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먼 인 골드> 2015년
몹시 추운 오후지만, 테레빈휴와 다른 화학 약품들의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지푸라기처럼 뼈대가 가늘고 파라핀처럼 피부가 창백한 게르타는 양팔로 가슴을 가리고 서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구스타프가 보고 있는 것은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아니다. 여자로는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는 빛과 어둠, 비례, 양감을 비롯한 여러 골치 아픈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손으로 가슴을 감싸듯이 받쳐볼래? 오른쪽 말고 왼쪽. 좋아, 이제 침상에 누워봐. 다리를 벌리고, 그 무릎을 안쪽으로 돌려. 됐어.”
게르타는 몸뚱이로 돈을 버는 여자들 특유의 지루해하면서도 참을성 있는 태도로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 구스타프는 그녀의 손가락 관절과 무릎, 팔꿈치와 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그린다. 게르타는 이 분간의 짧은 포즈와 삼십 분간의 긴 포즈를 번갈아가며 취한다. 구스타프는 드로잉 화첩을 넘기고 또 넘긴다. (P17)
그들은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은 다음, 어깨동무를 하고 보닛 장식에 대해 재잘대는 두 여점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비단으로 만든 노란 꽃과, 델프트 도기로 만든 푸른 리본이 달린 레이스 중 어느 게 나을까? 모자에 벌새 장식을 단 저 귀부인 좀 봐. 저런 걸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동생은 연필을 쓰는 반면, 클림트는 두꺼운 분필 조각을 이제 막 호수에서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손에 움켜쥐었다. 그는 민첩하게 손을 놀렸고, 다 그리면 바로 화첩을 넘겼다. 나로서는 자세히 살펴볼 틈이 없었다.
두 여자는 화가들의 눈이 자기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달아나버렸다. 나는 클림트가 마지막으로 대충 그린 스케치를 볼 수 있었다. 누구를 그린 것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순간에 그는 여자들이 남의 눈을 의식하고 움츠린 자세며 흥분한 눈빛, 서로에게 몸을 기댄 모습을 포착해 냈다 .
다음에는 대학생 두 명이 비틀대며 걸어와 몇 실링을 내놓고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구했다. 동생은 거절했다.
“무엇을 그릴지는 우리가 선택합니다. 우리가 선택받는 게 아니고요.” (P34)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계가 세 번, 네 번, 그리고 다섯 번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나를 그리는 데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리는지 궁금했다. 마침내 그가 종이를 떼어냈다.
“어떠니?”
내 열두 살의 허영심은 화가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순간 영영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무너져내렸다. 그림은 내 머리와 어깨까지만 그려져 있었다. 내 턱은 산기슭의 암벽처럼 툭 뒤어나와 있고, 입은 장군처럼 퉁명스레 꽉 다문 채였다. 눈은 햇빛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어떻게 분필만으로 이렇게 그렸을까? 일부만 그려진 내 몸은 피부톤을 표현하느라 아래쪽에 은은하게 복숭아빛을 살짝 깔아놓고 흰 블라우스 모양을 둥그스름하게 그려놓았을 뿐 대체로 흐릿했다. 붉은 의자며 벽지, 응접실 풍경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배경에는 손긑으로 종이 위에 살구색을 약간 문질러두기만 했다. 내 모습이 정말 이렇다면 빈에서 가장 못생긴 계집애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니?”
그가 물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뭇 걱정이 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그의 기분을 헤아릴 상황이 아니었다. 엄격한 수련의 힘으로 간신히 버텼다.
“예쁘네요.”
하지만 그는 내 거짓말을 눈치챘다. (P58-59)
“다음 할 일은 이십 분 동안 벽돌을 관찰하고 다시 그리는 거다.”
“이십 분 동안 벽돌을 관찰해야 한다고요?”
“시간 잰다. 시작해라.”
나는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벽돌은 내 앞에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벽돌을 쳐다보았다. 클림트 부인은 여전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부인은 무슨 일에도 놀라워하거나 재미있어하는 기색없이 무덤덤했다. 오븐에 넣어둔 파이 생각이라도 하는지 부엌 쪽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마 그런 모양이다. 식탁보는 부인의 무릎 위에 그대로 있었다. 수놓인 꽃 중 일부는 올이 풀려 있었다. 꽃잎의 테두리는 검은색 실로 수가 놓였다. 맞은편 선반을 보니, 도자기 단지에 심은 담쟁이가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그 밑에는 도자기로 만든 양치기 소녀 둘이 도자기 양 한 마리를 놓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클림트는 내 앞에 앉아 한가롭게 휘파람을 불면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의 종이를 넘겨다보았다. 그는 벽돌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도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직 십 분 더 남았다.”
