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년
“자, 여기. 다 너 가져. 텔레비전 뉴스에 아빠 나오는 거 확인해도 되겠지?”
그들은 의자 높이의 치토스 봉지와 건강식품 가게에서 산 여섯 개들이 자몽 소다를 가져다 놓고 마루의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아 야구 하이라이트, 선전, 일기예보 --내일도 비는 오지 않음--를 보며 엽기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시간까지 기다렸다. “자.” 뉴스 앵커 스킵 트롭블레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해마다 있어온 바인랜드 행사가 오늘 열렸습니다. 지역 정신병원의 외래환자인 조이드 휠러가 매해 공연으로 이제는 널리 알려진 판유리로 된 창을 통과하여 뛰어넘기를 했습니다. 올해의 행운의 가게는 화면에서 보시는 대로, 101번 고속도로 바로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큐컴버 라운지입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제보자의 전화에 놀라 TV 86 핫샷 뉴스팀이 작년에는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거의 특종처럼 다루었던 휠러의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갔습니다.”
“괜찮아 보이는데, 아빠.” 텔레비전으로 보기에 조이드는 창을 세게 부숴트렸다. 이번에는 미리 녹음된 진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순찰차들과 소방장비 덕분에 생기 넘치는 크롬 느낌이 돋보였다. 조이드는 바닥에 부딪쳤다 앞으로 구르고 일어나 카메라로 돌진하면서 이를 드러내고 소리 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P28-29)
그것은 적어도 씰베스터와 트위티만큼 끈질긴 수년에 걸친 로맨스였다. 엑또르가 가끔은 조이드를 위해서라도 만화가 폐지되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초기부터 그는 조이드를 가장 잡히지 않을 것 같은 피추적자로 여겼다. 그것은 조이드가 그에게 굴하지 않는 도덕적인 청렴함 같은 걸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집요함, 거기에 더해 약물 남용, 또 계속해서 지속되는 정신적 문제들, 그리고 어쩌면 상상력의 결핍일 수도 있는, 삶에서 어떤 거래를, 그게 약물이든 약물이 아니든,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는 소심함 탓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조이드를 쫓는 데에 전처럼 집착하지는 않지만 --그같은 관계의 위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아직도 엑또르는 뭐라고 딱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이, 그것도 되독이면 아무 예고 없이, 가끔씩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가 조이드의 인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된 직후였다. (P40-41)
“아직도 똑같은 옛날 감정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군. 이해해..... 지금쯤이면 좀 누그러져서 현실과 타협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닌가보군.”
“국가가 말라비틀어지면 가능하겠죠, 엑또르.”
“대단해. 자네 같은 60년대 사람들. 놀라워. 사랑스럽다니까! 어디를 가든, 상관없어.... 그래. 몽골! 외몽골의 작은 마을에 가봐. 자네 나이쯤 되는 현지인이 달려와서 두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당신 싸인은 뭐예요?’ 하고 외치거나, 아니면 ‘인-어-가다-다-비다’를 음 하나 틀리지 않고 딱딱 맞게 부를 거야.”
“인공위성 덕분이죠. 누구나 다 모든 걸 들을 수 있어요. 우주란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요?”
마약단속반 형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식으로 입 근육을 슬쩍 움직였다. “숨기지 마. 자네가 아직 그 말도 안되는 것을 믿고 있다는 거 다 아니까. 자네들 모두 속은 아직 어린애들이야. 그 당시의 시간 속에 실제로 살고 있어. 아직도 그 마법과 같은 결정적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지. 하지만 괜찮아. 나도 그러고 살 수 있어..... 그런데 게으르거나 일하기를 두려워하면 안돼..... 조이드. 자네하고는 도저히 대화가 안돼. 지금까지도 자신을 그렇게 순수하게만 생각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가끔 보면 자네는 어떻게든 돈은 한푼도 안 벌면서 한번에 몇 달씩 부랑자처럼 빈둥거리는 히피 뮤지션 같아. 정말 이해가 안 가.”
“엑또르! 그 입 다물어요! 나한테 지금 --난 그때도 순수하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성인처럼 행동하라는 거예요?”
“자네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다녔지. 미안하네, 친구.”
“그러게요.”
“내가 자네더러 철 좀 들라고 다그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가끔이라도 자네 자신한테 한번 물어봐. 알겠어?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그게 다야. 정말 쉽지. 과연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봐봐.” (P50-51)
펜들턴 셔츠와 청바지 위에 하얀 실험실 가운을 입은 사내가 문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더니 조이드를 향해 걸어오자, 그는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전혀 본 적 없는 사람이군.”
“조이드 휠리 씨! 아아, 어젯밤 뉴스에서 봤어요. 믿기지 않네요. 당신이 엑또르와 서로 아는 사이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요, 엑또르는 아직 정상이 아니어서, 우리한테 치료를 받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지금.....”
“그가 탈출했다 이거군요.”
“결국에는 잡게 될 거예요. 그래도 나중에 연락이 되거든, 우리한테 전화 주세요. 괜찮으시겠죠?”
“그런데 누구시죠?”
“오, 죄송합니다.” 그는 조이드에게 명함을 건넸다. 거기에는 ‘닥터 데니스 디플리, 사회복지 석사, 박사/비디오 교육 및 재활을 위한 국가기금’, 쌘타바버라 북쪽에 위치한 어떤 지명, 라틴어로 된 모토 빛에서 건강까지가 씌어져 있었고, 모토 위쪽엔 텔레비전 세트 모양이 둥근 원 안에 그려져 있었으며, 인쇄된 전화번호는 선을 그어 지워져 있고 대신에 또다른 번호가 볼펜으로 씌어져 있었다. “그게 우리 현지 번호예요. 엑또르가 잡힐 때까지 바인랜드 팰리스에 있을 예정입니다.”
“기가 막힌 하루군요. 당신들도 연방 사람들이죠!”
