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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해리스의 <콘클라베>

영화 <콘클라베> 2025년

by 노용헌

영화는 2025년 기대작으로, 골든글로브를 비롯해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 크리틱스초이스 등 굵직한 영화상에서 최다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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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은 아무 의미 없이 로멜리의 머리에서 윙윙거렸다. 요즘 점점 이런 현상이 잦아졌다. 주여, 이렇게 애원하나이다. 하오나 주님은 대답이 없으시군요. 지난해 내내 영적 불면증, 또는 어지러운 상념이 심신을 괴롭히고 성령과의 영교를 방해했다. 예전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왔던 일들이 아니던가. 취침 시간도 다르지 않았다. 성스러운 기도를 갈망할수록 점점 혼란스럽기만 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 교황에게 자신의 위기를 고해하고, 로마를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수석추기경 자리를 내놓고 수도회로 돌아가고 싶었다. 벌써 일흔 다섯, 은퇴할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교황은 그를 크게 나무랐다. 사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누군가는 목자로 선택받고 누군가는 목장을 관리해야 하오. 당신 임무는 목사도 아니고 목자도 아니요. 바로 관리자요. 난들 쉬운 줄 아오? 나한테는 당신이 필요하오. 자, 걱정하지 맙시다. 늘 그렇듯, 주님께서 다시 추기경을 찾을 터이니.” 로멜리는 실망했다. 관리자라고? 교황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 바람에 헤어질 때도 서먹서먹했건만..... 맙소사, 그때가 마지막이라니!

“...... 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하옵소서. 빛이 영원히 그를 비추게 하소서(Requiem acternam dona el,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l)......"

기도를 마친 후에도 추기경들은 침대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묵상을 올렸다. 2분쯤 지나 로멜 리가 고개를 조금 돌리며 눈을 반쯤 떠봤으나 등 뒤 객실에서도 다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는 다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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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로멜리는 이때를 돌아보며, 바로 그 순간 교황위 승계 전쟁이 시작됐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세 추기경 모두 선거인단 내에 지지파가 있었다. 벨리니는 그레고리오 대학 총장과 밀라노 대주교를 역임했으며, 아주 오래전부터 진보주의자들의 위대한 지적 희망이었다. 트람블레이는 교황청 사도 궁무처장과 인류복음화성 장관을 동시에 맡고 있기에 제3 세계와 관련해 후보 자격이 있었다. 더욱이 미국인처럼 보인다는 이점도 있었다(실제로 미국인이라면 선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데예미는 혁명의 가능성을 신성의 불꽃처럼 품고 다니는데, 늘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기에 언젠가는 ‘최초의 흑인 교황’이 될 것 같은 인물이다.

더욱이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보았듯이, 추기경단 단장으로서 선거관리 임무가 자신에게 떨어지리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몇 년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기에, 비록 지금은 완치됐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교황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오로지 임시방편으로만 여기고 살았으며, 실제로 사임까지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이런 난감한 상황에 콘클라베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로멜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 부디 지혜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일과 더불어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공평해야 한다. (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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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선거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 후 3주가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교황은 복음전도사 성 루카 축일 다음 날, 즉 10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10월 중순 이후와 11월 초 사이에는 교황 후계자를 뽑기 위해 전 세계 추기경들이 로마로 쏟아져 들어오고, 장례도 있기에 매일 추기경단이 모여 회의를 했다. 회의는 비밀이며 주제는 물론 교회의 미래였다. 진보파와 보수파의 알력이 이따금 표면화되기는 했어도 회의 자체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드디어 11월 7일 일요일, 순교자 성 헤르쿨라누스 축일. 로멜리는 시스티나 예배당 입구에 섰다. 추기경단 부단장 레이먼드 오말리 몬시뇰, 전례처장 빌헬름 만도르프 대주교가 좌우를 보좌했다. 선거인 추기경단은 바로 그날 밤 바티칸에 갇히고 투표는 다음 날 시작하기로 했다. (P42)


로멜리는 현재 오스티아(이탈리아 로마시 서남쪽에 있는 고대 로마의 도시)의 주교 추기경이다. 그전에는 로마 성 마르첼로알 코르소의 사제추기경이었으며, 그전에는 아퀼레이아의 명의대주교였다. 비록 명목뿐이었다 한들 어떤 자리에서든 열심히 일했다. 설교를 하고 미사를 주관하고 고해성사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우주 교회의 최고 왕좌에 오른다 한들 평범한 시골 사제의 기본적인 기술조차 모를 수 있다. 단 1~2년 만이라도 평범한 교구에서 지내보았으면 좋으련만! 서품을 받은 이후 처음에는 교회법 교수로, 외교관으로, 마지막으로 짧으나마 국무원장으로 봉사의 길을 따라왔다. 하지만 높이 오를수록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천국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그런데 이 미천한 존재가 추기경들을 인도해, 베드로의 열쇠를 누가 차지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세르부스 피델리스(Servus Fidelis). 충실한 하인, 그의 문장에 새긴 글귀다. 고리타분한 인간을 위한 고리타분한 모토.

