제 관이 엉킨 괴물 같았다. 아니면 대공업 시대의 폐기물처럼 비인간적인 기술의 냉혹함과 강철의 야만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이 금속 괴물 앞에 여성의 가녀린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자 빛의 분포가 절묘하게 바뀌었다. 금속 괴물은 임시로 설치한 지붕 그늘에 가려져 냉혹하고 거친 질감이 더 두드러졌고, 지붕에 난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온 금빛 석양이 여자의 머리칼과 업무용 가운 깃 위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비추었다. 마치 한바탕 소나기를 맞은 거대한 금속 폐허 위에 아름다운 꽃이 핀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세요. 일하세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나노연구소 주임이 젊은 엔지니어에게 한 소리였다. 그도 그 그림자를 멍하니 보고 있었나 보다. 예술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 왕먀오는 그 여성이 일반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석 엔지니어가 그녀를 수행하면서 정중한 태도로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왕먀오가 주임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죠?”
주임은 손으로 원을 크게 그리며 말했다.
“아실 겁니다. 200억이 투자된 이 가속기가 완공되면 제일 처음으로 할 프로젝트가 바로 저분이 주장한 초끈 이론 모형실험일 겁니다. 연공서열을 따지는 이론 연구계의 관례대로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원로들이 체면을 구길까 봐 먼저 나서지 않는 바람에 저분 차지가 된 것이죠.”
“응? 양둥(楊冬)이 여자였나?” (P17-18)
스창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양둥의 남자 친구.”
그제야 왕먀오는 량샹의 고에너지 가속기 건설 현장에서 딩이를 본 기억이 났다. 그는 이론 쪽 팀원으로 구전(球電) 연구 중 굉원자(宏原子)를 발견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왕먀오는 편지 봉투에서 맑은 향기를 풍기는 무언가를 꺼냈다. 종이가 아니라 자작나무 껍질이었다. 거기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모두 하나의 결과를 향하고 있다. 물리학은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유서에 서명조차 남기지 않고 그녀는 떠났다.
“물리학이...... 존재한 적이 없다?”
왕먀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P21)
……그런데 새로운 충돌 에너지 준위(準位)에서 입자, 충돌 에너지, 실험 조건 등이 모두 같은 상황인데도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다른 가속기에서는 물론, 같은 가속기에서 시간대만 다르게 한 실험에서도 모두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당황했지요. 같은 조건의 초고에너지 충돌 실험을 계속 진행했지만 매번 다른 결과가 나왔고 규칙도 없었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입니까?” 왕먀오가 물었지만 딩이는 왕먀오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저는 나노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물질의 미세 구조는 접해봤지만 선생에 비하면 일천합니다.
그러니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물리 법칙이 시간과 공간에서 불균일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다음은 선생도 추론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장군도 생각해냈으니까요. 그 사람 정말 똑똑하더군요.”
왕먀오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찬란하게 빛나는 도시의 불빛에 밤하늘의 별들이 모두 잠식되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주의 보편적인 물리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리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P34)
다음날은 주말이었지만 왕먀오는 아침 일찍 일어나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를 몰고 집을 나섰다. 사진 애호가인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인적이 드문 황야였다. 그러나 중년이 되고 나니 그런 호사를 부릴 기운이 없어 대부분 도시에서 풍경을 찍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도시에서도 황량한 분위기가 풍기는 곳을 선택했다. 이를테면 공원의 말라버린 호수 바닥이나 건설현장의 파헤쳐진 땅, 시멘트를 뚫고 자란 들꽃과 풀 같은 것이다. 배경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통속적인 도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그는 흑백필름만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 되어 점점 유명세를 탔고, 큰 사진전에서 두 번이나 입선하고 사진가 협회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면 늘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마음내키는 대로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찾는 구도와 영감을 포착했다. 때로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도 했다.
오늘은 여느 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의 사진은 고전적 품격의 안정감과 묵직함이 장점이었는데 오늘은 이런 구도를 찾기 어려웠다. 아침 햇살 속에서 막 깨어나고 있는 이 도시가 마치 모래 위에 건설된 것 같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난밤, 당구공 두 개가 긴 꿈속에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것은 검은색 공간에서 규칙없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검은색 배경에서 검은 공은 보이지 않았고 우연히 흰색 공에 가려질 때에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물질의 근원은 정말 법칙이 없는 것일까? 정말로 세상의 안정과 질서는 그저 우주의 한구석에서 잠깐 동안 유지되는 동태적 균형일까? 그저 혼란의 급류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소용돌이인 것일까?
그는 어느새 새로 건설된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 건물 앞까지 온 자신을 발견했다. 왕먀오는 자전거를 세우고 길옆에 앉아 A자 모양의 우뚝 솟은 건물을 쳐다보며 안정감을 회복하려고 했다. 떠오르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건물 꼭대기를 따라 깊이가 보이지 않는 판 창공을 바라봤다. 갑자기 머릿속에 두 단어가 떠올랐다. 저격수(Sniper)와 농장주(Farmer).
'과학의 경계‘ 학자들은 토론할 때 SF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SF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의 약자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두 단어의 영문 약자였다. 이것은 두 가지 가설에서 출발하며 모두 우주 규칙의 본질과 관련된다. (P36-37)
“알겠습니다. 제 눈은 차치하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어떤 외부의 힘이 원격조종으로 사람에게 뭔가를 보게 할 수 있습니까?”
의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있습니다. 예전에 선저우(神舟) 19호 의료팀에 참가했을 때 한 우주비행사가 우주선 밖에서 일하다가 섬광을 봤다고 했습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있는 우주비행사에게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태양 활동이 격렬할 때 우주의 고에너지 소립자가 망막에 부딪혀 만들어낸 섬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숫자가 보인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카운트다운을요. 그건 절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겁니다.”