“왜 그걸 그리고 계세요? 선생님은 이미 화가인데.”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물건이라도, 화가는 관찰을 통해 늘 뭔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의 대답에 부끄러워져, 나는 내가 그려야 할 대상으로 눈을 돌렸다.
벽돌은 붉은색이었다. 뭉근히 끓인 토마토처럼 거무스름한 오렌지색이 도는 붉은빛이었다. 한쪽은 검게 그을렸고, 한쪽은 타서 재가 된 것이 마맛자국처럼 보였다. 한쪽 끝에는 홈이 패어 있었다. 벽돌을 들어 올리자 가루가 바스러지면서 식탁 위로 약간 떨어졌다. 클림트의 눈치를 힐끔 보았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 지우개를 들고 자기 그림 위로 몸을 한껏 구부리고 있었다.
벽돌 모서리는 생각했던 것처럼 똑바르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 때의 내 목소리처럼 고르지 못했다. 물체를 어떻게 하면 삼차원으로 그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결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시계를 보았다. 삼 분이 남아 있었다.
“이건 너무 어려워요.”
내가 말했다. 좌절의 눈물이 눈에 가득 차올랐다. 눈에 띄지 않게 손으로 눈물을 ㅎ숨쳐내려 했다. 클림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기 스케치북을 덮고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야 배울 준비가 되었구나.” (P81-82)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나 자신의 유령이다. 스스로를 옥죄는 열망으로 쇠약해지고, 나 자신만의 디자인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에 부풀고, 어머니의 점잔 빼는 말투를 놀리기도 하고, 정원에서 민달팽이를 파내고, 아버지에게 입 맞추러 달려가고, 새들을 쫓기도 하는 나의 유령.
정원 끄트머리에는 구스타프가 우리와 함께 머무는 동안 화실로 썼던 온실이 있다. 유리창의 일부는 부서졌고, 남은 유리창은 전부 먼지가 끼어 흐릿하다. 하이츠만이 한 번 깨끗이 닦아주면 좋겠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두렵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단지 같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상태일 리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뜸을 들인다고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몇 바퀴 뱅글뱅글 맴을 돌며 발길 닿는 대로 밀 비슷하게 생긴 풀에서 씨를 훑어낸다. 손에 타는 듯한 작열감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물론 문은 꽉 닫혀 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감자를 저장한 지하실처럼 습하고 서늘하다. 눈앞의 어둠이 천천히 눈에 익는다.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하다.
방 저편에 세 사람이 서 있다. 야위고 초췌한 모습이다. 피난민들일까? 유령일까? 그들은 화실 뒤쪽의 숲을 내다보고 있다. 군인들처럼 열을 지어 차려 자세로 서 있다. 내 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간신히 호흡을 고르며 뒤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보니, 그들은 뼈대만 남은 나무 이젤이었다. 심장이 다시 평소처럼 뛰기 시작했고, 스스로에 대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겁쟁이는 아니었는데. (P101-102)
“미안하다. 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데, 널 여기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제 발로 왔어요.”
“너를 처음부터 여기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이야. 내가 너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에게 키스를 했다. 무엇에 이끌려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화실의 긴장된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키스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구스타프가 나를 밀쳐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턱수염은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턱수염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그는 부드럽게 내 입술을 열고 자기 혀를 집어넣었다. 기묘한 느낌이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의 혀에선 커피와 박하 맛이 났다. 나는 눈을 뜨고 소녀처럼 기다란 그의 속눈썹을 보았다. 그의 팔이 대리석처럼 단단히 나를 감싸안았다. 이런 와중에도 기이하리만치 덤덤한 기분이었다. 기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몸이 붕뜨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야 하지 않나?
우리는 키스를 멈추었다. 그가 눈을 떴다. 잠시 두려움이 엄습했다. (P136-137)
“앞으로도 그럴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 일은 꼭 원하는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법이거든. 에른스트와 헬레네는 불행한 사랑을 할 운명을 타고난 거야.”
훗날 에른스트가 죽고 언니가 깊은 비탄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구스타프와 나눈 이 대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역시 언니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 자기 형제 생각에 빠져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나는 그들 생각을 했다. 구스타프의 생각이 어디쯤 헤매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중산층 계급의 성적 위선에는 진절머리가 나.”
“뭐라고요?”