관리자......

한참 후 다시 침실로 돌아가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좋아, 그럼 관리하면 되잖아.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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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묘하게도 로멜리는 저 늙은 야만인에게 향수를 느꼈다. 어쨌든 함께 살아남은 두 사람이 아닌가. 둘 모두에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콘클라베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참석자 대부분 과거 한 번도 콘클라베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만일 추기경단이 젊은 교황을 선출한다면, 거의 대부분 다시는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깊어갈수록 더 많은 추기경들이 가방을 들고 비탈길을 올라왔다. 이따금 혼자이기도 하나 대개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었다. 로멜리는 이 희대의 역사에 많은 이들이 고무해 있음을 보고 감동했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얼마나 다양한 인종을 대표하는지 보라. 이 넓디넓은 우주 교회에서 문화도 지형도 다르게 태어났건만, 이렇게 주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함께 모이다니! 동양 주교단, 마론파, 콥트하에서는 레바논과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이 참석하고, 인도에서는 트리반드룸과 어나쿨람-앙가말리의 대표 대주교, 그리고 란치의 대주교 사베리오 할코가 왔다(다행히 그 이름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었다).

“할코 추기경 예하, 콘클라베에 잘 오셨습니다.” (P61)


전 세계에서 찾아온 추기경들과 달리 이들한테서 경건한 모습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기는 하나 이미 너무 많이 겪었기에 무덤덤해진 것이다. 로멜리 자신도 영적 상처를 입고 그런 식의 일탈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 바 있었다. 죽은 교황도 종종 추기경들을 다그쳤다. “마음 단단히 먹게, 형제들이여. 허영과 호기심, 악의와 험담의 죄들, 사악한 방해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네. 절대 굴하지 말게나.” 교황이 죽던 날 벨리니가 해준 얘기가 있었다. 교황 역시 교회를 향한 믿음을 잃었다고...... 로멜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얘기였기에 어떻게든 마음에서 몰아내려 애썼지만..... 교황이 말한 교회란 분명 이들 관료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 교황 자신이 뽑은 이들이 아닌가. 뽑으라고 강요한 사람도 없다. 예를 들어 신앙교리성 장관 시모 구투소 추기경이 있다. 성품이 온화한 터라 자유주의자들까지 큰 기대를 갖고 ‘제2의 요한 23세’라 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교들의 자율권을 확대하겠다고 공약해놓고는 교황청에 들어가자마자 전임자들만큼이나 권위주의적이고 그들보다 게으른 인물로 탈바꿈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르네상스인들만큼이나 살이 찌더니, 이제는 성 카를로 궁전의 호화 아파트에서 성녀 마르타의 집까지 그 짧은 거리를(거의 옆집이나 다름없다) 걷는 것마저 힘들어했다. 전속 사제가 바로 뒤에서 가방 세 개를 들고 허겁지겁 따라왔다.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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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프런트데스크 안에서 수녀 둘이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바쁘게 컴퓨터를 두드려댔다.

“이름은 빈센트 베니테스, 바그다드 대주교입니다, 예하.”

“바그다드? 그런 곳에 대주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라크 사람인가?”

“그럴 리가요! 필리핀 사람입니다. 성하께서 지난해에 임명하셨죠.”

“그래,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것 같군.” 언젠가 잡지 사진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다 타버린 교회 안에 가톨릭 대주교가 서 있었는데…… 그 사이에 추기경이 되었단 말인가?

“누구보다 예하께서 이번 임명을 아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만도르프가 물었다.

“아니, 모르네. 그게 이상한가?”

“예, 그분이 진짜 추기경이라면 성하께서 적어도 추기경단 단장님께 알렸을 테니까요.”

“꼭 그렇지는 않네. 기억하겠지만 선종 직전, 의중 결정 추기경 임명 건으로 교회법을 완전히 뒤집으셨으니.”

로멜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사실 그간 다른 추기경들보다 이 마지막 손님을 냉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중(in pectore)이란 오래된 조항으로 교황은 최측근을 포함, 누구에게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추기경을 선임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교황청에서 오랜 세월을 지냈건만 의중 결정 추기경 얘기는 단 한 번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교황 선종 이후에도 공포된 바가 없었다. 그 일이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 때였는데, 지금껏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짐작으로는 늘 중국인이며, 정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익명으로 남아 있다는 정도? 어쩌면 마찬가지로 안전 문제가 바그다드 대주교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문득 돌아보니 만도르프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위에 땀을 비 오듯 쏟는 탓에 축축한 대머리 위로 샹들리에 불빛이 번들거렸다.

“물론 성하께서 그렇게 민감한 결정을 했을 때 당연히 최소한 국무원장과 상의는 했겠지. 미안하지만 벨리니 추기경을 찾아서 이리 오라 하지 않겠나?”

오말리가 떠나고 로멜리는 다시 만도르프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진짜 추기경이라고 생각하나?”

