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득Persuasion> 2022년
영화 <설득>(1997), <제인 오스틴의 설득Persuasion>(2007)
『설득』은 제인 오스틴의 생전 마지막 작품으로, 주위의 설득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이후 겪게 되는 여성의 심리적 변화와 결국 이어지는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가세가 기울어 남은 것은 자존심과 허영심뿐인 귀족 월터 엘리엇 경의 둘째 딸인 앤은 웬트워스 대령과 사랑에 빠지지만, 안정된 결혼 생활의 조건인 재산과 인맥 모두 부족한 남자라는 주위의 조언에 파혼한다.
『이성과 감성』(1811), 『오만과 편견』(1813), 『맨스필드 파크』(1814), 『에마』(1815) 등을 출판했다. 이 책들은 출간 즉시 큰 호응을 얻었고 그녀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1817년 『샌디턴』 집필을 시작한 뒤 건강이 악화되어 집필을 중단하고,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노생거 사원』과 『설득』은 사후 1818년에 출판되었고, 후에 그녀의 습작과 편지들, 교정 전 원고와 미완성 원고가 출판되었다.
레이디 엘리엇의 친구와 월터 경의 관계는 주변의 기대와 무관하게 결혼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레이디 엘리엇이 사망한 지 십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가까운 이웃이자 친한 친구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은 홀아비로, 또 한 사람은 과부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데다 성격이 차분하고 재산도 상당한 레이디 러셀이 왜 재혼을 고려하지 않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중은 여자가 재혼을 안 하는 경우보다 재혼을 하는 경우를 훨씬 더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월터 경이 계속해서 독신을 지키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월터 경이 (한두 번 아주 터무니없는 청혼을 했다가 남모르게 실망을 한 이후로)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훌륭한 아버지라는 사실을 주지하자. 그중에서도 맏딸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포기할 용의가 있었는데, 사실 그럴 만한 유혹을 받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녔던 모든 권한과 권위를 대부분 물려받았다. 외모가 출중한 데다 월터 경을 꼭 닮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또 두 사람은 서로 죽이 아주 잘 맞았다. 나머지 두 딸은 아버지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메리는 찰스 머스그로브의 아내가 됨으로써 약간의 인위적인 중요성을 획득했지만, 앤의 경우는 아버지나 큰딸에게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총명하고 상냥해서 조금만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요한 존재로 여겼을 텐데 말이다. 앤의 말은 언제나 무시되었고,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편리를 양보할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녀는 그냥 앤일 뿐이었다.
실제로 레이디 러셀은 앤을 자신의 대녀로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했으며, 또한 좋은 친구로 여겼다. 엘리엇 집안의 세 딸을 모두 사랑했지만 앤에게서만 생전 어머니의 흔적을 느꼈다. (P10-11)
“해군이라는 직업이 유용한 면은 있지. 하지만 내 지인이 그런 일을 한다면 마땅찮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 몰랐어요!” 앤이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야.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첫째, 그 직업으로 인해서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부당하게 출세할 수 있다는 점, 그러니까 아버지나 할아버지 대에는 꿈도 못 꿨을 지위로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둘째, 그 직업은 젊음과 활력을 아주 끔찍하게 단축해. 해군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늙어. 살면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봤지. 해군에 몸 담은 귀족은 다른 직업을 가진 귀족보다 모욕적인 상황에 처할 위험이 많아. 자신이 부친이라면 상대할 가치가 없어 말도 안 나눴을 사람의 자제가 출세하는 꼴을 봐야 하는 거지. 게다가 본인 자신도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빨리 남들의 혐오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어. 지난봄 런던에 갔다가 어떤 사람 둘과 한자리에 있게 되었지. 그런데 그 둘이 다 내가 지금 한 말의 훌륭한 사례였어. 세인트 아이브스 경이라는 볼드윈 제독이라는 사람한테 앞장을 서라고 양보를 해야 했다고. 그 볼드윈 제독이라는 치는 몰골이 상상을 초월하게 한심하더군. 얼굴은 마호가니 색에다가 또 얼마나 주름이 쭈글쭈글하던지. 잿빛 머리카락 아홉 가닥이 얼굴 옆에 있고, 정수리에 파우더를 살짝 바른게 다더라고. ‘하늘에 대고 묻건대, 저 노인네가 도대체 누군가?’하고 내가 가까이 서 있던 친구인 베이질 모글리 경에게 물었지. ‘노인네라니!’하고 베이질 경이 외쳤어. ‘볼드윈 제독일세. 몇 살이나 되어 보이나?’ ‘예순.’ 내가 대답했지. ‘아니, 예순두 살쯤.’ ‘마흔 살일세.’ 베이질 경이 대답했어. ‘딱 떨어진 사십이네.’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한번 상상해 보라고. 그 볼드윈 제독의 모습은 쉽게 못 잊을 것 같아. 해상 생활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보다 잘 보여 주는 예는 본 적이 없어. 하지만 해군들이 다 어느 정도는 그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모두들 세상 온갖 곳을 떠돌아다니고, 그러는 동안 이 세상의 모든 환경과 기후에 노출되기 때문에 결국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몰골이 되어버린단 말이야. 볼드윈 제독처럼 나이가 드느니 그전에 그냥 머리에 한 방 맞고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참 딱한 일이야.” (P32-33)
