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영화 <센스 앤 센서빌리티> 1995년

by 노용헌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역사상 가장 많이 영상화 된 소설들 중 하나다. 그녀가 남긴 장편소설 6편은 모두 영화화, 드라마화됐다. 그것도 각각 여러 번씩. <센스 앤 센서빌리티>는 엠마 톰슨 주연, 이안 감독의 영화, 3번의 드라마로, <오만과 편견>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작을 포함해 4번 영화화됐고, <엠마>는 기네스 팰트로 주연작과 에이미 해커링의 <클루리스>까지 합쳐서 영화로 6번, TV 드라마로 1번 만들어졌다. <설득>은 영화로 1번, TV 드라마로 2번 제작됐다. 오스틴 사후에 출간된 <맨스필드 파크>는 패트리샤 로제마 감독이 원작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오스틴의 실제 모습을 적극 투영해서 영화화했고, <노생거 수도원> 역시 한 차례 영화화된 적이 있다. 심지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제인 오스틴이 십대 시절 쓴 희곡 <찰스 그랜디슨경>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맨하탄의 제인 오스틴>을 1980년 발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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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부친이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존 대시우드 씨의 부인은 시어머니에게 아무런 사전 통지도 없이 아들과 식솔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그녀가 여기 올 권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저택은 시아버지가 죽은 바로 그 순간부터 남편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만큼 그녀의 행동은 더더욱 예의와는 담을 쌓은 꼴이니, 성격이 무던한 여자라도 대시우드 부인의 처지가 되었다면 매우 불쾌했을 것임에 틀림없겠다. 그런데 부인의 마음은 예법에 민감하였고 낭만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곧아서 누구라도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면 그녀에게 떨칠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존 대시우드 부인은 워낙 시댁 사람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든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를 이제야 얻었던 셈이다.

대시우드 부인은 이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 너무 괘씸하여 며느리를 경멸해 마지않았기 때문에, 며느리가 들어온 날로 바로 이 집을 영원히 떠나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가버리면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고 맏딸이 간곡히 말리지 않았더라면, 또 자기 세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그래 여기 머물자, 그리고 저 아이들을 위해서 저 아이들의 오라버니와 적을 지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렇게 톡톡히 효과를 본 충고를 한 맏딸이 바로 엘리너인데, 그녀는 깊은 이해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겸비하고 있어서 불과 열아홉인데도 어머니의 조언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녀는 그냥 두면 대개 경솔한 짓을 저지를 것이 뻔한 대시우드 부인의 안달복달에 자주 맞서서 그들 모두의 이익을 지켜냈다. 그녀는 뛰어난 마음을 가졌다. 성향은 다정했고 감정은 강렬하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알았다. 그것은 어머니도 배워야 할 지혜였고, 동생 중의 하나는 한사코 배우지 않으려 한 지혜였다.

매리앤의 능력은 여러 모로 앨리너의 능력과 맞먹었다. 그녀는 분별력도 있고 영리했다. 그러나 무든 일에 너무 열심이었다. 그녀의 슬픔, 그녀의 기쁨에는 절도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이 넓고 사랑스럽고 흥미로운 여성이었다. 신중하지 않은 것 빼고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놀랄 만큼 빼닮았다.

앨리너는 동생의 과도한 감성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대시우드 부인은 그것을 뿌듯해하고 애지중지하였다. 그 둘은 이번에 받은 상처가 격렬해지도록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었다. 처음에 그들을 압도했던 슬픔의 고통을 솔선하여 되씹고 찾아내고 또 몇 번이고 되살려 냈다. 그들은 자기들의 슬픔에 온몸을 던졌으니, 불쌍한 처지를 상기시킬 만한 생각이 났다 하면 그것을 증폭시키기에 바빴고, 앞으로 무슨 위안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앨리너도 깊이 상심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이겨내기 위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녀는 오빠와 상의했고, 올케가 당도하자 그녀를 맞이하였고, 경우에 맞게 대접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자기처럼 처신하도록 일깨우고 참아 넘기자고 격려했다.