“이등분선 같죠. 동시에 사적, 공적으로 보조금과 계약금을 받아서 기본적으로는 텔레비전 남용과 그밖의 비디오 관련 장애를 연구하고 치료합니다.” (P58-59)
그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아직도 그녀의 운명을 믿지 못하는 여교사처럼 웃음을 지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레네시, 당신은 사랑이 누구든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그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모자챙 바로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적어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어야 해. 어딘가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어야 해. 그녀의 얼굴은 지금 이 햇빛을 받고 있고, 좋아. 그녀의 두 눈은 딱 지금처럼 고요하고, 그녀의 입은 그대로 벌어져 있고.....
쩨쩨하든 아니든, 그는 그 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월은 그가 올라탔던 높고, 고요하고, 사납고, 잔잔한 파도처럼 계속 흘러갔다. 그러나 점점 그날이, 그 운명의 날이 자기 몫을 요구하며 그에게서 빼앗아가더니, 결국은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했던 단 하나의 작고 쓰라린 즐거움만이 남게 되었다. 가끔씩 달, 조수, 행성의 자력이 다 같이 조화를 이룰 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 그의 이마에 달린 제3의 눈을 통해 그게 어디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곧장 미끄러져갈 수 있는 외계의 운송 체계 속으로 바로 들어가서, 사람들 눈에 안 보이도록 하는 게 아직 불완전해서 더러 감지되는 불편을 겪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오래 그녀를 따라다니며 어렵게 짜낸 매 순간을 즐겼다. 이것은 누가 봐도 나쁜 짓이었다. 그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것을 털어놓았다. 나중에 어리석은 행동으로 판명될지도 몰랐지만, 거기에는 바로 오늘 아침 그의 고백을 들은 딸 프레리가 있었다. (P67-68)
60년대가 끝났을 때, 치마 끝이 아래로 내려오고 옷 색깔이 칙칙해지고 모두가 전혀 화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화장하게 되었을 때, 누더기를 걸친 자들이 때를 만나고 닉슨 정권의 탄압이 가장 열성적인 히피 낙관론자들의 눈에도 충분히 보일 만큼 명백하게 그 윤곽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무렵에 프레네시는 다가오는 가을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생각했다. 이제 마침내 나의 우드스톡, 나의 로큰롤 황금시대, 나의 LSD 모험, 나의 혁명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마침내 그녀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도로에서 적법차량을 운전할 수 있고, 전자동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영장과 허가증에 상관없이 행동하고, 역사와 사자(死者)들을 무시하고, 어떠한 미래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결정적인 순간에 순전히 그것을 채우는 행동에 따라 단순하게 전진할 수 있는 몇몇에게만 주어진 자유에의 특별한 복종을 받아들였다. 이제 그 어떤 마약 상용자도, 그 어떤 혁명적인 무정부주의자도 찾아내지 못할 단순하면서 확실한 세계, 삶과 죽음의 1과 0에 기초한 세계가 도래한 것이었다. 최소의, 아름다운 그 세계가, 삶과 죽음의 패턴들이......
그녀가 앞을 내다볼 겨를이 없을 정도로 쫓겼던 그 어린 시절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닉슨과 그의 무리들의 시대 또한 가고, 후버가 죽고, 심지어 시민들이 준비하고 있다가 정부의 사건 기록 편집본이 가치가 있다고 판명되면 그것을 읽는 척하고 연기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워터게이트와 그로 인해 파생된 수많은 사건들은 플래시오 ㅏ프레네시에게는 호화롭던 황금시대의 종언을 가져왔다. 그는 몇주 동안 집에만 있으면서 마룻바닥에 앉아 텔레비전 앞에 얼굴을 바짝 쳐든 채, 낮에는 온종일 공청회를 보고, 밤에는 다시 공영채널을 틀었다. 계속해서 떠드는 작은 화면 앞에서 여름 내내 씩씩거리고 탄식하는 그의 모습은 그녀가 그를 지금까지 봐온 것 중에 가장 강렬했다. (P120-121)
프레네시는 커가면서 전쟁 이전 시대의 이야기들, 스톡턴 통조림 공장 파업, 벤투라 사탕부 농장, 베니스 양상추 농장, 쌘와킨 목화 농장 일대의 파업..... 사샤가 조심스럽게 알려준 바로는, 마리오 싸비오가 태어나기도 전에 스프라울 플라자에서뿐 아니라 스프라울 본인에 맞서서 시위가 계속되었던 버클리에서의 징집 반대 운동에 대해서 들었다. 또 어딘가에서 사샤가 톰 무니의 석방을 위해 일하고, 피켓 시위 금지를 위해 제정된 악명 높은 제1개정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1938년 컬버트 올슨의 선거유세에 참여한 이야기도 들었다.
“전쟁이 모든 걸 바꿔놓았어. 전쟁 중에는 파업이 전혀 없었으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전쟁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필사적인 책략이자, 히틀러나 스딸린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지도자의 영향력하에 국가를 동원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들 중 상당수는 FDR를 정말로 좋아했어. 주위에 엄청나게 많은 일자리가 있었는데도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뭐가 뭔지 충분히 생각해보기 위해 잠시 일을 그만두었어.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아가면서 말이야.”
“다른 여자들은 어땠는데?” 프레네시가 궁금해서 물었다.
“함께 투쟁하던 내 자매들, 오, 아냐, 아냐, 내 어리석고 불쌍한 것들은 모두들 정신이 없었어. 남편들이 해외에 있는 동안 바람을 피우고, 아이들과 시어머니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너무 열심히 일하거나 혹은 노느라 정치 얘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 그러다보니 야학에 가서 동료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을 볼 시간조차 전혀 없었어. 그러던 중 마침내 네 아버지가 맞춤양복이 아니라 정부에서 나눠준 제복을 입고, 바짓단이 너무 짧아서 양말에 비상용 담뱃갑을 끼워넣은 게 훤히 다 보이는 차림으로 나타났지.....” (P129-131)
“'꿈일 때와 꿈이 아닐 때를 어떻게 구분해?‘” 프레네시가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질문이야.”