그이란, 몽크포트의 부목사를 지냈던 웬트워스 씨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얼핏 들어서는 그런 의심이 들 만도 했지만, 그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프레더릭 웬트워스 대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산토 도밍고 근처 해상에서 있었던 전투의 결과 지휘관으로 승진했으며, 1806년 여름, 임지가 결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머싯셔를 방문했었다. 부모를 모두 여의였기 때문에 몽크포트를 집 삼아 반년을 머물렀다. 당시 그는 눈에 띌 만큼 잘생긴 젊은이로서 머리도 좋고 활력이 넘쳤으며 하는 일마다 탁월했다. 앤도 특출나게 어여쁜 외양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훌륭한 취향과 감성을 소유한 아가씨였다. 둘 중 한 사람이 실제의 반만큼만 매력이 있었다 해도 충분했을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달리 할 일이 없었고, 그녀에게는 사랑할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에게 그처럼 뛰어난 점이 많았으니 그 만남이 실패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점차 상대방을 알아 나갔고, 동시에 빠른 속도로, 그리고 깊게 사랑에 빠졌다. 그에게서 사랑의 고백과 청혼을 받은 그녀와, 자신의 고백과 청혼이 그녀에 의해 받아들여진 그, 그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완벽하게 훌륭한 배필을 만났다고 여겼는지, 더 큰 행복을 느꼈는지를 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P41~42)
하지만 앤이 파혼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입을 피해만을 염려해서는 아니었다. 자기 자신보다 그를 위해 파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를 위해서 자신이 신중해야 한다고, 자신의 소망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별 —마지막 이별— 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고,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위로가 정말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논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무리하게 포기함으로써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은 더 커졌다. 결국 그가 그 고장을 떠나는 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다.
그들이 알고 지낸 기간은 서너 달에 불과했지만, 그때 시작된 앤의 고통은 몇 달로 끝나지 않았다. (P44)
그들이 만났다. 다시 한 번 한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가다듬으며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지 팔 년, 거의 팔 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이미 멀어지고 희미해진 마음의 동요를 다시 되풀이하다니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팔 년이면 강산도 변할 시간이었다. 별별 일들, 변화와 소원함과 사라짐.... 모든 것,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과거를 잊는 일, 그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또 확실한 일인가! 팔 년이라는 세월은 그녀의 삶에서 거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딱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음에도 그녀는 한 가지 감정을 오래 간직하는 사람에게는 팔 년이 단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감정을 어떻게 읽는 것이 옳을 것인가? 그녀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한심할 만큼 싫어졌다. (P91-92)
그는 아직도 앤 엘리엇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부당하게 취급했다. 그를 버리고 실망시켰다. 더 나쁜 것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의지가 박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성격이 과단성 있고 자신만만한 웬트워스로서는 그런 박약한 의지를 참아 주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나친 설득의 결과였고 결점이자 소심함의 표현이었다. (P93)
한 인간의 몸의 크기와 정신적 슬픔의 크기 사이에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덩치가 큰 사람도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우아한 몸매를 가진 못지않게 깊은 슬픔에 잠길 권리가 있다. 하지만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커다란 덩치와 슬픔의 연결이 너무 어색해서 아무리 합리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도 보호해 줄 수 없고 섬세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참아 줄 수 없는 경우,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P104)
다른 사람의 영향을 너무 쉽게 받는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단점은 누구의 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누구든지 그 사람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단호해야 합니다. (P132)
앤은 그가 전에 가졌던 생각, 즉 단호한 성격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낳는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견해가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이제 의문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 정신의 모든 다른 면들이 그렇듯이 단호함에도 정도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젠 깨달았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남의 설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성격이 단호한 성격만큼이나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가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P175)
앤은 아버지와 언니가 귀족들 앞에서 처신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 실망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 지닌 자부심으로 미루어 훨씬 나은 처신을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한 번도 예측하지 못했던 소망, 즉 그들이 좀 더 자부심을 가지고 행동했으면 하는 소망을 품었던 것이다. ‘우리 친척 레이디 달림플과 카터릿 양’ 혹은 ‘우리 친척 달림플 가의 사람들’이라는 소리가 하루 종일 귓가에 윙윙거렸다. (P216)
