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영화 <아우스터리츠> 2016년

by 노용헌


세르게이 로즈니차(Sergei Loznitsa)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영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는 홀로코스트 수용소 추모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관찰한 영화이다. <아우스터리츠>(1960)년 영화는 에이블 갠스(Abel Gance) 감독의 서사적인 역사 전쟁 영화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나폴레옹의 결정적인 승리를 다룬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나폴레옹>(2023)에서도 아우스터리츠의 전투를 다루었다. 아우스터리츠(Austerlitz)라는 이름은 나폴레옹 시대의 격전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자도 지적하듯이 이 아우스터리츠라는 역사적인 이름은 소설에 등장하는 마리엔바트의 아우쇼비츠(Auschowitz) 샘물, 테레지엔슈타트의 바우쇼비츠(Bauschowitz, 체코어로 보후쇼비체) 분지 등과 함께, 소설 속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암시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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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중 하나가 아우스터리츠였는데, 그는 당시에 예순일곱 살이었지만 기이하게 곱슬거리는 금발을 한 청년처럼 보이는 남자로, 나는 그런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을 프리츠랑의 영화 <니벨룽겐>에 나오는 독일 영웅 지크프리트에게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나중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안트베르펜에서 아우스터리츠는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빛바랜 푸른색 면으로 된 일종의 작업복 바지와, 맞춤복이지만 이미 오래전에 유행이 지난 양복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이런 외모를 제외하고는 그가 그 밖의 여행객들과 다른 점은 유독 그만이 무심하게 앞을 응시하지 않고, 도안과 스케치에 몰두해 있었다는 것으로,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파리나 오스트엔데로 가는 연결 기차를 기다리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적 대사(大事)와 관련되기라도 한 듯한, 우리가 앉아 있는 이 화려한 대합실과 관련이 있기라도 한 듯 보였고, 뭔가를 그리지 않을 때면 그의 시선은 종종 창문들의 연결선으로, 홈이 팬 벽기둥과 다른 부분들, 공간 건축의 부분들과 세부적인 것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P11)


안트베르펜 정거장의 생성사에 대해 묻는 나의 질문에 아우스터리츠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세계지도에서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회황색 한 점에 불과하던 벨기에가 식민지 경영과 더불어 아프리카 대륙에 세력을 확대함으로써, 브뤼셀의 자금 시장과 천연자연 중개소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많은 거래가 이루어지고, 벨기에 주민들은 무한한 낙관주의에 고무된 채 그토록 오랫동안 외세 치하에서 억압당하고 분리되고 독립적이지 못했던 나라가 바야흐로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려 하고, 지금은 이미 상당히 지나갔지만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시대에, 자신의 후원 아래 겉으로 보기에는 중단 없는 발전이 이루어지고, 갑자기 넘쳐나는 돈을 부상(浮上) 중인 국가에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줄 공공 건축물을 건립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레오폴드 왕의 개인적인 소망이었지요, 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P13)


우리가 언젠가 건축물을 규모에 따라 기록하는 카탈로그를 만든다면, 정상적인 주택 규모보다 아래에 배열되는 건축물들, 예를 들면 들판의 오두막, 은둔자의 음악, 수로지기의 거차, 전망대의 작은 정자, 정원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집 같은 것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평화의 여운을 약속하는 데 반해, 한때 교수대 언덕에 세워진 브뤼셀의 법원 궁전 같은 거대한 건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건물이 마음에 든다고 할리는 만무할 것입니다, 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에 대해 놀라워하고, 이런 놀라움이란 이미 경악의 전 단계로서, 거대하게 확대된 건축물이 어디엔가 파괴의 그림자를 미리부터 드리우고, 이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부터 폐허로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P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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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메스꺼워져서,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가끔씩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모두가 비슷하게 군청색 양복을 입고 줄무늬 셔츠와 번쩍거리는 넥타이를 매고 이 초저녁 시간에 그들의 익숙한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 도시의 금광에서 나온 노동자들을 잠시동안 관찰했는데, 어떤 우화에도 기술되지 않은 이 동물류의 수수께끼 같은 습관, 이를테면 서로 밀착해 서 있는 모습과 반쯤은 사교적이고 반쯤은 공격적인 태도, 잔을 비울 때면 식도를 드러내는 것, 점점 더 흥분해 가는 뒤섞인 목소리들, 이 사람 저 사람이 갑작스럽게 넘어지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갑자기 흥청거리는 무리의 가장자리에서 혼자 떨어져 있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내가 그 순간 알아차렸던 것처럼 거의 20년 동안 보지 못한 바로 그 사람, 아우스터리츠였다. (P46)


오늘 오후 페레이라와 함께 이 아름다운 모티프 앞에 서 있을 때, 기이하게도 아득히 먼 과거에 우리가 벨기에에서 만났던 일을 생각했고, 그 당시에 안트베르펜, 리에주, 그리고 제브루게에서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자기 생애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이곳 그레이트 이스턴 호텔 바에서 나를 만난 것은 모든 통계학적 가능성과 상반되지만, 놀라우면서도 뭔가 피할 수 없는 내적인 논리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아우스터리츠는 이 말을 하고 나서 침묵하며, 한동안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 이후 내가 실제로 누구인지 몰랐어요, 라고 말을 시작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내 이름과 그 이름이 열다섯 살 되던 해까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근원에 대한 자취를 좇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지나간 시간 동안 나의 사고 능력 이전이나 혹은 그 위에 위치하고, 분명 내 두뇌 속 어딘가에서 엄청난 분별력을 가지고 다스리는 심급이 왜 항상 나 자신의 비밀을 유지해 주었고, 대단히 중요한 것을 추론하고, 그 추론에 합당 한 뒷조사를 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저지했는지가 분명해졌어요. 이렇게 나 자신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이들을 지금 어느 정도 정돈된 순서로 배열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군요. 나는 웨일스 지방의 한 시골 도시 발라에서, 칼뱅파 목사이자 이전의 선교사 집에서 자랐는데, 그 분의 이름은 에미리 일라이언스라고 하고, 그의 아내는 잉글랜드 가정 출신으로 겁이 많은 분이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그날 저녁 그레이트 이스턴 호텔 바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P51-52)