프레네시는 피자를 오븐에 넣었고, 플래시는 어슬렁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잠시 후 식사를 하면서 플래시가 난데없이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사라져버린 컴퓨터 명단에 대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두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는 실종자들이 죽었거나, 혹은 그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로부터 숨었거나 하는 거였는데, 그것은 둘 중 누구도 대그우드 범스테드가 쌘드위치를 먹어치울 때처럼 물질의 법칙이 중단된 상태에서 걸신들린 듯이 먹는 아들의 식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 최악의 씨나리오였다. 하지만 프레네시는 또다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어쩌면 그와 반대로 그 사람들이 지상으로, 그러니까 세상으로 다시 나온 건 아닐까?”
“그래,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P148)
그러나 지금 그녀, 플래시, 저스틴이 놓여 있는 위치에서는, 중량이 없고 눈에 안 보이는 전자(電子)상의 실재 혹은 부재의 사슬을 나타내는 문자와 숫자로 된 자판의 키만 누르면 모든 게 끝날 수도 있었다. 만약 0과 1의 패턴이 인간의 삶과 죽음의 패턴과 ‘같다면’, 만약 개인의 모든 것이 0과 1의 긴 행렬에 의해 컴퓨터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긴 행렬에 의해 어떤 종류의 창조물이 나타날까? 그것은 천사, 잡신(雜神), UFO의 어떤 존재처럼 적어도 한 차원 높은 곳의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존재의 이름으로 된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려면 여덟명의 인간의 삶과 죽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기록이 완성되면 그것은 세계 역사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신(神)의 컴퓨터에 들어 있는 숫자들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일반적인 복음성가 같은 것을 따라 부르듯 혼자 중얼거렸다. 죽어서든 살아서든 우리의 쓸모만이 신이 보는 유일한 것이라고. 땀과 피의 세계에서 우리가 울고 다투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해커의 입장에서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야간 매니저가 한번 쓴 일회용 기저귀 다루듯 수표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지급이 중지된 수표예요.”
“은행이 문을 닫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는 근무시간의 대부분을 가게에 몰려들었다 빠져나가는 수많은 컴퓨터 문맹들에게 현실을 설명하는 데 썼다. “컴퓨터는요.......” 그가 한번 더 친절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절대로 자거나, 혹은 쉬는 법이 없어요. 24시간 영업하는 가게처럼요......” (P152-153)
“우오, 그러게요. 저도 아줌마를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어요. 워, 잠깐만요6. 그럼 아줌마가 디엘 채스테인이에요? 신체장애인 명부의 약어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바로 아줌마였군요. 할머니가 보여준 사진하고 다르게 생기셨어요. 아줌마와 우리 엄마가 같이 찍은 사진 말예요.”
“네 엄마라고.” 프레리는 그녀가 보다 다르마 피자 템플에서 본 적이 있는 조심스럽고 침착한 방식으로 숨 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한쪽 입가가 다른 쪽보다 약간 위로 올라갔을지도 몰랐다. “네가 프레네시의 아이로구나.” 그녀는 한동안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해본 적 없는 것처럼 힘을 들여서 말을 했다. “네 엄마하고 나는...... 우리는 옛날에 같이 뛰었어.”
그들은 밖으로 나가 테라스의 조용한 구석을 찾았다. 프레리는 디엘에게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소문과 정신 나간 마약단속반원과 그의 영화 계획, 그리고 법무부에서 보낸 준(準)군사 부대가 집을 덮친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디엘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이름이 부록 본드가 확실하니?”
“그럼요. 위험한 인물이라고 아빠가 말했어요.” (P167)
프레리는 디엘이 자기에게 아직 어린 나이에 비해 너무 편집증이 과한 것 같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디엘은 가느다란 유리잔의 가장자리 너머로 슬쩍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좋아요. 우리 엄마는 당신들이 하고자 했던 그 혁명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고, 그러다 도망쳤고, 영장이 발부됐고, 우체국에 연방수사국의 수배 사진이 붙었고, 아빠 조이드는 얼마 동안 엄마의 은신처가 되어주었고, 그러고 나서 나를 낳았고..... 우리는 연방요원들이 엄마의 소재를 찾아내어 엄마가 모습을 감추기 위해 지하에 숨어야만 했을 때까지 가족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반항하는 듯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지하. 그렇지. 어른들이 어린 프레리에게 딱 그 정도만 이야기해주었으리라는 걸 디엘은 알고 있었어야만 했다. 지하. 그렇다면 디엘은 자기 알고 있는 것을 그녀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어떻게 말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 (P169)
그녀가 찾은 것은 새벽부터 카메라와 불법 ECO 필름이 가득 든 가방을 메고서, 텔레그래프 가(街)에서 폭동 진압 장비와 소형 총기, 그리고 바라건대 고무탄 소총 정도만을 갖추고 거리로 접근하고 있는 준군사 부대를 마지막으로 필름에 담고 있는 프레네시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프레네시는, 캠퍼스에서 천천히 후퇴하면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던져놓고 가는 군중의 앞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필름이 다 돌아가고 뷰파인더의 안전장치에서 눈을 땠을 때 그녀는 홀로 군중과 경찰의 중간 지점에 있었고, 재빨리 몸을 피할 수 있는 옆길도 전혀 없었다. 음, 상점 입구들은 모두 사슬로 잠겨 있었고, 창문들은 두꺼운 합판으로 셔터가 쳐져 있었다. 그녀가 취해야 할 다음 단계는 계속해서 필름을 갈아 끼워 카메라에 좀더 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방 속을 계속 뒤적거리는 것만으로도 카키색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코 끝에 계속 남아 있는 최루가스 바로 너머로, 그들의 냄새를, 즉 면도 후에 바르는 로션, 태양빛을 머금은 총기의 쇳덩어리, 이미 두려움에 젖어 땀이 흥건한 겨드랑이의 냄새를 그대로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기도했다. 오, 슈퍼맨이 필요해요, 덩굴을 타고 있는 타잔이 필요해요. 아랫배에 심한 복통이 순간적으로 찾아왔다 사라졌다 하는 찰나에 헬멧과 안면 가리개까지 완전히 새까만 디엘이 전체를 빨간색과 은백색으로 과도하게 치장한 자신의 소중한 악동, 체코산 오토바이 체 제드를 타고 나타나서는, 위험에 처한 프레네시와 카메라, 미니스커트, 장비 가방 등등 모든 걸 태우고 사라져버렸다. (P193-194)
