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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120

언어의 타락

by 노용헌


언어의 타락

Corruption of Language


정치적인 글이 나쁘다는 건 우리 시대에 대체로 잘 들어맞는 사실이다. 사실이 아닌 경우란 글 쓰는 사람이 “당파적 노선”이 아니라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일종의 반골인 경우에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정설(定設)이란 그 색깔이 무엇이건 간에 생기 없고 모방적인 스타일을 요구하는 듯하다. 팸플릿이나 영향력 있는 논설, 성명, 백서, 정무차관의 연설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표현법은 정당마다 다르지만, 참신하고 활력 있고 직접 만든 표현을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연단에서 친숙한 표현만을(‘흉포한 잔학행위’, ‘칠석같은 결의’, ‘피로 얼룩진 압제’, ‘자유 세계의 민족들’, ‘어깨를 나란히 하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지친 하수인을 보노라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이라도 보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은 연사의 안경에 조명이 반사되어 안경이 눈을 가리는 검은 원반처럼 보이는 순간이며 더 강해진다. 이는 완전히 공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는 연사는 실제로 자신을 어느 정도 기계로 개조해 버린 것이다. 목구멍에서 그럴듯한 소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가 스스로 단어를 선택할 때처럼 뇌가 관여한 것은 아니다. 연설을 거듭 되풀이해서 익숙해진 나머지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교회에서 응창(應唱) 성가를 하듯 말이다. 이렇게 의식이 축소된 상태는 정치적 단합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유리한 작용을 한다.


-조지 오웰, 민주주의와 자유, P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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