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이트의 살인해석(Freud))> 2020년
20세기 사상가 프로이트와 융의 학설을 바탕으로 쓴 범죄 추리극. 프로이트가 실제로 미국을 방문한 해인 1909년 뉴욕을 배경으로, 프로이트와 융을 살인사건에 개입시키고 있다.
190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당시의 제자였던 카를 융과 함께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시에 있는 클라크 대학에서 정신분석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클라크 대학이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이는 프로이트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학계에서 그의 업적을 인정받은 사건이었다.
미국 방문이 이처럼 성공적이었음에도, 프로이트는 말년에 늘 미국에서 어떤 외상을 입은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미국인들을 가리켜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또 오랫동안 프로이트를 괴롭혀온 몸의 질환은 1909년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그는 이를 미국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전기 작가들은 이 수수께끼를 곤혹스러워하며,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프로이트의 반응을 납득할 만한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던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P5)
행복에 있어서 수수께끼란 없다.
불행한 이들은 모두 똑같다. 오래전부터 그들을 괴롭혀온 상처와 거절된 소원, 자존심을 짓밟힌 마음의 상처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경멸로 인해, 더 심각하게는 무관심으로 인해 꺼져버린 사랑의 재가 되어 불행한 이들에게 달라붙어 있다. 아니, 그들이 이런 것들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하여 불행한 이들은 수의처럼 자신들을 감싸는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행복한 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을 바라보지도 않고, 다만 현재를 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곤란한 점이 있다. 현재가 결코 가져다주지 않는 게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의미다. 행복해지는 방법과 의미를 얻는 방법은 다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순간을 살아야 한다. 단지 순간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미를, 꿈과 비밀과 인생에 대한 의미를 얻고 싶다면, 아무리 어둡더라도 과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며,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연은 행복과 의미를 우리 앞에 대롱대롱 흔들어대며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다그친다.
나는 언제나 의미를 선택해왔다. (P9-10)
프로이트 박사는 전혀 광인처럼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표정은 권위가 있었고, 두상은 잘생겼으며 뾰족한 수염은 단정하고 전문가다웠다. 172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둥그스름한 체형이었지만, 쉰셋의 남자에 딱 어울리는 단단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최고급 천으로 만든 양복에 회중시계를 찼고, 17세기 귀족들이 목에 두르던 남성용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한 주 동안 항해를 한 사람치고는 놀라울 만큼 기운이 넘쳐 보였다.
박사의 눈 또한 범상치 않았다. 눈에 대해서는 브릴이 내게 경고한 바 있었다. 프로이트 박사가 현문을 내려올 때에는 감정이 격렬히 솟구치는 듯 눈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견뎌야만 했던 중상모략에 늘 눈썹을 찌푸리고 다니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미국에 온 사실이 썩 내키지 않는 듯도 했다. 여섯 달 전, 내가 있는 클라크 대학의 홀 총장이 처음 프로이트를 미국으로 초대했을 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우리는 확실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홀은 클라크 대학 20주년 기념식 주요 행사로 프로이트 박사에게 대학 최고 영예인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할 예정이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정신분석학에 대한 강연을 열어주겠다는 말로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프로이트 박사는 수락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곧, 이 모든 추측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프로이트 박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국 땅을 밟고 서서 한 첫 번째 행동이었다. 담뱃불이 붙는 순간 찌푸린 표정이 가시고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겉으로 드러났던 떨떠름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운 듯 거대한 항구와 그 안의 혼란스러운 광경을 즐겼다. (P14-15)
프로이트는 시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나는 혼자 걷고 있었네.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지, 지금처럼 말일세. 우연히 어떤 상점 진열장에 보석 상자가 놓인 걸 보았다네. 물론 그건 여성을 뜻하겠지. 나는 돌아보았네. 당황스럽게도 내가 헤매고 있던 동네는 홍등가였어.”
프로이트의 학설이 관습적인 성도덕에 도전할 것을 명하고 있는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융은 그렇다고 주장했다. 융은 실제로 이런 암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프로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의 요점은 사회의 금기가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불건전하다는 데 있다고 했다. 일단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발견을 이해하게 된다면 오직 겁쟁이들만 문명화된 도덕에 복종하려들 거라고 했다.
브릴과 페렌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진정한 성적 욕망을 인식할 것을 요구할 따름이지. 그것에 굴복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환자의 꿈 이야기를 듣고 단지 해석할 뿐이네.” 브릴이 말해다. “환자에게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욕망까지 충족해야 한다고 말하진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다네. 융, 자네는 환자에게 그렇게 말하나?” (P22-23)
1909년에는 자그마한 기계장치 하나가 뉴욕 시에 널리 퍼지기 시작해 의사소통에 날개를 달아주고 인간의 상호작용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바로 전화였다. 8월 30일 월요일 오전 8시. 발모럴 빌딩의 관리인은 황동 전화기에서 자개가 박힌 수화기를 들고 건물주에게 숨죽인 목소리로 급히 소식을 전했다.