덴바이에 있는 요양소를 방문한 지 1년도 더 지나 1949년 여름 학기가 시작될 무렵, 우리는 상급반에 진급하기 위해 중요한 시험을 한창 준비중이었는데, 펜리스-스미스 교장 선생님이 어느날 아침 나를 불렀어요, 라고 잠시 후에 아우스터리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는 단이 풀린 관복을 입은 그가 유리창의 납창살을 통해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태양빛 속에서 잎담배를 넣은 파이프의 푸르스름한 연기에 둘러싸여 서 있는 모습을 지금 내 앞에서 보는 것 같고, 그가 특유의 산만한 방식으로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지난 2년간의 사건들을 고려해 볼 때 내가 모범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모범적으로 행동했으며, 다음 몇 주 동안 선생님들이 내게 확고하게 걸고 잇는 희망에 보답한다면, 상급 과정 동안 스토위 그레인지 기탁 장학금이 수여될 것이라고 말했어요. 물론 그 전에 내가 답안지에 데이비드 일라이어스가 아니라 자크 아우스터리츠라고 써야 한다는 것을 밝힐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했어요. 그것이 자네의 진짜 이름인 것 같아, 라고 펜리스-스미스가 말했어요. 내가 학교에 들어올 때 그가 상당히 오래 이야기를 나눈 나의 양부모는 졸업 시험이 시작되기 전 적당한 때에 나의 출신에 대해 밝히고, 가능하다면 입양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펜리스-스미스는 말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 자신은 단지 일라이어스 부부가 전쟁 초기에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집에 데려온 것을 알고 있을 뿐이며, 더 자세한 것은 말해 줄 수 없다고 했지요. 일라이어스의 상황이 호전된다면 분명히 다른 것들도 모두 결정될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도 관련이 있는 만큼 자네는 당분간 데이비드 일라이어스로 남아 있게. 단지 자네가 시험 답안지에 자크 아우스터리츠라고 써야 한다는 것뿐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네 답안은 무효로 간주될 것일세. 펜리스-스미스는 메모지에 이름을 썼고, 그 메모지를 내게 건네주었을 때, 나는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76-77)


나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대로 펜리스-스미스 교장 선생님이 자기가 적은 메모지를 내게 건네주던 1949년 4월 그 어느 날까지 아우스터리츠란 이름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어요. 나는 그것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고, 이 기이하고 비밀스러운 패스워드처럼 보이는 단어를 서너 번 음절에 따라 읽어 보고는 고개를 들고 죄송하지만 선생님, 이것이 무슨 뜻인지요? 하고 물었더니, 펜리스-스미스 선생님은 그것이 유명한 전투 장소인 모라비아에 있는 작은 지명임을 자네가 곧 배우게 되리라고 생각하네,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고 나서 다음 학년이 진행되는 동안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 마을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다루어졌어요. 최종 학년에 올라가기 1년 전의 교과 과정에 유럽 역사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전반적으로 복잡하고도 위험한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국의 위대한 활동이 끝나는 1789년부터 1814년 사이의 시기로 제한되었어요. 이 시대를 우리에게 가르치던 선생님은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한 시대라고 종종 강조했는데, 그는 앙드레 힐러리라는 분으로 군에서 제대하자 곧바로 스토워 그레인지에 첫 부임을 했고, 곧 드러난 것처럼 나폴레옹 시대에 대해서는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꿰고 있었지요.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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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는 1805년 12월 2일에 대해 몇 시간에 걸쳐 말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압축해서 묘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가 여러 차례 말한 것처럼, 그와 같은 날에 일어난 것과 누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살아서 달아났는지, 아니면 밤이 시작될 무렵 전쟁터는 어떻게 보였는지, 부상자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르짖고 신음하는 모습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체계적인 형태로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끝없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결국 알지 못하는 것을 “전투는 이쪽저쪽으로 요동쳤다”라는 우스꽝스러운 문장이나 그와 비슷하게 서투르고 쓸데없는 표현으로 요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우리 모두는, 그리고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지요. 우리는 현실을 재현하려고 애쓰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과거의 역사극에서 볼 수 있던 것, 예를 들면 쓰러진 고수(鼓手), 방금 사람을 찔러 쓰러뜨린 보병, 말의 찢어진 눈, 응집되어 가는 싸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장군들에 둘러싸인 채 부상을 면한 황제 등이 점점 더 우리에게 몰려오지요.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 새겨진 그림들을 다루는 것으로, 진리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그 그림들을 응시한다는 거예요. 내게도 삼왕전투(Dreikönigschlacht)는 그것에 대해 읽은 무수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동맹군들의 패배라는 그림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이른바 전쟁의 사건 경위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러시아 병사와 오스트리아 병사의 무리가 걸어서, 그리고 말을 타고 얼어붙은 자첸 호수 위로 달아나는 이 한 장면으로 불가피하게 넘어가지요. 나는 어떤 대포알들은 영원히 허공에 멈춰 서 있는 것, 다른 대포알들은 얼음 속으로 빠지는 것, 그리고 팔을 쳐든 채 뒤집히는 유빙에서 미끄러지는 불행한 사람들을 보고, 그런데 기이하게도 나 자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연대와 함께 강행군하여 빈으로부터 올라온, 근시의 다부 원수(元首)의 눈으로, 이 전투의 한가운데서 마치 최초의 자동차 운전자나 비행사처럼 두 개의 끈으로 머리 뒤로 묶은 안경을 통해 본답니다. 내가 오늘날에도 앙드레 힐러리의 설명을 회고해 보면, 프랑스 민족의 명예로운 과거와 기이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당시 내 속에서 떠올랐던 생각도 역시 다시 기억납니다. 힐러리가 교실에서 아우스터리츠란 말을 자주 하면 할수록 그것은 차츰 내 이름이 되어 갔고, 이전에는 내게 하나의 오점으로 느끼던 것이 항상 내 앞에 떠도는 12월의 안개 너머로 아우스터리츠 자체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처럼 많은 것을 약속해 주는 발광체로 점점 더 분명하게 변해 갔어요. 그 학년 내내 나는 선택받은 자처럼 느꼈고, 동시에 내가 알고 있던 것처럼, 나의 의심스러운 상태와 결코 일치하지 않는 상상에 거의 일생 동안 매달렸지요. (P82-83)