“교황 성하의 임명장을 지녔더군요. 바그다드 대주교구 앞으로 보냈지만 성하의 요청에 따라 교구에서도 비밀로 한 듯합니다. 관인(官印)도 찍혀 있습니다. 직접 보시죠.” 만도르프가 서류 다발을 로멜리에게 건넸다. “게다가 이분은 대주교이십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봉사하는..... 신임장을 위조할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서류는 분명 진짜처럼 보였다. 로멜리가 서류를 돌려주었다.

“그럴 것 같군. 지금 어디 있지?”

“내실에서 기다리시라 일렀습니다.” (P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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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께 정말 이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세요?”

“조심하세요. 친구. 그런 발언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성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어요. 그분의 바람을 존중할 의무뿐이죠.”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은 교리 문제입니다. 임면권까지 무결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교황의 무류성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는 잘 알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교회법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라면 나도 추기경 못지않게 일가견이 있답니다. 교황령 39절은 아주 구체적이죠. ‘추기경 선거인단이 사전에 즉 신임 교황이 선출되기 전에 도착한다면, 선거가 어느 단계이든 상관없이 참여하도록 허락할지어다.’ 저 양반은 합법적인 추기경입니다!”

로멜리는 팔을 뿌리친 뒤 문을 열었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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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베니테스의 사명은 로멜리 자신이 마닐라 거리에서 수행한 임무와 비슷했다. 활동적이고 위험천만한 일들, 심지어 내전 와중에 강간당한 여인과 소녀들을 위해 의료원과 숙소를 짓기도 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선교사-사제가 왜 그렇게 교황 성하의 마음을 끌었는지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신을 만나고 싶으면, 안락한 제1 세계 교구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가장 절박한 곳으로 가야 한다. 그분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든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질지어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삶을 버리면 구할 것이니라..... 베니테스는 정확히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교회의 장벽을 통해서라면 결코 이곳에 이르지 못할 사람.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을 사람. 그래서 사회적, 사교적으로 늘 어색한 사람. 그렇다. 저렇듯 특별한 성직 수여가 아니라면 어떻게 추기경단에 속할 수 있었겠는가. 로멜리는 비로소 그 모두를 이해했다. (P101)


콘클라베 추기경들은 서로 라틴어로 소통해야 했어요. 그러다가 1962년, 자유주의자들이 사어를 버리고 보다 쉽게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죠? 의사소통만 더 어렵게 되지 않았나요?“

“콘클라베만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만 우주 교회로 사명을 넓히면 결과는 다를 겁니다.”

“우주 교회? 50여 개 언어로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 우주가 이해를 합니까?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언어에서 사고가 생기고 언어에서 철학과 문화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벌써 60년 전이지만, 유럽에서 가톨릭교도가 된다는 의미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서와 그 뜻이 달라요. 기껏 연맹에 불과하다니까요. 여기 만찬장을 둘러보시죠. 예하, 이렇게 간단한 식사에서조차 언어가 우리를 어떻게 떼어놓고 있는지 보이시죠? 그래도 제 말이 틀렸습니까?”

로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의 논리가 아무리 궤변이라도 어쨌든 중립을 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논쟁에 휘말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테데스코가 정말 심각하게 주장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찔러보는 건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가 드릴 말씀은..... 고프레도,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내 연설은 크게 실망스러우실 겁니다.”

“라틴어를 포기하면 결국 로마를 포기하는 겁니다. 명심하세요.”

“오, 이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억측이십니다!” (P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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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테데스코와 반대라고 설명하게. 저 양반 신념은 확고하지만 결국 확고한 헛소리일 뿐이야. 절대로 라틴어 기도 시대로 돌아가지도 않고 사제들이 군중들에게 등을 도린 채 미사를 집전하는 일도 없을 걸세. 단지 부모가 무지하다는 이유로 자식이 열 명이나 되어도 안 되고, 지극히 역겹고 억눌린 시대였어. 그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네. 나는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우리 교회 내에서도 견해 차이를 인정한다고 전하게. 주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또한 여성들이 교황청 내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사바딘이 말을 끊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진심이십니까? 아무래도 여성 문제는 뺐으면 합니다. 테데스코에게 공격의 빌미만 제공할 겁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저쪽에서는 예하께서 여성 서품을 추진하려 한다고 우길 거예요.”

로멜리가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벨리니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인정하지. 여성 서품 얘기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금지하겠네. 아마도 앞으로 몇백 년은 그렇겠지.” (P109)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조?”

“오, 물론이죠.” 라자팍세를 돌아보며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합시다”라고 말하고는 스리랑카 대주교가 두 사람에게 고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트람블레이는 그를 보내기가 무척 아쉬운 듯 보였다. 그래서일까? 돌아서서 로멜리에게 말할 때는 목소리에 앙금까지 느껴졌다. “무슨 일입니까?”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죠. 예하의 방 어떠신가요?”

트람블레이의 얼굴이 굳어지고 미소도 사라졌다. 어쩌면 거절할지도 모르겠다.

“에, 필요하다면 해야겠죠. 하지만 짧게 해주시죠. 아직 만날 사람이 많습니다.”