조지 밴월이 그 소식을 들은 곳은 관리인 머리 위 16층에 있는, 트래버틴 관의 펜트하우스 아파트 전화기 앞이었다. 밴월은 자기가 거주할 목적으로 그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엘라배스터 관에 사는 리버포드 양이 방 안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살해되었거나 그보다 더 나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녀가 리버포드 양을 발견했다. (P25)
그렇지만 내가 완전히 프로이트에게 사로잡힌 건 <햄릿> 분석을 읽었을 때였다. 햄릿 분석은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대한 책에 수록된 부분으로, 논문의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 200 단어 분량으로 가볍게 써내려간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서구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라 할 만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수천수만 번, 전 세계 어떤 언어로 씌어진 희곡보다고 더 많이 공연되었다. 성경을 빼고는, 문학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주석서와 분석 글이 씌어진 작품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극의 핵심에는 기묘한 공백, 구멍이라 할 부분이 있었다. 모든 행동은 주인공이 행동할 수 없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희곡은 우울증에 빠진 햄릿이 아버지의 살인자 --덴마트의 왕이자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 클로디어스-- 에 대한 복수를 미루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올린 핑계와 변명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핑계와 변명은 고난에 찬 독백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햄릿은 독백을 통해 자신의 무력함을 비웃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사느냐(to be)'로 시작하는 바로 그 말이었다. 복수를 미루고 잘못된 절차를 밟은 탓에 몰락이 다가오고 나서야, 즉 오필리어가 자살하고 어머니는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죽이려고 준비한 독주를 잘못 마신 탓에 죽고, 또 햄릿 자신은 레어티즈의 독 검에 치명상을 입은 직후에야 마침내, 희곡의 마지막 장면에서 삼중으로 박탈된 삼촌의 삶을 처단할 수 있게 된다.
햄릿은 왜 행동하지 않았을까?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게 클로디어스를 죽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했다. 햄릿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기회는 지금이다), 그는 외면했다. 무엇 때문에 멈췄을까? 어째서 이 설명할 수 없는 망설임이, 겉으로 보기에 나약해 보이고 비겁에 가까운 이런 태도가 3세기 동안이나 전 세계의 관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인 괴테와 쿨리지도 돌에 꽂힌 검을 뽑으려다 실패했고, 그들보다 못한 수백 명의 문학가들은 그 돌에 박치기를 하다가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나는 프로이트의 해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믿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 대답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프로이트의 충격적인 이론에 반대할 필요를 느꼈고, 그 이론의 결점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교정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몇 날 며칠을 프로이트와 셰익스피어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점점 프로이트가 햄릿에게 내린 진단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분석은 이 희곡의 수수께끼를 처음으로 밝혀낸 완전한 대답일 뿐 아니라, 왜 이제까지 아무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주었고, 동시에 이 비극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을 홀릴 수 있었던 힘을 명확하게 밝혀주었다. 여기 자기 발견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적용시킬 수 있는 과학자가 있다. 영혼과 만나는 의학이 있다. 프로이트 박사의 <꿈의 해석>에서 두 페이지가량 되는 그 분석을 읽었을 때 내 미래는 이미 결정되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반박할 수 없다면 내 인생을 거기에 바칠 작정이었다. (P36-38)
그렇지만 소녀는 죽은 게 아니었다. 정신이 나간 듯. 두 눈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친숙한 하인들을 보고도 안심하기는커녕 마치 그들이 살인자나 악마라도 되는 양 공포에 사로잡혀 그들을 쳐다보았다. 소녀는 더위가 무색하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시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힘을 다 써버렸는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빅스 부인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남편에게 방을 나가 의사와 경찰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부인은 조심스럽게 아가씨에게 다가가 진정을 시키고 묶은 매듭을 풀었다. 입이 자유롭게 되자 소녀는 보통 말이 수반되는 모든 동작을 해 보였지만, 소리나 말을 전혀 내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속삭임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도착했지만, 소리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좌절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경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에게 종이와 연필을 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써보라고 했다. ‘안 돼요.’ 소녀는 이렇게 썼다. “왜 안 됩니까?” 경찰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기억이 안 나요.’ (P64)
“그 아가씨는 히스테리를 일으킨 겁니다.” 내가 말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거죠.”
“해리성 기억상실증?” 밀하우가 내 말을 따라했다.
“외상성 장애를 일으킬 만한 사건을 억압하느라 생긴 기억 손실을 말하지. 빈 출신의 프로이트 박사가 이 용어를 만들어냈네. 이런 상태는 본질적으로 히스테리에서 비롯되고, 실성증(失聲症), 즉 말을 못하게 되는 증세를 수반하지.”
“맙소사!” 피시 이모부가 다시 외쳤다. “말을 못한다고 했나? 바로 그거야.”