그런데 디엘 생각에는 무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위가 그에게 계속 상기시켰을 테니까. 남자들이란 늘 그랬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음모로 가득 찬 늪지대와 같았다. 그곳에서는 물 밑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름도 없는 미끌미끌한 것들이 살갗에 닿을 듯 말 듯 계속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모두들 수면으로 보이는 게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드디어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오직 그들로부터 벗어나, 싸우는 법을 배울 때가 유일하게 기분이 좋았던 때라는 확신이 그녀에게 막 흘러넘쳤던 것이다. 여자를 밝히는데다 갑자기 광분하고, 기질적으로 쉽게 화내는 것도 모자라 너그러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세에는 기하학적으로 어지럽게 퍼져 있는 주둔군 가족주택 구역의 마당, 울타리, 쓰레기장 어딘가에서 모습을 숨긴 채 숨만 쉬며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그녀를 낚아채갈지도 모르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러다보면 너무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핑곗거리가 될 만한 극적인 어떤 것을 기다리는 대신에, 그녀는 두 사람 모두 우연히 집을 비운 어느날 작은 군용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우고,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것들을 긁어모아 쌘드위치를 만들어 커다랗게 66이라고 적힌 쇼핑백에 넣은 다음, 센세에에게 가져 다줄 군납 시바스 리갈 한병을 훔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방을 빠져나와 무단이탈을 했다. (P208-209)
“우리가 어떻게 만났느냐면......” 디엘의 목소리가 흥분한 소프라노로 바뀌었다. “이거 참! 실은 랠프 웨이본을 통해서였어. 나는 브록 본드에게 복수하는 꿈을 꾸면서 내 인생의 수년을 보냈어. 그를 죽이고 싶었거든. 이런저런 식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자이니, 그를 죽여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 정도로 나는 균형을 잃었었어. 그런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고, 내 판단력을 망가뜨렸어.” 처음에 그녀는 랠프가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팬인 줄 알았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항상 정장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마침내 그는 유진의 어느 커피숍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새우 스캠피를 곁들인 접시를 한동안, 언뜻 봐서는 맥없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토마토소스로 최대한 완벽하게 뒤덮인 채로 길 아래의 특이한 장난감 가게로부터 방금 배달된 것이었다. (P215)
“주의력이 관건이야. 디엘 상.” 그녀가 심각하게 말했다. 육체관계로 하는 무술은 복잡하고 관계적이어서, 단지 기의 흐름과 그날의 그 시간뿐 아니라, 기억, 양심, 정념, 억제도 총동원되어 한번의 치명적인 순간을 위해 쓰이도록 되어 있었다. 로셸 수녀는 디엘의 수그린 목덜미와 옆으로 돌린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네 생활 패턴으로 봤을 때 내 생각은 이래, 다른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다가, 너는 아래로 내려오게 된 --”
“납치됐었어요!”
“--끌려간 거야. 또다시 타락한 세계로. 이번엔 정신을 집중해서 침착하게 준비하지 않은 채 무모한 매춘부가 되어 외부세계로 뛰어드는 바람에 기회를 날려버린 거야. 뭘 더 바라지?”
바로 그때 디엘은 이노시로 센세에가 결코 전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 충동적으로 덤벼들었다 일을 망치고 남은 일생 동안 고생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해주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완전히 망쳐놓을 여지가 그녀의 운명 속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에게 경고할 수 있었겠는가? 디엘은 자기가 그의 말에 잠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알고 싶은 건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느냐는 거예요.”
“네 삶을? 잊어버려. 손바닥 진동술을 썼다면, 그럴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변수가 많아서 경우마다 달라. 특히 얼마나 빨리 조처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어.” (P254-255)
와와즈메 라이프 앤드 논-라이프의 프로그래머들은 밤낮으로 매달린 끝에, 인체의 많은 경락 혹은 주요 신경들은 발바닥에서 막힌다는 전통사상에 근거하여 표준화된 반사요법 분석을 내놓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2차원 발바닥에 3차원 신체가 투사된 신체 지도를 얻기에 이르렀다. 당시 진흙 바닥에 난 발바닥 자국에는 작은 전자기 흔적들이 남아 있었는데, 비록 그 가운데 일부는 비에 지워졌지만, 발의 임자가 무엇이든 간에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 뇌를 포함해 모든 주요 기관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스냅사진으로 보여줄 정도는 되었다.
“기관이라고요! 뇌라고요! 그렇다면 말씀은--”
“보고서에 따르면, ‘100미터 높이의 도마뱀류의 발자국과 일치’한다고 되어 있었어!”
“잠깐, 정리 좀 하고 갈께요. 그것은 폭발 전문가의 소행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미노루 뒤에 누가 있든, 당신이 나를 뒤쫓게 한 거군요. 그런가요?”