아우스터리츠는 평소의 습관대로 천장을 따라 이어지는 꽃무늬 타일 속에 있는 흰 눈 같은 장식 석고 장미와 사각형 납유리를 관통해 공원 지대 저 너머에 북쪽과 북서쪽으로 펼쳐진 도시의 파노라마를 보고 사진을 몇 장 찍었고, 여전히 카메라를 만지면서 시간에 대해 상당히 긴 설명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내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다. 시간이란 인간의 모든 발명들 중에서 단연 가장 인위적인 것이며, 자신의 축을 자전하는 행성들과의 연관성에서 보면 어떤 계산도 훨씬 더 자의적인 것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맞추는 태양일은 정확한 척도를 제시할 수 없는 까닭에 시간 측정이란 목적을 위해서도 운동 속도가 변하지 않고 회전 궤도에서 적도를 향해 기울어지지 않는 환상적인 평균 태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라도, 나무들의 성장과 석회석이 부식되는 기간에서 출발하는 계산 만큼이나 자의적이라고 아우스터리츠는 그리니치의 천체 관측실에서 설명했다. 뉴턴이 정말로 시간을 템스와 같은 강이라고 생각했다면, 시간의 근원은 어디이며 그것은 어떤 바다로 흘러 들어가나요 하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하면서, 창문 아래로 그 날의 마지막 반사광 속에서 반짝거리는, 일명 개들의 섬을 감싸는 물결을 가리켰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강들은 필연적으로 양쪽으로 경계를 갖지요. 그렇게 본다면 시간의 강변이란 무엇일까요? 유동적이고 상당히 무겁고 투명한 물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간의 특성이란 무엇인가요? 시간 속으로 잠기는 사물들은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과 어떤 차이가 날까요?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동일한 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왜 시간은 한 곳에서는 영원히 정지하거나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곤두박질 치나요? 우리는 시간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많은 곳은 시간보다는 기후 상황에 의해 지배받고, 그와 더불어 수량화할 수 없는, 직선적인 균등을 알지 못하고 항상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이고 정체와 돌연한 흐름에 의해 결정되며, 지속적으로 변하는 형태로 되돌아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크기에 의해 발전되는 것은 아닐까요?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얼마 전까지 자기 나라에서 남겨지고 잊혀진 지역이나 발견되지 않은 해외의 대륙에 적용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런던 같은 시간의 수도에서조차 적용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들이나 죽어가는 사람들, 자기 집이나 병원에 누워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러니까 시간 밖에 있는 것이고, 단지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불행으로도 충분하지요. 실제로 나는 한 번도 시계를 가진 적이 없는데, 벽시계나 자명종, 주머니 시계, 손목시계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시계가 네게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근본적으로 뭔가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서 시간의 권위에 항상 저항하고,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흘러가지 않아서 내가 그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과거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시간의 순간들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하거나 혹은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았으면, 일어난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순간에 비로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른바 시대적 사건에서 나를 배제시킨 때문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비참함과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절망적인 미래를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113-115)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기꺼이 어두워질 때가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해독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생각들이 빙빙 돌기 시작할 때까지 한 권의 책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리고 밤에 어두운 집 안에서 책상 앞에 램프의 불빛 속에서 연필 끝이 말 그대로 저절로, 전적으로 성실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 한 줄 그어진 페이지를 내달리는 그림자를 쫓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이제 글 쓰는 일은 내게 너무 어려워져서 종종 한 문장을 위해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하고 몹시 힘들게 생각해 낸 문장을 기록할 수 없을 때면, 고통스럽게도 나의 구상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과 내가 사용한 모든 단어들의 부적절함이 드러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만하며 때때로 하루 분량이 채워진 것처럼 보일 때라도, 다음날 아침에 그 페이지에 처음 눈길을 던지자마자 매번 심각한 오류와 부조화, 궤도를 벗어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거예요. 기록된 것이 많든 적든간에 그것을 읽어보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보여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 시작해야 했지요. 나는 곧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요.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어떻게 옮길지 알지 못하는 공중 줄타기 곡예사처럼 나는 내 밑에서 플랫폼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훨씬 벗어나 번적거리는 균형 막대의 끝이 더 이상 이전처럼 나의 등불이 되지 못한 채, 나를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불길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경악하며 깨닫게 되었지요.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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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미혹당한 사람처럼 한가운데 서 있었던 그 대합실은 마치 내 과거의 모든 시간들과 이전부터 억눌리고 사라져 버린 불안과 소망을 포함하고, 내 발 아래 돌로 된 바닥의 검고 흰 다이아몬드 무늬가 내 생애 마지막 게임을 위한 운동장인 듯한, 시간의 전 차원으로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이 홀의 반쯤 침침한 빛 속에서 1930년대 스타일의 옷차림새를 한 중년 부부를 보았는데 부인은 손질한 머리 위에 비스듬히 모자를 쓰고 가벼운 개버딘 외투를 입었으며, 그녀 옆에는 검은 양복과 목 주변에 로만 칼라를 한 말라 보이는 신사가 있었어요. 나는 그 사제와 부인뿐 아니라 그들이 데리러 온 남자아이도 보았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 아이는 혼자 옆쪽을 쳐다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지요. 무릎까지 오는 흰 양말을 신은 그의 다리는 바닥에 닿지 않았고, 가슴에 안고 있는 배낭이 없었다면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배낭 때문에 나는 그를 알아보았고, 내가 회상할 수 있는 한 처음으로 그 순간에 나 자신을, 반세기도 더 전에 영국에 도착해서 내가 이 대합실에 분명히 와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어요. 이것을 통해 내가 빠진 상황이란 많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내 속에서 느끼는 일종의 강탈이고, 수치와 염려, 혹은 당시 그 낯선 두 사람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에 말문이 막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나는 단지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년을 보았고, 뻣뻣하게 마비된 채 내버려진 상태가 과거의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속에 가져온 파괴를, 그리고 한 번도 진짜로 살지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제 처음으로 태어난 것 같은 생각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죽기 전날 같은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1939년 여름, 나를 입양하기로 설교자 일라이어스와 그의 창백한 아내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에 대해 나는 단지 추측만 할 뿐이었어요. 아이가 없던 그들은 매일매일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되어 가는 감정의 경직을 해소해 보고자 당시 네 살 반 된 남자아이를 키우는 데 함께 헌신하거나 아니면 더 높은 심판 앞에서 일상적인 선행의 정도를 넘어서는 개인적인 헌신과 희생과 관련된 일을 할 의무가 있다고 착각한 것이지요. 그 분들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을 접하지 못한 내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나 역시 발라에서의 처음 얼마간 일라이어스의 보호 아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어요. 나를 몹시 불행하게 만들던 새 옷을, 그리고 초록색 배낭이 이해할 수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기억하고, 결국 나는 모국어가 사라지는 것과 주의를 기울이면 매번 놀라서 중단되고 침묵하는, 한 동안 내 안에 갇힌 그 뭔가가 긁거나 두드리는 소리가 한 달 한 달 점차 잠잠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그 일요일 아침 여러 가지 상황이 연결되어 개축 공사를 위해 영원히 사라지기 불과 몇 주 전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의 낡은 대합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짧은 기간 안에 그 속에 속하는 모든 것과 함께 완전히 잊혀 버린 단어들이 내 기억의 심연 속에 흩어진 채 남아 있었을 거예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152-154)


