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지앙의 <파문>

영화 <러브 이즈 크라임> 2015년

by 노용헌

《러브 이즈 크라임》(L'amour est un crime parfait)은 2013년 공개된 스릴러 드라마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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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그를 따라온, 그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여학생은 그의 문예창작 수업을 불과 얼마 전 신청한 학생이었고, 그는 그녀가 던지는, 그것도 지나치게 던지는 추파에 단 일 초도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망설인단 말인가? 그 주말은 자칫 방심하다가는 숲이 홀라당 타버릴 만큼 날씨가 몹시 건조하고 추울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한껏 부푼 입술, 잘룩한 허리,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녀는 거의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안전띠가 간신히 그녀를 한쪽으로 쓰러지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커피부터 준비해야 할 터였다.

도로 양옆은 하얬고, 키 작은 초목이 자라는 곳들은 검은 잉크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붉은 달빛 속에서 눈앞에 굶주린 뱀처럼 몸을 뒤틀고 있는 하얀 차선을 타고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물세 살이었다. 새벽에 그는 그녀가 차갑게 죽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순간 얼이 빠져 있다가, 득달같이 시트를 젖히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문 쪽으로 다가가 문에 귀를 갖다댔다. 집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침대로 돌아와 여자의 몸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피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방으로 스며드는 강렬한 빛 속에서 매끄러운 우윳빛 피부의 그녀는 아무런 탈도 없어 보였다.

그는 더 기다리지 않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감자 자루처럼 튼튼하지만 금방이라도 탈이 날 것 같은 여자를 거의 둘러메다시피 해서 차에서 침대까지 옮겨야 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방에 다다르는 순간, 갑자기 그녀가 깨어났다. (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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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정한 배신자들은 누구일까? 진실을 감추고 있는 건 누구일까? 여자를 차에 실으려 하자 골치 아픈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리가 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차가 워낙 작아서 공간이 별로 없었다. 억지로 쑤셔넣어야 했다. 관절들을 부러뜨리다시피 하면서 뒤틀어야 했다. 언제라도 마리안이 나타나서 그에게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물을 수 있었다. 그러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언제라도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집 앞 도로를 지나갈 수도 있었고, 조깅하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서 노력을 배가하고 힘을 쓴 덕분에, 무엇인가가 마침내 꺾였다 --그는 그 무엇의 실체를 명확하게 분석하지 않으려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여학생을 피아트 안에 실을 수 있었다. 손목시계를 흘끗 들여다본 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적을 짧게 두 번 울리고 나서 출발했다. 그것은 그의 누이 마리안과 그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정립해놓은 습관, 서로를 똑같이 난처하게 만들지만 여전히 계속되어오고 있는 그런 어정쩡한 습관들 중 하나였다. 마리안은 오래전부터 더 이상 창가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 역시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백미러에 눈길을 던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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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어느 날 마리안과 그는 우연히 그 동굴을 발견했다. 그날 그는 그곳을 지나가다가 느닷없이 발이 미끄러져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는데, 그때 거기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깎아지른 경사면은 이끼와 나뭇가지로 뒤덮여 있어서 거기에 그처럼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이 있다는 건 그 누구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는 그 까마득한 구멍 위의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건 사력을 다해 그를 붙잡고 끌어올려준 누이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한숨을 돌린 후, 말이나 황소라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커다랗게 벌어진 구멍 쪽을 부들부들 떨면서 돌아보았다.

이내 차가운 땀줄기가 그의 견갑골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다. 이 문제를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심각하게 생각해봐야만 한다는 건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폐가 불에 탄 듯 화끈거렸다. 장딴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가다가는, 혀를 빼물고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다녀야 할 게 분명했다.