“한가지 더 있어!” 교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타께시는 다른 비싼 요금제들처럼 궤도상에 정지해 있지 않는, 즉 지상의 동일한 지점 위의 궤도에 항상 멈춰 서 있지 않는, 절약형 통신위성 치프샛 써비스에 가입해 있었다. 치프셋은 하늘에서 계속 되쪽으로 이동했고, 지금처럼 사람들이 한창 통화 중일 때 지평선 저 너머로 가버렸다. “칩코의 실적!” 와와즈메 교수가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귀에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토오꾜오 증권러래소에서 말이야! 그게 갑자기 아주 이상해졌다고! 그래. 말 그대로 ‘이상해’ 졌어! 가령--” 그 순간 싸구려 인공위성이 먹통이 됐다. 타께시는 욕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P278-279)
그들은 노스 스푸너 출구에서 나와 리버 드라이브로 빠졌다. 일단 바인랜드의 신호등에서 벗어나자, 강이 이전 모습을 되찾더니 유로크족이 항상 믿어왔던 그대로, 유령의 강이 되었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 이름이 있었다. 낚시터, 덫을 놓은 곳, 도토리 터, 강 위로 솟은 바위, 강둑 위의 바위, 작은 숲과 각각 이름이 붙은 나무들, 샘물, 물웅덩이, 풀밭,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각각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었다. 이 중에 많은 것들을 유로크족은 보거라고 불렀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좀더 작은, 최초의 인간들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살고 있던 존재들이었다. 인류가 밀려들기 전 보거들은 뒤로 물러났다. 몇몇은 산 너머 동쪽으로 영원히 모습을 감추거나, 혹은 거대한 삼나무 보트에 옹기종기 누워 물에 몸을 맡긴 채 저 멀리 바다로 점차 모습이 희미해지면서 새로 온 자들이 듣기에도 구슬픈 박탈과 추방의 노래를 한마음으로 부르며 사라졌다. 떠나는 게 불가능했던 다른 보거들은 눈에 띄는 풍경 속으로 물러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슬픔을, 그리고 계절이 계속 이어지면서는 다른 감정들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그래서 후세의 유로크족은 그 감정의 언덕 위에 앉아, 감정을 건져올리고, 감정의 그늘에서 쉬면서, 지진, 일식, 그리고 알래스카 만에서부터 잇따라 포효하는 집채만 한 겨울 폭풍뿐 아니라 바람과 빛의 뉘앙스를 사랑하고 그 안으로 점점 더 스며드는 법을 배웠다. (P303-304)
디엘이 디차를 버클리에서 처음 알았을 당시에 그녀는 여동생 지피와 함께 전투복 차림에 유대계 흑인들의 지나치게 부풀린 헤어스타일을 한 채, 공공장소의 담벼락에 ‘정부를 박살 내라’라는 구절을 스프레이로 칠하고 터퍼웨어 용기에 담은 플라스틱폭탄을 아이스박스에 넣고 돌아다녔다. “영화 편집자인 척했지만 사실 우리는 무정부주의 폭파범들이었어.” 그녀가 프레리에게 말했다. 오늘밤만큼은 그녀는 교외의 평범한 엄마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또다른 위장일지도 몰랐다. 디차는 유행하는 안경테로 된 안경을 쓰고 온통 앵무새투성이의 무무를 입고서 상그리아를 마시고 있었다.
황금시간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야외의 햇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나무 위의 새들은 저 멀리서 밀려오는 프리웨이의 콘크리트 파도 소리 위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디차는 그들을 파티오를 가로질러 뒤편에 있는 작업실로 안내했다. 무비올라 편집기와 16밀리미터 필름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몇몇은 릴 혹은 심지에 감겨 있었고, 다른 몇몇은 주변에 조각조각 헝클어져 있었으며, 또다른 몇몇은 깡통째로 강철 트렁크 안에 담겨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관 중인 24fps 영화필름과 옛날 게릴라 영화 장비들이었다.
그 당시에 그들은 눈에 띌 듯 말 듯 무리를 지어 오래된 중형 쎄단, 안팎으로 캠프용 자동차 장식을 댄 픽업트럭, 기기 적재용 이코노라인 밴, 움푹 파이고 크롬 도색은 없지만 고속 정찰차로는 끝내주는 스팅 레이를 몰면서 시민 밴드로 서로 무선 연락을 취하며 함께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당시로서는 도로의 진풍경이었다. 그들은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고, 찾으면 찍어서 그들이 목격한 기록을 바로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 그들은 근접촬영이 갖고 있는 폭로와 엄청난 충격의 효과를 특히 신뢰했다. 권력이 부패하면 그렇게 된 과정이 가장 민감한 기억장치인 인간의 얼굴에 일지처럼 적히기 마련이었다. 누가 빛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돈에 팔려간 자들의 얼굴 사진들을 들여다본다면, 어떤 시청자가 전쟁, 체제, 미국의 자유에 관한 무수한 거짓말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합성된 목소리들이 절대 수령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들을 저버린 채, 똑같은 표현들을 얼렁뚱땅 둘러대고 아무 감정 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P317-318)
브록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대로, 자기강박적인 대학의 얼간이들 중 최악이 어른 형태로 투사된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그녀 스스로에게 그런 척해야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짜’ 브록, 즉 중간에 비틀거리더라도 그녀가 85필터를 끼고서 태양과 하늘이라고 상상하는 빛 속으로 그를 이끌어서, 진즉 그렇게 자랐어야 하는 남자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랑스러운 사춘기 소년 브록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정신을 놓은 채,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것은 그녀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었다. 그 단어는 이미 그 시절에 하찮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 마법은 사그라졌지만, 모든 로큰롤의 주제였으며, 우리가 한때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순수한 원천이었다. 만약 믿을 만한 게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브록마저, 사랑하고 싶을 만큼 바보같이 난폭한 파시스트 브록마저 구원할 수 있는 저 무게가 없고, 햇빛이 비치는, 60년대의 필수품의 힘에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그는 잠이 든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것인 그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러자 그의 육체의 자태,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에 저절로 몸을 부르르 떨며 굴복하고 말았다. 척추 밑에서는 두려움이, 두 손에서는 욕정의 아픔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녀는 너무 벅찬 나머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에게 몸을 기울여 자신의 넘쳐흐르는 마음을 작게 속삭였다. 그때 감긴 줄로만 알았던 그의 눈꺼풀이 줄곧 열려 있는 게 어슴푸레 보였다. 그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브록이 웃기 시작했다. (P352-353)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의 단순한 방식을 거부하고, 집 안에 있는 총과 더불어, 그녀가 여전히 믿는 초당-24-프레임의 진실이 좀더 강렬하고 새로운 수준의 진실을 찾아내게 될 거라고 상상했다.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작은 체구의 바보 자식에게 8대 1로 조명을 비추고, 거울에 반사되는 지나치게 밝은 부분들은 누그러뜨리고, 바싹 붙어서 근접촬영에 들어간다...... 그런 다음 뒤로 빼서, 그 사랑스럽고 치명적인 물건을 오늘밤 모임의 대표 숏에 넣고, 프레임을 변경하고, 마침내 그녀가 여태껏 조명을 비추고 눈에 보이게 했던 모든 것들, 그저 유령에 불과했던 그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피할 수 없는 협상 조건들로 돌아가......
