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편(內篇) ------------> 빛(Lighting)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 지도 몰라. 그래 친구야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김민기, 봉우리 노래中에서-
바람이 만드는 만 가지 소리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듯 보였다. 제자 안성자유(顔成子游)가 놀라 물었다. “선생님, 어찌 그리 넋을 잃으신 듯합니까. 몸을 마른 나무처럼 만들고 마음을 죽은 재처럼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남곽자기가 말했다. “그대는 사람의 피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는 못 들었고, 땅의 피리는 들었어도 하늘의 피리는 못 들었네.” 이 대화에서 세 가지 피리 소리는 1. 인간이 만든 소리, 2. 자연의 소리, 3. 하늘의 소리는 결국 도(道)의 소리이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물아일여’(物我一如), ‘물아일체’(物我一體)와 사물과 나를 모두 잊은 ‘물아양망’(物我兩忘), ‘물아동망’(物我同忘)의 경지다. 빛이 만들어내는 빛깔은 만 가지 빛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사진가는 빛을 통해서 남곽자기가 듣는 소리처럼, 사물을 표현하고자 한다.
나비 꿈- 존재의 경계를 묻다
장자의 <제물론>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호접몽(胡蝶之夢)의 이야기다. “옛날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참으로 즐거웠고, 자신이 장주인 줄 알지 못했네. 갑자기 깨어보니 분명한 장주였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네. 이를 물화(物化)라 하네.” 물화(物化)의 과정은 아마도 광화(光化)의 과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장자가 나비로 변화를 가지는 것처럼, 카프카도 <변신>이라는 소설에서,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본다. 이들은 천재이자, 정신분열자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다른 물체에 이입한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마른 현실은 공감능력이 상실된 사회이다. 다른 이(타자)의 일은 나의 일과는 동떨어진 세계이고, 전혀 관심이 없다.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아와 타자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존재의 경계에서 장자는 넘나들고 있고, 횡적으로 건너가는 자이다.
시비의 상대성
장자는 “저것에서 보면 이것이 저것이 되고, 이것에서 보면 저것이 이것이 된다”(彼出於是, 是亦因彼)라고 말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르다는 것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 같기도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진리도 확증된 것은 없다고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판단이 어려울 때는 그리스 철학자처럼 에포케(epoche)를 해야 한다. 후설이 이 용어를 사용해 <판단중지>라는 말을 한 것처럼, 사물에 대한 기존의 관점, 선입견, 습관적 이해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또한 “언어로 그릴 수 있는 세계는 정확히 그리고, 그릴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는 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말이다. 종교 갈등, 이념 대립, 세대 갈등 이 모든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맞고 그들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를 뿐이다. 시비를 나눌 수 없을 경우, 양비론이나 양시론이 아닐지라도, 모든 이론은 상대적이지만, 장자의 말은 곰곰이 생각할 여지를 준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는 것이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한다. 외물(外物)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매일 마음의 갈등을 일으킨다. 마음의 갈등이 없이 바라보는 것, 빛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그 변화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에 있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려면 밝은 지혜로써 봐야만 할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경지를 ‘보광(葆光)’이라 말한다. ‘보광(葆光)’이란 ‘빛을 싸서 감춘다, 지덕(知德)을 숨겨서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진가는 감추어진 빛, 내면의 빛을 볼 줄 알아야겠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너머를 본다는 것은 감추어진 빛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삼모사 – 지혜로운 유연성
장자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래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기뻐했다’는 이야기이다. 잔꾀를 부리는 의미로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시비와 득실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의미로서도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 내용의 변화는 없지만, 형식이나 순서는 얼마든지 유연하게 바꾸거나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튜디오에서 조명을 세 개를 사용하든, 네 개를 사용하든, 그 형식은 내용의 총합에 합당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진가도 대상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조삼모사의 이야기가 나쁘게만 해석되는 이유는 현실이 팍팍한 이유이다. 여기서 빠진 부분을 유추해서 생각해보면 아침에 세 개를 주다가, 네 개를 준 것은 하나를 더 준 것이고, 저녁에는 세 개가 아니라 세금으로 걷어 들인 것이 6개를 걷어가고, 또 다른 저녁에는 7개를 걷어간다고 생각하면 결국은 총합이 똑같다. 현실은 월급을 많이 준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세금으로 걷어 들인다면 삶은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빛이란 그 누구에게도 세 개를 주거나 네 개를 주거나 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비춘다.
언어의 한계와 도의 인식
장자는 “도는 말로 인해 가려지고, 말은 영화(榮華)로 인해 가려진다.”(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라고 말한다. 진리는 부분적 성취에 가려지고, 말의 본뜻은 화려한 수식에 가려진다는 의미이다. 언어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天地一指) AI시대에 언어는 더욱 해석하기 쉽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진다.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하기도 한 것들은 판단을 모호하게 만든다. 장자는 이러한 한계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편집증은 거짓증거나, 확증된 거짓말을 양산하고,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려진 보광(葆光)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으로 남아 있지 않고, 덧칠된 생각들뿐이다. AI의 학습은 점점 더 지능 폭발(intelligence explosion)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천지일지(天地一指) - 우주는 하나의 손가락
“천지는 한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 마리 말이다.”(天地一指, 萬物一馬).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차이도 결국 하나의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하나이고, 만물의 다양성도 결국 한 마리 말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 관찰 방법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한 손가락으로 미친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빛에 의해서 하나의 한 점으로 수렴될지도 모른다. 만물의 근본도 하나로 귀결될지도 모르고.
“지극한 사람의 쓰임은 마음이 거울과 같아서, 가는 것을 전송하지 않고 오는 것을 맞이하지 않으며, 응하되 간직하지 않는다”(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는 구절로 <제물론>은 마무리된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를 비출 뿐,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상통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사진가는 빛이 만들어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참 쉽기도 하지만, 어려운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오역된 것들로 덧붙여 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影子的對話)
망량(罔兩)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조금 전에는 걸어가다가 지금은 멈춰 있소. 당신은 조금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서 있소. 어째서 그처럼 일정한 마음가짐이 없소.”
그림자가 말하였다.
“내가 무언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걸까요? 내가 의지하는 것도 또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걸까요? 내가 의지하는 것은 뱀 껍질이나 매미 날개 같은 걸까요? 그러나 어찌 그러한 까닭을 알겠으며, 어찌 그렇지 않은 까닭을 알겠소? ‘의존하지 않음’에 의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이오.” 그림자는 빛이 있기에 존재한다. 빛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림자가 없는 빛은 존재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빛을 삶으로 그림자를 죽음으로 대입해 본다면, 삶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고 있다. 그림자가 없고 빛만 있다면, 또는 빛은 없고 그림자(어둠)만 있다면. 순백색과 순흑색을 카메라는 표현하기 어렵다. 빛(Highlight)과 그림자(Shadow)가 적절히 교차하고 있어야 사진은 계조가 풍부한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림자가 더해져야 완벽한 사진을 만들 것이다.
https://youtu.be/vdIchIlgDJU?si=iaXaaQHaoOSPuA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