나는 이제 기억하는데 내가 얼마나 훈련되어 있지 않은지, 반대로 가능한 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나의 근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항상 얼마나 애를 써 왔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날에도 상상할 수 없는 독일인들의 유럽 정복에 대해, 그들이 세운 노예 국가들에 대해, 내가 피해 나온 박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혹은 내가 뭔가 알았더라도 시골 처녀가 예를 들면 페스트나 콜레라에 대해 아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내게 세상은 19세기의 종식과 더불어 끝난 것이었지요. 나는 감히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구한 시민 세계의 전체 건축사와 문명사는 당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요. 오늘날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불행한 소식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신문을 읽지 않았고, 특정한 시간 외에는 라디오도 켜지 않았으며, 나의 방어 자세를 점점 더 구체화하고 일종의 격리 혹은 면역 체계를 형성해서, 점점 더 좁아지는 공간에 간직된 나 자신의 과거사와 아주 멀리 떨어졌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 스스로를 지켰지요. 그것을 넘어 나는 일종의 대체적 혹은 보상적 기억으로 작용해 온, 수십 년 동안 계속해 온 지식 축적에 계속해서 몰두했지만, 모든 안전 장치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위험한 정보가 내게 이를 때면, 나는 눈멀고 귀먼 상태를 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일은 그 밖의 다른 불유쾌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금세 잊혀졌지요. 내 사고의 이 같은 자기검열, 다시 말해 내 속에서 시작되는 기억에 대한 지속적인 거부는 그 사이 점점 더 많은 노력을 요구했고,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내 언어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나의 모든 스케치들과 기록들을 없애 버렸으며, 런던을 관통하는 끝없는 밤의 산책과 점점 더 자주 찾아오는 환각들과 더불어 1992년 여름에는 마침내 쓰러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P155-156)


고서점 안은 조용했고, 단지 피넬러피가 항상 옆에 두고 있는 작은 라디오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내게는 지나칠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가 앞에 놓인 책장을 완전히 잊고 꼼짝 않고 서서, 약간 윙윙거리는 기계에서 나오는 그 소리의 한 음절도 놓치지 않을 듯이 귀를 기울이도록 나를 사로잡았어요. 내가 들은 것은 대화를 나누는 두 여성의 목소리로, 이들은 1939년 여름 어린아이이던 그들이 어떻게 특별수송차로 영국으로 이송되었는지를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빈, 뮌헨, 단치히, 브라티슬라바, 베를린 같은 일련의 도시들을 언급했지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을 태운 기차가 이틀 동안 계속된 여행 후 독일 제국을 가로지르고, 기차에서 풍차의 커다란 날개들을 보았던 네덜란드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대형 연락선인 프라그(PRAGUE) 호를 타고 후크에서부터 북해를 지나 하위치까지 간 것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이 기억의 조각들이 의심할 바 없이 나 자신의 삶과도 관련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나는 갑작스럽게 밝혀진 이 같은 사실에 놀란 나머지 방송 끝에 나온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을 경황이 없었지요. 나는 단지 어느 부두에서, 대부분 배낭이나 등짐을 진 아이들이 두 줄로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에요. 다시 내 발 밑에서 거대한 마름돌과 둘속의 운모, 항구 수조에 있는 거무튀튀한 물과 비스듬히 올라오는 밧줄들과 닻의 체인들, 집채보다 큰 뱃머리, 머리 위에서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회전하던 갈매기들과 구름 사이로 비쳐들던 햇살과 기차를 타고 어두운 육지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 칸에 있던 좀 더 어린아이들을 돌보아 주던 스코틀랜드 식 모자와 우단 바레트를 쓴 소녀를 보았고, 지금 기억하기로는 나는 몇 년 동안 그 소녀에 대해 여러 번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녀는 나를 위해 푸르스름한 야등이 켜진 방에서 일종의 반도네온을 가지고 재미있는 노래를 연주해 주었어요. 괜찮으세요? --나는 갑자기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을 때까지, 그리고 내가 갑작스럽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 피넬러피가 염려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요. (P157-158)