왕먀오는 얼떨떨한 채로 병원에서 나왔다. 숫자는 여전히 그의 눈앞에 떠 있었다. 마치 카운트다운에 맞춰 걷는 듯했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유령을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왕먀오는 몽유병 환자처럼 초점을 잃은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사서 썼다.
나노센터 메인 실험실에 들어가기 전 왕먀오는 선글라스 벗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를 본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를 걱정했다.
왕먀오는 실험실 중앙에서 여전히 운행 중인 반응 블랙박스를 바라보았다. 이 거대한 설비의 몸통은 수많은 관이 한곳으로 연결된 구체였다. ‘비도(飛刀)’라는 이름의 초강도 나노 소재는 이미 생산되었다. 그러니 분자 건축술로 만들었기에 양산할 수 없었다. 분자 건축술은 분자 탐침(探針)으로 재료분자를 벽돌처럼 쌓아 올리는 기술인데 이런 공정은 자원을 대규모로 소모했다. 그 때문에 이 제품은 세계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P54-55)
왕먀오는 브라우저 주소 창에 기억하기 쉬웠던 게임 주소 ‘www.threebody.com'을 입력했다. 인터넷 페이지에 이 게임은 V 장비 방식만을 지원한다는 안내가 나타났다. 나노센터 직원 휴게실에 V 장비가 있었던 것이 생각난 왕먀오는 텅 빈 메인 실험실에서 나와 당직실에 비치된 열쇠를 가져다가 휴게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휴게실에 들어가 당구대와 헬스 기구를 지나 한 컴퓨터에서 V 장비를 발견했다. 어렵게 센서 옷을 입고 헬멧을 쓴 다음 컴퓨터를 켰다.
게임을 시작했다. 그는 여명이 밝아오는 황야에 서 있었다. 천지가 온통 어두컴컴한 암갈색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멀리 지평선에서 서광이 비쳤고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대지 위로 붉은빛을 발하는 산봉우리 두 개가 무너져 내리면서 황야 전체에 붉은빛이 퍼졌다. 하늘과 해를 가렸던 먼지가 가라앉고 나서야 왕먀오는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글자를 볼 수 있었다.
‘삼체(三体).’
그다음 로그인 화면이 나왔다. 아이디를 ‘해인(海人)’으로 입력하니 바로 로그인이 되었다. (P62-63)
“비성(飛星)! 비성이다! 두 개의 비성이다!”
사실 왕먀오는 그 전부터 그 이상한 천체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것은 별보다 컸고 탁구공만 한 원반 형태로 운행 속도가 매우 빨랐으며 별이 가득한 하늘을 이동하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개가 나타난 것이다.
주 문왕이 설명해주었다.
“두 개의 비성이 나타나면 곧 항세기가 시작되지!”
“예전에도 나타났던 것 같은데.”
“그건 한 개였지.”
“최대 두 개입니까?”
“아니, 세 개까지 나타나. 그 이상은 없어.”
“세 개의 비성은 더 좋은 세기를 예고하는 것입니까?”
주 문왕이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왕먀오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세 개의 비성은...... 그것이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하게.”
주 문왕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열망했던 항세기가 시작되어 일출과 일몰이 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낮과 밤이 열여덟 시간 정도로 점차 고정되었고 밤낮이 규칙적으로 교차되자 날씨가 한결 따뜻해졌다.
왕먀오가 물었다.
“항세기는 얼마나 지속됩니까?”
“하루 또는 한 세기,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라.”
주 문왕은 모래시계 위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기록에 서주(西周)는 2세기에 걸쳐 항세기가 지속됐다고 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복받은 것이지.”
“그렇다면 난세기는 얼마나 계속됩니까?”
“말하지 않았나. 항세기를 제외하면 모두 난세기라고. 둘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지.”
“그러니까 규칙이 전혀 없는 혼란한 세계라는 겁니까?” (P70-71)
왕먀오는 삼체의 진실은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대학교 3학년 때 들은 정보 과목에서 교수는 강의실에 큰 그림 두 장을 걸었다. 하나는 내용이 많고 정밀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였고 다른 하나는 광활한 하늘 사진이었다. 텅 빈 푸른 하늘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구름 한 점이 있을 뿐이었다. 교수는 두 그림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답은 후자였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백배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삼체가 바로 그랬다. 정보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특이한 점은 삼체의 설계자가 여느 게임과는 다른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게임 설계자는 보이는 정보를 최대한 늘려서 현실감을 주려고 하는 반면, 삼체의 설계자는 정보를 최대한 압축해 어떤 거대한 진실을 감추려는 것 같았다. 광활한 하늘 사진처럼 말이다.
왕먀오는 생각의 고삐를 늦추고 생각이 삼체 세계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했다.
‘비성! 핵심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비성이다. 한 개의 비성, 두 개의 비성, 세 개의 비성..... 그것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차가 빌라 단지 앞에 도착했다. (P82)
심한 공격을 받았어도 예저타이의 말투는 여전히 침착했다. 이 점에 사오린은 매우 놀랐고, 두렵기까지 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외부의 관측이 파동함수의 붕괴를 일으킨다고 하잖아. 이것은 반동 유심론(唯心論)의 또 다른 표현이고 가장 만연한 학설이지.”
“철학이 실험을 이끄는가, 실험이 철학을 이끄는가?”
에저타이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비판자들은 한순간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자 홍위병이 말했다.
“당연히 정확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과학 실험을 이끌지!”
