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 1999년
후지이 이츠키(藤井樹)가 죽은 지 2년이 지났다.
그리고 3월 3일의 두 번째 기일(忌日). 히나마츠리인 그날, 고베에는 드물게 눈이 내렸다. 언덕배기에 있는 공동묘지도 눈 속에 묻히고 검은 상복 위에도 하얀 눈이 얼룩을 만들었다.
히로코(博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색의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하얀 눈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눈덮힌 산에서 죽은 그가 마지막으로 본 하늘도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그 애가 뿌리는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한 것은 이츠키의 어머니인 야스요였다. 원래대로라면 히로코의 시어머니가 되어 있을 사람이었다. (P5)
아키바는 이츠키와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등산의 리더이기도 했다. 벼랑에서 떨어진 이츠키를 내버려둘 결심을 한 것도 그였다. 장례식 날, 아키바와 산악 동료들은 이츠키의 친척들로부터 참가를 거부당했다. 그때는 누구나 감정이 격해 있었다.
“산의 규칙은 산 위에서만 통용되는 거야!” (P7)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에 히로코는 중학시절의 그를 발견했다. 학급 단체사진에서 벗어난 곳에 혼자만 원 안에 있는 것이 그였다. 그 풍모는 히로코가 아는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전학을 했단다. 졸업하기 전에.”
“그렇지만 전혀 안 변했네요.”
“그래?”
야스요가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보니 웬지 불길한 사진 같구나.”
그리고 두 사람은 학급 사진 속의 중학생들 얼굴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야스요는 학생복의 소년들을 상대로 그 나이에 이 아이가 귀엽구나, 내 취향이야, 라고 말해서 히로코를 웃겼다.
“첫사랑의 상대도 있겠지.”
야스요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학생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어 나갔다. 그리고 한 여자를 가리켰다.
“어머나, 이 아이, 히로코를 닮지 않았니?”
“네?”
“혹시 첫사랑의 아이?”
“이 친구가요?”
“첫사랑의 그림자를 쫓아간다고 하잖아, 남자라는 건.”
“그래요?”
“그럼.”
히로코는 앨범에 얼굴을 갖다대고 유심히 보았지만 어디가 닮았는지 알 수 없었다. (P13-14)
도시미츠는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큰 입을 벌리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러브레터?”
이런 타입의 조크, 요컨대 아무것도 아닌 모든 사건을 연애짓이나 성적인 심벌에 대입하는 타입의 조크에 대해 나의 몸은 생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다. 거의 반사적으로 왼손이 편지를 빼앗아 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른손이 문을 잠그고 있는 식으로 내 몸은 반응하였다. 문 저편에서 도시미츠는 일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 큰 입을 떡 벌리고 섰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우편물을 분류하여 자신의 것만 빼고 나머지는 부엌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층에 올라갔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한 통뿐이었다. 즉 도시미츠가 주운 그 한 통이다. 보낸 사람을 보니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와타나베 히로코.
주소는 고베시로 되어 있다.
..... 고베의 와타나베 히로코.
고베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아마 내 인생에서 처음 접촉하는 것일 게다. 알고는 있지만 알고만 있을 뿐인 지명이다. 그런 고베의 와타나베.... 와타나베 히로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우선 나는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편지지가 한 장. 그 한 장의 편지지를 본 나는 뭐랄까, 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다고나 할까, 좀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P20-21)
히로코가 그를 만난 것은 전문대 시절이었다. 그는 고베시내의 미대에 다니고 있었으며 유채화를 전공하는 산악부였다. 전문대생인 히로코가 먼저 사회인이 되었고, 그는 후에 고등학교 미술교사가 되었다.
동경출신인 히로코에게 있어서 고베에서 대부분의 생활은 그였다. 그와 함께 보낸 날들, 언제나 함께였던 날들, 때로는 혼자 집을 보던 날들, 그래도 그만 생각하였던 날들, 그리고 또 그가 있는 날들, 그래도 그만 생각하였던 날들, 그리고 또 그가 있는 날들, 시간이 멈춰 버리면 좋겠다고조차 생각했던 날들, 그리고 영원히 그가 없는 날들.