나는 그 3월의 늦은 오후와 저녁 내내 베라와 내가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를 그렇게 억누르던 모든 것에 대해 짧게 보고한 후에는 무엇보다 실종된 나의 부모 아가타와 막시밀리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생각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아버지 막시밀리안 아이헨발트는 할아버지가 혁명 시기까지 향신료 무역을 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체코 사회민주당에서 가장 활동적인 당원 가운데 한 분이었고, 당시에 배우 경력의 초창기로 그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출연했던 그보다 열다섯 살 어린 어머니는 아버지가 공식행사나 직장 회합 연사로 다닌 숱한 여행 중에 니콜스부르크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베라는 말했어요. 1933년 5월, 내가 슈포르코바 가로 이사를 오자마자 그들은 지치지 않고 반복했던, 아름다운 경험으로 가득 찬 파리 체류에서 돌아와 비록 결혼하지 않은 상태이긴 했지만 이 집에서 살림을 차렸지, 하고 베라는 말했어요. 아가타와 막시밀리안은 둘 다 프랑스적인 것을 대단히 선호했어, 라고 베라는 말했어요. 막시밀리안은 근본적으로 공화주의자였고, 유럽 도처에서 끊임없이 확산되어 가는 파시즘 물결 한 가운데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제2의 스위스처럼 자유의 섬으로 만들기를 꿈꾸었고, 아가타는 그녀대로 더 나은 세계에 대해, 무엇보다 경탄했던 자크 오펜바흐로부터 영감을 받은 훨씬 다채로운 표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이유에서 나 역시도 체코인들 가운데서는 그다지 흔치 않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베라는 말했지요. 열광적인 로만어문학 전공자인 자신이 아가타와 막시밀리안과 공유했던, 모든 표현 방식에서 드러난 프랑스 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이사를 들어온 날 처음으로 나눈 대화에서 곧바로 우정이 생기게 했고, 이런 우정에서 자연적으로 아가타와 막시밀리안과는 반대로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그녀가 내가 태어나자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몇 년 동안 유모를 맡기로 자청했다고 베라가 말했다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171-172)


우리가 쇤보른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나서 다시 그녀의 집에 함께 앉았을 때, 베라는 내 부모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그분들의 출신과 삶의 여정, 그리고 몇 년 사이에 그들의 존재가 말살되어 버린 것에 대해 처음으로 상세히 이야기했어요. 네 어머니 아가타는 내 생각으로는 검고 약간은 멜랑콜리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뢰할 만하고, 때로는 약간은 쾌활한 성격을 가진 여성이었어, 라고 그녀는 말을 시작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녀는 그 점에서는 아직도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 슈테른베르크에 페즈모(帽)와 덧신 공장을 소유하고 모든 혐오스러운 것을 간단히 무시할 줄 알았던 그녀의 아버지 노(老) 아우스터리츠와 똑같았지. 한번은 그가 이 집을 방문했을 때, 무솔리니 쪽 사람들이 동양식 두건 비슷한 것을 쓰자 그가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생산하여 이탈리아로 보낸 후 그의 사업이 상당히 번창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 당시에 아가타 역시 오페라와 오페레타 가수로서의 경력에서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인정받자 고무된 채 더 나아지기 위해 한동안 모든 것을 헌신할 생각이었지만, 그에 반해 막시밀리안은 아가타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유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안 이후로는,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벼락출세자들과 그들의 지휘 아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해 몰려드는 단체들과 사람들의 무리는, 그가 종종 말한 것처럼, 정말로 끔찍하며, 처음부터 맹목적인 정복욕과 파괴욕에 사로잡혀 있고, 그들의 핵심은 사람들이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던 것처럼 제국 총리가 연설에서 계속해서 수천만 번도 더 반복하는 마력적인 말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 천 번, 만 번, 2만 번, 10만 번, 그리고 수십만 번 그 쉰 목소리로 독일인들에게 주입하는 운(韻)은 그들 자신의 위대함과 이미 그들 앞에 닥쳐와 있는 종말에 대한 것이라고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은 독일 국민이 다른 사람에 의해 불행으로 내몰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고 베라는 말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을 이어 갔다. (P184-185)


새로운 정권에 적응하기란 물론 내게보다는 아가타에게 훨씬 어려웠지, 라고 베라는 말을 계속했어요. 독일인들이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관련 규정을 통과시킨 후,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물건을 살 수 있었고, 택시를 타서는 안 되었으며, 전차도 맨 뒤칸에만 타야 했고, 커피숍이나 영화관, 음악회, 그 밖의 다른 모임에도 갈 수 없었지. 그녀 자신도 이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몰다우 강변이나 정원, 공원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어. 녹지가 있는 곳은 어디도 가서는 안 되었고, 걱정 없이 하상(河上) 증기선의 난간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그녀는 그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지. 매일매일 길어지는 제한 목록에 따라 곧 공원 쪽 포장도로로 가는 것이 금지되고, 빨래방이나 세탁소에 들어가는 것,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자, 아가타는 곧 절망의 언저리까지 갔다고 베라가 말한 것을 들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나는 지금 그녀가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손을 펴 이마를 치면서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난 이-해-할 수 없어, 나 이-해-할 수 없다고! 난 절-대로 그걸 이-해-하지 않을 거야!! 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라고 베라는 말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능할 때마다 시내에 갔고, 나는 어딘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는 장소들에 대해 말했고, 전보 하나를 치기 위해 4만 명의 프라하 유대인들에게 허용된 단 하나의 우체국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었으며, 정보를 얻고, 관계를 맺고, 돈을 맡기고, 증명서와 보증서를 가져가고, 다시 돌아오면 밤늦도록 온 머리를 짜내어야 했어. 그녀가 오랫동안 그리고 더 많이 애를 쓰면 쓸수록 희망은 점점 희박해져서, 우리가 일촉즉발의 전쟁과 더불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이던 제한 강화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여름, 그녀는 마침내 극장 지인 중 한 사람의 중재로 몇 달 후에 프라하에서 런던으로 가는 어린이 호송 작전에 내 이름을 등록하는 데 성공하고는 최소한 나만이라도 영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베라가 말했어요. 베라는 아가타가 자신의 수고가 처음으로 아이 같은 결실을 얻은 것에 흥분해서 좋아했지만,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은, 항상 보살핌을 받던 아이가 긴 기차 여행과 그 다음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를 그려 볼 때면, 그 훙분한 기분이 염려와 걱정으로 어두워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다른 한편, 아가타는 첫 단계가 행해진 이상 분명히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곧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다음 우리 식구 모두 파리에서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베라는 말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소망과 뭔가 책임질 수 없는 것, 용서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심히 분열되어 있었고, 네가 프라하를 떠나는 날까지 며칠만 더 우리에게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녀는 나를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베라는 내게 말했지요. 윌슨 정거장에서 작별하던 시간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고 어느 정도는 희미해진 상만 남아 있다고 베라는 말했고, 한참 동안 생각한 후, 작은 가죽 가방에 내 물건을 넣고 배낭에는 약간의 먹을 것이 들어 있었는데 —아우스터리츠는 이것을 un petit sac à dos avec quelques viatiques(먹을 것이 든 작은 배낭)라고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이 말은 그가 그 사이 깨달은 것처럼, 이후의 그의 모든 삶을 요약하는 베라의 정확한 표현이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190-192)