다른 누이인 마거릿은 명랑하고 마음씨 고운 소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매리앤만 한 분별력은 별로 없이 언니의 낭만적인 기질만 흠뻑 흡수하였고, 나이도 열세 살로 어렸기 때문에 자기보다 인생을 더 산 두 언니와는 어깨를 겨를 처지가 못 되었다. (P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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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엄마도 참. 쿠퍼를 보고도 생기가 안 돈다면 뭐! 그렇지만 취향의 차이는 인정해야겠지요. 엘리너가 나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거기 개의치 않고 그분과 행복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내가 만약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그렇게 감성 없이 읽는 것을 들으면 내 속은 다 터지고 말았을걸. 엄마, 세상을 알면 알수록 내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영 못 만날 거라는 생각만 더 들어요. 원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이는 에드워드가 가진 모든 미덕을 다 가져야 하지만, 그냥 선량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매력적인 외모와 매너가 받쳐주어야 하지.”

“얘, 네가 아직 열일곱도 안 되었다는 걸 기억해야지. 그런 행복이 오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기엔 너무 어려. 네가 네 어미보다 운이 나빠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메리앤, 네 팔자가 어미 팔자하고 딱 한 가지 점에서만 달랐으면 좋겠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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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브랜던 대령님이 아직은 주변에서 저 친구 곧 가겠구나 하면서 걱정할 만큼 늙으신 건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이십 년은 더 사시겠지. 그러나 서른다섯이면 결혼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하긴.” 하고 엘리너가 말했다. “서른다섯하고 열일곱은 서로 결혼 같은 걸 안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혹시 스물일곱에 미혼인 여성이 있다면 브랜던 대령님이 서른다섯이라는 것이 그 여성과 결혼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안 된다고 생각해.”

“스물일곱 난 여자라면.” 잠시 생각해 보다가 메리앤이 말했다. “새로 사랑은 느낀다거나 불러일으킨다거나 할 욕심을 내지 말아야지. 집에 더 있기가 불편하거나 재산이 얼마 없을 경우에는, 의식주도 해결하고 안정도 얻으려고 아내 자리를 찾아 노친네와 결혼해서 간병인 노릇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분이 이런 여자하고 결혼한다면 뭐 어울리지 않을 것은 전혀 없지. 편의를 위한 계약이니까, 세상 사람들도 그러려니 할 거야. 내 눈에는 그건 결혼도 뭣도 아니지만 말이야. 나한테는 상업적인 교환으로밖에 안 보여. 각자가 서로를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지.”

“너더러 믿으라고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엘리너가 대꾸했다. “스물일곱 난 여자가 서른다섯 살 남자에게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수도 있고 그를 바람직한 반려자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나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네. 브랜던 대령님이 어제 (아주 으스스하고 습한 날이었지.) 어쩌다가 어깨 한쪽이 좀 쑤신다고 했다고 해서 그분과 부인이 늘 병실에 갇혀 지낼 거라는 말 아니냐구.”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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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야망이 전혀 없다는 걸 내가 잘 알지. 자네의 소망은 정말 소박해.”

“대부분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지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완벽하게 행복해지고 싶답니다. 그렇지만 다들 그런 것처럼 제 방식으로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큰 인물이 되는 것으로는 저는 행복해지지 못할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게!” 하고 메리앤이 소리쳤다. “부나 위대함이 행복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위대함은 거의 관계가 없겠지만, 부는 많은 관계가 있지.” 엘리너가 말했다.

“엘리너, 창피하게 왜 그래!” 하고 메리앤이 말했다. “다른 아무것으로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경우에만 돈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 풍족한 생활을 할 능력은 주겠지만, 그 이상으로 무슨 진정한 만족을 제공하지는 못해. 나 자신에 관한 한 말이야.”

“아마도 우린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엘리너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능력과 내가 말하는 부는 아주 닮은꼴이 아닌가 해. 그리고 세상이 이대로인 한 그런 게 없이는 현실적으로 안락하게 살 수 없다는 것에 우리 둘 다 동의하고 있는 셈이고. 네 생각이 내 생각보다 더 고상한 것뿐이지. 자, 네가 말하는 능력이 뭔데?”