그를 산에서 잃고 고베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후에도 히로코는 동경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얼버무리면서 독신 생활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직 이곳에 있다. 그런 실감에 스스로 깜짝 놀라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회사와 맨션을 그저 왕복할 뿐인 매일이었다.
그것은 두 번째 기일로부터 4일째가 되는 토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귀가한 히로코가 우편함을 열자 쓸데없는 DM과 팜플렛에 섞여 작은 사각 봉투가 들어 있었다. 뒤에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봉투를 열자 안에 한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네 번 접은 그 편지지를 편 히로코는 순간, 그것을 자신이 쓴 그 편지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기일날 밤에 쓴 그 편지이다. 어딘가에 갔다가 반송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내 알았다. 순간의 착각, 그리고 동시에 히로코는 심장이 멈출 것 같아졌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저도 잘 지냅니다.
하지만 조금 감기 기운이 있습니다.
후지이 이츠키
편지는 그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그러나 설마 그럴 리는 없었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그 편지를 누군가 읽은 것일까? 어째서 그것이 도착한 걸까? 히로코는 한동안 가슴의 고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 짧은 편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P30-31)
후지이 이츠키님.
감기는 좀 어떻습니까?
무리하지 말고 빨리 나으시기 바랍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히로코는 이런 편지를 써서 또 그 주소로 보내 보았다. 안에는 감기약을 동봉하였다. 상대도 분명 여기에는 놀랄 거야. 히로코는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몇 일 후, 답장이 왔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감기약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당신은 어떤 와타나베씨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부디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후지이 이츠키
후지이 이츠키가 된 이 가짜는 정말 어이없게도 이쪽에 자기소개를 요구하고 있다.
“어떡하지?”
하고 말하면서도 히로코는 내심 괜히 기뻤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펜팔친구가 생겨 버렸다. 어쨌든 천국에 있는 그가 붙여준 사람이다. 분명 좋은 사람일 게 틀림없다. 히로코는 이 기묘한 만남을 그와 신에게 감사했다. (P38-39)
“그의 편지였어. 그가 써준 거야.”
이 말에 아키바의 안색이 바뀌었다.
“이런 빌어먹을 편지가 온 게 탈이야.”
아키바는 편지를 뭉쳐 던져 버렸다. 히로코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키바를 보았다. 그리고 편지를 주워 무릎 위에 놓고 다시 폈다.
“후지이일 리가 없잖아! 그 녀석이 편지 따위 쓸 리가 없어!”
히로코는 놀라서 아키바를 보았다.
아키바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에 견디고 있었다.
아키바가 말했다.
“미안...... 미안.”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키바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참아야 했던 것이다. 자신이 참지 않으면 이내 깨져 버리는 관계라는 것을 아키바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응, 히로코. 오타루에 가보지 않을래?”
“응?”
“오타루에 가서 이 사람을 만나보지 않을래?”
“.........”
“그 녀석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잖아. 만나보지 않을래?” (P59)
“..... 저 ..... 뭐가 이상하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니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케이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일단 꿈은 아닌 것 같다. 어느 틈엔가 잠들어 버려서 살짝 돌아간 것일 게다. 방에 어둠이 스며들어 있다. 물을 마시려고 베갯머리를 보니 주전자와 약병과 함께 편지가 한 통 놓여 있다. 이제 완전히 낯익은 그 봉투는 와타나베 히로코에게서 온 것이다.
나는 편지를 읽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편지 고맙습니다.
다음 달 오타루에 갑니다.
시간 있습니까?
몇 년 만인가요. 이츠키씨를 만나는 것이. 정말 기대됩니다.
머리 모양은 달라졌을까요?
갈 날이 가까워지면 전화하겠습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P65)
잠깐 사이에 꾼 그 꿈속에는 중학시절의 나와 엄마와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길 가운데 얼어붙은 커다란 물웅덩이를 발견하자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 그 위를 기세좋게 미끄러져 나갔다.
“위험해!”
뒤에서 엄마가 소리치고 있다.
그것은 꿈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의 광경이었다. 나는 반쯤 꿈을 꾸면서 그것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후지이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후지이 이츠키씨!”