그의 방은 1층이라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통과했다. 용무를 빨리 끝내고 싶은 까닭인지 걸음도 빨랐다. 스위트룸. 교황의 방과 정확히 똑같은 규모였다. 천장 샹들리에, 협탁과 책상 램프, 심지어 욕실 등까지 모두 켜둔 채였다. 실내조명이 마치 수술실 살균 등처럼 이글거렸다. 소지품이라 해봐야, 협탁에 헤어스프레이 통 하나가 전부였다. 트람블레이는 문을 닫고도 로멜리에게 앉으라 청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교황 성하와의 마지막 면담 얘기 좀 하고 싶어서요.”

“그게 어땠는데요?”

“듣기로는 어려웠다면서요?”

트람블레이가 기억하기 쉽지 않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뇨, 내 기억으로는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추기경한테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라고 요구하셨다더군요.”

그 말에 트람블레이는 오히려 표정이 밝아졌다.

“아하! 그 헛소리? 보지니아크 대주교죠?”

“그 점은 밝힐 수 없습니다.” (P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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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티가 앞에 서더니 팔을 뻗어 흰색 물결무늬 주교관을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나 사팔눈으로 제대로 자리 잡았는지 확인하고 다시 다가와 1밀리미터쯤 조정한 뒤 다시 돌아가 등의 리본들을 당기고 어루만졌다. 솔직히 기분은 끔찍할 정도로 불안했다. 마침내 자네티가 홀장을 건넸다. 로멜리는 황금 목양자의 지팡이를 왼손에 잡고 두어 번 무게를 가늠했다. 당신은 목자가 아니야. 당신은 관리자야. 머릿속 익숙한 목소리. 문득 홀장을 돌려주고 옷을 갈가리 찢은 뒤, 난 사기꾼이야!, 라고 소리치며 사라지고 싶었다. 로멜리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안하군, 고맙네.” (P122)


로멜리는 추기경들을 둘러보았다. 의자는 넓게 네 줄로 나뉘었다. 현명한 표정, 따분한 표정, 종교적 열정이 가득한 표정....... 추기경 한 명은 아예 잠이 들었다. 아마도 옛 공화국 시절, 토가 차림의 고대 로마 원로들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여기저기 유력 후보들도 눈에 띄었다. 벨리니, 테데스코, 아데예미, 트람블레이..... 서로 떨어져 앉았지만 다들 자기 생각에 몰두한 듯 보였다. 문득 콘클라베가 너무 부족하고 자의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던가? 성서 어디에도 근거가 없었다. 성서를 아무리 읽어도 주께서 추기경을 만들었다는 구절은 보지 못했다. 성 바오로가 주님의 교회를 생명체로 묘사했는데, 저들이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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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는 바로 이 교회의 아버지를 살려 살아 있는 몸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진리와 사랑으로 산다면 모든 면에서 자라 그리스도께 적합하리로다. 주님은 머리이며, 그 머리에 따르매 온몸이 들어맞고 함께 결합하리로다.’ 손은 손이고, 발은 발입니다. 손과 발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님께 봉사하죠. 요컨대,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다양성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 바오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와 사랑을 완성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닐지어다. 교리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우왕좌왕하지 않고,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사기에 당하지도 않으리로다.’

저는 몸과 머리의 아이디어를 집단 지성을 위한 기막힌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공동체는 함께 자라 스스로 그리스도가 됩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성장하려면 서로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육신의 수족 모두가 필요하니까요. 어느 누구도, 어느 파벌도 상대를 지배하려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존경심으로 서로에게 복종하라.’ 바오로는 바로 그 편지로 다른 지역 신도들을 계도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 교회에 봉사하는 동안,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종국에는 확신을 두려워하시지 않았던가요?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Eli, Eli, lama sabachtani).'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쳤죠. 우리 신앙이 살아 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앙도 필요가 없겠죠.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바로 그 의심 덕분에 가톨릭 신앙은 계속해서 생명을 얻고, 그로써 전 세계에 영감을 줄 것입니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또 실천하는 교황을 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자, 다 함께 기도합시다. 모든 순교자와 성인, 사도의 여왕, 지극히 성스러운 마리아의 이름으로 로마 교회가 대대손손 영광되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P131-132)


“어떻게 그런 일이! 내가 뭘 요구했나? 세 가지 아닌가, 통합, 관용, 겸손. 아니, 우리 교황이 무자비하고 오만한 종파주의자라면 좋겠나?” 오말리는 고개를 숙여 복종의 예를 보였다. 문득 로멜리는 자기 목소리가 높았음을 깨달았다. 추기경 둘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미안하네, 레이. 미안해. 아무래도 한 시간 정도 내 방에 가 있어야겠어. 갑자기 지치는군.”

그저 중립적이고 싶었다. 평생 중립을 지키며 살지 않았던가. 전통주의자들이 신앙교리성을 장악했을 때도,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미국에서 교황 사절로 묵묵히 할 일을 했다. 20년 후, 죽은 교황이 옛 근위병을 없애고 그를 국무원장 자리에서 끌어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단 단장 지위에 만족하며 충실하게 봉사했다. 충복, 중요한 건 교회다. 그날 아침 한 얘기는 진심이었다. 신앙 문제에 관한 한, 무데뽀적 확신이야말로 큰 해악이 될 수밖에 없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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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청하오니, 여러분, 지금 마지막 순간에나마 성 바오로가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 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물론 그리스도를 배움에 있어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어린애들처럼 교리의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둘릴 겁니까?