나는 그런 말을 큰 소리로 입 밖에 낸 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런 티를 낸다면 그가 비난하는 바로 그 혐의를 면치 못할 터였다.
“너희 부모님 말이다. 아주 재미있어. 그렇게 사상이 깨고 교양을 갖춘 분들인데,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해! 하지만 우리 딸들은 줄 수 없어!’ 이렇게 부르짖지.”
“부모님은 언니의 미래를 염려하신 것뿐이에요.”
왜 내가 부모님을 변호하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미래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왜 여자와 남자가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고 떳떳하게 함께 있을 수는 없는 거지?”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세상이 바뀔 수도 있죠.”
그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앞장서지 않는 한 바뀌지 않아.”
내게 뭔가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건가 싶었다. 당장 내 자유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는 가식 없이 세상을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나이나 사회적 계급, 사회 통념을 떠나 자기가 고른 상대라면 누구하고나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조차 그가 모든 이를 위해 사회를 변혁하는 데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비난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을 뿐인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논쟁일 뿐인 척했다. (P152-153)
“내 소원은 위대한 예술 작품, 영원히 기억될 작품을 만드는 거야.”
그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충격을 받을 이들도 있을 테고, 어떤 이들은 혐오감을 느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을 고스란히 남들 눈앞에 펼쳐 보여줄 거야. 네가 너만의 것이라고 할 만한 걸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다면. 그 일이 무엇일까?”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 중 한 가지는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었다.
“난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어요.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어요. 그저 세상이 더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어요. 그뿐이에요.” (P169)
임신한 모델은 도덕적인 비난의 뜻에서, 혹은 단지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들의 육체는 화폭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바보 같은 소리 마. 난 네가 필요해. 여기에서 누구랑 마주쳤어?”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들어 그를 힐끗 보았다가 잠깐이지만 수줍은 어린아이처럼 다시 눈길을 떨어뜨렸다.
“내 꼴이 서커스에 나오는 뚱보 여인 같아요.”
“네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심했어. 흥미가 좀 당겨? 희망에 대한 일종의 비유랄까.”
미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본다. 가끔 그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내 초상화를 그린다니 말도 안 돼요, 미쳤어요?”
희망. 그녀의 삶에 희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데 어떻게 그녀가 희망을 상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아이를 낳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산고에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바흐만은 그녀와 결혼해 주지 않을 테고, 부모님도 그녀를 다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외모도 고된 삶에 지쳐 일찍 시들 것이다. 그럼 무얼 해야 하나? 공장에 취직할까? 몸을 팔아야 하나? 그리고 아이는 어떻게 될까? 말없이 아들이기만을 기도한다.
“혼자 모델을 서주는 시간을 더 늘려야겠는데, 배가 더 불러올 것 같아?”
“더 부르냐고요? 물론이죠. 자꾸만 더 커질 거예요. 곧 이 화실보다도 더 커질걸요.”
미나의 목소리에는 냉소와 회의가 배어 있다. (P184-185)
이듬해 봄, 구스타프는 오스트리아 예술 향상에 이바지하고자 쿤스틀러하우스에 새로운 예술가 집단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쿤스틀러하우스의 노장 멤버들은 이 소식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격론이 벌어지던 중 구스타프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고, 그의 지지자들도 뒤를 따랐다. 며칠 후, 그는 쿤스틀러하우스에서 완전히 사퇴했다. 그는 새로운 그룹에 ‘분리파’라는 이름을 붙이고 회장이 되었다. 그들은 라파엘 전파와 같은 여타의 반항적인 예술 운동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들은 <베르 사크룸>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간하기로 했다. 자기들의 작품을 전시할 화랑을 마련해서 순회 전시회도 열 예정이었다. 구스타프는 분리파 건물의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베르타 주커칸들이 여는 분리파 창설 축하 파티에 함께 가자고 청했다. 나는 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궁정에 나가는 것보다 더 신경이 곤두설 터였다. (P215)
반대쪽 피부는 더 건조해서 연필이 잘 써졌다. 그의 팔꿈치를 향해 위로 헤엄쳐 올라가는 물고기 떼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연필이 간지럽힐 때마다 소리 죽여 쿡쿡 웃느라 몸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연필을 도로 뺏어가 내 손의 뼈를 따라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손은 새의 날개 같구나. 네 뼈는 속이 비어 있을 거야.”
그 순간은 얇은 그물에 싸여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내 뺨에 턱수염을 부비면서 내 얼굴을 턱수염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사랑해요. 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만 되뇌었을 뿐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에밀리.”