“예.”
아직 확실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내 머리 속에서 누군가가 함께, 예! 하고 대답을 했다.
(어? 지금의......)
이상하게 생각한 나의 뇌리에는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복을 입은 그 소년은 맑은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P71-72)
그러나 히로코는 아직 만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문옆에서 본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히로코는 그 동안에 편지를 썼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그 편지를 다 쓸 때까지 오지 않으면 그것을 우편함에 넣고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사과를 드리기 위해 오타루에 왔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당신 집앞에서 쓰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어쩐지 당신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오늘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옛날 나의 연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최근, 우연히 그의 옛날 주소를 보고,
배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쓴 편지가 그 최초의 편지였습니다.
그는 2년 전...... (P81)
어쩌면 동성동명의 후지이 이츠키도 저 우체통에 저렇게 편지를 넣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여자의 얼굴을 본 히로코는 숨을 삼켰다.
닮았다는 말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 여자는 마치 히로코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볼일이 끝나자 자전거를 타고, 그리고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얼른 히로코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자전거가 히로코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히로코는 뒤돌아 그 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엉겹결에 말을 걸었다.
“후지이씨!”
그것은 직감이었다. 집배원의 착각도, 택시 운전사의 말도 그 직감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 여자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틀림없었다. 히로코는 그녀가 후지이 이츠키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결국 혼잡 속의 히로코를 발견하지 못한 채 다시 페달에 발을 올리고 떠나 버렸다. 자전거가 보이지 않게 되어도 히로코의 동요는 진정되지 않았다.
“히로코?” (P94-95)
몇 일 후, 히로코는 우편함 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히로코가 호텔 앞에서 목격한 그 편지였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고 좀 심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 대신 한 가지 반가운 정보를 알려 드릴게요.
실은 내가 중학교 때, 우리 반에 동성동명의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후지이 이츠키라는 것은 그 아이가 아닐까요?
동성동명의 남자와 여자란 흔한 일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내게 짚이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감기도 많이 나았습니다.
당신도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후지이 이츠키 (P96-97)
돌아온 이츠키는 역시 말이 없이 또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 이번에는 오노가 화장실에 갔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오노가 없어진 자리는 잠깐 동안 조용해졌다. 아키바에게 있어서는 히로코에게 직접 이야기를 걸 수 있는 찬스였다. 여기서 대화를 히로코에게 연결시켜 놓지 않으면 저 수다쟁이 오노를 상대로 줄곧 떠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어 아키바는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겨우 말문을 열려고 했을 때, 이츠키가 느닷없이 끼여들었다.
“저!”
좀 상기된 목소리였다.
“와타나베씨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습니까?”
“첫눈에 반하는 거요? 글쎄요, 어떨까요?”
“저와 사귀어 주십시오.”
히로코도 아키바도 엉겁결에 절규했다. 이츠키도 그 말뿐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상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퍼졌다. 참다 못한 아키바는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무심코 이렇게 말해 버렸다.
“이 녀석 말입니다. 제법 괜찮은 놈입니다.”
아키바는 잠깐 동안의 사랑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오노가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오노는 잽싸게 화제를 뿌렸지만 세 사람의 반응은 웬지 어색했다.
그 후 히로코는 이츠키와 사귀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키바의 헌신적인 응원도 있었다. 한 번 포기한 아키바는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2주간 생각한 끝에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대답을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히로코의 대답이었다. 참으로 기묘한 시작이었지만, 지금 그것은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서 히로코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P110-111)
편지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폐를 끼쳐놓고 부탁을 드리는 것도 뻔뻔스러운 일입니다만, 만약 그에 관해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지 않으시겠어요?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공부는 잘했는지 못했는지,
운동은 잘했는지 못했는지,
성격은 좋았는지 나빴는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런 무례한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바보 같은 편지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귀찮으시다면 잊어주세요.
...... 그러나 만약 그럴 마음이 드신다면 답장을 주십시오.
꼭 기대하지는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단단히 기대하고 있는 주제에.”