형제들이여, 수석추기경은 태풍 속 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의 돛단배, 즉 성 가톨릭교회 말입니다. 교회는 지금 전대미문의 폭풍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온갖 속임수와 교활한 속임수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우리 배가 뚫고 가야 할 바람과 파도는 이름도 많습니다. 무신론, 민족주의, 불가지론, 마르크시즘, 자유주의, 개인주의, 페미니즘, 자본주의...... 하지만 이놈의 ‘주의’는 하나같이 우리를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려 하죠.

선거인단 여러분, 여러분의 의무는 새로운 선장을 뽑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 회의론자들을 몰아내고 키를 단단히 움켜쥐어야 합니다. 그놈의 ‘주의’야 매일 생겨나지만 사상의 값어치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의견이라고 다 의견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상대주의의 독재’에 굴복한 채, 온갖 부질없는 당파와 변덕스러운 모더니즘에 기대 살아가려 한다면 우리 배는 끝입니다. 우리한테 필요한 교회는 세계와 함께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세계를 움직일 교회입니다.

주님께 기도합시다. 이 막중한 선택의 순간,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어 부디 작금의 표류를 끝내줄 목자를 보여주소서. 그 목자가 다시 한 번 우리를 이끌어, 주님을 알고 주님의 사랑과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P157-158)


콘클라베. 라틴어로 콘 클라비스(con clavis). ‘열쇠를 지니다’라는 뜻이다. 13세기부터 교회는 이런 식으로 추기경들이 결정을 내리도록 보완책을 마련했다. 식사와 잠을 제외하고, 교황을 선택하기 전까지 추기경들은 이곳 성당을 벗어날 수 없다.

마침내 추기경 선거인단만 남았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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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투표하기로 하죠.” 로멜리는 자리로 돌아가 규정집과 투표용지를 챙긴 후 다시 제단으로 돌아왔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앞자리를 보시면 이런 용지가 있을 겁니다.” 그가 투표용지를 들고 추기경들이 붉은 가죽 폴더를 열 때까지 기다렸다. “보시다시피, ‘나는 아래와 같이 신임 교황을 선출합니다.’라는 글이 상단에 라틴어로 적혀 있고 아래는 빈칸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빈칸에 지지하는 후보자 이름을 적으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투표를 타인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고, 또 이름은 하나만 적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투표는 무효표가 됩니다. 글씨는 또박또박 써주시되 필체를 알아보지 않도록 해주세요.

자, 이제 교황령 5장 66절을 보시면 여러분께서 따르셔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추기경들이 규정집을 펼치자 로멜리가 큰 소리로 읽었다. 모두 이해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추기경 선거인은 선임 순으로 기표를 마치고 용지를 접은 뒤 손을 들어 모두가 볼 수 있게 한 채로 제단으로 가져간다. 제단에는 검표인들이 서 있으며, 제단 위에 그릇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접시가 있는데 용지는 바로 그 접시 위에 놓는다. 제단에 이르면 선거인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청하오니, 부디 내 인도자가 되시어, 내 표가 반드시 교황이 되어야 할 분께 가도록 이끄소서. 이제 용지를 접시 위에 두고 접시를 이용해 용지를 용기 안에 떨어뜨린다. 투표를 마치면 제단에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모두 이해하셨죠? 예, 좋습니다. 검표인들, 이제 자기 위치에 자리하세요.”

지난주 검표원 셋을 제비로 뽑았는데, 빌니우스의 룩샤 대주교, 성직자성 장관 메르쿠리오 추기경,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대주교 뉴비 추기경이었다. 셋은 에배당 여기저기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으로 이동했다. 로멜리도 자기 의자로 돌아가 펜을 집었다. 펜은 투표용으로 추기경들에게 하나씩 지급한 터였다. 로멜리는 팔로 투표용지를 가리고 대문자로 이름을 적어 넣었다. 마치 시험 중에 옆 사람에게 답안지를 보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벨리니, 로멜리는 용지를 접어 높이 든 다음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 청하오니, 부디 내 인도자가 되시어, 내 표가 반드시 교황이 되어야 할 분께 가도록 이끄소서.” (P16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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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에서는 기(氣)라고 하고 신앙인들은 성령이라 믿는 힘이 있다. 그 힘이 그날 밤 누군가에게 임했다면 다름 아닌 아데예미였다. 경쟁자들도 얼핏 눈치를 챈 표정이었다. 예를 들어, 추기경들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어나고 리스본 총대주교 루이 브란다우 드크루스가 저녁 끽연을 하겠다면 안뜰로 나가자 트람블레이가 곧바로 뒤쫓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지지를 부탁할 것이다. 그래도 아데예미는 그저 로비 모퉁이에 담담하게 서 있기만 했다. 유권자들을 그에게 몰고 와 대화를 하게 만드는 일은 지지자들 몫이었다. 그 앞에 금세 작은 줄이 생겼다.