“연 수입 천팔백이나 이천 정도. 그것보다 많지는 않지.”

엘리너는 웃었다. “연수 이천이라고! 천이 내가 말하는 부야! 이렇게 될 줄 짐작했어.” (P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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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자주 이런 식의 실수를 저지르는가 봐요.” 엘리너가 말했다. “이런저런 점에서 성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다거나 하는 짓 말이지요. 사람들이 실제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명랑하다거나 진지하다거나, 아니면 똑똑하다거나 멍청하다거나 하면서 멋대로 생각한단 말이죠. 그리고 이런 착각이 왜 생기는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지도 못하겠고. 때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따르기도 하고, 그보다 더 흔하게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듣는 거지요. 스스로 숙고하고 판단할 여유도 없이 말이죠.”

“언닌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엘리너.” 메리앤이 말했다. “각자 판단이야 있지만 이웃들의 판단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이게 늘 언니의 신조였다고 난 확신하는데.”

“아니야, 메리앤, 그런 적 없어. 이해력을 억누르라는 소리가 아니었어. 내가 바꾸려고 해봤던 것은 몸가짐이 전부야. 내 뜻을 혼동해서는 안 되지. 우리가 아는 사람들한테 좀 더 사려 깊게 대하라고 한 적이 많았던 거, 그 죄는 인정하지. 그렇지만 언제 너더러 그 사람들의 감정을 수용하라거나 심각한 문제에서 그들의 판단에 순응하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니?”

“그렇다면 예의를 지키며 살자는 구상에 동생분을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말씀인데.” 에드워드가 엘리너에게 말했다. “전혀 진전이 없나요?”

“정반대지요.” 엘리너가 메리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이 문제에서 내 판단은 전적으로 당신 편이지만.” 하고 그가 받았다. “실제 하는 행동은 동생 편에 훨씬 더 가깝지 않나 합니다. 전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너무 바보스러울 정도로 수줍어서, 타고난 성격이 그래서 쭈뼛거렸을 뿐인데 예의를 안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디 신분이 낮은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게끔 태어난 것이 아닌가 자주 생각했답니다. 상류층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로 편하지가 않습니다!” (P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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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달이 지나봤자 별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습니다.”하고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대시우드 부인은 그의 이런 의기소침을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곧 있었던 작별의 자리서 모두에게 고통을 가외로 주었고, 특히 엘리너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걸 진정 시키는데 상당한 노고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고, 그가 떠나는 것에 모든 가족이 실제 이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는 말자고 마음을 다졌다. 그래서 메리앤이 비슷한 상황에서 자기의 슬픔을 한껏 부풀려둘 목적으로 기가 막히게 써먹은 수법, 즉 입을 꾹 다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으려고만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취한 수단은 목적만큼이나 달랐고, 각각 나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도 잘 들어맞았다.