어쨌건 그가 그곳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젊은 여자의 시신을 가장자리에서 떠밀고 --그리고 공연히 귀를 기울이고-- 난 후에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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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라. 그는 이틀이 지난 뒤에야 그 여학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뭔가가 꿈틀대기 시작했었다. 바르바라. 그가 그 여학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듣고서도 금세 잊어버렸던 정말 멍청해 보이는 그 이름.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히 바람직한 수업 태도를 보여주었고 글솜씨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의 눈에 그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얌전하고 수줍은 표정이지만 가슴속에는 한줌의 잉걸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런 금발머리 여자. 그는 일어나서 서재의 창으로 밖을 힐끗 내다보았다. 그는 바르바라에 대해 어떤 감동적인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은 드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아주 많은 학생들이 그를 거쳐갔지만, 견고한 작품을 써낼 만한 학생들은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재능이 필요했다. 이 세상에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역시 재능이 없는 부류에 속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마치 저편 기슭의 단단한 땅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것도 잡을 게 없어 물속에서 계속 허우적대고 있는 망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 태어날 때부터 최소한의 재능도 부여받지 못했다면, 아무리 물고 늘어져봐야 부질없는 일이었다. 연초마다 첫 강의에서 그가 어김없이 늘어놓는 연설의 요지는,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나 해당할 지나친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경계하라는 거였다. 이류 작가조차 드물었다. 십오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수업에서 빛을 발한 학생들, 선택받은 학생들을 불과 두세 명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드넓은 대양의 작은 물방울 몇 개. (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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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바르바라의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그 여자가 말했다.

“아,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는 즉시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참지 못하고 자기 엄마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여학생들은 많았다 --그가 제발 입을 다물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을 지킨다는 건 여자애들에게는 대체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그를 스쳐지나갔던 그 난처한 일들은 다른 데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는 즉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어느 날 그가 선착장 근처에서 조용히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어떤 여학생의 어머니가 잔에 든 내용물을 그의 얼굴에 뿌린 적도 있었으니까.

그 여자는 그의 팔을 살짝 짚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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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속의 암벽은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좋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그는 등산화를 즐겨 신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그가 딛고 있던 벽이 조금 허물어지면서 부서진 돌들이 허공으로 떨어져내렸다. 가능한 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그는 암벽에 최대한 몸을 바짝 붙이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나이가 드니 겁도 많아지는군, 그는 바르바라의 시신을 향해 다가가면서 생각했다.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겁이 생기는 거지.

절벽 중간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발을 딛는 순간, 그는 그게 바위가 아니라 물컹한 진흙더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큰일날 뻔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검보랏빛으로 변한 여학생의 시신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돌출부에 몸을 걸친 채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리를 쭉 뻗어 가까스로 시신에 발끝이 닿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밀었다. 발끝으로. 그녀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내려갈 수 있도록 흔들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뭔가가 계속 방해를 했다. 뭔가에 자꾸 걸리곤 했다. 화가 치밀어오른 그가 시신을 구멍 한복판으로 떨어뜨리려 애쓰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갖 욕을 퍼부어대고 낑낑대고 있는 동안, 그의 허리에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다. (P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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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리샤르를 만났어.” 그가 말했다. “그 멍청이가 숲속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연히 만났어. 그 녀석이 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것 같아.”

“정말? 왜 그러는 건데?”

“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마 날 쫓아내려는 꿍꿍이가 아닐까? 내가 뭐 잘못하는 거 없나 빌미를 잡으려는 거 아니겠어?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사실 학교측에서는 어떻게든 교직원 수를 줄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 안 그래? 세상이 온통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염병할, 대학이라고 왜 시류를 거스르려 하겠어? 미안. 거칠게 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잖아. 지난해 부임한 우리 학장. 그 양아치 같은 작자는 리샤르 말이라면 무턱대고 동조하거든. 함부로 말해서 미안. 리샤르는 쉽게 내 목을 자를 수 있을 거야. 누나가 있으니까 그러지 않을 뿐이지. 그뿐이라고. 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전혀 망상이 아니라고.”

그는 매운 공기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누나도 이미 알고 있다는 거 알아. 모르는 척하지 마.”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런 건 내 소관이 아니야.”