로멜리는 프런트데스크에 기댄 채 커피를 홀짝이며 아데예미를 지켜보았다. 지금은 사람들과 대화 중이었다. 그가 백인이었다면 테데스코보다 반동적이라며 자유주의자들이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나,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맹렬히 비난하면 그저 아프리카 문화유산 탓으로 돌렸다. 아데예미를 온전히 이해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교회를 통합할 장본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도량도 커서 성 베드로의 옥좌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법하다.

문득, 너무 노골적으로 그만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하건만 솔직히 내키지가 않았다. 물론 로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는 했다. 하지만 컵과 접시를 방패처럼 들고는 가볍게 미소 짓거나 고개 인사를 하는 식으로 재빨리 추기경들을 피해 달아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모퉁이 주변, 그러니까 성당 문 옆에서 베니테스를 보았다. 지금은 추기경들이 에워싼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베니테스도 어깨너머를 돌아보고 로멜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양해를 구하고 로멜리한테로 건너왔다. (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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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돌이켜보면 분명 큰 실수였다. 그 즉시 옷을 갈아입고 아데예미 방을 노크했어야 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소문이 굳어지기 전에 미리 추기경을 만났다면 무슨 일인지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 로멜리는 다시 침대에 올라가 침대보를 턱까지 올린 채 무슨 일일까 궁금해했다.

가장 분명한 해명은 --그러니까 자기 입장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해석은-- 수녀한테 고민거리가 생겼고 그래서 깊은 밤 다른 수녀들이 건물을 떠난 후 변장한 채 아데예미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는 정도였다. 성녀 마르타의 집에 있는 수녀 상당수가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그녀 또한 나이지리아에서부터 추기경을 알았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한밤중에 동반자도 없이 수녀를 방에 들였으니 아데예미로서는 경솔하기 짝이 없는 처신이었다. 하지만 경솔한 행동을 딱히 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이후 이런저런 해석이 분분했지만 어느 것이든 로멜리로서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종류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상황을 다루는 훈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요한 23세의 <영혼일기(Journal of a Soul)>의 구절이 젊은 사제 시절의 갈등 이후 그 자신을 인도하기는 했다.

여자 문제라면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 대화하지 말라. 단 한 마디도. 이 세상에 여자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 해도,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절대 상의도 하지 말라. 이 진리야말로 내 성직 초기에 가장 심오한 불변의 가르침이었다.

이는 정신훈련 중에서도 핵심이었고, 덕분에 로멜리는 60년 이상 독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여자는 생각도 하지 말 것! 옆방에서 어떤 일이 있었으며, 또 아데예미와 남자 대 남자로서 여자 얘기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추기경의 폐쇄적인 지적 시스템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사건 자체를 아예 잊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데예미가 고해성사를 한다면 듣기는 할 것이다. 고해 신부의 입장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은 아예 일어난 적조차 없는 듯 행동하리라.

로멜리는 손을 뻗어 스위치를 껐다.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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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잠깐 둘이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아그네스 수녀?” 로멜리는 아그네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항변하려 들자 홱 몸을 돌려 노려보았는데, 어찌나 추상같던지 결국 아그네스도 고개를 떨구고는 뒷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 문까지 닫아주었다. 그 앞에서라면 교황 셋과 아프리카 폭군 한 명이 한 수 양보했다던 아그네스가 아니던가!

로멜리는 의자를 끌어다 수녀 맞은편에 앉았다.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사실 로멜리로서도 고통스러웠다. 오, 주여, 이 불쌍한 여인을 돕고, 또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어 주님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샤누미 수녀, 이 말씀부터 드리리다. 수녀님을 취조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우리 둘 다 주님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책무가 있으니 최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죠. 어떻게 끝이 나든 결론은 옳아야 해요. 그러니 가슴속에 있는 얘기를 있는 대로 말합시다. 아데예미 추기경과 관계있는 얘기라 괴롭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죠?”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 방 밖으로 한 마디도 나가지 않는다고 약속하리다.”

수녀는 잠깐 망설였으나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후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날 주께서도 도우신 게 분명하다.

“고해성사를 하시겠소?”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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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티피컬 라테란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을 읽었다. 당시 배운 내용이 군중을 다양한 범주로 나누는 일이었다. 겁에 질린 군중, 의욕을 잃은 군중, 반항하는 군중 등등. 사실 성직자 그룹에도 유용한 기술이다. 이 세속적 기술을 적용한다면 콘클라베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군중으로 읽힐 수 있다. 성령의 집단 충동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니 왜 아니겠는가? 라칭거를 선출했을 당시에도 그랬듯 콘클라베는 소심하게 변화를 거부할 수 있다. 어떤 콘클라베는 무모해서 보이티와 같은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이번 콘클라베와 관련해 로멜리가 걱정하는 바는, 카네티의 소위 분열하는 군중으로 점차 변질되는 것이다. 혼란스럽고 불안정해 쉽게 유혹에 휘둘리는 것이다. 이 경우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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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군요. 지금 우리 셋의 모임이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해 공모를 꾸미는 것 같은데..... 신성모독 아닌가요? 우리한테 필요한 건, 시가를 문 리스본 총대주교입니다. 그 양반이 시가를 피우면, 우리는 미국 정치 집회처럼 연기 가득한 방에 갇힐 테니까요.” 벨리니는 슬쩍 미소를 짓고 사바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서약을 잊지 맙시다. 당연히 교황이 되어야 할 사람을 선출하겠다고 주님께 서약하지 않았던가요? 그저 차악을 위해 투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말에 사바딘이 조소를 머금었다.