“그 말은 정확한 철학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실험으로 얻은 참된 지식에 반대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자연계를 인식한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P103)
38년 뒤, 예원제는 마직막 순간에 <침묵의 봄>이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떠올렸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사악한 면이 그녀의 젊은 영혼에 치유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남겼지만 이 책은 인간의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해주었다. 폭넓은 주제를 다루지도 않고, 그저 살충제 남용이 환경에 미치는 위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었지만 작가의 시각이 예원제를 뒤흔들었다. 레이철 카슨이 쓴 인간의 행위, 즉 살충제 사용은 예원제가 보기에 정당하고 정상적이며 적어도 중립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이 행위는 문화대혁명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 세계에 끼치는 폐해는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기에 정상이거나 심지어 정의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행위 중 사악한 것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그런 추론이 그녀를 두렵게 했고 공포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이 생각이 예원제의 일생을 결정했다. (P113-114)
푸다닥하는 소리가 나더니 산 아래 숲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밤하늘로 속속 떠올라 빙빙 돌았다. 그녀는 엄동설한 숲속에 그렇게 많은 새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어 공포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새 떼가 안테나가 향한 곳으로 날아들더니 희미하게 빛나는 구름을 배경으로 후드득 추락하기 시작했다.
약 15분 뒤, 안테나의 붉은 등이 꺼졌고 피부의 가려움증도 사라졌다. 하지만 주 통제실의 어지러운 구령 소리는 여전했고,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홍안 공정 제 147차 발사 완료, 발사 시스템 잠금. 홍안 검측 상태로 진입. 검측부 시스템 통제권 받고, 중단된 데이터를 올리도록.”
“각 조는 발사 일지를 충실하게 작성하고 각 조 조장은 발사 정기 회의에 참석하도록. 이상.”
고요가 내려앉았다. 안테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여전했다. 밤하늘의 새들도 숲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다시 안테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 활짝 벌린 거대한 손바닥 같았고, 이 세계를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바닥’이 향하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의 공격 목표인 BN20197F호는 보지 못했다. 옅은 구름 뒤에는 1969년의 추운 밤하늘만 있었다. (P138)
한 시간 뒤 시내에 진입한 왕먀오는 천문관 앞에 차를 세웠다.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불이 거대한 유리 건축물의 투명한 유리 외벽을 통과해 내부 구조를 어렴풋하게 비추고 있었다. 천문관을 설계한 건축가가 우주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명한 것일수록 더 신비하다. 우주 자체는 투명하므로 시력이 미친다면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더 신비하다.
잠이 덜 깬 듯한 천문관 직원은 미리 문 앞에 나와 왕먀오를 기다리고 있다가 슈트케이스 같은 가방을 그에게 건넸다.
“3K 안경 다섯 개가 들어 있습니다. 충전은 다 되어 있고요. 왼쪽 버튼이 전원, 오른쪽은 광도 조절이에요. 저는 들어가서 자겠습니다. 문 옆의 저 방이에요. 아, 사 박사.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직원은 어두운 천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왕먀오는 자동차 의자에 상자를 놓은 다음 3K 안경을 꺼냈다. 이것은 V 장비의 헬멧 모니터와 비슷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안경을 썼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변화가 없었다. 그저 컴컴했다. 그제야 그는 전원 버튼을 안 눌렀다는 것을 깨닫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도시가 몽롱한 빛무리로 변했다. 대부분 밝기가 비슷했고 반짝이거나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빛무리 중심에는 송신원이 있었다. 파장 때문에 형태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P144)
“스창, 당신은 궁극의 철학 문제를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아, 예를 들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 우주는 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 하는 것 말입니다.”
“없어.”
“한 번도요?”
“응, 한 번도.”
“당신은 살면서 계속 밤하늘을 봤잖아요. 그런데 경외심이나 호기심이 안 생깁니까?”
“밤에는 하늘 안 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밤 근무 자주 하잖아요.”
“이봐. 밤에 잠복하면서 하늘을 보다가 내가 감시하던 놈이 도망가면 어떻게 하나?”
“우린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요. 건배!”
“사실 말이지, 나는 하늘의 별을 봐도 당신이 말한 궁극의 철학 같은 것은 생각 안 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집도 얻어야지, 애들 대학고 보내야지, 한도 끝도 없는 사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척 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다 보이는 솔직한 사람이야. 그러니 상사의 환심을 살 수가 없지. 퇴역하고도 얼마나 뒹굴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니, 일이라도 안 했으면 진작 차였지. 이렇게 생각할 게 많은데 무슨 마음으로 별을 보며 철학을 생각하겠나?”
“그것도 그렇네요, 자, 건배!”
“그래도 말이야, 내가 정말 궁극의 이치를 발견했지.”
“말해봐요.”
“불가사의한 일 뒤에는 반드시 귀신이 있다.”
“무슨...... 헛소리!”
“여기서 ‘귀신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음모를 꾸민다는 거야.”
“당신이 기본적인 과학 상식만 있었어도 누군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을 겁니다. 특히 나중에 일어난 일은요.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현재 과학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 과학 외의 다른 일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초자연도 아니에요. 무엇을 초월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또 허튼소리! 불가사의한 일은 나도 숱하게 봤어!”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마셔, 그리고 다 마시면 자.” (P149-151)
“안녕하시오. 나는 묵자(墨子)요.” 그가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해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 당신을 알지요!” 묵자가 흥분해서 말했다.
“137호 문명에서 당신은 주 문왕을 추종했지요.”
“그와 함께 이곳에 온 건 맞지만 그의 이론은 믿지 않습니다.”