그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번졌다. “그래 제발. 힘든데 신경 쓰지 마.” 그가 말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날 허수아비로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펜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네가 하고 다니는 짓거리들에 대해 어디 한번 말해볼까? 내가 귀머거리에 장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는 몇 초 동안 그녀를 주시했다. 길고 풍성한 검은 머리, 단호하고 빛나는 시선, 창백한 입술, 먼저 칼자루를 쥐어보겠다고 섣불리 나서선 안 되었다. 몇 시간 전에 그는 바르바라 어머니의 여리고 하얀 손목을 잡았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다시 펼쳐지면서 그는 대화의 끈을 놓쳐버렸다. 마치 발을 헛디뎌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그사이에 마리안은 모래에 꽂힌 막대기들이 천장을 향해 피워 올리는 미르라 향의 연기구름 속에서 다시 서명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난 내가 뭘 하는지 알아.” 그녀가 말했다. “나도 생각이 있어.”

한때 그는 지붕 위에 그 어떤 나쁜 정령도 떠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집밖으로 나가곤 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마리안은 이제 다 큰 어른이었다. (P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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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다음날 아침에 피우려 했지만 벌써 피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담배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몇 가지 나쁜 버릇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버릇들 때문에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 그는 생각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겪는 시련들은 분명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 퍼플 보틀>의 마지막 삼분의 일 부분이 헤드폰 속에서 울리고 있는 동안, 그는 몇 분 정도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윽고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였다. 미리암. 바르바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좀 늦은 시각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했다. 게다가 이튿날 강의가 없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전화벨이 울리게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숨을 한껏 끌어모아 멈추었다.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일 분 이십 초 후, 폐가 터지기 직전에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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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넘어온 여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는 그와 헤어지던 날 스물여섯 살이었다. 미리암은 그 여자보다 스무 살이 더 많았다. 그 분야에 관해 그는 갓난아기만큼밖에 몰랐지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어떻든 간에 확실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특히 여자들의 마음에 관해서-- 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 법이었다. 낙관주의라는 결함이 없는 사람은 결코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내를 가지고 겸손하게 산에 오르는 사람은 결국 정상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의 힘을 속단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적수이기 마련이었다. 그는 마침내 주차티켓을 돌려받았다. 세상 반대편 끝에서 한창 전쟁중인 부사관의 아내가 느끼는 좌절감이 어떤 것일지 잠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뇌충혈을 일으킬 것 같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승객에게로 돌아왔다.

짐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녹초가 되는 법이 없다. 희망으로 배불린 적 없는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다.

밤이 거대한 종처럼 그들 주위의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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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성 없이 모험에 몸을 맡긴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이번 모험을 성적인 측면에서 지금까지 최고의 연애에 속한다고 주저 없이 분류했다? 이 연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가늠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채로. 그가 발을 내딛긴 했지만 조금도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여학생들, 만만한 부류들뿐이었고, 그 범주를 넘어서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미리암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격변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의 직관은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그의 몸은 그 미묘한 떨림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경계 태세를 취하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강의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리샤르 올소가 홀에서 그를 멈춰 세웠다. 마리안의 소식을 얻어들으려는 거였다. “나는 당신이 마리안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확인하고 싶어요.” 리샤르는 오늘 자기가 직접 그의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덧붙였다. 마르크가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동시에 냉소를 날렸다.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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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자기 몸에서 징후를 보이고 있는 증상에 관해 더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리프란 두세 알을 먹어둘 필요가 있었다. 부모를 너무 일찍 여읜 경우 폐단은 인생의 입문 수업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른 채 방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개념들이 전달되지 못하고, 많은 정보들이 결여되었다. 많은 감정들이 분류조차 되지 못했다.

저녁에 그는 기분이 정말 우울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도저히 누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어서, 서둘러 자기 방으로 올라와 처박혔다. 침대에 벌렁 누워 가슴팍에 팔짱을 낀채 고요한 황혼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멋진 생각이 떠올라서 수첩을 꺼냈다. 그 수첩은 그가 몇 년 전부터 뭔가 적을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어딜 가든 늘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변변하게 기록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다시 희망의 끈을 이어줄 만한 건 아무것도.