“프로이트 박사는 언어장애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실어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문은 박사의 심리학 저작이 알려지기 전부터 미국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다. “박사님은 아마 이 주제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일 겁니다. 세부적으로는 히스테리성 외상과의 연관성을 밝혀내셨죠. 특히 성적인 외상과의 관련성을 주장하셨습니다.”
“프로이트 박사가 빈에 있다니 안타깝군.” 시장이 말했다. (P80)
프로이트가 말했다. “나는 종교에 대해 깊이 회의하는 무신론자일세. 모든 신경증은 그걸 앓는 사람에게는 종교와 같아. 종교 자체가 인류에게 보편적인 신경증이지. 이 정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우리가 신에게 부여한 특질은 우리가 처음 유아기와 아동기에 느끼는 공포와 소원을 반영하지. 이걸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 심리학의 기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네. 만약 자네가 찾는 게 종교라면 나를 따르지 말게나.”
“프로이트 박사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페렌치가 말했다. “영거 박사가 종교를 찾는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청년은 내 사상에 관심을 가져왔네. 그러면 거기 함축된 의미도 아는 게 당연하지.” 프로이트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문득 엄격한 태도가 사라지고 아버지 같은 자상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나 또한 이 청년의 사상에 관심을 가질 법하니, 질문을 돌려줘야겠군. 영거, 자네는 종교를 믿는가?”
당황스럽게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제 아버지는 믿으셨죠.”
“영거 박사의 대답은 프로이트 박사님이 물어본 질문에 맞지 않는군요.” 페렌치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이해하네.” 프로이트가 대답했다. “영거의 말 뜻은 이걸세. 아버지가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자신은 의심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 말이 맞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P87)
“리틀모어.” 검시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인자는 중국인 세탁부가 아니야. 부유한 남자지. 그건 아는 사실이잖아.”
“아닙니다. 휴겔 씨. 범인이 부유한 남자라고 한 건 여자의 목을 조를 때 값비싼 비단 넥타이를 썼기 때문이죠. 하지만 세탁실에서 일하면 비단 넥타이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요. 그 중국인이 훔친 넥타이로 리버포드 양을 죽였을 수도 있죠.”
“무슨 동기로?”
“모르죠. 어쩌면 여자를 죽이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그 시카고에 살던 살인자처럼요. 아, 리버포드 양이 시카고에서 왔다고 했죠. 검시관님은 그렇게 생각을......”
“아니, 형사.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또 자네가 봤다는 중국인이 리버포드 양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지도 않아.”
“하지만 진흙은......”
“진흙 따윈 잊어버려.”
“그래도 중국인이 도망친 건.....”
“중국인이 아니라니까! 내 말 듣고 있나, 리틀모어? 어쨌거나 이번 사건에서 중국인은 중요하지 않아. 범인은 적어도 180센티미터가 넘어. 백인이고. 시체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으로 봐서 백인이라고. 하녀, 하녀가 열쇠야. 그 여자가 뭐라던가?” (P102)
나는 프로이트 박사가 액튼 양의 첫 번째 진료에 동석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면담을 끝낸 뒤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전이’를 망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전이는 정신분석 과정에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로, 프로이트는 우연히 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들이 프로이트 박사를 숭배하거나 때로는 혐오하는 식으로 분석에 반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박사는 이러한 감정들을 치료를 어렵게 하는 방해 요소로 보고 무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감정들이 환자의 병이나 치료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환자들은 분석가의 진료실 안에서 그 증상을 일으켰던 무의식적인 갈등을 그대로 재현하여 병의 핵심인 억압된 욕망을 의사에게 전이하고 있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히스테리라는 병은 어린 시절에 형성되어 무의식 속에 깊이 묻혀 있던 일련의 소원과 감정들이 방출되지 못하고 있다가 새로운 사람이나 때로는 사물에까지 전이됨으로써 생겨난다는 사실을 프로이트는 발견해냈다. 이 현상을 환자와 함께 분석함으로써 --전이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어 살펴봄으로써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내어 병의 원인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이는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였다. (P109-110)
“괴테가 융 박사님의 증조부라면서요?” 내가 브릴에게 물었다.
“헛소리야.” 브릴은 취리히에서 융 밑에 일하면서 1년을 살았다.
“스스로를 미화하는 가족 전설이지. 폰 훔볼트 얘기도 하던가?”
“네, 하더군요.”
“혈통을 날조하지 않더라도 그만하면 돈 많은 여자랑 결혼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게 이야기를 지어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죠.”
내 말에 브릴은 웅얼웅얼 투덜거렸다. 그는 앞머리를 넘겨 번들거리는 이마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거 보여? 로즈가 간밤에 그랬다네. 자네들이 다 떠난 뒤에 나한테 프라이팬을 던졌다고.”
“맙소사. 왜요?”
“융 때문이지.”
“네에?”