“그랬지요.” 묵자는 왕먀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거 아시오, 당신이 떠나고 36만 2000년 동안 삼체 세계는 문명이 네 번 바뀌고 난세기와 항세기가 불규칙적으로 교차하면서 힘겹게 성장했소. 가장 짧았던 때에는 겨우 석기 시대의 반을 갔을 뿐이오. 하지만 139호 문명이 기록을 세웠지. 증기 시대까지 갔지 뭐요!”
“그러면 그 문명 중에서 태양의 운행 규칙을 찾아낸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묵자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없소. 운이 좋았을 뿐이오.” (P158-159)
눈부신 노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둠이 거대한 손으로 검은 커튼을 치듯 잿더미로 변한 세계를 뒤덮었다. 방금 화상을 입은 대지가 어둠 속에서 검붉은 빛을 뿜어댔다. 난로 속에서 갓 끄집어낸 석탄 같았다. 왕먀오는 밤하늘에 별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금세 수증기와 연기가 하늘을 가렸고 붉게 타오르는 대지의 모든 것을 가렸다. 세계는 암흑의 혼돈 속으로 빠졌다. 붉은색으로 된 문장이 나타났다.
--제141호 문명은 화염속에서 멸망했다. 이 문명은 동한(東漢) 단계로 진화한다.
문명의 씨앗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 삼체 세계의 운명은 알 수 없는 진화를 시작할 것이다.
--다시 로그인하십시오.
왕먀오는 V 장비를 벗었다. 정신적 충격이 조금 가라앉자 삼체는 가상 세계로 위장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하고 깊은 진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에 비해 눈앞의 현실 세계는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단순하고 얄팍한 <청명상하도> 같았다. (P168)
“시스템이 발사하는 전파는 변조를 거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변조는 일반 무선통신과는 전혀 다릅니다. 정보를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되는 주파수와 진폭으로 적의 차폐 방어 기능을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 시험 중입니다.”
예원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품었던 많은 의문들이 풀렸다.
“최근 주취안(酒泉)에서 발사한 표적 위성 두 대를 홍안 시스템으로 공격하는 실험이 성공했습니다. 목표물을 명중시켜 위성 내부를 1000도에 가까운 고온에 이르게 해서 탑재된 측정기와 촬영 설비가 전부 파손됐습니다. 앞으로 실전에서 홍안 시스템은 적의 통신과 정찰 위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 제국주의의 현재 주력 정찰 위성인 KH-8과 앞으로 발사할 KH-9, 소련 수정주의의 궤도가 낮은 정찰 위성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필요하면 소련 수정주의의 살류트 우주정거장과 미국 제국주의가 내년에 발사 예정인 스카이랩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정치위원, 지금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누군가가 예원제 뒤에서 말했다. 돌아보니 양웨이닝이었다. 레이즈청을 쏘아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일 때문이오.” (P176)
"예원제, 감청부의 업무 내용을 설명해주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적의 우주 활동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적의 우주선이 지상과 우주선 간의 통신을 감청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 우주 비행 관측부와 협력해 적 우주선의 궤도 위치를 놓치지 않고 홍안 시스템의 작전에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홍안의 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양웨이닝이 끼어들었다.
“레이 정치위원, 제 생각에 좋지 않은 결정 같습니다. 그녀에게 말할 필요가 정말 없습니다.”
예원제는 양웨이닝을 쳐다보며 불안하게 말했다.
“정치위원님, 제가 아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아니, 아닙니다.” (P179)
예원제는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아련한 말투로 말했다.
“외계 문명 탐사는 매우 특수한 분야야. 연구자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사람 소리도 모두 끊긴 깊은 밤, 이어폰으로 우주에서 전해지는 생명이 없는 소리를 듣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그 별들보다 더 영원한 것 같았어. 때로 그 소리는 다싱안링의 겨울에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처럼 차가워. 그 고독은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때로 야근을 마치고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마치 빛나는 사막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 사막에 버려진 불쌍한 아이 같고...... 이런 생각이 들어. 지구의 생명은 정말 우주의 우연 속의 우연이라고. 우주는 텅 빈 큰 궁전이고 인간은 그 궁전에 있는 유일한 하나의 작은 개미지. 이런 생각은 내 후반 생에 모순된 감정을 실어줬어. 때로 생명은 정말 귀해서 태산보다 무겁게 느껴지지만, 또 때로는 인간이 너무나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느껴져. 어쨌든 삶은 이런 이상한 감정 속에 하루하루 지나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늙었지.....”
고독하지만 위대한 사럽에 평생을 바친 존경스러운 노인에게 왕먀오는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원제의 마지막 말에 같이 쓸쓸해져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 선생님, 나중에 제가 홍안 기지 유적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예원제는 고개를 저었다.
“왕먀오, 나는 자네와는 달라. 나이도 많고 몸도 안 좋아.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지.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뿐이야.”
예원제의 은발을 보면서 왕먀오는 그녀가 딸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P198-199)
왕먀오가 차분하게 말했다.
“세 개의 태양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보를 기록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위대한 광경을 본 순간은 겨우 몇 초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누구도 거기에서 도망치거나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세 개의 태양이 하늘에 뜬’ 것은 삼체 세계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재난입니다. 세 개의 태양이 뜨면 행성 지표면은 순식간에 용광로로 변할 것입니다. 그 고온은 암석도 용해시킬 수 있습니다. ‘세 개의 태양이 하늘에 뜬’ 가운데 멸망한 세계에서는 유구한 시간이 흘러야만 다시 생명과 문명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역사 기록이 없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모든 사람이 교황을 쳐다보았다.