엘리너는 그가 떠나자마자 자기의 그림용 책상에 앉아서 종일 바쁘게 작업하였다. 일부러 그의 이름은 언급하려고도 회피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여느 때와 거의 마찬가지로 가족의 통상적인 일에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이런 처신으로 슬픔을 줄일 수는 없었다 해도 최소한 그것이 불필요하게 커지는 것은 막았다. 이러니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녀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메리앤은 자기의 행동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와는 정반대인 언니의 행동도 그리 잘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자제라는 문제는 그녀를 아주 쉽게 정리했다. 감정이 강렬하면 자제란 불가능한 것이고, 담담한 경우에는 자제가 무슨 미덕이냐는 것이었다. 막상 그리 생각하게 되니 얼굴이 붉어졌지만, 언니의 애정이 실제로 담담하다는 것을 그녀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반면 자신의 애정이 강렬하다는 것은 뚜렷이 입증한 셈이었다. 언니를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 속상하긴 했지만 그런 언니를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으니까. (P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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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가 얼마간 관찰해보니 그는 그런 척해서 그렇지 워낙이 본성이 나쁘거나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고 짐짓 그러는 것 같았다. 그 말고도 많은 남성들이 그렇듯이, 미모를 우선시하는 터무니없는 편견 탓에 자기가 매우 어리석은 여자의 남편이 되고 말았음을 뒤늦게 알게 되어 약간 시큰둥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실책은 너무 흔하기 때문에 분별 있는 남자라면 두고두고 속을 끓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남보다 두드러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모든 사람을 경멸적으로 대하고 눈앞의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보다 잘 나 보이고 싶은 욕망 말이다. 동기야 너무 흔해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몰상식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평판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자기 아내 외에는 누구한테도 호감을 살 것 같지 않았다. (P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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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모종의 언약이 월러비와 메리앤 사이에 존재했다는 것을 그녀는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월러비가 거기에 지쳤다는 것도 명백해 보였다. 왜냐하면 아무리 메리앤이 아직도 자신의 소망을 키우고 있다 할지라도, 그녀로서는 이런 행동이 무슨 종류든 실수나 오해의 탓이라고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변심만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만약 당황스러워하던 표정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분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그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자신의 못된 짓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고, 이렇다 할 무슨 계획도 없이 처음부터 동생의 애정을 가지고 장난쳤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인간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옆에 없다 보니 사랑이 약해졌거나, 편의를 쫓아 그 사랑을 억누르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예전에 그런 사랑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그녀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메리앤이 그렇게 불행한 만남으로 이미 겪고 있는 아픔이라든가 동생에게 앞으로 닥쳐올 것이 뻔한 한층 더 가혹한 아픔에 대해서 그녀는 깊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는 나았다. 아무리 장차 갈라설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에드워드를 언제나처럼 존중할 수 있다면, 그녀의 마음은 꿋꿋하게 버텨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을 심화시킬 상황이 함께 들고일어나 메리앤의 슬픔은 고조되었으니, 월러비와의 최종적인 이별, 즉각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이 일어났던 것이다. (P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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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격정이 지나가 버리자, 좀더 꿋꿋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엘리너, 난 잔인하게 이용당했어. 그렇지만 월러비한테서가 아니야.”

“얘, 메리앤, 그 사람 자신이 아니면 누구겠니? 누가 그 사람을 교사할 수 있었겠니?”

“그이 자신의 마음보다는 온 세상에 의해서지. 난 그이의 본성이 나빠서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고 믿기보다는 내가 아는 모든 인간들이 작당을 해서 나를 아주 형편 없어 보이게 만든 것이라고 믿겠어, 차라리. 누군지 몰라도 그이가 편지에서 말한 이 여자든 아니면 어느 누구라도, 간단히 말해서, 언니, 엄마, 에드워드만 제외하고는 누구라도 얼마든지 잔인하게 나를 중상모략하는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거야. 언니네 셋을 제외하고서, 나쁜 짓을 저지를 의심이 안 가는 사람이 월러비 말고 어디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어? 내가 그이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는데?”

엘리너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고, 다만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혐오스러운 적(敵)이 누구든 간에, 얘, 그자들의 악의에 찬 승리를 헛것으로 만들어버리자꾸나. 너 자신이 결백하고 신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높은 기상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어. 가져 마땅한 장한 자존심이 그런 악의를 물리칠 수 있는 법이지.”

“아냐, 아냐,” 하고 메리앤이 소리쳤다. “나만큼 비참해지면 자존심도 뭐도 없어져. 내가 비참하다는 걸 누가 알든 상관 안 해. 이런 모습을 보고 세상 누구라도 승리감을 만끽할 수 있을 거야. 엘리너, 엘리너, 별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자존심이 있고 독립적일 수도 있어. 모욕에 맞서기도 하고 아니면 치욕을 갚아주기도 하고. 그러나 난 못 해. 난 느껴야만 해. 비참해야만 해.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그런 의식을 즐기라고 하지.”