“내가 어제 융에 대해 프로이트에게 한 말을 로즈에게도 했거든. 그랬더니 화를 버럭 내더라고. 내가 융을 질투한다는 거야. 프로이트 박사가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데 내가 그런 말까지 했으니 박사가 내 시기심을 꿰뚫어보고 나를 더 나쁘게 생각하실 테니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당신이 저녁 내내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을 보면 융을 질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대꾸했지. 돌이켜보니 그 말이 잘못되기는 했어. 바라본 건 융이니까. 로즈가 나랑 같은 의학 수업을 들은 거 알고 있지? 하지만 로즈는 의사가 될 수 없었어. 게다가 내 환자도 넷인데, 어떻게 로즈를 도울 수 있겠나?”
“그렇다고 로즈가 프라이팬을 던져요?”
“날 환자 보듯 하지 말게나. 여자들은 물건을 던지니까. 다들 언젠가는 던지게 돼 있어. 자네도 알게 될걸. 엠마는 예외지. 융의 아내 말이야. 엠마는 카를에게 재산을 넘기고 애들을 키워주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웃기만 하지. 남편이 정부들을 집으로 데려오면 저녁까지 대접한다네. 그놈은 흑마술사야. 아니, 괴테와 폰 훔볼트 얘기를 한번만 더 하면 그 자식을 죽여버릴지 모른다구.”
미술관을 떠나기 전에 위기가 닥칠 뻔했다. 프로이트 박사는 코니 아일랜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요의를 느꼈고, 안내원은 우리를 지하로 내려보냈다. 아래층으로 가는 길에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말을 걸지 말게나. 난 이제 끝도 없이 뻗어 있는 복도를 지나야 하니까. 그 끝에 대리석 궁전이 있겠지.” 그의 말은 둘 다 맞았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그 궁전에 도착했다. (P162-163)
검시관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형사를 보았다. 리틀모어는 기틀로우 형사를 기차 편으로 시카고에 보냈다고 보고했다. 내일 밤이면 시카고에 도착할 터였다. 리틀모어는 평소처럼 명랑한 기분으로 밴월 씨와 말 사이에 있었던 엉뚱한 일화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휴겔은 집중해서 듣다가 소리쳤다. “밴월! 그자가 호텔 밖에서 액튼이라는 여자를 본 게 틀림없어. 그래서 겁을 먹은 거야!”
“액튼 양은 별로 무섭게 생기지 않았던데요. 휴겔 씨.”
“바보 같으니라고. 밴월은 그 여자가 죽었다고 생각한 거지!”
“왜 액튼 양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머리는 뒀다 뭐 하나, 형사.”
“휴겔 씨, 밴월이 범인이라면 액튼 양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겠죠.”
“뭐라고?”
“지금 밴월이 범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액튼 양을 공격한 사람이 누구든 그 여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겠죠. 그러니 밴월이 범인이라면 액튼 양이 죽었다고 생각할 리 없어요.”
“뭐라고? 말도 안 돼. 자기가 그 여자를 끝장냈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아니면 여자가 자기를 알아볼지 몰라 두려워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그 여자를 보고 공포에 사로잡혔던 거야.”
“왜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시죠?”
“리틀모어, 그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중년이고, 부자지. 머리는 검지만 희끗희끗 세어가고 있고, 게다가 오른손잡이지. 첫 번째 희생자와 한 건물에 사는데다, 두 번째 희생자의 모습을 보고는 질겁하지 않았나?”
“그걸 어떻게 아세요?”
“자네가 말했잖아. 밴월이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고 마부가 그랬다며,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아뇨, 제 말은 그가 오른손잡이인지 어떻게 아시냐구요.”
“어제 만났으니까 알지, 형사. 나도 눈이 있다고.”
“거참. 대단하십니다. 그럼 저도 한번 맞혀보세요. 오른손잡이일까요, 왼손잡이일까요?” 형사는 자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만두지 못해. 리틀모어!”
“전 모르겠어요. 휴겔 씨.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직접 보셨어야 해요. 아주 침착하게 명령을 내리고 모든 일을 정리하더군요.”
“말도 안 돼. 살인자가 연기까지 잘하는군. 이제 범인을 잡은 걸세. 형사.”
“아직 그 사람을 잡았다고 할 수는 없는데요.”