교황이 온화하게 말했다.
“태워 죽여라.”
그 얼굴에 익숙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주왕의 웃음이었다.
대전은 즉시 생기가 돌았다. 모두 무슨 기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갈릴레이와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십자가 형틀을 가져와 까맣게 탄 시체를 내려 한쪽에 던지고 십자가를 세웠다. 다른 사람들도 신나서 나무를 쌓아 올렸다. 다빈치만 무관심한 듯이 탁자 한쪽에 앉아 연필로 무엇인가를 계산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불탄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브루노네. 당신처럼 제멋대로 지껄였지.”
교황이 조용히 말했다.
“약한 불로.”
병사 두 명이 내화성 석면 끈으로 왕먀오를 화형 틀에 묶었다. 왕먀오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교황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분명 프로그램일 거야. 다른 사람들은 프로그램이 아니면 백 치고, 나는 다시 로그인해서 들어올 수 있어!”
갈릴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돌아올 수 없어. 삼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야.”
“그러면 당신도 프로그램이겠군. 정상적인 사람이 인터넷 상식도 모르다니. 이곳은 내 맥 컴퓨터 정보를 저장했을 테니 다른 컴퓨터에서 아이디를 바꾸면 돼. 그때 내가 누군지 밝히겠어.”
“시스템은 V 장비를 통해 당신의 망막 정보를 저장했소.”
다빈치가 고개를 들어 왕먀오를 한번 쳐다본 다음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하던 계산을 계속했다.
왕먀오는 갑자기 공포가 몰려와 소리쳤다. (P206-207)
그래서 나는 이 무한한 공간에 작고 질량이 있는 구체(球體) 하나를 창조했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 구체는 공의 정중앙에 떠 있었습니다. (무한한 공간에서는 어디든 정중앙입니다.) 그 우주에는 구체에 작용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구체 역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구체는 그곳에 떠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영원히 변화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설명일 것입니다.
나는 첫 번째 구체와 크기와 질량이 같은 두 번째 구체를 창조했습니다. 거울로 되어 있어 자신을 제외한 우주의 모든 것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구체에 초기 운동, 즉 내가 첫 움직임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금세 각자의 인력으로 서로를 잡아당겨 두 구체가 서로에게 기대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떠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죽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초기 운동이 있고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 그들은 각자의 인력 작용 아래 상대를 중심으로 회전할 것입니다. 초기 설정을 어떻게 해도 구체의 회전은 고정되어 영원히 변치 않은 채 죽음의 춤을 출 것입니다.
세 번째 구체를 넣자 상황이 놀랍게 변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도형은 내 의식 깊은 곳에서 모두 숫자화됩니다. 세 번째 구체가 없는 상태, 즉 하나일 때와 두 개일 때의 우주는 하나 또는 몇 줄의 방정식만 그려냈습니다. 마치 늦가을 낙엽 몇 장처럼요. 하지만 세 번째 구체는 공이라는 눈을 그려 넣은 용이었습니다. 세 개의 구체가 있는 우주는 단숨에 복잡해졌고 초기 운동을 마친 세 개의 구체는 복잡하고 영원히 중복되지 않을 것 같은 운동을 진행하면서 폭우처럼 많은 방정식을 쏟아냈습니다. 나는 이렇게 꿈나라로 빠져들었습니다. 세 개의 구체가 꿈속에서 불규칙하고 영원히 중복되지 않는 춤을 추었습니다. 하지만 내 의식 깊은 곳에서 이 춤은 리듬이 있었습니다. 그저 중복되는 주기가 무한히 긴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에 사로잡혔고 이 주기의 일부분 또는 전부를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다음 날도 나는 공에서 춤추는 세 개의 구체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그렇게 쏟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스님이 그분에게 내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괜찮다. 그가 공을 찾은 것뿐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공을 찾았습니다. 나는 시장에서도 은둔할 수 있었습니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수학의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삼체문제(三體問題)의 물리 원리는 단순합니다. 사실 수학 문제죠. 그때 나는 반평생 화류계를 전전하던 탕자가 갑자기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P215-217)
왕먀오가 물었다.
“삼체문제 연구는 진전이 있었습니까?”
현재 이 연구 분야의 일반적인 상황으로 보면 상당한 진전을 거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의 리처드 몽고메리와 파리 제7대학의 산타 크루즈 그리고 프랑스 계량 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이 ‘근사법’이라고 부르는 계산법을 이용해 삼체 운동의 가능한 안정 형태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적절한 초기 조건에서 삼체의 운행 궤도는 머리와 꼬리가 연결된 8자 형태를 띨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특수한 안정 상태를 찾는데 열중했고 현재까지 서너 종류를 찾아냈습니다. 사실 나는 유전 알고리즘으로 100여종의 안정 상태를 찾아냈고 그것의 궤도를 그려냈습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 화가전을 열어도 될 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목표가 아닙니다. 삼체문제의 진정한 해결 방법은 어떠한 시간 단면의 초기 운동 벡터를 알고 있을 때 삼체 시스템 이후의 모든 운동 상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수학모델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위페이도 갈망하는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조용한 생활은 어제로 끝났습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겼거든요. (P224)
“최대한 그들이 말한 그대로 말해보게.”