그는 나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는 만년필을 붙잡고. 날짜를 적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빠른 동작으로 종이 위에 여러 개의 원을 그려보았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그 빌어먹을 만년필에 잉크가 떨어졌다. “제기랄! 젠장 맞을!” 그는 씩씩거리면서 뭔가 글을 쓸 만한 것을 찾아 방안을 사방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순간적으로 포착해야 할 흔치 않은 것이었다 --감정이 강렬할수록 지속 시간은 더 짧았다. 그것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작가로서 자기가 가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기회에 속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컴퓨터에 눈길을 던졌다. 차라리 죽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죽고 말지,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컴퓨터 화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몇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미리암에게서 온 것이었다. “당신 거기 있나요?” 그녀가 묻고 있었다. 그는 그 메시지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메시지는 하루의 마지막 섬광이 비추던 때, 한 시간 전쯤에 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그는 답했다. (P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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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의 문예창작 강의가 폐강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잘릴 터였다. 다른 두 명의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 순간 새로운 구조조정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단행될 모양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텨내야 합니다. 노조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노동 역사상 이런 개떡같은 상황은 일어난 적이 없었어요. 노조 대표는 말을 이었다. 상황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는 애매하게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노조 대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노조 대표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 개비로는 성에 안 찰 텐데 두 개비 집으세요.”

다시 혼자가 된 마르크는 한쪽에는 도서관, 그리고 다른 쪽에는 마리안이 근무하는 행정처가 들어서 있는 붉은 벽돌 건물들 옆의 벤치에 가 앉았다. 마리안에게 그 얘기를 즉시 들려줘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그녀가 아는 게 나았다. 그가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헤쳐나갈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아서 이 빌어먹을 말보르를 마음대로 피우지도 못하겠군. 그는 자기가 해고당할 거라는 소식, 리샤르와 마르티넬리가 더는 고려해볼 생각도 않고 학교에서 그를 내쫓기로 마침내 합의를 봤다는 소식을 듣고 귀 뒤에 꽂아두었던 말보로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생각했다.

마리안이 리샤르 올소의 탐욕에 몸을 내맡긴 게 아무 효과도 없었단 말인가? 결국 그 비열한 인간이 그런 식으로 그녀를 갖고 논 거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데도 다행히 날은 그다지 덥지 않았다. 지금 그의 상태에서 머리에 열이 끓어올라 일사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너절한 놈을 믿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런 녀석한테 뭘 기대한 걸까?

“내가 너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그건 실수였다고 말했잖아.”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받은 즉시 벤치로 와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으로 벤치를 거머잡은 채 똑바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빌어-먹을-놈의-자식.”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가면서,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허벅지를 세차게 내리쳤다. “그 자식이 누나한테서 그만한 걸 받을 자격이 있는 놈이었으면 좋겠군.”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그가 해고당한 후로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P1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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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춤거리면서 최선을 다해 그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말해줄 만한 살아 있는 존재를 단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십오 분은 족히 헤맸다. 관자놀이 부분의 압력 --살갗 밑에서 소리 없이 펄떡거리는 피-- 과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강렬한 빛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면서, 게다가 선글라스를 글러브박스 안에 넣어두고 그냥 내린 탓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그의 머릿속에는 차에 타자마자 선글라스부터 꺼내 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자 이내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빛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빛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큰 안도감을 주다니. 그는 오랫동안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쥔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마침내 시동을 걸고 힘겹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계속 왼쪽으로 쏠리며 옆 차량을 스칠 만큼 차선을 벗어나거나 빨간불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돌진하곤 했고, 그럴 때마다 놀란 운전자들이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면서 그의 고막을 나사송곳으로 뚫어댔다.