“오, 이런, 단장님. 아무래도 그 얘긴 궤변입니다! 첫 번째 투표라면, 누구나 순수하고..... 또 선합니다. 하지만 4~5차 투표에 다다를 때쯤 개인적인 지지자는 오래전 사라지고 선택은 좁아질 수밖에 없어요. 바로 이 집중 과정이 콘클라베의 기능이죠.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우린 몇 주 동안 이곳에 갇혀 지내야 할 겁니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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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수녀와 작별한 후 로멜리는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는 줄을 서서 커피를 받은 뒤 다시 로비로 나와 진홍색 안락의자 하나를 골라 앉았다. 프런트와는 등진 위치, 지금은 기다리며 지켜볼 때였다. 트람블레이 추기경, 아, 실로 대단한 인간이로군! 전혀 미국인답지 않은 북미인, 프랑스인이 아니면서 프랑스어에 능통한 자. 교조적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적 보수주의자(아니, 그 반대이던가?), 제3세계의 대변인인 동시에 전형적인 서구인, 맙소사, 그런 자를 과소평가하다니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 트람블레이는 이제 커피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사바딘이 대신 받아오지 않는가. 밀라노 대주교가 트람블레이를 이탈리아 추기경 그룹으로 데려가자, 무리는 경의를 표하고는 자리를 넓혀 그가 합석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로멜리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이다. 다만 구경꾼이 없기만 바랄뿐. (P267)

“일단 그가 성직 매매에 관여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상기하자면 성경에서도 규정한 범죄죠. 사도들이 손을 얹어 성령을 받게 하자, 시몬은 이를 보고 돈을 내며 이렇게 말하였노라. ‘내게도 그 힘을 주시오. 그리하여 내게 안수를 받으면 누구나 성령을 받게 해주시오.’ 그때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답하였도다. ‘당장 그놈의 은화를 들고 꺼지시오. 감히 돈으로 주님의 선물을 사려하다니!’”

로멜리가 얘기하는 동안, 벨리니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성직 매매가 어떤 의미인지는 압니다.”

“그간에도 공직이나 성사를 매수한 사례가 있었지만 이보다 더 분명한 경우가 있었던가요? 트람블레이가 첫 번째 투표에서 그만큼 득표한 이유는 매수했기 때문입니다. 주로 아프리카와 남미 추기경들이 대상이었죠. 이름도 모두 적혀 있습니다. 카르데나스, 디엔, 피가렐라, 가랑, 파풀루테, 바티스트, 싱클레어, 알라타스. 트람블레이는 심지어 현찰을 지불했어요.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죠. 이 과정이 모두 지난 12개월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필경 교황 성하께서 선종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했겠죠.”

벨리니는 서류를 다 읽고 난 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정보를 소화하고 증거 가치를 가늠하는 중이리라.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돈을 지불한 이유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죠?”

“은행 보고서를 봤으니까요.” (P287)


로멜리가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했을까요, 엑토르? 추기경 생각은 어때요?”

“양심을 따르는 이는 절대 잘못하지 않습니다. 예하, 결과가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잘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행동을 이끄는 이정표는 당연히 양심이어야죠. 주님의 목소리를 제일 잘 듣는 곳이 바로 양심이니까요.”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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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테데스코가 콘클라베를 장악한다면 그 책임 또한 받아들여야 했다. 추기경단 단장으로서 선두주자의 파멸을 공모하고 또 다른 주자의 몰락을 주도하지 않았던가. 테데스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면서도 정작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고 말았다. 벨리니는 더 이상 대안이 되지 못했다. 그에게 투표해봐야 아집에 불과할 것이다.

로멜리는 책상에 앉아 폴더를 열고 투표용지를 꺼냈다.

그럼, 베니테스? 그 양반이라면 틀림없이 숭고하면서 이해력도 깊다. 그 점에서라면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지 않은가? 그가 교황이 된다면 아시아 그리고 어쩌면 아프리카까지 교회 선교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매체도 그를 좋아하고, 발코니에서 성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보는 광경도 감동적이리라. 하지만 정체가 뭐지? 종교적 신념은 어느 쪽이고? 더욱이 덩치가 너무 왜소했다. 교황직을 수행할 만한 체력은 되는 걸까?