그는 내게 키스했다. 화강암 절벽에서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두려움을 떨쳐내고 휙 몸을 날렸다. 잠시 동안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맛과 감촉과 냄새뿐이었다. (P254)
길고 좁은 복도를 따라 작은 주방을 지나면 창문으로 뒤뜰이 내다보이는 널찍한 방이 나왔다.
이곳이 학부 회화 중 하나인 <철학>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을 당시 구스타프가 작업을 하던 곳이다. <철학>은 <의학>보다 세상을 더 시끄럽게 했다. 가운데쯤 있는, 에테르 속에서 나타난 무정형의 얼굴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신인가? 지혜인가? 옆에는 벌거벗은 건강한 인물들이 기둥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절망 탓인지 고뇌 탓인지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 아래로는 날카로운 눈빛이 사악한 여인이 캔버스 아래쪽에서 얼굴만 겨우 내밀고 보는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일까?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대학교수들은 대경실색했다. 회의가 열렸다. 교수들 중 여든일곱 명이 <철학>을 대강당에 걸지 말라고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그들은 이를 이성과 학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신문들은 일제히 각각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양한 해석으로 이 파문의 전모를 다뤘다. 비평가들은 논쟁에 앞 다투어 뛰어들었고, 일부는 매우 잔인했다.
화실에 도착해 보니, 구스타프는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치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놈의 교수들. 예술을 과학인 줄 알든지, 아니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X 더하기 Y는 Z라는 식으로 깔끔한 방정식을 원한단 말이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가능하다면 예술도 아니지.”
“그럼요.”
내가 말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속이 풀릴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쏟아놓도록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가 말을 끝낼 때쯤 비평가들을 욕해야 효과가 있었다.
“요들은 내 그림이 추악하다고 했더군. 추악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도 좋지만, 그 그림들을 보고 추악하다고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은 본 적이 없어요.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지만, 아름다워요.”
“아, 불안과 공포를 느끼도록 의도한 거야. 그런 느낌을 못 받는 사람이라면 삶의 실체를 거부하는 거지.”
“그럼요.”
“크라우스는 내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건, 내가 철학에 대해 문외한이고, 어리석은 자들은 붓과 물감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썼더군.” (P257-258)
그는 아델레의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아델레는 분홍 드레스를 입고 모델을 섰지만,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림에는 분홍색 드레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삼각형과 눈과 공작 꼬리 무늬가 비잔틴 풍으로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금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 양식화된 모자이크 위로 그녀의 얼굴은 사진처럼 또렷하게 생생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모델에게는 관심이 없고, 단지 모델 주위에 짜넣은 복잡하게 얽힌 무늬에만 집중할 따름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 초상화는 아델레에 대해 중요한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P336)
화실에 도착하니 집 앞 잔디밭에 한 소년이 드러누워 있었다. 하늘이 흐리고 찬바람이 불어 아침에 내린 서리가 아직 녹지 않은 채였다. 얼어붙은 땅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보고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코앞까지 갔는데도 기척을 듣지 못했다. 그의 옆 잔디 위에 놓인 화첩으로 보아, 구스타프를 늘 귀찮게 따라다니며 도움을 청하는 학생들 중 한 명인 듯했다. 더 나은 축들은 편지를 써서 약속을 잡았다. 단정히 몸단장을 하고 제시간에 맞춰 오면, 구스타프는 그들 대다수가 형편없는 구제불능이라 해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이 소년이 입은 바지는 세 치수 정도는 더 커서 손뜨개질한 멜빵을 매고 있었다. 소맷부리 단추도 채우지 않아 더러운 소매가 손목 주변에 너덜거렸다. 구스타프를 만난 뒤로 숱한 화가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옷을 못 입은 화가는 처음이었다.
소년은 내 발소리를 듣고 몸을 뒤집어 내 쪽을 향했다. 구부러딘 코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귀는 이상해 보일 정도로 튀어나온 못생긴 얼굴이었다. 소년은 아주 어렸다.
“집에 없어요. 반시간 전에 종을 울려봤어요.”
소년이 말했다.
구스타프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기 습관을 고수하고, 점심은 절대로 먹지 않는 그였다. 혹시 아픈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그 소년을 피하려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있든가. 소년은 자기와 함께 잔디 위에 앉아 있어주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열쇠가 있어.”
내가 말했다.
“부인이세요?”
소년이 물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아니.”
소년은 옆으로 누워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럼 애인이세요?”