결국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신호에 걸려 멈춰 있을 때 옆에 서 있는 차 안에서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찡그린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한 여자가 그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알려주었다. 백미러로 시선을 옮긴 그는 턱 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그리고 피는 그의 셔츠 앞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는데도 그가 움직이지 않자 차들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는 손수건이건 뭐건 하나쯤 발견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정신없이 주머니들을 뒤지고 있었다. 뒷좌석에 처박아둔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낸 그는 휴지를 떼어내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뒤쪽에 늘어서 있는 운전자들이 경적들의 콘서트에 뛰어들어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방향지시등을 켜고 --피투성이 손으로 어정쩡하게 코를 틀어막은 채 충돌할 위험을 무릅쓰고 힘겹고 조심스럽게-- 오른쪽 차선으로 끼어들기를 시도하면서, 그 난관에서 간신히 벗어나 운명이 자신에게 수도 없이 마련해준 골칫거리, 달리 어찌해 볼 도리 없이 고개를 마냥 뒤로 젖히고 있게 만드는 골칫거리에 몰두하려 했다. (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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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럽게도 분명히 초저녁이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한밤중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계속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점점 더 절실해졌다. 그 욕구를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왜 이십 년이나 삼십 년 전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까? 지금껏 만나온 젊은 여자들, 여학생들이 모두 다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마리안의 그림자가 한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그는 담배를 껐다.

이 여자와 함께 잠을 잔 이후로 그는 자신이 사춘기를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들이 밤사이에 육체관계를 가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몸은 마치 건전지처럼 재충전된 것 같았다. 숲으로 가서 그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내야 할 순간에 힘이 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 저주받은 경찰관이 왜 하필이면 그의 품에서 심장 발작이나 뭐 그 비슷한 것을 일으킨 것일까, 하필이면 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 그 운명의 타격이, 그걸 ‘저주받았다’고 부르지 않는다면 뭐라고 부를까? 더럽게 사나운 불운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한탄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비축하는 게 나았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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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찰관의 시신을 갈라진 틈 바로 옆까지 밀어낸 다음, 두발을 구르는 힘으로 시신을 허공 속으로 난폭하게 날려버렸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게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모든 게 암흑 속에 완전히 지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심연 쪽으로 기어갔다. 모든 건 완벽했다. 경찰관의 시신은 바르바라의 시신이 걸렸던 장애물을 피하면서 아주 깔끔하게, 곧바로 밑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적어도 그 일은 개운하게 처리되었다. 그는 몸을 굴려 심연의 가장자리를 벗어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심연의 존재는 그가 쥐고 있는 진정한 으뜸패였다. 하늘의 파래져가고 있었고, 까마귀들이 그를 가로질러 날면서 맴을 돌고 있었다. 그 심연은 아주 소중한 으뜸패였다. 확실히, 그 심연의 어둠은 부정적인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부근으로 야영을 하러 오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 법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가는 길에 그 무시무시한 심연을 마련해준 하늘에 감사했다. 비록 그 자신이 그 속에 처박힐 뻔했었지만, 심연은 그와 견고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옛날에 그는 사흘 밤낮 동안 그 안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안에서 해가 지면 그 나이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팔다리가 떨리기 시작하고 이가 덜거덕거리고, 두려움에 신음하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완전히 달리, 그의 음울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거기서 보호받는 느낌, 안전한 느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주위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 같은 그 끝없는 암흑과 그 깊은 동굴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를 괴롭히는 갈증과 허기에도 불구하고, 그를 물어뜯는 추위와, 사람들이 그를 다시 찾아냈을 때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에게 가해질 응징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광물과 이끼로 뒤덮인 아늑한 공간 안에서 보낸 시간으로 인해 뭔가가 상당히 충족된 느낌이었다. 그 장소를 떠도는 피조물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빛을 사라지게 하고 문을 다시 닫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빗장을 가로지르는 능력.

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자칫 차가운 돌 위에서 잠이 들 뻔했다. 문제는, 이제 그가 미리암을 생각하면 심장이 더 세차게 뛰고 호흡이 더 빨라진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낯선 감정, 아주 새로운 감정이었으니까. 아무도 그런 감정에 대비하도록 그를 단련시켜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기이한 건, 그가 전에 그런 감정에 관해 불가항력처럼 수없이 많은 글을 썼었다는 거였다. 만일 그 감정을 겪어보지 않았거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체화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전개되지 못했을 터였다. 따라서 아이러니는 그가 자신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로 수천 페이지를 까맣게 메웠다는 사실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의 작품 속 수많은 인물들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 주제에 관해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자기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었을까? 이제 그는 그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P18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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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문학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강의를 듣는 학생들 중 절반을 어리벙벙하게 만든 것 --나머지 절반은 그 문제에 관해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굶주려 있었다-- 에 대해 몹시 흡족해하면서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고 있을 때, 짧은 옷을 입은 그녀가 그에게로 곧장 다가왔다. 그가 인정하는 아니 에그바움의 장점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그녀의 집요함이었다.