“자네 말이 맞아.” 검시관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내세울 만한 물증이 없어. 뭔가 더 필요하다고.” (P164-165)
“.... 승강기 안에서 융이 말을 계속했다. “던 백작은 저를 상징합니다. 던(Thun)과 융(Jung). 이보다 더 명확할 수는 없지요. 두 이름 다 알파벳 네 자로 되어 있고 ‘un'이라는 단어가 안에 들어가니까요. 백작의 가족은 원래 독일인이었지만 이민을 할 수밖에 없었죠. 저도 그랬습니다. 백작은 박사님보다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죠. 저도 그렇고요. 그는 오만해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죠. 저도 오만하다는 비난을 받고요. 꿈에서 백작은 박사님의 적이지만 내부 집단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박사님이 이끌지만 박사님을 위협하는 아리안족 사람. 당연히 저는 아리안족입니다. 결론을 피할 수 없어요. 박사님은 제 꿈을 꾸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왜곡해야만 했죠. 왜냐하면 절 위협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카를.” 프로이트가 차분히 말했다. “나는 던 백작의 꿈을 1898년에 꿨네.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일세. 내가 자네를 만난 건 1907년이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프로이트는 씩씩하게 걸어 나갔고,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뭐라고 답변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는 지나간 일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꿈도 꿉니다. 영거!” 융이 외쳤다. 눈이 부자연스럽게 빛났다. “당신은 내 말을 확인해줄 수 있소.” (P177-178)
밴월을 체포할 수 있을 만한 증거들은 충분했다. 왜 시장은 그 점을 보지 못할까? 휴겔은 자기 손으로 밴월을 체포하고 싶었다. 검시관에겐 체포할 권한이 없었다. 휴겔은 그 점이 아쉬웠다. 그는 모든 점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뭔가가 더 있어야 했다. 모든 이야기가 딱 맞아 떨어지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엘리자베스 리버포드의 살인자가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를 훔쳤다면 시체에 남아 있는 증거를 없애려 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대체 뭐란 말인가? 검시관의 머릿속에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 리버포드 양의 아파트에서 찍은 사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진 중 하나가 잃어버린 단서를 보여준다면?
휴겔은 침대에서 내려와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는 필름을 현상할 수 있었다. 좀체 쓰지 않지만, 시체 안치소 근처에 암실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경찰본부 사진 전문가인 루이 리비에르에게 작업을 맡기는 편이 더 안전했다. (P204-205)
서부지구 47번가 경찰서에서 지원 병력을 데리고 도착한 포스트 반장은 리틀모어의 항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8번로 782번지 아파트에 사는 중국인 여섯 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중에는 중국식당 지배인과 소동을 구경하러 올라왔다. 운 나쁘게 걸린 단골 둘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체는 수레에 실려 시체 안치소로 보내졌고, 두 명의 범인을 찾는 추격이 시작되었다.
리틀모어에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잃어버린 엘리자베스 리버포드의 시체일지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그러기에는 부패의 정도가 심해 보였다. 리틀모어는 병리학자가 아님에도, 일요일 밤에 살해된 여자가 수요일에 이렇게까지 부패할지는 의심스러웠다. 휴겔 씨라면 확실히 알 거라고 리틀모어는 생각했다. (P252)
“그게 뭐죠?” 클라라가 물었다.
“그들의 도덕성이죠.” 다나가 대답했다. “프로이트 박사. 박사의 의견이 옳다면 그게 대체 어떤 세상이겠소? 머릿속에 또렷이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하층 계급은 ‘문명화된 도덕성’을 비웃게 될 거요. 쾌락은 신이 되겠지. 모든 사람들이 연대해서 훈육과 자제심을 거부할 테지만, 그것 없이는 우리 삶에 위엄은 없소. 군중은 폭동을 일으킬 거요. 안 할 이유가 뭐겠소? 문명의 규칙들이 사라질 때 그들이 무얼 원하게 될 것 같소? 박사 생각에는 그자들이 단지 섹스를 원할 것 같아요? 그들은 새로운 규칙을 원하게 될 거요. 새로 나타난 광인에게 복종하기를 원하겠지. 또 피를 원할 거요. 아마 당신 피일지도 모르오. 프로이트 박사. 역사에 비추어본다면 말이오. 그들은 천민들이 늘 그러하듯, 자기들이 더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들겠지.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살인도 서슴지 않을 거요. 내 머릿속에는 유혈 사태가 그려집니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대규모 유혈 사태죠. 박사는 문명화된 지성을 떠나보내려 하고 있소. 인간의 잔혹성을 감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말입니다. 그 대가로 뭘 제공할 거요. 프로이트 박사? 그 자리에 뭘 갖다놓을 겁니까?”
“다만 진실이죠.” 프로이트가 대답했다.
“오이디푸스의 진실이오?” (P292)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햄릿은 행동하면 죽을 것 같다고 느꼈다. 햄릿에게 ‘있느냐(to be)'는 행동하지 않음을 뜻한다. 행동에 나서면 죽는다. 그것이 ’있지 않을 것이냐(not to be)'였다.
있느냐 있지 않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과 일격에 따른 고통을
참는 것이 더 숭고한가.
재앙의 파도를 두 팔로 막아
물리침이 더 숭고한가, 죽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것(to be)'은 단지 운명의 ’고통을 참는 것‘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는 것이다. 또 ’있지 않는 것(not to be)'은 행동하는 것이며 ‘두 팔로 막아’내고 죽는 것이다. 행동에 나서는 것이 죽음을 뜻하므로, 햄릿은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햄릿은 독백을 끝맺는다. ‘죽음 뒤에 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겁쟁이로 만들고 의지를 꺾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햄릿에게 ‘있는 것’은 정적인 상태, 고통을 참아내는 것, 겁, 행동하지 않음을 뜻하며, ‘있지 않는 것’은 용기와 대담한 계획, 행동과 연결하게 된다. 아니, 모든 사람들은 늘 그렇게 이 독백을 이해해왔다. 하지만 나는 의구심이 든다.