이것은 뭔가 써주지 않으면 그녀의 마음도 개운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책상에 앉은 나는 참으로 곤란해졌다. 생각해보니 난 그 녀석에게 전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기보다 그 녀석 때문에 나는 중학시절 그 자체에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망설이면서도 우선 나는 펜을 들기로 했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그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어요.
동성동명의 사람이란 게 그리 몇 명씩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와의 추억은 그 대부분이 이름에 관련된 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그것은 절대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P114-115)
“오늘 시험 답안지, 바뀌지 않았니?”
“뭐?”
“이게 네 거잖아.”
그렇게 말하며 답안을 내밀었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은 자전거 페달을 돌려 라이크를 켜서 그것으로 보려고 했지만 돌리면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게 순조롭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내가 페달을 돌려주었지요.
그 녀석은 한참동안 자신의 답안과 내 답안을 비교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겁니다.
“뭐 하는 거니? 보면 금방 알잖아.”
그런데 그 녀석,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역시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점점 손이 저려와서 대체 뭐 하는 거야, 하고 생각했더니 그 녀석 불쑥 내뱉는 말이,
“broken 이었구나, breaked가 아니구나”라니.
요컨대 그 녀석은 답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을 수 없겠지요.
거기까지 쓴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다락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중학시절의 교과서며, 노트 등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안을 뒤졌다. 그리고 바인더에 파일되어 있는 프린트 다발 속에서 문제의 답안지를 발견하였다.
틀림없이 영어답안으로 뒤에는 그가 나의 것인지 모르고 그린 낙서가 남아 있었다. 그 낙서가 예상 외로 깨끗한 데생인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러고 보니 히로코의 편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히로코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보물일지도 모른다. 보내주면 기뻐하겠지.
그 그림은 당시 유행하였던 미야자키 미치코의 바지를 벗는 CM을 그린 것이었다. (P130-131)
그러고 보니 그 녀석 3학년 초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 관해서는 실은 나도 무관하지 않으니까요.
어느 날 아침, 그 아이는 자전거로 통학중에 트럭과 부딪쳐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담임인 하마구치(浜口) 선생님이 황급히 병원으로 가셔서 그날 아침 조회는 학년주임 선생님이 대신 왔습니다.
그래서 후지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무구치 선생님이 병원으로 가셨다던가, 병원에서의 연락에 의하면 후지이는 생명에는 별 이상없다고 하는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에 선생님과 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학년주임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입이 떡 벌어진 채 정지동작으로 있다가, 후지이, 너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하시는 거예요.
아--아, 또구나, 했습니다.
아무래도 학교는 나와 그 녀석을 착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 한바탕 소란, 학년주임도 뛰어나가서 결국 아침조회는 없어졌고, 그보다 병원 쪽에서는 잘못 연락을 받고 달려온 우리 부모님과 늦게 온 그 쪽 부모들이 맞부닥치고, 담임인 하마구치 선생님 외에 학년주임에다, 교장과 교도주임도 달려와서 대소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놀란 것은 상처를 입은 본인이었지 않았을까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 아이에게 듣지 못했나요?
그 아이는 다리가 부러진 정도였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아마 육상경기대회 일개월 전이었을 겁니다. 그는 육상부 선수였어요. 물론 시합에 맞추어 회복할 수 없었지요. 꽤 기대주였던지 모두들 유감스러워했습니다. (P138-139)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우리는 도서실에 이르렀다.
“잠깐 보고 갈래?”
“아! 오늘은 서가 정리일인가요?”
“그래.”
“저도 했었어요. 봄방학 때.”
“도서위원의 연중행사였지.”
“모두 모여라!”
선생님의 호령으로 학생들이 모였다.
“너희들의 선배인 후지이다.”
갑작스럽게 소개받아 두근거리면서 나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학생들도 느닷없이 모르는 사람을 소개받아 당황했는지 수줍어하면서 얼굴을 마주보며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쩐지 모습들이 이상했다. 낮은 소리 속에 내 이름이 섞여 있다. 무엇을 서로 속삭이고 있는가 싶었더니 한 학생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후지이 이츠키씨?”
나는 놀랐다. 학생들은 쿡쿡 웃고 있다.
“너희들 알고 있니?”