“그러지요. 판한이 ‘우리처럼 겉으론 같은 편 같아 보이는 사람이 사실 극단에 선 적이지!’라고 하자, 선위페이가 말했죠. ‘그래요. 당신들은 주의 힘을 빌려 인간에 반대하지요.’ 그러자 판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우리는 주가 세상에 강림해서 진작에 벌을 받았어야 할 인간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이 강림을 막고 있지. 그러니 우리는 공존할 수 없어. 당신들이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들을 중단시켜주겠어!’ 라고 했습니다. 선위페이가 ‘당신 같은 악마를 조직에 들여놓다니, 총사령관님도 눈이 멀었지!’ 하고 말했습니다. 판한이 다시 말하더군요. ‘총사경관을 거론하니 말인데 총사령관은 어느 파인가? 강림파 아니면 구원파? 당신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나?’ 이 말에 선위페이는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말다툼하지 않아서 듣지 못했습니다.”
“전화로 자네를 위협하던 사람 목소리는 누굴 닮았나?”
“판한을 말하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작아서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차 몇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밖에 도착했다. 흰 장갑을 끼고 카메라를 든 경찰들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빌라 안이 분주해졌다. 스창은 왕먀오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다. 왕먀오는 소형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웨이청을 찾았다.
“그 삼체문제 진화 알고리즘 모형에 관한 개요 같은 것을 줄 수 있습니까? 어떤 곳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좀 무례한 부탁이니,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P230-231)
왕먀오는 건물을 돌아 뒤쪽으로 갔다. 놀라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단진자였다. 건물 앞에서도 단진자가 살짝 보였지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왕먀오가 삼체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전국 시대의 대지에서 봤던, 복희가 태양을 잠재우려고 만들었던 그 거대한 단진자였다. 눈앞에 놓인 대형 단진자는 현대화된 모습으로 바뀌었고 진자를 지탱하는 두 개의 높은 탑은 모두 금속 구조로 에펠탑만큼 높았다. 진자 역시 금속이고 표면은 매끈하게 도금된 거울이었다. 진자를 매단 고강도 케이블은 매우 가늘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진자가 두 개의 높은 탑 사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P267)
“대분열이요?”
“앞선 문명을 멸망시킨 대재난입니다. 예전 문명에 비해 이 재난은 경계 기간이 상당히 길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191호 문명의 천문학자가 예전부터 ‘비성부동(飛星不動)’을 예측했습니다.”
마지막 네 자를 듣는 순간 왕먀오는 마음이 뜨끔했다. ‘비성부동’은 삼체 세계 최대의 흉조였기 때문이다. 비성 또는 먼 곳의 태양이 지면의 관찰 각도에서 봤을 때 우주를 배경으로 정지하는 것은 태양과 행성의 일직선상에서 운행된다는 것을 뜻하고,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태양과 행성이 같은 속도와 같은 방향으로 운행한다. 둘째, 태양이 현재 행성에서 멀어지고 있다. 셋째, 태양이 현재 행성을 향해 오고 있다. 191호 문명 전에는 그저 상상 속 재난일 뿐이며 정말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 대한 공포와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비성부동’은 삼체 문명에서 가장 불길한 주문이 되었다. 비성 한 개만 정지해도 사람을 덜덜 떨게 했다.
사무총장이 말했다.
“당시 세 개의 비성이 동시에 정지했습니다. 191호 문명 사람들은 대지 위에 서서 세 개의 비성이 공중에 멈춘 것을 무력하게 바라봤습니다. 그들의 세계를 향해 곧바로 달려오는 세 개의 태양을 봤습니다. 며칠 뒤, 태양 하나가 대기층 바깥의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왔습니다. 조용한 밤하늘에서 그 비성은 갑자기 사방으로 빛을 흩뿌리며 태양으로 변했습니다. 30여 시간 뒤 다른 두 개의 태양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건 일반적 의미의 ‘일직선으로 늘어선 세 개의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비성이 태양으로 변할 때 첫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행성을 스쳤고 바로 그 뒤를 이어 다른 두 개의 태양이 더 가깝게 스쳐 갔습니다! 세 개 태양이 행성에 미친 기조력(起潮力)은 모두 로시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첫 번째 태양은 행성의 가장 깊은 지질 구조를 뒤흔들었고, 두 번째 태양은 행성의 내핵을 향해 직선으로 이어지는 대균열을 만들었으며, 세 번째 태양은 행성을 두 동강 냈습니다.”
그가 하늘 한가운데에 뜬 거대한 달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P271-272)
태양은 전파 증폭기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태양은 지구가 방출하는 무선 전파를 포함한 우주에서 온 전자기복사를 늘 받는데 어째서 그중 일부만 증폭할까? 이유는 명확했다. 에너지 거울이 반사 주파수를 선택할 수 있기도 하지만 태양 대류층의 차단 작용이 더 큰 이유였다. 표면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대류층은 복사층 위에 위치한 태양의 가장 바깥에 있는 액체층이다. 우주에서 온 전파는 우선 대류층을 통과해야 복사층의 에너지 거울에 도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증폭되어 발사될 수 있다. 이때 전파의 일률은 역치(閾値)를 초과해야 하지만 지구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무선 발사는 이 역치보다 낮다. 그러나 목성의 전자기복사는 이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홍안의 최대 발사 일률 역시 이 역치를 초과한다!
태양 간섭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른 가능성이 나타났다. 인류가 태양을 초대형 안테나로 삼아 우주에 전파를 발사하면 그 전파는 항성급의 에너지로 증폭되어 발사되고 그 일률은 지구에서 사용 가능한 전체 발사 일률보다 몇억 배는 클 것이다 .
지구 문명이 2형 문명급 발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P297)
인류 문명의 운명이 이 가느다란 두 손가락에 달려 있었다. 예원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사 버튼을 눌렀다.