어쨌든 마지막에 햄릿은 숙부에 대항해 행동하고, 결국 죽게 된다. 아마도 햄릿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있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삶과 행동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있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다. 정말이지 그럴 수 없다. 햄릿이 마비된 까닭은 어찌된 일인지 행동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잘못된 등식, 가짜 등치는 한 번도 완전히 이해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나는 오이디푸스를 거치지 않고서는 햄릿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비슷한 생각이 액튼 양에 대한 내 감정을 괴롭히려 들 것 같아 두려웠다. 액튼 양이 자신의 아버지를 성적으로 즐겁게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분석이 맞다면 나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쪽이 나라는 걸 안다. 프로이트 말이 맞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누구도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내가 액튼 양의 사례에서 그런 가능성을 추측하는 순간, 그녀를 사랑할 힘을 잃게 된다. 어쩌면 사랑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그런 불쾌한 욕망이 숨어 있다면 어떻게 인류가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P298-299)
내 아버지가 그렇게 꺾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기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는 단순한 원칙에 따라 살았다. 고통을 쉽게 드러내지 말 것. 그 고통이 아버지가 느낀 유일한 감정이었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들었다. 거기에 다른 감정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자기 원칙을 깨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이걸 이해했다. 모든 감정은 고통스럽다.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가장 큰 기쁨도 마음을 찌르는 가시이고, 사랑 --사랑은 영혼의 위기다. 따라서 그런 원칙을 갖게 된 아버지는 어떤 감정도 내보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만을 내보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자신이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조차 내보일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터놓고 말하기 싫어하는 아버지의 천성을 싫어했다.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죽인 게 바로 그 천성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의 그 점을 가장 존경했다.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밤에 저녁을 먹는 그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나 또한 아버지가 갖고 있던 원칙의 반 정도를 지키며 내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비록 아버지가 실천했던 것에는 반에 반도 못 미치지만 말이다. 오래전에 나는 결심했다. 내가 느낀 감정을 터놓기는 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그게 내가 말한 ‘반’의 의미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언어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표현들은 모두 행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쇼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햄릿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실제로 햄릿이 극에서 처음으로 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왕비가 햄릿에게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풀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묻자, 햄릿은 ‘보인다니요, 어마마마? 저는 보이는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고 나서 햄릿은 슬픔이 겉으로 드러난 모든 표현들을 경멸한다. ‘새까만 망토’니 ‘격식에 맞는 엄숙한 상복’이니 ‘강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이니 하는 것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다 사람이 꾸며낼 수 있는 행동이고,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햄릿은 말한다.
“맙소사!” 나는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제가 알아냈습니다!”
“나도 그래요!” 리틀모어도 마찬가지로 열렬하게 환성을 질렀다. “어떻게 그자가 시외에 있으면서 엘리자베스 리버포드를 죽일 수 있었는지 알아냈어요. 밴월 말입니다. 피해자는 그와 함께 있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요. 시장님도 몰랐죠. 밴월은 두 사람이 같이 있던 장소에서 여자를 죽인 겁니다. 그렇죠? 시체를 다시 아파트로 데려가서 묶은 뒤에 살인이 거기서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꾸민 거죠. 이전에는 왜 이걸 몰랐을까. 박사님 생각도 나랑 같죠?”
“아닌데요.”
“아니라고요? 그럼 박사님이 한 생각은 뭡니까?” (P388-389)
나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아니죠. 아니, 내 말이 맞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있지 않음’에 두 번째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존재하는 것의 반대가 죽음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햄릿에게는 아니었죠. ‘있지 않음(not to be)'은 그렇게 ’보이는 것(to seem)'입니다.”
“뭐가 그렇게 보여요?”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나는 일어나서 왔다갔다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주먹을 세게 우두둑 쥐었다. “단서는 줄곧 거기에 있었어요. 극이 시작될 때부터, 처음에 햄릿이 이런 대사를 하죠. ‘보인다니요, 어마마마? 저는 보이는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봐요. 덴마크는 부패했어요. 모든 이들은 햄릿의 부친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했죠. 햄릿의 모친이야 말할 것도 없죠. 햄릿은 왕이 되었어야 했어요. 그 대신, 덴마크 사람들은 햄릿의 어머니가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혐오스럽게 짝이 없는 숙부와 결혼하게 된 걸 축하하고 있었고, 결국 숙부가 왕위에 오르게 되죠.