나 대신 선생님이 질문하였다.
“예? 정말로?”
하고 말한 것은 아까 내 이름을 맞춘 학생이다. 돌연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저마다 거짓말! 이니 정말! 이니 하며 법석이었다.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소란이 끝난 후 학생들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선배님, 우리들 사이에서는 전설적 인물이시랍니다.”
“그건 말도 안돼.”
“있다!”
학생 한 명이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뒷표지를 펼치더니 안의 카드를 빼내어 내게 보여주었다.
“보세요. 이것.”
나는 카드를 보고 놀랐다. 그것은 그가 장난으로 후지이 이츠키라고 쓴 그 백지카드였다. 설마 남아 있다니. (P147-148)
“그래, 누구였지? 그걸 한 게?”
“예?”
“네 이름을 쓴 사람.”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의미 있는 눈을 하였다. 선생님도 그 첫사랑 설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아녜요. 그건 제가 아니에요.”
“응?”
“제 이름이 아니에요.”
“..... 뭐라고?”
“기억나지 않으세요? 왜, 또 한 사람의 후지이 이츠키요.”
“.......”
“있었잖아요? 동성동명의.”
“아아.”
“그 녀석의 장난이었어요.”
“......”
“기억하세요?”
“그래. 남자 후지이 이츠키?”
“그래요!”
“출석번호 9번.”
“우와, 대단해요!”
“......”
“지금, 완전히 순식간에 기억해 내셨어요.”
“그 아이는 특별해.”
“?”
“죽었잖아. 2년 전에.”
“......”
“설산(雪山)에서 조난 당해서.”
“.......”
“몰랐니? 뉴스에서도 한참 다뤘었는데.”
그 후 선생님과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택시 안에서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P157-158)
“이 아이까지 죽일 생각이세요!?”
할아버지는 놀라서 돌아보았다.
엄마는 억지로 나를 할아버지의 등에서 떼어놓았다.
할아버지는 나의 몸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엄마가 그것보다 먼저 감싸안은 채 마루 구석으로 달아났다.
할아버지는 현관 입구에 멈춰 선 채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나를 껴안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 때 어떻게 했어요? 아버님! 생각해 봐요!”
“......”
“119구조대가 하는 말 듣지 않고 멋대로 택시 잡으러 가서 결국 못 잡았지요?”
“......”
“그래서 아버님, 그 사람 업고 병원까지 걸어갔죠? 기억하세요?”
“.......”
“그래서 응급처치가 늦어서..... 그래서 죽었잖아요. 그 사람!”
“......”
“또 같은 짓을 되풀이하실 건가요! 이츠키까지 죽일 생각이세요.”
“..... 밖에는 대설이 오고 있어.”
“이럴 때는 전문가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안돼요. 네, 알겠어요?”
“이제부터 점점 심해질 거야.”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안전해요. 이럴 때는!”
“그래서 늦어지면 어떻게 할래?”
“그러니까.......” (P168-169)
술에 취한 탓인지 카지 아저씨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라는 것을 히로코는 알았다.
“뭐예요? 모두의 테마곡인가요? 그것?”
하고 히로코가 물었다.
“예?”
카지 아저씨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하였다
“이 노래, 그 녀석이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죠. 골짜기에 떨어져서 말입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 노래만 들렸죠.”
히로코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아키바를 보았다.
“어째서 하필이면 인생 마지막 순간에 마츠다 세이코였을까. 그 녀석 마츠다 세이코 제일 싫어했는데.”
아키바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상한 녀석이었어.”
“그렇지.”
또 침묵이 세 사람을 감쌌다. 세 사람 사이에는 그가 있었다. 각각의 뇌리를 그와의 추억이 순례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히로코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 프로포즈를 받지 못했어요. 그 사람에게. 밖으로 불러내더군요. 손에는 반지 케이스까지 꼭 쥐고서.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둘이서 두 시간 정도를 묵묵히 벤치에 앉아 야경만 바라보았죠. 그러다가요, 왠지 그가 가엾어져서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말했어요. 결혼해 달라구요.”
“히로코가?”
아키바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랬더니 그 사람......”