당직자 한 명이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예원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노란색 버튼을 눌러 발사를 중지시키고 방향대를 다시 움직여 안테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고는 콘솔에서 벗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당직자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퇴근 준비를 했다. 일지를 가져다 방금 예원제가 발사 시스템을 가동한 것을 기록하려고 했다. 이상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 종이테이프에 찍힌 발사 시스템 가동 시간이 3초도 안 된 것을 보고 일지를 제자리에 던지고 하품을 하면서 군모를 쓰고 나갔다. 그때 우주를 향해 날아간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막 떠오른 태양을 마주하자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문을 나서 몇 발짝 걷지도 못하고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깨어보니 의무실이었다.
양웨이닝이 몇 년 전 헬기에서처럼 침대 옆에서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가 예원제에게 임신했으니 휴식을 취하라고 말했다. (P311)
“지금 보는 것은 지구 삼체 조직의 첫 번째 회원들입니다. 우리의 이상은 삼체 문명의 힘을 빌려 인류 문명을 개조하고 인류의 광기와 사악함을 억제해 지구를 다시 한번 조화롭고 죄악 없는 세상으로 번영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조직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원제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지구 삼체 운동의 총사령관을 맡아주십시오. 지구 삼체 전사들이 모두 당신의 자격을 인정했습니다!”
예원제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번스가 주먹을 높이 들고 회원들에게 소리쳤다.
“인류의 폭정을 제거합시다!”
파도 소리와 바람을 가르며 안테나가 내는 굉음에 맞추어 삼체 전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세계는 삼체의 것이다!”
이날은 지구 삼체 운동 탄생일로 공인되었다. (P356)
왕먀오와 스탠턴 장교는 관광객처럼 꽃무늬 셔츠 차림에 커다란 밀짚 모자를 쓰고 산중턱의 시원한 정자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운하가 한눈에 보였다.
운하 양쪽에는 높이 24미터의 강철 기둥이 각각 놓여 있었다. 160미터 길이의 초강도 나노 줄 50가닥이 50센티미터 간격으로 두 강철 기둥에 연결되었고 각각의 나노 줄은 오른쪽에 와이어를 연결했다. 다행히도 운하는 왕먀오가 생각한 것처럼 혼잡하지 않았고 하루 평균 40척 정도의 대형 선박만 통과했다. 강철 기둥은 모두 접이식으로 연결되어 운하 양옆에 누워 있었다. ‘심판일’호의 앞 선박이 통과하면 와이어를 잡아당겨 나노 줄을 오른쪽 언덕 강철 기둥에 마지막으로 고정시킨 다음 기둥을 세울 예정이었다. 작전명은 ‘쟁(爭)이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노 줄로 이루어진 절단 그물은 ’금(琴)‘이라고 불렀다.
한 시간 전에 ‘심판일’호가 가툰 호수에서 게일란드 수로로 진입했다.
스탠턴이 파나마에 와본 적이 있는지 왕먀오에게 묻자, 그는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1990년에 왔었지요.”
“전쟁 때문에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지 않은 전쟁이었어요. 바티칸 대사관 앞에서 포위당한 노리에가 대통령밖에 기억나질 않으니.” (P382)
이 정보를 받을 세계에 축복을 기원합니다.
다음 정보를 통해 당신들은 지구 문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길고 긴 노동과 창조를 거쳐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고 다양한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또한 자연계와 인류 사회 운영 발전의 규칙을 기본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에는 여전히 큰 단점이 있습니다. 원한과 편견, 전쟁이 존재합니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 부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많은 인류 구성원이 빈곤과 어려움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인류 사회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각종 어려움과 문제를 열심히 해결하고 있으며 지구 문명의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정보를 발송하는 나라가 하는 사업이 바로 이런 노력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 구성원의 노동과 가치가 충분히 존중받고, 모든 사람의 물질과 정신 수요가 충분히 만족되며, 지구 문명이 더욱 아름다운 문명이 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꿈이 있습니다. 우주의 다른 문명 사회와 연락을 하고 당신들과 함께 광활한 우주에서 더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기를 바랍니다. (P392)
그는 아득히 먼 천국을 잃을 수 없었다. 설령 꿈속에서라도 말이다.
감청원은 우주적 차원에서 우주의 저주파 전파는 측량 기준선이 충분히 길지 않아 송신원의 방향만 알 수 있을 뿐 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방향의 먼 거리에서 높은 일률로 발사했을 수도 있고 가까운 거리에서 낮은 일률로 발사했을 수도 있었다. 그 방향에만 억만 개의 항성이 있고 각 항성은 거리가 제각각 다른 별들이 모인 은하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신원의 거리를 모르면 위치 좌표를 확정할 수 없었다.
거리, 관건은 거리다!
사실 송신원의 거리를 확인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상대방에게 회신을 보내면 된다. 만일 상대가 이 회신을 받고 단시간 내에 회신하면 시간 간격과 광속으로 거리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상대가 회신을 할 것인지였다.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회신을 하면 삼체인은 전파 신호가 오는 길에 시간을 얼마나 소모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발사원이 먼저 우주에 소리쳤으니 그들이 삼체 세계의 정보를 받으면 회신할 가능성이 높았다. 감청원은 현재 삼체 정부가 그 아득히 먼 세계에 정보를 보내 그들이 회신하도록 유인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정보가 발사되었을 수도, 아니면 아직 아닐 수도 있었다. 후자라면 자신의 비루한 생명을 불사를 기회가 있었다. (P395)
“맞다. 지구 문명을 멸망시키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은 호전적이라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그들과 하나의 세계에서 공존한다고 하자. 그들은 기술적으로 학습이 빠르다. 그렇게 되면 두 문명 모두 잘 지낼 수 없다. 우리 삼체 함대가 태양계와 지구를 점령하고 나면 지구 문명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인은 삼체 점령자가 존재하지 않는 듯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영원한 금지 사항이 있다. ‘출산.’ 우리는 이런 내용의 정책을 이미 확정했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너는 지구의 구세주가 되려고 하면서 왜 자신의 문명에는 책임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가?”