무엇보다 햄릿이 가장 분노한 건 슬픔을 거짓으로 꾸미는 것, 바로 그렇게 ‘보이려는 것(seeming)'이었죠. 결혼 피로연에 놓인 성찬에 손대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이, 얼마 뒤에 침대에서 짐승처럼 뒹굴 사람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죠. 햄릿은 그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꾸미려고 하지 않았죠. 보이기를 거부했어요. 그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햄릿은 부친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는 복수를 맹세하죠. 하지만 그 순간 이후로 햄릿은 보이는 것의 세계에 진입하게 됩니다. 햄릿이 행한 첫 번째 조치는 별난 기질을 가진 척하는 거였죠. 미친 척하는 거요. 다음으로는 배우가 헤큐베를 위해 울 때 경외에 차서 듣죠. 그러고는 실제로 배우들에게 설득력 있게 가장하는 법에 대해 지시를 내립니다. 심지어 그날 밤 배우들이 공연할 연극을 위해 손수 대본을 쓰죠. 햄릿은 그 장면이 자신의 고통을 누그러뜨려주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살인을 재현해서 숙부를 놀라게 하고 그가 유죄를 시인하게 할 속셈이었죠.
햄릿은 연극, 곧 보이는 것의 영역에 빠져듭니다. 햄릿에게 ‘있을 것이냐 있지 않을 것이냐(to be or not to be)'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의미가 아니었어요. ’그대로 있을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보일 것이냐(to be or to seem)'를 뜻하죠. 그게 햄릿이 해야 할 결정입니다. ‘보이는 것’은 행동하는 겁니다. 거짓으로 꾸미고 배역을 연기하고, 이게 햄릿의 모든 문제. 모든 이의 코앞에 놓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있지 않음은 가장이 되고, 가장은 행동이 되는 거죠. 그러므로 ‘있음(to be)'은 ’행동하지 않음(not to act)'이 됩니다. 여기서 햄릿의 마비가 옵니다! 햄릿은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건 행동하지 않음을 뜻하죠. 햄릿이 그 결심을 지킨다면, 다시 말해 그냥 있기로 결심한다면 행동해선 안 되죠. 하지만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기로 한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그때는 실재보다 가장을 선택해야만 하죠.“
나는 내 앞에 있는 단 한 명의 관객을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삼촌에게 다가가려면 속여야만 하는군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죠. 모든 행위는 연기입니다(All action is acting). 모든 실행은 연극이죠(All performance is performance). 이런 단어들이 중의적인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짜다’에는 계획하다는 뜻도 있지만, 내통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꾸민다’에는 모양이 나게 잘 만든다는 뜻도 있지만, 거짓으로 둘러댄다는 뜻도 있죠. 예술은 기만입니다. 기교(技巧)에도 교묘(巧妙)하다는 뜻이 들어 있죠.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다면, 그에 따라 행동하고 연기해야 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정신분석한다고 가정해봐요. 남자는 여자의 의사가 됩니다. 그는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다만 연기죠. 그는 의사 역할을 그만두더라도 다른 역할을 떠맡게 되겠죠. 친구든 애인이든 남편이든, 뭐든 되어 있겠죠. 우리는 연기할 배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죠.”
노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연기를 했군요. 당신과 같이.” (P439-442)
“당신이 그녀를 죽였군요.” 내가 말했다. “클로로포름으로, 노라에게 쓰라고 남편에게 줬던 것과 같은 클로로포름 말입니다.”
클라라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형사가 되셔야 한다니까. 엘시는 입이 가벼운 애였어요. 목소리는 또 얼마나 듣기 싫던지. 나한테 선택의 여지를 안 주더군요. 다 불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 애 눈에 그렇게 씌어 있더군요.”
“왜 그냥 날 죽이지 그랬어요?” 노라가 소리쳤다.
“아,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란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처리할 순 없잖니. 삶의 전부인 네가 작은 힘을 다해 자기를 망가뜨리고 파괴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남편의 표정을 바라보는 기분이 어땠는지 넌 짐작도 못할 거야. 그 사람 재산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었지. 뭐, 어쨌든 그 사람 돈은 내가 다 갖게 되겠지만, 영거 박사님, 지금 절 너무 오래 붙잡고 계신 것 같군요.”
“우리를 죽일 순 없을 거요. 밴월 부인. 우리 둘 다 당신 총에 맞아 죽은 걸 경찰이 알게 되면 부인이 결백하다고 믿지 않을 겁니다. 부인을 교수형에 처하겠죠. 총을 내려놔요.” 나는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멈춰요!” 클라라가 총구를 노라 쪽으로 돌리며 외쳤다. “자기 목숨을 걸고선 모험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노라의 목숨이 달려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걸요. 자, 이제 발코니로 가요.”
나는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코니가 아니라 클라라 쪽이었다. “멈추라니까!” 클라라가 다시 외쳤다. “당신 미쳤어? 저 애를 쏴버릴 거라고!”