모든 게 돌고 돌았다. 바다 쪽에서 들어오는 햇빛, 허브와 사샤로부터 배운 옳고 그른 사례들, 브록이 변덕스러운 달처럼 밀려들어오게 했다 빠져나가게 하는 욕구의 조수(潮水)까지. 그는 모든 걸 차지하려 했다. 그 썩을 놈은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했다. 그때부터, 이따금씩 아닌 척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 다 그녀에게 더 이상 협상할 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P392)
듣는 동안 내내 프레네시는 친구의 눈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피스크 자매 말이 옳았던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디엘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장난감 무기를 든 꼬마들처럼 헤집고 다녔어.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권총처럼 우리에게 그런 힘을 주었어. 빌어먹을. 어떻게 그렇게 놓칠 수 있었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그때 우리는 마약에서 억지로 손을 끊으려 했었지? 퍼플 오슬리를 완전히 끊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머리를 내저으며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위드만 제거된 게 아니었어. 다른 사람들이 더 있다는 얘기가 캠퍼스 전체에 돌았어. 연방수사국이 그것을 감추고 있다나? 그런들 그게 우리에게 무슨 대수겠어? 우리가 누구를 구한다고? 총이 등장한 순간 모든 ‘영화 예술’ 작업도 다 끝이 났어.” (P419)
그 의원이란 자는 친구들한테 여러번 진 신세를 갚으려고 철사 울타리가 쳐진 펜실베이니아 주의 앨런우드 교도소 영내로 몰래 두어차례나 기어들어간 전적이 있는 자였다. 만약 도박이 성공한다면, 브록은 생각만으로도 그냥 흥분이 됐다. 그 법안, 그의 것인 그 법안이 통과되면 시민소요를 일으키다 억류된 자들은 규정에 따라 법무부 보호시설로 데려가 거기서 밀고자 적격심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중에 적격 판정을 받은 자들은 연방정부에 의해 기소당할지, 아니면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법무부의 정치정보실을 위해 비밀첩보원으로 일하는 청부인으로 고용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다양한 무기들의 사용법을 포함해 정규 훈련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들은 원래의 매도계약에 따라 연방수사국에 넘겨져, 그쪽의 지시하에 대학 캠퍼스, 좌경단체, 다른 국내 소요 진원지 등으로, 때로는 중복해서 침투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기소면제를 제외하고도 모두들 선망하는 ‘학사 후 가을 복학의 꿈’에 은연중 담겨 있는 소원대로, 학교로 다시 돌아가 한 학기, 한 학점 더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들에게 유용한 도움을 줘서 그 값만 제대로 치른다면, 연방수사국은 원한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태워줄 태세였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밀고자들의 부담은 매우 컸다.
브록 본드의 비범함은 60년대 좌파의 활동들 속에서 질서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질서에 대한 욕망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모든 부모들에 맞서는 청년세대의 혁명을 선포하고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안, 브록은 국가라는 이름의 확대가족 속에 영원히 어린아이로, 안전하게 남기만을 바라는, 만약 그 자신도 느껴봤더라면 가끔은 감동적이었을, 숨겨진 욕구를 보았다. (P433~434)
브록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피면서, 성흔(聖痕)과 같은 흔적들, 예컨대 벗어진 이마, 하등동물처럼 생긴 귀, 놀랄 만큼 경사진 프랑크푸르트 이안면(耳眼面)의 행렬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범죄학의 선구자 체사레 롬브로소(1836~1909)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롬브로소는 범인의 뇌는 도덕과 법에 대한 존중 같은 문명화된 가치를 관장하는 뇌엽들이 모자라서 인간보다는 동물의 뇌와 좀더 유사한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뇌가 들어 있는 두개골이 각각 다르게 발달하게 되고, 얼굴이 바깥으로 향해 있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롬브로소가 근거로서 제시하는 예는 비정상적으로 큰 눈구멍, 주걱턱, 정면 소두증, 다윈처럼 쫑긋 선 귀 등등 다양했고 두개골 데이터도 있었다. 브록의 시대에는 그 이론이 방법상으로 조야하고 오래전에 폐기된, 기이하고 명백하게 파시스트적인 19세기 골상학의 부산물로 전락했지만, 브록에게는 이치에 맞아 보였다. 실제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롬브로소의 ‘미소니즘’ 개념이었다. 급진주의자, 투사, 혁명가는 모두, 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칭하더라도, 롬브로소가 ‘새로운 모든 것에 대한 혐오’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따서 명명한 인간의 심오한 유기체적 원칙에 대해 죄를 범하는 자들이었다. 그 원칙은 사회가 안전하고 질서있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피드백 장치였다. 만약에 누구든 세상을 갑자기 바꾸려고 시도한다면, 국가로부터뿐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새것 혐오주의’의 즉각적인 반발을 받게 될 것이다. 1968년의 닉슨 당선은 브록이 보기에 그 완벽한 예였다. (P439-440)
자기 딸이 이렇게까지 무방비인데다 이 정도로 상처받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단단히 마음먹고 아주 흔한 넋두리부터 시작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확실히 프레데시가 진정하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크든 작든 어떤 반응도 하게 하지 않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꾸준히 말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말은 어느새 독백이 되었다. 첫 번째 별거 이후 버스의 옆 사람, 마당의 개, 밤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이미 몇 번은 털어놓았던 이야기였다. “사실 네 엄마는 나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렸어. 너무 잘나서 그렇게 말을 안할 뿐이지, 사실은 그래. 네 어마는 시종일관 만사를 정치적으로 생각해. 난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지내려고만 하는데 말이야. 난 절대로 네 외할아버지처럼 용감한 노조원이 아니었거든. 네 외할아버지 제스는 정정당당하게 맞서다가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지. 네 엄마한테는 그게 미국 역사의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걸 내가 무슨 재주로 따라가겠니? 난 내 아내와 아이에게 필요한 걸 했다고 생각해. 자유는 네 엄마한테처럼 중요하지는 않았어. 네 외할아버지는 ‘자유’를 최대한 외치다보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지. 그런데 난 두려웠어. 나무를 쓰러트리듯이 쉽게 브루트 450을 나한테 떨어트릴까봐....” 사실 그는 한두번 맞은 게 아니었다. 워너 스튜디오에 이름을 올린 첫날, 파업이 진행 중이었고, 자신은 파업을 깨기 위해 IATSE에 의해 고용된 천 명의 깡패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P464-465)
“그런 건 거의 알아채지 못했는데요.”