“어떻게 그런 말을!”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가보네요.”
“이름이 뭐니?”
내가 물었다. 소년을 떼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스타프는 죽어도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인 데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풋내기 화가한테는 특히 약했지만, 나야 그런 것쯤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에곤 실레예요.”
“그건 네 그림이니? 내가 좀 봐도 될까?”
“그러세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클림트 씨가 올 때까지 자리를 뜨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잔디 위에서 화첩을 집어 대문 앞 계단으로 가지고 갔다. 에곤 실레는 뒤를 따라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화첩을 폈다. (P358-360)
<키스>는 1908년에 빈 미술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삼 년 전에 분리파를 떠난 후로 한 번도 전시회를 열지 않았던 분리파의 옛 멤버들 모두가 전시회에 참여했다. 콘서트홀이 건축될 예정인 공터를 시에서 임대해, 호프만이 테라스와 정원, 안뜰, 야외극장, 다실이 있고 쉰네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전시용 건물을 건축했다. 전시회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즉위 육십 주년 기념일 축하 행사와 때를 맞추어 열렸다. 작품은 모두 오스트리아인들의 것이었다. 구스타프도 방 하나를 독차지하고 열여섯 점의 그림을 전시했다. 나는 너무 바빠서 준비를 도울 수 없었고, 구스타프가 개막일까지 <키스>를 보여주지 않아, 피로연장에 도착해서야 처음으로 그림을 보았다.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가장 붐비는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구스타프의 전시실이었고, 그의 새 그림 주변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인파 속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내게 몰려와 말을 건넸다.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훌륭하군요. 나는 대꾸하면서 인파가 좀 빠지면 잘 볼 수 있도록 그림 반대편 벽에 자리를 잡았다. (P386)
다음 날, 실레는 음란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구스타프는 실레가 아이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일이 닥칠지는 몰랐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작업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었다. 재판은 빈에서 기차로 반시간 거리에 있는 노일렌바흐에서 열렸다. 너무 걱정된 나머지, 구스타프는 평결문이 낭독되는 날 법원으로 갔다. 실레의 그림에 소각 처분이 내려졌다. 끔찍한 순간이었다. 닥쳐올 사태의 예고편 같았다.
전쟁이 발발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전쟁에 대한 내 견해는 두 가지로 엇갈렸다. 이런 때에 아름다운 드레스며 패션 사진, 하물며 그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추악한 시대일수록 어느 때보다 아름다움을 필요로 한다. 결국 구스타프와 나는 베오그라드에서의 암살로 공포에 질리고, 황후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지고, 전쟁 소식으로 절망한 상황에서도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간호사로 훈련을 받을 수도 있고 구제위원회에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둘 다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구스타프는 설사 원했다 해도 군인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정치가가 될 수 있을 만큼 경박한 인간도 못 되었다. 그는 신문에 논설을 쓰는 것도, 연설을 하는 것도 싫어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다. (P396-397)
“에밀리를 불러줘.”
요한나는 방을 뛰쳐나가 고집쟁이 개를 키우는 친구 나우만을 찾았다. 그는 의사를 부르러 갔다.
나는 거실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전보를 받았다. 외투도 챙겨 입을 정신이 없었다. 계단을 뛰어내려가 거리로 달려나갔다. 마차에 올라서야 여전히 손에 <예술 공예 저널>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창문을 열고 얼어붙은 차바퀴 자국 위로 책을 던져버렸다.
화실에 도착해 보니, 의사가 와 있었다. 흰 턱수염을 기른 의사는 검은 왕진가방을 들고 있었다. 의사는 내게 구스타프의 아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구스타프가 뇌졸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자력으로 회복될 수도 있다. 타격이 그리 심각하지 않으면 뇌가 스스로 제 기능을 되찾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P401)
잠시 후 저녁식사를 들고 돌아와 보니,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쟁반을 내려놓고 그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넘겨보았다. 그는 이십 분 걸려 완두콩 크기의 원 하나를 그렸다. 그다음 날도 오후 내내 애쓴 끝에 끝이 벌어진 V자를 그렸다.
다음 날, 나는 침대 밑에서 부러진 연필을 발견했다.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모든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식사를 거부했다. 나는 그에게 시간이 지나면 예전과 다름없이 회복될 거라고, 좋아지고 있다고, 포기해선 안된다고 애원했지만, 그가 내 말을 듣기나 했는지, 들었어도 알아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를 위해 살아 있어달라고 말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나보다.
1918년 2월 6일, 그는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내 이름이었다. (P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