영화 아우스터리츠 05.jpg

베라가 그처럼 망각에서부터 나타난 사진들의 규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기까지 몇 분이 지나갔는데, 그동안 나 역시 계곡으로 내려가는 눈사태를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하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마치 절망에 찬 한숨소리를 —그녀는 이것을 gémissements de désespoir라는 말로 표현했다— 듣는 것처럼 그들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마치 사진 자체가 기억을 가지고 우리를 기억하며, 살아남은 우리와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 라고 그녀는 말했다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래, 그리고 다른 사진에 있는 여기 이 아이가 너인데, 네가 프라하를 떠나기 한 반년쯤 전인 1939년 2월이었지 하고 그녀는 잠시 후 말을 이었어요. 너는 아가타를 흠모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의 집에서 열린 가면무도회를 따라갔는데, 그때 눈처럼 흰 이 의상을 너를 위해 직접 재단했단다. Jacquot Austelitz, paze rüzové královny(자크 아우스터리츠, 장미 여왕의 시동)라고 당시에 방문한 너의 할아버지가 뒷면에 직접 적어 놓으셨지. 그 사진은 내 앞에 놓여 있었지만, 나는 감히 그것을 손에 쥘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aze rüzové královny, paze rüzové královny라는 말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멀리서부터 그것의 의미가 내게 나타났으며, 아는 장미 여왕과 그녀 옆에서 옷의 긴 뒷자락을 잡아 주는 어린 소년의 살아있는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날이나 그 후에도 무척 애를 썼지만 나는 그 역할을 하는 나 자신을 기억해 내지 못했어요. 이마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난 특이한 선을 알아보았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은 과거의 압도적인 기억들에 의해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지요. 나는 그 후 여러 차례 이 사진을, 어디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내가 서 있는 이 황량하고 평평한 들판을 살펴보았지요. 지평선 위의 어둡게 흐릿한 지점, 바깥 가장자리가 유령처럼 환한 소년의 곱슬머리, 내가 한때 생각했던 것처럼 아마도 붕대를 감았거나 혹은 부러졌거나 부목을 댄 팔 위의 만틸라, 여섯 개의 커다란 진주 단추, 해오라기 깃털이 달린 화려한 모자, 심지어 무릎까지 오는 양말의 주름조차 확대경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조그만 단서도 찾지 못했어요. 그때마다 나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러 와서 아침 여명 속의 빈 들판에서 도전을 받아들고 그 앞에 닥친 불행을 물리치기를 기다리는 시동의 살피는 듯한 눈빛에 사로잡힌 것처럼 느꼈어요. 베라가 내게 어린 기사의 사진을 내놓았던 슈포르코바에서의 그날 저녁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동을 받았다든가 당혹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도 생각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나중에 내가 다섯 살짜리 시동에 대해 생각할 때도 오로지 이 맹목적인 공포만이 나를 사로잡았어요. 한번은 내가 오랜 부재 끝에 프라하의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었지요. 가구들은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었어요. 나는 부모님이 곧 휴가에서 돌아올 것이고, 그 분들에게 중요한 것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분들이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어요. 단지 그 분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실제로 그런 것처럼 이미 90세나 100세 정도로 엄청나게 연세가 많다고만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 분들이 마침내 문 앞에 서 있을 때면 기껏해야 30대 중반이었지요. 그들은 들어와서 방들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손에 쥐고는 잠시 살롱에 앉아 농아들의 비밀스러운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 분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나는 그들이 지금 사는 집이 있는 산 속 어딘가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예감했지요. 우리는 과거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법칙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더 이상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좀 더 높은 구적법(求積法)에 다라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공간들만 존재하며, 그 공간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자신이 기분에 따라 여기저기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되고, 내가 그런 생각을 오래 하면 할수록, 아직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은 사람의 눈에는 비현실적이고 단지 이따금씩 빛의 특정한 상황과 내기 조건에서만 보이는 존재처럼 생각되었지요. 기억할 수 있는 한 나는 현실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어떤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늘 들었고, 이 같은 느낌이 장미 여왕의 시동의 눈빛이 나를 꿰뚫어 보는 슈포르코바에서의 그날 저녁처럼 내 속에 강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어요. 테레진으로 가는 다음날에도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었지요. (P201-205)


예를 들어 내가 시내를 가로지르는 길에 수십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은 어느 조용한 마당을 들여다볼 때면 잊어버린 사물의 중력 범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느려지는지가 거의 몸으로 느껴져요. 그러면 마치 미래의 사건들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한번 수락한 초대에 따라 마침내 특정한 집안의 특정한 시간에 있는 것처럼, 그 사건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단 하나의 공간에 모여 있는 것처럼 보여요. 우리는 과거 속에서, 이미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사라져 버린 것 가운데서 약속을 하거나, 거기서 시간의 저편에서 우리와 관련 있는 장소와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요, 하고 아우스터리츠는 말을 이었다. (P208)