“파시스트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건 오직 그의 마력뿐이야. 신문사 사람들도 그걸 아주 좋아하지.”
“그러니까 프레네시가 바인랜드로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프레리와 나도 거기에 가 있게 될 거고요……” 하기야 나쁜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아무런 환상 없이 그 순간들을 벗어나게 도와준 곳이 한군데라도 있었던가. 그날밤 그는 사샤의 집 전화로 반 미터와 통화했다. 조이드의 체포 소식에 풀이 죽어 있던 그는 북으로의 이주 행렬에 합류하려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화를 받고는 기뻐서 조이드의 차, 스테레오, 앨범, 그 외 잡동사니를 챙겨오기로 했다. 그들은 반 미터가 조이드에게 알려준 전화번호들 중 하나로 곧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딱 달라붙은 프레리를 안고서, 조이드는 가장 가까운 쌘타모니카 프리웨이 출구에서 사샤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P491)
훗날 이곳은 유리카-크리센트 씨티-바인랜드 거대도시의 일부가 될 터였지만, 주요 연안, 숲, 강둑, 만은 에스빠냐와 러시아 배에 탄 초기 방문자들이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연어, 짙은 안개 때문에 속이기 좋은 연안, 유로크족과 톨로와족의 어촌에 주목한,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재능에 대해서는 몰랐던 벌목 관리인들은 바다로부터 접근할 때 거무스름한 상록수가 우거진 곶들에서 너무 키가 크고 붉어서 진짜 나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줄기가 완벽하고 잎사귀가 짙은, 빽빽이 들어선 삼나무들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예감, 어쩌면 인디언들이 알고 있으면서 알려주지 않았을 수도 있을 다른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어떤 경계선에 대한 예감을 적어도 한번 이상은 잊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의 모습은 세기가 바뀔 무렵의 사진들 속에서, 작업 중인 사진작가를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로 등장하곤 했다. 그들은 종종 원주민 복장을 한 채 뿌연 은백색 풍경, 무정하리만치 순수한 포말이 하얗게 부서지는 회색빛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낸 해저산의 검은 정상, 폐허가 된 성곽 같은 현무암 절벽,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울창한 삼나무 숲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 사진들 속의 빛은 심지어 지금 바인랜드의 빛 속에서도 보였다. 빛이 표면에 떨어질 때의 비에 젖은 무심함, 정령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외침..... 다른 무엇을 그 오래된 사진들이 계시할 수 있었을까? (P509-510)
“타께시가 컴퓨터로 전산화한 이후로는 좀더 쉬워졌어. 그래도 여전히 단 하나의 문제로 변질될 위험이 있어. 자신의 사건에 집착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빠지다보면, 그들이 벌을 계속 면하게 돼..... 가끔은 나도 이성을 잃고서, 한밤에 고약하고 비열한 마음을 먹고 나가, 네 엄마를 찾아내서 괴롭힌 적이 있어. 그러면 네 엄마는 울고, 네 아빠와 싸움을 벌여. 그런데 이게 뭐야. 내 계산상으로는, 그건 네 엄마가 나한테 진 빚의 이자도 못되는 거야. 하지만 최근에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었어...... 그러다 어쩌면 잊을까 싶어서. 그래도 절대 용서는 되지 않았어.