로멜리의 관료적 사고는 매우 논리적이었다. 경쟁자 벨리니와 베니테스를 제거하자 테데스코를 막을 후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로멜리 자신, 일단 40표를 지켜 콘클라베를 연장한 다음 성령께서 성 베드로의 성좌를 누구한테 상속할지 인도해주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 일을 누가 하겠는가?

도리가 없군. (P3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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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게나, 레이. 이 엄청난 걸작을 봐. 기막히게 예언적이지 않은가? 그림 끝에 어둠의 장막 보이지? 예전에 그저 구름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까 연기가 틀림없구먼. 어딘가에 불이 났어. 가시권 너머일 텐데 미켈란젤로가 감추려 한 걸 보니....... 폭력, 전쟁, 갈등의 상징일까? 그리고 베드로가 고개를 똑바로 들려고 애쓰는데..... 자네도 보이지? 지금 거꾸로 처박힐 지경인데 왜 저러고 있을까? 지금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굴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안간힘을 써서 자신의 신앙과 존엄성을 보이려는 게지. 세상은 문자 그대로 뒤집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유지하고 싶은 걸세.

그야말로 징후가 아닐까? 교회의 시조께서 우리한테 보내는? 악마는 세상을 뒤집으려 한다네. 하지만 이렇듯 고통스러운 세상에서조차 축복의 사제 베드로는 우리가 이성을 유지하고, 부활의 구세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시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을 마무리하세나. 콘클라베는 멈추지 않아.” (P338)


“오, 안 돼! 말도 안 돼! 안 돼!” 그가 고개를 젓다가 짧고 통통한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당혹감에 미소는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 보셨죠? 제가 반대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 순간적으로 흥분한 탓에 주님은 잊고 이제 상황 논리에 따라 반응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당대회를 하자는 겁니까? 교황을 거래해요? 교황이 웨이터예요. 아무렇게나 부르면 나타나게? 형제들이여, 부탁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사악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가장 적임자를 교황으로 선출하자고 맹세하지 않았던가요? 오늘 오후 군중을 달래자는 핑계로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손쉽게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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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단을 대표해서 묻겠습니다. 베니테스 추기경, 에하는 합법적으로 교황에 선출되었습니다. 그 지위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베니테스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기다란 침묵이 이어졌다. 100여 명의 추기경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문득 이 양반이 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맙소사.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재앙이야! 로멜리가 조용히 덧붙였다.

“예하. 교황령 항목을 읽어드릴까요?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직접 쓰신 글입니다. ‘선출된 이여, 부담감 때문에 주께서 맡기신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의지에 공손히 복종할지어다. 주님은 짐을 지으시되, 그 손으로 또한 부축해주시리니 능히 감당할 수 있으리로다.’”

마침내 베니테스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에도 결의가 번쩍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성당 양쪽에서 일제히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박수갈채도 뒤를 이었다. 로멜리는 미소 지으며 자기 가슴을 두드려 안도감을 표했다.

“그러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베니테스가 다시 머뭇거렸다. 문득 로멜리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자신도 몇 분 동안 교황 이름을 정한답시고 고민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베니테스는 교황 이름을 정하지 않은 채 콘클라베에 들어 온 유일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이윽고 베니테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노켄티우스.” (P36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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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예하.”

“어떤 고민인지부터 말하게. 할 일이 많아.”

“예, 아무래도 좀 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때는 하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첫날 밤 베니테스 추기경께 세면도구를 가져다드릴 때, 면도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시더군요. 면도를 전혀 하지 않으신다면서.”

“뭐?”

“그렇게 말씀하실 때도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상황도 상황이기에 그때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단장님, 특별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로멜리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몬시뇰을 노려만 보았다.

“레이, 미안하네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베니테스의 욕실에서 촛불을 불어 끈 적이 있다. 그때도 면도기가 빌 포장지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의료원에 대해 뭔가 알아보니.....” 오말리가 말끝을 흐렸다.

“의료원? 제네바 병원 얘긴가?” 로멜리가 되뇌었다. 갑자기 대리석 바닥이 물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오말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핵심입니다. 단장님. 뭔가 계속 신경을 건드렸는데 오늘 오후 콘클라베가 베니테스 추기경을 선택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했죠. 그런데 일반 병원이 아니라 의료원이었습니다.”

“무슨 의료원.”

“소위, ‘성전환 전문’이었습니다.” (P375-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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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성직자로 계속 일해도 좋다고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성하께서는 제게 맡기셨어요.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인도를 구했죠. 결국 수술을 받고 성직을 떠나기로 했죠.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가기로 한 날 밤, 마음을 바꿨습니다. 단장님. 전 주님께서 만드신 존재입니다. 오히려 그분의 작품에 손을 대느니 있는 그대로 사는 쪽이 죄가 덜하다고 믿어요. 그래서 약속을 취소하고 바그다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성하께서 기꺼이 허락하셨다?”

“그렇게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저를 의중 결정 추기경으로 임명하셨으니까요. 내가 누군지 너무나 잘 아시고도.”

“분명 제정신이 아니셨을 겁니다.” 로멜리가 외쳤다. (P37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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