홀레쇼비체의 전시회장 문 앞에서 작별한 후 6년이 지나자 아가타는 1944년 9월에 테레진에 수감된 1,50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쪽으로 보내졌다고 베라는 계속 이야기했지요. 그녀 자신은 그 후 오랫동안 아가타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무의미한 미래에 계속된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녀는 종종 여러 주일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자신의 몸 바깥에서 세게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았으며, 끊어진 실마리를 보았고,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믿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영국에 머무르던 나와 프랑스에 있는 아버지에 대해 나중에 끝없이 이어졌던 조사는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어요. 어떤 식으로 시도하든 간에 항상 모든 흔적은 모래 속에서처럼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당시에는 검열 부대가 우편 체계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외국에서 답장을 받는 데 종종 몇 달씩 걸렸기 때문이었지요. 그녀 자신이 제대로 된 기관을 찾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달랐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위한 가능성도 돈도 그녀에게는 없었다고 베라는 말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기대도 없이 몇 년이 지났지만, 돌이켜 보면 납덩이처럼 무거운 단 하루처럼 느껴진다는 거예요. 그녀는 학교 업무를 행했고, 스스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마련했지만, 그 시간 이후 그녀는 무엇을 느끼지도 숨을 쉬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단지 지난 세기 혹은 그 전 세기에 나온 책들 속에서만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베라의 그 같은 이야기 뒤에 우리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종종 긴 침묵이 이어졌고, 슈포르코바의 어두워진 집 안에서 여러 시간이 흘러갔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요. 저녁 무렵 내가 베라와 작별을 고하자, 그녀는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는데, 그때 그녀는 갑자기 내가 윌슨 정거장에서 떠나는 날, 기차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아가타가 몸을 돌리고는 지난 여름만 해도 우리가 여기서 마리엔바트로 갔었는데..... 그런데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지? 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어요. 처음에는 전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베라의 이 회상은 곧 나를 사로잡아서, 나는 평소에는 거의 전화를 하지 않지만, 그날 저녁 섬의 호텔에서 베라에게 전화를 했지요. 그녀는 피로감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1938년 여름, 아가타, 막시밀리안, 그녀와 내가 다같이 마리엔바트에 갔었다고 말했어요. 그것은 멋진, 거의 황홀한 3주간이었다고요. 이 시설에서 자신들의 물컵을 가지고 기이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과체중이거나 너무 마른 요양객들은, 아가타가 한번은 지나가면서 말한 것처럼 그지없이 평화로운 사람들처럼 보였지요. 우리는 팔라스 호텔 바로 뒤에 있는 오스본 발모랄이란 여관에 묵었어요. 아침에는 우리는 대부분 온천을 하고, 오후에는 주변으로 끝없이 긴 산책을 갔지요. 막 네 살이 된 그 여름 휴가에 대해 나는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아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고, 아마도 바로 그 때문에 나중에 내가 1972년 8월 말에 바로 그곳 마리엔바트에 당시 내 삶에서 시작하려 했던 더 나은 전환 앞에서 근거 없는 불안을 느끼며 서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파리 시절 이후 편지를 주고 받았던 마리 드 베르뇌유로부터 보헤미아로 가는 여행에 동행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서 그녀는 유럽 온천 휴양지의 발전상에 대한 자신의 건축사 연구 외에도, 내가 오늘은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고립 상태에서 빠져 나오도록 시도해 볼 작정이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최고로 준비했어요. 그녀의 사촌 프레데릭 펠릭스는 프라하 주재 프랑스 대사관 수행원이었는데, 그가 으리으리한 타트라 리무진을 공항으로 보내 우리는 그걸 타고 곧장 마리엔트로 갔지요. (P225-227)


보헤미아에서 되돌아온 첫 몇 주 동안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를 외우고, 자갈과 담쟁이덩굴 잎, 한번은 돌로 된 장미와 부서진 천사상의 손을 집으로 가져갔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걸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고, 그러나 낮 동안 햄릿 타워로의 산책이나 나를 진정시키면 시킬수록 저녁이면 종종 몇 시간씩 계속되고 점점 더 심해지는 끔찍한 불안감에 휩사였지요, 라고 말했다. 내가 느끼는 혼란의 근원을 찾아내었고, 모든 지나간 세월을 넘어 스스로에게 익숙한 삶에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 자신이 고립된 아이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그때 이후 나 자신에 의해 억눌려 왔지만, 이제는 강력하게 몰려오는 쫓겨난 존재와 지워진 존재라는 느낌 앞에서 이성은 속수무책이었어요. 가장 간단한 활동을 할 때, 신발끈을 묶을 때, 찻잔을 씻거나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릴 때, 이 같은 끔찍한 불안이 나를 엄습했지요. 금세 내 혀와 입 안이 말라 버려서 마치 며칠 동안 사막에 누워 있는 것 같았고, 점점 더 숨이 가빠졌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 아래까지 차올라서 온몸과 심지어 떨리는 손등에까지 식은땀이 솟았으며,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검은 선영으로 감싸여 있었어요. 나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고, 골목으로 나오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으며, 한번은 실제로 길고 고통스럽게 수축된 뒤 내부로부터 폭발하는 나 자신을 보았으며, 내 몸의 조각들이 어둡고 먼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어요. 내가 그 당시 그 같은 발작 상태를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오늘날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지만, 어느 날 올더니 가의 끝에 있는 간이매점으로 가는 도중 쓰러져서 머리를 보도석 모퉁이에 부딪힌 후, 여러 병원과 검사실을 거쳐 세인트 클레멘트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누군가가 나중에 내게 설명한 것에 따르면, 신체적 기능은 마비되지 않았지만, 생각의 전 과정과 감정의 움직임이 마비된 채 거의 3주간에 걸친 실신 상태에서 빠져 나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곳 남자 병실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지요. 처방된 약물 때문에 기이한 상태에 빠져 나는 저기 저 안에서 아무런 위안도, 소망도 없이 온 겨울 내내 정원을 이리저리 산책했고, 침침한 창문을 통해 몇 시간 동안 내가 지금 서 있는 공원 묘지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에서 두뇌의 타 버린 네 벽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라고 말하면서 왼손으로 담장 뒤 높이 솟아 있는 벽돌로 된 병원 건물의 정면을 가리켰다. 나중에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나는 간호인 중 한 사람이 빌려준 망원경으로 아침 여명 속에서 공원 묘지 안에 야생 통로를 가지고 있는 여우들, 놀란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나중에는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다람쥐들, 때때로 나타나는 고독한 사람들의 얼굴, 어둠이 몰려올 때면 규칙적으로 묘비석 위로 넓은 곡선을 그리며 나는 부엉이의 느린 비상을 관찰했어요. 이따금씩 나는 병원의 이런저런 다른 입원 환자들, 예를 들면 한 지붕 수리공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일하는 도중 이마 뒤의 특정 부위에서 뭔가 팽팽한 것이 끊어지고, 자기 앞의 서까래 중 하나에 세워 놓은 끊길 듯한 트랜지스터 기계에서부터 불운을 고지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는 이후에 그를 끊임없이 쫓아왔으며, 자신은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지요. 나는 저 안에서 설교자 일라이어스의 정신착란에 대해서도 종종 생각했고, 그가 그 속에서 몰락해 간 덴바이의 돌로 된 집도 생각했지요. 단지 나 자신, 나 자신의 역사와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만은 가능하지 않았어요. 프라하에서 돌아온지 1년 뒤인 4월이 막 시작될 무렵 나는 퇴원을 했어요. (P25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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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시간 나는 이곳에 앉아서 그 사이에 훨씬 낡은, 두 줄로 단추가 달린 자두색 양복을 입은 아버지가 커피 하우스의 탁자 위로 몸을 숙인 채 프라하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편지를 쓰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지요. (P278-280)