“엘리엇 씨, 저는 좋은 지인이라면 생각할 줄도 알고 아는 것도 많아서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야 좋은 지인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틀렸습니다.” 그가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 “그건 좋은 지인이 아니고 최상의 지인이지요. 좋은 지인의 요건은 출신과 교육과 몸가짐입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해서도 저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아요. 출신과 좋은 몸가짐이 본질적인 요건이지만 거기다 배운 게 조금 있다면 위험하지는 않지요. 반대로 아주 도움이 될 거예요. 앤 사촌, 고개를 흔드는군요. 제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까다로운 분이군요. 친애하는 사촌님.” 그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대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다른 여성들보다 까다롭게 굴 자격이 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람직할까요? 그 덕분에 행복할 수 있을까요? 로라 플레이스의 마음씨 좋은 귀부인들과 사귀면서 가능한 한 그 관계가 가져다주는 모든 이득을 누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그분들이 올겨울 바스 최고의 인물들과 교제를 할 것이 틀림없고, 지위는 지위니까 그들과 친척 관계라는 것이 알려지면 당신의 가족, 아니 제 가족이 우리 모두 바라는 정도의 존경을 받게 될 겁니다.”
“그래요.” 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틀림없이 그 사람들의 친척이라고 알려지겠죠!” 그리고 침착함을 되찾으면서 더 이상 그의 대답이 이어지지 않도록 덧붙였다.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너무 소란을 떤 건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존심이 강한 모양이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친척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더욱이 그 사람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데 말이죠, 정말 화가 나는 건 사실이에요.”
“실례지만 사촌, 당신은 당신 가족의 가치에 대해 부당하게 말하고 있어요. 런던에서라면, 더욱이 요즘 겸손하고 조용히 지내시는 편이니 사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바스에서는 월터 경과 그의 가족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교제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고 그런 가치를 인정받는 분들입니다.”
“글쎄요.” 앤이 말했다. “저는 그렇게 전적으로 지위 때문에 환영받는 걸 즐기기에는 자부심이 너무 강하답니다.” (P219-220)
“엘리엇 씨는 정말 좋은 분이고 저도 많은 면에서 그분을 높이 평가해요. 하지만 저와는 잘 맞지 않는 분 같아요.”
레이디 러셀은 이렇게만 대꾸했다. “네가 켈린치의 여주인, 미래의 레이디 엘리엇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네가 사랑스러운 네 어머니의 대를 이어 그녀가 누리던 모든 권한과 모든 인기와 모든 미덕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너는 모습과 성격이 네 어머니를 꼭 빼닮았어. 네가 네 어머니와 같은 지위와 이름과 가정을 누리는 걸, 네 어머니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살림을 주관하고 기도를 드리는 걸, 네 어머니보다 소중하게 대접받는 걸 상상만 해도! 사랑스러운 앤, 난 내 한창때보다도 더 행복할 거야!”(P233)
연주회장으로 들어서는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앤 엘리엇은 더없이 행복했다. 엘리자베스는 카터릿 양과 팔짱을 끼고 앞에 선 딤플 자작 부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면 앤은 어땠을까? 그녀의 행복과 언니의 행복을 비교하는 것은 앤의 행복을 모독하는 일일 터였다. 언니의 행복이 이기적인 허영심에 기인한 것이라면 앤의 행복은 너그러운 애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앤의 눈에는 연주회장의 휘황찬란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행복은 내면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눈이 반짝거리고 볼이 빛났지만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난 삼십 분만을 떠올리면서 자리를 향해 가는 동안에도 웬트워스 대령과의 대화 내용을 되새겼다. 그가 한 말의 내용, 그의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태도와 표정에서 그녀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의 눈에는 루이자 머스그로브가 차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 생각을 일부러 전하려 한 것 같았다는 것, 벤윅 대령에 대한 놀라움, 첫사랑에 대한 강한 감정, 시작했다가 끝내지 못한 문장들, 반쯤 시선을 비낀 눈, 그리고 반쯤 의미심장했던 눈길, 이 모든 것들은 적어도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돌아오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노여움과 분개와 회피의 단계는 지나갔고, 그런 감정들이 단순한 우정과 존경이 아닌 과거의 부드러운 감정, 그렇다, 과거의 부드러운 감정의 일부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그의 변화가 그 이하의 것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P269-270)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아셨어야 했어요.” 앤이 대답했다. “현재의 절 의심하지 마세요. 지금은 아주 경우가 다른데다 제가 나이가 들었잖아요. 제가 이전에 잘못해서 설득을 당했더라도, 절 보호하기 위한 설득이었지 절 위험에 빠뜨리려는 설득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제가 설득당했을 때는, 그것이 의무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어요. 하지만 이젠 의무 때문에 그런다는 말은 할 순 없겠네요. 제게 무관심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온갖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되었을 거예요.”