“당신은 노라를 향해 쏘겠죠. 밴월 부인. 총알은 빗나갈 겁니다. 그게 뭐죠? 총신이 짧은 이십이 구경 단발식 권총 아닌가요? 사정거리 육십 센티미터 안에 들지 않으면 마구간 문짝도 못 맞힐 겁니다. 자, 난 육십 센터미터 안에 들어와 있소. 밴월 부인, 날 쏴요.”
“그래요, 그럼.” 클라라는 이렇게 말하며 나를 쏘았다.
나는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히 총신에서 총알이 나와 천천히 내 쪽으로 날아와서는 흰 셔츠를 뚫고 들어가는 광경을 그대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왼쪽 갈빗대 아래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때야 총소리가 들렸다. (P496-497)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건 모두 거짓말입니다. 박사님이 프로이트 박사에게 뒤집어씌운 죄목들이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죄다 거짓말입니다.”
“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알고 있다고 칩시다.” 다나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소. 원하는 게 뭐요?”
“지금은 세시 반이네요.” 내가 대답했다. “삼십 분 뒤에 전 우스터의 G. 스탠리 홀 총장에게 전보를 칠 겁니다. 내일 뉴욕 타임스에 실리기로 한 기사 하나가 빠질 거라고요. 저는 제 전보가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다나는 내 눈길을 마주한 채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하나만 말해주지.”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거요. 인간 두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하오.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놓는 약은 없어요. 사람들의 망상을 치료해주는 약도 없고, 성적인 욕망이 세상에 만연하게 하지 못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풀어주는 방법 같은 것도 없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없고, 박사도 알다시피 모두 신경학적인 문제요. 그렇게 돼야 하고, 정신분석학은 우리를 백 년 전으로 돌려놓을 거요. 정신분석학의 음탕한 성격은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겠지. 음란한 성격은 젊은 과학자들의 정신뿐 아니라 나이 든 이들에게도 매력이 있을 거요. 아마 대중을 노출증 환자로 만들고 의사를 밀교의 수행자로 바꿔놓겠지. 그렇지만 사람들은 언젠가 미몽에서 깨어나 이 모든 게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우리는 머지않아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꿔놓는 약을 발견할거요.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하는 약 말이오. 문제는 그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발가벗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에 당황할 정도의 수치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거지. 전보를 보내시오. 박사, 그 전보의 내용은 사실일 거요. 지금은.” (P511-512)
7월 어느 날, 클라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라에게 결혼 생활을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조지가 거의 밤마다 자기를 채찍질하고 강간한다고 했다. 클라라는 죽을까봐 두려웠지만 남편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남편이 자기를 죽일 게 뻔했다.
노라는 겁에 질렸지만 클라라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클라라를 구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클라라는 경찰 고위직에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휴겔을 두고 한 말이 확실했다. 클라라는 노라와 함께 딸이 죽은 이민 가족을 ‘돌보다’ 그를 알게 되었다. 클라라 말로는 자기가 겪고 있는 곤경을 그에게 털어놓았다고 했다. 휴겔은 클라라를 동정했지만 남편은 아내를 강간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있기 때문에 법은 무력하다고 했다. 하지만 조지가 다른 여자애들을 강간했으며, 침묵하는 대가로 식구들에게 돈을 줬고, 그중 하나는 죽기까지 했다는 말을 클라라가 덧붙이자 검시관은 격노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라고 단언했다. 즉 살인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조지가 정부를 위해 마련해놓은 아파트에서 여자 하나가 겉으로 보기에 죽은 것처럼 발견되어야 했다. 여자는 조지의 손에 죽은 듯 보여야 했다. 그 사람 본인(검시관)은 죽은 듯 보이는 약을 다룰 수 있고, 자신이 직접 의학 검시에 나설 거라고 했다. 사건 현장에 남은 증거는 밴월을 범인으로 몰아갈 것이다. 클라라는 이 모든 계획이 검시관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노라가 믿도록 만들었다.
노라는 이 계획이 너무 대담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노라는 클라라에게 정말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클라라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밴월의 정부이자 희생양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녀(클라라)는 다만 운명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바로 그때 노라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클라라는 겉으로는 충격을 받은 듯 반응했다. 절대 안 돼. 클라라가 대답했다. 희생자의 역을 연기하는 여자는 다치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노라는 클라라에게 다친다는 게 강간을 뜻하는지 물었다. 물론 아니지, 클라라는 대답했다. 하지만 희생자는 줄이나 밧줄 같은 걸로 목이 졸리도록 되어 있었고, 한두 개의 상처 자국이 날 수도 있다고 했다. 노라는 그렇다면 자기가 하겠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클라라가 승복했고 두 사람은 계획을 진행시켰다. 노라는 일요일 밤에 발모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기억을 못했다. 틀림없이 검시관이 준 강경증 유도 약물 탓이었다. 노라는 클라라가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한 게 기억났고, 자신의 가짜 이름을 잊었던 것도 기억해냈다. 하지만 나머지는 불분명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리틀모어에게 설명했다. (P515-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