벨베데르 층의 다른 쪽으로는 센 강의 비스듬한 띠와 마레 구역과 북쪽으로는 바스티유 너머로 내려다볼 수 있었지요. 잉크색의 소나기 구름층이 이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도시 위로 기울어지고, 도시의 탑들과 궁전들, 기념비들은 곧 사크레 쾨르 둥근 지붕의 흰 윤곽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바닥까지 이르는 판유리에서 단 한 발 뒤에 서 있었어요. 시선을 아래로, 밝은 산책로 지붕과 그것에서 더 어둡게 솟아 있는 나무들의 수관으로 향하면, 심연의 소용돌이가 사람을 사로잡아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르무안은 여기 이 위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관자놀이와 이마 주변에서 느끼는 것 같다며 말했으며, 그것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머릿속에 형성되어 간, 저기 아래 도시의 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의식의 반사일 뿐이라고 덧붙였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오늘날에는 이 도서관이 서 있는 도스테를리츠 역과 톨비악 다리의 조차(操車) 시설 주변 사이의 황량한 땅에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커다란 창고가 위치해 있었는데, 독일인들은 그 창고에 파리의 유대인들의 집에서 꺼내 온 전리품을 모아 두었지요. 그 전리품들은 당시에 수개월간 계속된 조치로 약탈한 4만 세대에 있던 것으로, 그것을 위해 파리의 가구 운송업자 단체의 차량이 동원되었고, 1,500명 이상의 하역 인부들이 투입되었어요. 마지막까지 철저히 조직된 몰수 및 재사용 프로그램에 대하여 사람들은, 즉 점령군의 부분적으로는 서로 경쟁하는 관할 지휘부, 예컨대 재정담당부서와 세무담당부서, 주민사무소와 토지등기사무소, 은행과 보험회사, 경찰과 운송회사, 집주인과 주택 공급자들 모두는 드랑시에 수용자들 중 거의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알고 있었어요, 라고 르무안은 말했지요. 당시에 순식간에 자기 소유로 만든 값나가는 물건들, 예금액, 주식과 부동산은 오늘날까지 시 당국이나 국가 당국의 손에 들어 있어요, 라고 르무안은 말했어요. 1942년부터 저 아래 아우스터리츠 —톨비악 창고 광장에는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든, 단순히 집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든 우리 문명이 이룩한 것들이, 예컨대 루이 16세의 서랍장, 마이센 도자기, 페르시아 양탄자와 숱한 책들부터 심지어 식탁용 소금통과 설탕통에 이르기까지 쌓여 갔지요. 창고 안에서 일했던 사람이 최근에 내게 한 말에 따르면 심지어 몰수한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손질하기 위해 꺼내놓은 콜로포늄을 담는 별도의 상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라고 르무안은 말했어요. 드랑시에서 불려온 500명 이상의 예술사가, 골동품 상인, 보수 전문가, 목수와 시계공, 모피 가공업자와 패션 디자이너 들은 인도차이나 출신의 임시 군인들에 의해 감시를 받으면서 매일 열네 시간씩 들어오는 물건들을 수선하고 은수저는 은수저대로, 취사도구는 취사도구대로, 장난감은 장난감대로, 값어치와 종류에 따라 분류하는 일로 분주했지요. 700대 이상의 열차 차량이 여기서부터 제국의 파괴된 도시로 출발했지요. 죄수들이 도스테를리츠 갤러리라고 부른 이 창고 안에는 독일에서 온 정당 보스들과 파리에 주둔하고 있는 친위대나 독일군의 고위직 요원들의 아내나 혹은 다른 여성들과 함께 그루네발트에 소재한 별장을 위한 살롱 가구나 세브르 도자기 세트, 모피 외투나 플라이옐 피아노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어요, 라고 르무안은 말했어요. 당연히 가장 값진 물건들은 대규모 포격을 받은 도시로는 보내지 않았어요. 진정한 의미의 역사 전체가 우리의 파라오 같은 대통령 도서관 바닥 밑에 묻혀 버린 것처럼,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오늘날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아요, 라고 르무안은 말했지요. 아래 인적이 드문 산책로에는 마지막 밝은 빛이 사라졌지요. 위에서 보면 초록 이끼 바닥처럼 보이는 잣나무 숲의 꼭대기는 점점 더 균일하게 검은 사각형이 되었어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벨베데르 위에 함께 서 있었고, 이제는 불빛 속에서 반짝이는 도시를 내려다보았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310-312)


내가 파리를 떠나기 직전에 모닝 커피를 마시러 오귀스트 블아키 가에 가서 다시 한 번 아우스터리츠와 만났을 때, 그는 그 전날 조프루아 라스니에 가에 있는 문헌 보관소 직원으로부터 막시밀리안 아이헨발트는 1942년 말 구르스 수용소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훨씬 남쪽으로 피레네 산맥이 시작되는 부근에 있는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난 번 만난 후 몇 시간 뒤에 그가 국립 도서관에서 오는 길에 도스테를리츠 역에서 차를 갈아타려고 했을 때, 기이하게도 자신이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내가 우연히 알게 된 것처럼, 지난 수요일에 파업으로 철도 교통 일부가 마비되고, 그 때문에 도스테를리츠 역을 둘러싼 침묵 속에서, 우리 아버지가 독일인이 진군해 온 직후 바로 가에 있던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이곳에서 파리를 떠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출발할 때 열차 창문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는 듯했고, 둔탁하게 움직이는 기관차에서 흰 증기구름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 후 나는 반쯤 멍하니 미로 같은 지하 통로들과 육교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역 안을 돌아다녔지요. 이 역은 내게는 이전부터 파리의 모든 역 가운데 가장 수수께끼 같은 곳이었어요. (P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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