“다이너마이트라고, 아니? 내가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을 했다고?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 그건 내 입에서 나올 만한 어휘가 아닌데, 하지만 뭐, 그랬다 칩시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내 책상 위에 앉지 말아요. 아니, 예의 좀 지키라고. 그건 나쁜 습관이야, 안 그래?”

“교수님은 나에게 키스했어요.”

“그럴 수 있지. 물론, 다들 흔히 키스를 하니까. 봐요, 봄이 왔어. 사람들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서로 키스를 해. 우리 때는 그런 걸 가벼운 불장난이라고 불렀지. 요즈음에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쨌든 아니 자네와 나는 불장난을 한 거야. 물론,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는 파일들을 자신의 책가방 안에 정돈해 넣으면서 잠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녀는 바르바라의 뒤를 잇는 여자가 되었을 터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남자를 자극하는 당돌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아뇨, 아무 문제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P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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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한 그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매력을 이용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분명히 배은망덕한 짓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교수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때맞춰 그녀가 리샤르와 몇 차례 만나 그의 행동을 변호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가차없이 대학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그 밖의 많은 일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사송곳 하나가 그의 뱃속을 휘휘 저으며 뚫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들이 뭔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상실을 멈출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유착되어 있다는 것. 그들의 어머니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들을 조롱하면서 일그러진 얼굴로 “피도 안 마른 두 연놈이 벌써 ‘붙어먹었군’ 이라고 말하던 시절부터 이미 그들이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한 존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그가 현재의 이 모든 걸 이룰 힘을 어디서 찾았겠는가? 그게 아니면 어떤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가 그의 팔을 무장시킬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들은 어떤가? 결국 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누워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몇 방울 흘렸다. 그러고는 그에게로 몸을 돌려 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교차시켜 온몸으로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음울한 세월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악몽 속에서 그녀를 안전하게 격리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마치 그녀 주위에 견고한 울타리를 구축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두 팔과 다리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담요를 어깨 위로 끌어올려 마치 주저앉은 텐트처럼 뒤집어쓰고 있으니 한결 나았다. (P21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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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개가 짖어대고 근처 나무 사이에서 뻐꾸기가 세차게 울고 있는 동안,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경찰관의 실종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고 --그의 동료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고, 어느 순환도로 진입램프의 갓길에서 채취된 피가 틀림없이 그의 것이라는 분석결과도 나왔다. 무장한 미치광이가 숲속이고 학교고 슈퍼마켓이고 마음놓고 활보하듯이 경찰 살해범이 시내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즐겁게 해주지 않았으며 경찰의 이미지에도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경찰관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더욱 조심해야 했고,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 했다. 경찰은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탐문 조사를 벌였다. 그들이 차를 추적해서 언덕 위에서 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어떤 교수에게로까지 수사망을 좁혀올 위험은 잔존해 있었다.

며칠 전 그는 또다시 그 동굴을 확인하러 갔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최대한 신중을 기하기 위해 며칠 전 밤이었다. 좋은 신발과 밧줄을 갖추고 성능 좋은 손전등을 비추면서. 그때는 그가 아니 에그바움을 풀장에서 끌어올리기 전이어서, 골절상을 입은 꼬리뼈에 요통까지 겹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밧줄을 몸에 단단히 감은 다음 암벽에 자라나고 있는 나무뿌리들과 관목들을 꽉 움켜잡고 동굴 밑으로 향하는 동안 한 번도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았고, 심지어 머리 위에서 우는 올빼미를 방해하지도 않고 끝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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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때때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로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진정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고, 정말 매력적인 남자라고.

문학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이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닫게 될 때까지 품어왔던 그 미친 열망에 대해.