나는 타나토이드의 꿈을 꿔. 꿈꾼다 생각해서 반드시 꾸게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내가 그 꿈을 꾸건 안 꾸건, 나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달리는 열차 안에 있어. 늘 그 열차 안이고, 여행 중인 열차에 늘 올라타 있어..... 나는 의식을 갖고서, 어떤 일을 침대에 평평하게 누워 있어. 침대 옆에는 두명의 동료들이 있어서, 열차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나를 기꺼이 검시해서 내 죽음과 나를 죽인 살인자들을 세상에 알릴 지역 검시관을 찾으려고 애쓰며 돌봐주고 있어..... 두 사람의 얼굴은 전혀 알 수가 없어. 그래도 그들은 가끔씩 안에 들어와 내 옆에 앉아줘. 늘 춥고, 늘 밤이야. 낮이 있어도 내내 잤나봐. 잘 모르겠어. 너무나 많은 세월을 열차를 타고 다니다보니, 우리가 가는 모든 관할구역들에 미리 통보가 되어서, 매번 모자를 쓰고 무기를 소지한 남자들이 플랫폼에 서서 계속 가라고 손을 흔들며, 우리를 절대 본 적이 없다고 맹세만 해댔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꾸 생각나게 하는 그 두 사람은 들르는 도시가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특별했어. 그들은 특별객차의 커피, 담배, 간식용 음식을 먹고 살며, 카드 내기를 수없이 하고, 나를, 뭐라고 해야 하나, 얼음 처리를 하고 싶어하는 브록의 동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처럼 논쟁을 벌였어. ‘모두 사랑 때문이야.’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친구는 ‘헛소리 집어치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야’하고 대꾸했어...... ‘자기만의 지극히 사적인 목적을 지닌 반란 경찰이야’ ‘죽음에 근거한 억압적인 정권의 명령을 단지 따를 뿐이야’ 등등..... 최근까지도 그들이 어두운 시간에 장단을 맞춰 말하는 걸 들었어. 그들은 마지막 정류장, 마지막 진입 거부의 순간까지 충실했던, 내 최후의 의장대였어.”
“꼭 디엘과 타께시처럼 들리네요.” 프레리가 말했다. (P583-584)
제스가 낭송하는 에머슨의 한구절을 듣기 위해서였다. 몇해 전 제스는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의 교도소 장서에 인용된 에머슨의 구절을 처음 접하고 외워놓은 이후로, 그것을 매년 낭송해왔다. 바인랜드의 안개처럼 힘이 없지만, 제스는 꼿꼿하고 맑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그 구절을 들려주었다. “‘신성한 정의의 균형은, 흔들리고 나서도, 비밀스러운 응보에 의해 항상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대들보를 기울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의 모든 폭군, 지배자, 독점자가 어깨로 빗장을 들어올리더라도 다 헛수고다. 꿈쩍없이 적도가 자기의 선을 영원히 지키고 있거늘, 인간이든 티끌이든, 별이든 태양이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안 그러면 반동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제스는 물 흐르듯 낭송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래서 율라는 그에게서 눈을 전혀 뗄 수가 없었다. (P589-590)
“이거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하는 거 아녜요.” 아이제이아가 의견을 밝혔다. “아저씨들 세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혁명을 믿고, 그것을 위해 바로 목숨을 건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들은 확실히 텔레비전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텔레비전이 아저씨들을 붙잡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대안적인 미국 전체를 인디언들이 그랬듯 진짜 적들에게 모두 팔아버렸어요. 그것도 1970년 달러로, 너무 싼값에 말예요......”
“이거 원, 네 말이 틀렸기를 바란다.” 조이드가 거침없이 말했다. (P595)
그러다 그녀는 숲 속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하늘에서 비추는 짧고 환한 불빛에 놀라, 잠시 브록에 대한 환상과 주위의 조용하고 어두워진 은빛 이미지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그때까지 오지 않던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잠에서 깰 터였다. 동이 틀 무렵, 안개는 여전히 도랑에 끼어 있고, 사슴들과 젖소들은 풀밭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태양은 이슬에 젖은 풀잎 위의 거미줄 틈에서 눈이 부시게 빛났다. 붉은꼬리말똥가리 한 마리가 상승 기류를 타고 능선 위로 날아올랐다. 일요일 아침이 이제 막 펼쳐지려는 참이었다. 그때 프레리는 얼굴을 핥는 따뜻하고 끈질긴 혓바닥에 잠에서 깼다. 다름 아닌 데즈먼드였다. 수 마일을 걷느라 거칠거칠해지고, 얼굴은 어치 깃털로 뒤범벅이지만, 할머니 클로이의 침과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는 데즈먼드가 눈웃음을 치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제 집에 왔다고 생각하며. (P613-614)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바인랜드>는 서로 양립하기 힘든 미국현대사의 두 시대, 즉 1980년대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주요 사건은 북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가상의 카운티 바인랜드에서 1984년에 시작된다. 전직 히피이자 록밴드 출신의 조이드 휠러는 근근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10대의 딸 프레리와 둘이 산다. 1960년대에 혁명을 꿈꾸는 급진적인 다큐영화 제작팀 24fps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던 전처 프레네시 게이츠는 프레리가 두 살이던 때에 종적을 감춘 상태이다. 그녀와 은밀한 관계였던 연방검사 브록 본드가 관리하는 연방수사국의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 전역을 떠돌며 다른 협조자들과 함께 살아야 해서이다. 조이드는 매년 지급되는 정신장애 생활보조금을 받기 위해 근처 술집에서 창을 관통하는 묘기를 보이던 중에 과거에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마약단속반 엑또르 쑤니가의 방문을 받고는, 레이건 집행부의 프레네시와 관련된 정부예산 삭감으로 그녀가 현재 숨어 지내고 있으며, 잔뜩 독이 오른 브록이 프레네시를 협박해서 끌어낼 목적으로 프레리를 악착같이 찾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준다. 위기에 처한 프레리는 닌자 무술에 정통한 엄마의 오랜 친구 디엘과 그녀의 동업자 타께시 후미모따를 만나, 프레네시가 브록 때문에 밀고자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교내 반전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위드 에트먼을 죽게 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한편, 브록은 1984년의 대대적인 마리화나 박멸 운동을 앞세워 프레네시가 숨어 있다고 믿는 바인랜드의 공습을 지휘하고, 텔레비전 중독자에서 영화제작자로 변신한 엑또르는 프레네시와 플래시 부부를 바인랜드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브록의 작전은 그가 관리하던 프로그램의 연방예산마저 삭감되면서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브록은 분에 못 이겨 혼자 헬리콥터를 몰다 사망한다. 소설은 프레리가 마침내 엄마와 만나는 가족 상봉 장면으로 끝이 난다. (P622-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