“뭐라고 했는데?”
“단 한마디, 좋아, 라고.” (P177-178)
메아리가 들려왔다. 아키바는 또 외쳤다.
“후지이! 히로코는 내가 책임질게.”
메아리가 그것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아키바는 멋대로 지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외쳤다.
“좋아!”
메아리가 그것을 또 따라했다.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미소지었다.
“좋다고 하는데, 저 녀석.”
“..... 말도 안돼, 아키바.”
“하하, 히로코도 뭔가 소리쳐 봐.”
그 말을 듣고 히로코는 뭔가 소리치려고 했지만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쑥스러워서 설원 중턱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누구도 거리낄 것 없이 큰소리로 외쳤다.
“잘·지·내·고·있·나·요? 저·는·잘·지·내·고·있·어·요! 잘·지·내·고·있·나·요? 저·는·잘·지·내·고·있·어요! 잘·지·내·고·있·나·요? 저·는·잘·지·내·고·있·어·요!”
그러다 눈물에 목이 메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히로코는 울었다. 정말 아이처럼 소리내어 히로코는 흐느꼈다.
카지 아저씨가 눈을 비비면서 창을 열었다.
“무슨 소란이야, 이른 아침부터.”
“방해하지 말아요. 지금 아주 중요한 시간이니까.” (P180)
그리고 서로 동시에, 학교는? 하고 질문해 놓고 어색한 침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이 무슨 용건으로 왔나 했더니 도서실에서 빌린 책을 반납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3권인가 4권인가. 중학교 도서실에 놓아두어도 틀림없이 아무도 건드릴 것 같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것은 어찌 되었건 왜 그걸 내가 반납해야 하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그 녀석, 자기가 못하니까 부탁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왜? 하고 물어도 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하여간 부탁한다고 강제로 책만 맡겨놓고 그 녀석은 돌아갔습니다. 그 진상을 알게 된 것은 1주일 늦게 학교에 간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니 그 녀석의 책상 위에 꽃병이 놓여 있었어요.
심장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남학생들의 장난이었더군요.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그 녀석 갑자기 전학을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책을 반납할 수 없었구나, 하고 나는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장난하지마” 하고 말하며 그 녀석 책상 위의 꽃병을 때려 부셔 버렸습니다.
순간 온 교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나도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뭔가에 화가 나 있었겠지요. 무엇에 화가 났는지 좀처럼 떠올릴 수 없지만 어쩌면 그때,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도서실로 갔어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고 하면 좀 거창합니까, 어쨌든 약속한 책은 제대로 도서실에 돌려 놓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후지이 이츠키 (P182-183)
어느 날, 남학생인 쿠보타가 우연히 도서실에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도서카드에 단 한 사람, 후지이 이츠키라고 하는 이름이 쓰여 있는 카드였다. 그것은 그 책이 후지이 이츠키 단 한 사람밖에 빌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책이 몇 권이나 나왔다. 카드에 후지이 이츠키의 서명밖에 없는 책 말이다. 쿠보타는 그것을 찾는데 열중했다. 그러는 동안 그것이 동료 도서위원들 사이에도 알려져 어느 틈엔가 모두 다투어 찾게 되었다.
그것이 ‘후지이 이츠키 찾기 게임’이다.
어느 날, 또 한 장 새로운 카드를 발견하였다. 발견자인 스즈키 하루카는 이 카드만은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동료들과 함께 그 집을 향했다. 우리집 말이다.
갑자기 나타난 손님에 나는 놀랐다.
학생들은 쑥스러운 듯이 머뭇거리더니 그 중 하루카가,
“좋은 것을 발견하여서요.”
그렇게 말하고 한 권의 책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가 두고 간 그 책이었다.
멍해 있는 나에게 학생들은 뒤예요, 뒤의 카드, 하고 들떠서 재촉했다. 시키는 대로 나는 뒤의 카드를 보았다. 그곳에는 후지이 이츠키의 서명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직 뒤예요, 뒤요,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채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카드를 뒤집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그것은 중학시절 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면서 그것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에이프런 원피스에는 공교롭게 아무 데도 주머니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P186-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