“삼체 문명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신에는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일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나?”
“물론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생존은 다른 모든 것의 전제니까요. 하지만 원수님,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문명의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전체 문명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존엄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합니다. 삼체 사회는 극단적인 억압 정치에 놓여 있습니다. 법률도 유죄 아니면 무죄, 딱 두 가지뿐입니다. 유죄면 사형, 무죄면 석방됩니다. 제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정신의 획일화와 메마름입니다. 정신을 허약하게 하는 모든 것이 죄악으로 치부됩니다. 우리는 문학도 예술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향유하는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랑도 고백할 수 없습니다....... 훤수님,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네가 말한 그런 문명이 삼체 세계에도 있었다. 자유와 민주가 있던 사회였고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네가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대부분은 봉쇄되고 금서가 되었다. 삼체 문명의 윤회 속에서 그런 문명이 가장 허약하고 가장 단명했기 때문이다. 난세기의 작은 재난에도 멸망해버렸지. 이제 네가 구하려고 했던 지구 문명을 보자. 영원히 봄 같은 아름다운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사회를 삼체 세계에 옮겨놓는다면 100만 삼체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 그 꽃은 연약하지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꽃은 천국의 한적함 속에서 자유롭고 아름답습니다.”
“삼체 문명이 그 세계를 점령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다.” (P398-399)
--지자 1호, 알겠다.
“원수님, 11차원으로 수축되면 우리는 영원히 이것을 잃습니다. 지자가 일반 미시 입자 크기로 수축되면 내부의 감응 신호 장치와 입출력 인터페이스가 모든 전자파의 파장보다 작아집니다. 이는 지자가 거시 세계를 감지할 수 없고 우리의 명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것을 미시 입자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자 2호, 3호, 4호를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한 개 이상의 지자는 모종의 양자 반응으로 거시 세계를 감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자핵 내부에 양성자 두 개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일정한 운동 법칙을 따릅니다. 스핀을 예로 들면 두 개의 양성자 스핀 방향은 반드시 상반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양성자가 원자핵에서 분리되면 그 둘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이 법칙은 계속 유효합니다. 그중 한 양성자의 스핀 방향을 변화시키면 나머지 하나의 스핀 방향도 즉시 상응하게 변화할 것입니다. 이 양성자 두 개가 지자로 만들어진다면 그들 사이의 이러한 반응을 기반으로 서로 감응하는 세트를 구성합니다. 지자 여러 개로도 이런 감응 대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대열은 임의의 크기에 도달할 수 있고 모든 주파수대의 전자파를 수신할 수 있으며 거시 세계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자 대열의 양자 반응을 구성하는 것은 매우 복잡합니다. 제 설명은 비유에 불과합니다.” (P425-426)
예원제가 삼체 세계의 정보를 읽고 있을 때 작전센터에서는 획득한 정보를 연구할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 전, 창웨이쓰 장군이 말했다.
“동지 여러분, 아마 지자가 우리의 회의를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더 이상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주위의 모든 것이 익숙했다. 커튼에는 여름의 무성한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참석자에게 이 세계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는 눈이 자신들을 주시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눈 아래 숨을 곳은 없었다. 이런 느낌은 그들의 일생을 따라다닐 것이고 그들의 후대 역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인류는 이런 상황에 정신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창웨이쓰가 이 말을 하고 3초 뒤, 삼체 세계는 지구 반군 외의 인류와 첫 번째 교류를 했다. 이후 그들은 지구 삼체 반군의 강림파와의 통신을 중단했다. 모든 참석자가 살아 있는 동안 삼체 세계는 어떤 정보도 보내오지 않았다.
이때 작전센터에 있는 모든 이의 눈에 왕먀오에게 카운트다운이 보였던 것처럼 정보가 떴다. 정보는 2초 남짓 짧게 반짝거리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그 내용을 보았다. 그것은 겨우 여섯 자였다.
너희는 벌레다! (P432-433)
보라, 이것이 바로 벌레다. 벌레의 기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삼체 문명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것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각종 살충제를 비행기로 분사하기도 하고 천적을 키워 뿌리기도 하고 알을 찾아 없애고 유전자 변형으로 번식을 근절하기도 했다. 태워도 보고 수몰시키기도 하고 각 가정에 살충제를 비치해놓고 사무실 책상에는 파리채같이 그들을 없앨 무기도 준비해놓았다. 이 긴 전쟁은 인류 문명과 늘 함께했고 아직까지도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았다. 벌레는 멸종되지 않았을뿐더러 예전처럼 여기저기에서 횡행한다. 그 수도 인간이 나타나기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인류를 벌레로 보는 삼체인은 벌레는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태양이 검은 구름에 가려졌고 대지에 드리운 그림자가 움직였다. 구름이 아니라 이제 막 도착한 메뚜기 떼였다. 그들은 금세 근처 들판에 내려앉았다. 세 사람은 생명의 폭우를 흠뻑 맞으며 지구 생명의 존엄을 느꼈다. 딩이와 왕먀오가 들고 있던 술병을 발아래 화베이 평원에 쏟았다. 벌레에게 바치는 술이었다.
왕먀오가 스창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스창.”
딩이는 스창의 다른 손을 잡았다.
“저도 고맙습니다.”
왕먀오가 말했다.
“빨리 돌아갑시다. 할 일이 많습니다.” (P439-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