그런 대화는 그녀를 감동시켰다. 그가 반쯤 벗은 채로 부엌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담배를 손에 들고 얼음 조각을 씹으며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가 정말 아름답고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가 최근 몇 년간 만나보지 못한 아주 훌륭한 섹스 파트너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이었다.

“간혼 그들은 범속하기 그지없어요. 그걸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가 말했다. “여하튼 나는 수치심을 느껴요. 사람들이 나를 그런 멍청이들 중 하나로 생각할 때면, 그렇게 형편없는 작품들, 그런 애매모호한 잡탕들, 그런 쓰레기들을 나에게 먹으라고 내놓다니,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걸까요? 그들은 그런 형편없는 것들을 도대체 어디서 끌어내는 걸까요? 이 나라에서 현재 살아 있는 작가들 중에 제대로 된 작가는 여섯 명도 되지 않아요. 간단하죠. 그럼 다른 작가들은 뭘 하고 있느냐고요? 그건 내게 묻지 말아요. 미리암. 나도 모르니까.” (P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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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에 회자되는 한 작가가 있었다. 아마도 평균보다는 좀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끔찍하고, 불안정하고, 부자연스럽고 역겹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문체로 꼴사납게 가식적인 글을 써대는 작가, 그럼에도 비평가들이 줄기차게 만장일치로 격찬을 퍼붓고 있는 작가, 한 학생이 가방에서 그 작가의 책들을 꺼내다가 그와 부딪쳐 그중 한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그 책을 주워들고 살펴보다가 몇 줄을 대충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 페이지를 찢어버린 후 책을 창밖으로 던졌다.

열차가 어떤 부분에서 탈선하는지, 그러니까 한 문장이 어떤 부분에서 그 작가의 결점, 교만이나 실패, 아집을 드러내는지 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 하나를 칠판에 옮겨 적었다. 그 문장은 다른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끝을 맺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스릴과 긴장 효과를 낳는 데 실패한 레퍼토리로 끝을 내는 재주, 뜨내기 손님들을 상대하는 얄팍한 상술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략으로 멋모르는 독자들을 낚으려 하는 그런 재능. 얼마나 자만이 넘치고 얼마나 눈이 멀어야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잡지 저 잡지에서 그런 형편없는 문학을 얼마나 선전해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작가의 작품의 경우, 얼마나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게 다른 작품들을 모방한 흔적들이 배어 있는지 한눈에도 훤히 보이지 않는가?

그는 뒤로 물러나서, 칠판 위에 자기가 써놓은 문장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이따금, 그 전투는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학년 말 학생들의 글에서 그런 인위적인 문학을 발견할 때면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과 함께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 (P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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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온 그는 미리암 옆에 앉았다. 그 선택은 아주 끔찍하고 아주 힘들었다. 진지한 연애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에 이끌려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입술에 갖다댔다. 하지만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더 이상 자기 자신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멍한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었고, 그 누구도 누군가를 그런 무지로부터 구해줄 수 없었다.

숨막히는 순간이 지나면 해방의 순간이 뒤를 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길을 지나기가 훨씬 더 어려워 보였다. 길은 훨씬 더 길고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그는 가스레인지로 다가가 가스를 틀었다. 그리고 연필과 수첩을 들고 식탁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이제 가스가 연신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썼다. “사랑하는 마리안.....”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한참을 꼼짝도 않고 있었다. 한없이 길게 흐르는 그 몇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들이 탄 배가 어두워졌다. 갑자기, 함께 생을 마치는 것도, 태고의 어둠까지 서로 의지하며 버텨내는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리안....” 그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생겼을 뻔했던 그 형을 다시 생각했다. 형이 태어났더라면 분명히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머니의 머리가 돌아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그 모든 일들이, 바깥 주차장에는, 그에게서 100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곳에 그 동물의 머리를 덮어놓은 가운이 어둠 속에서 한 점 얼룩처럼 어렴풋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길조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사슴을 깔아뭉갰는데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완전히 그 반대.

안에서 봤을 때, 그가 입에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밖에서 봤을 때, 방갈로가 주위에 금빛을 흩뿌리면서 빛나는 호박처럼 폭발했다. (P28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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