“아마, 나도 그렇게 판단을 했어야 했소.”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소. 당신 성격에 관해 최근에 깨달았으면서도 그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소. 그 깨달음은 여러 해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던 옛 감정들에 압도되어 묻혀버렸고 그 가운데 사라졌던 거요. 난 당신이 설득당해 날 보기하는,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더 받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소. (...)” (P317)
“오!” 앤이 흥분해서 외쳤다. “저도 대령님께서 느끼시는 그 모든 감정과 대령님과 비슷한 모든 분들이 느끼시는 감정을 정당하게 평가해 드리고 싶어요. 같은 인간 중 누구의 감정이든 그 따뜻하고 충실한 심정을 과소평가해서는 절대 안 되지요. 만일 제가 진정한 애정과 충실성은 여자만 아는 감정이라고 감히 주장한다면 저는 정말 경멸받아 마땅합니다. 아닙니다. 전 남자도 결혼 생활 중에 모든 위대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남자도 목적만 있다면 모든 중요한 노력을 기울이고 모든 가정적 관용을 베풀 능력이 있다고요. 다시 말해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살아 있고, 또 그 남자를 위해 살고 있다면 말이지요. 제가 여자에 대해서 주장하는 특권은 (그건 부러워할 만한 게 못 되는, 탐내실 필요가 전혀 없는 특권이지요.) 상대나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오래오래 사랑하는 특권입니다.”
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북받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P340)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당신 곁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짓던 당신의 사촌을 보면서 그와 당신이 결혼한다면 얼마나 격에 맞을까 생각해 보니 너무도 끔찍했소! 그것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라는 것도! 설령 당신으로선 내키지 않거나 크게 끌리지 않는 결혼이라 할지라도 그가 얼마나 강력한 지지를 받을 것인지! 그 모든 것은 나를 바보로 만들기에 충분했소. 그러니 나도 바보같이 굴 수밖에 없었지. 그걸 바라보면서 어떻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 당신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당신 친구분의 모습, 그녀의 영향력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데, 그 일만 떠올리면! 그녀의 설득이 과거에 당신에게 미쳤던 영향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데! 내게는 모두 적대적인 상황이었잖소?”
“구별을 하셨어야죠.” 앤이 대답했다. “지금은 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마셨어야죠. 상황과 나이가 크게 달라졌잖아요. 제가 한때 설득당했던 게 잘못이었다 해도, 그건 무모한 짓을 부추기는 설득이 아니라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설득이었다는 걸 기억하셨어야지요. 제가 그 설득을 받아들인 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의무의 문제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요. 제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건 무모한 짓이고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니까요.” (P352-353)
스미스 부인은 이렇듯 재산을 불리고 건강을 회복하고 친구도 자주 만나면서 더욱 즐거운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성격이 쾌활하고 머리가 총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훌륭한 미덕을 계속 지니고 있는 한 이미 있는 것보다 큰 재산상의 번영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절대적인 부자가 되어도, 완벽하게 건강을 찾아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복은 그 안에 있던 빛나는 활기에서 왔으며, 친구인 앤의 행복은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에서 왔다. 앤은 다정함 그 자체였고 웬트워스 대령의 사랑은 그러한 다정함의 대상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단, 그의 직업을 감안하여 친구들은 그녀가 다정함을 좀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햇빛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단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해군의 아내라는 직업을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해군의 아내라는 국가적 대사보다는 가정적 미덕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불안과 걱정이라는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P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