“그러나 어머니와 또 나를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더 그러고 싶긴 해. 그러나 내가 이렇게 비참한데 행복한 체해야 하다니.... 아! 누가 그걸 요구할 수 있어?”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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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하고 안면을 틀 생각을 즉시 버리기로 작심했어요. 인사한 적이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고. 쿰 마그나가 클리블랜드에서 그리 가깝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아요. 뭐, 별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문도 못 하니까요. 너무 미워서 다시는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말할 거예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파머 부인이 나머지 동정심은 다가오는 결혼의 세세한 내용을 모두 힘닿는 대로 확보해서 엘리너한테 전하는 일에 할애되었다. 그녀는 어떤 마차 제조공의 작업장에서 새 마차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어떤 화가가 월러비 씨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가게에 가면 그레이 양의 옷들을 볼 수 있을지를 곧장 말해 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떠들어대며 친절을 베푸는 것이 엘리너의 가슴을 종종 답답하게 만들었다면, 이 일에 대한 레이디 미들턴의 태평하고 예절 바른 무관심은 그녀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친지들 사이에서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확실하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호기심에 차서 세세한 부분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동생의 건강에 대해서도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그런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어떤 자질이든 때로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본래의 가치 이상으로 치켜세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때로 그녀는 쓸데 없는 애도에 질릴대로 질려서, 좋은 품성보다는 좋은 예절이 사람을 편하게 하는 데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P283-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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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너하고 어머니한테는 사실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 자주 났단다.” 엘리너가 덧붙였다. “그리고 두어 번 시도도 했었고, 그러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내 말을 믿게 하진 못했을 거야.”

“넉 달이나! 그렇지만 언닌 그일 사랑했잖아!”

“그래. 그러나 내가 그분만 사랑한 것은 아니지. 다른 사람들의 안녕도 나한텐 소중했으니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다 알리지 않고 지냈던 거야. 그게 나한텐 좋았고. 이젠, 별 감정 없이 거기에 대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할 수 있어.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지는 말았으면 해. 내가 말하잖니, 나부터가 더 이상 별로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이야. 날 지탱해 주는 건 많이 있어. 나 자신이 신중치 못하게 처신해서 실연을 당한 것은 아닌 셈이고, 실망감을 더 키우지 않고 버틸 만큼 버틴 거지. 에드워드가 본질적으로 그릇된 처신을 한 건 아니야. 나는 그이가 아주 행복하길 바라. 그리고 그이는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지금으로서야 회한도 없지 않겠지만 결국에는 잘될 것이 틀림없어. 루시도 분별이 없지 않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해서 만사가 형통할 거라고 본다. 그리고 메리앤, 사랑은 일편단심이라는 생각이 매력적이긴 해도, 행복이 어떤 특정한 사람한테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말은 일리가 있긴 해도,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글쎄, 맞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아. 에드워드는 루시하고 결혼할 거야. 그인 인물로나 이해력에서나 그래도 절반 수준은 넘는 여성하고 결혼하는 셈인데, 세월이 가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그 여자보다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다는 것도 슬슬 잊어버리게 되겠지.”

“언니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하고 메리앤이 말했다. “정말 소중한 걸 상실하고서도 쉽게 다른 무엇으로 메워버린다면, 언니의 결단이라든가 자제는 어쩌면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닐지 몰라. 그 정도라면 나라도 더 납득이 갈 만한 거니까.” (P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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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인물과 재능을 겸비한 이에 활달하고 정직한 성품까지 타고났고 다정다감한 기질을 가지고 있던 한 남자가 너무 이른 독립과 뒤따른 게으름, 방탕, 사치의 습관으로 말미암아 그 정신, 성격, 행복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세상이 그를 무절제에 빠뜨리고 허영에 물들게 하였으며, 무절제와 허영이 그를 냉혹하고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허영심이 무절제를 제치고 죄스러운 승리를 구가하는 와중에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면, 무절제 혹은 그 소산인 궁핍이 나서서 그 사랑을 희생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를 악으로 이끈 그 각각의 그릇된 성향이 마찬가지로 그를 벌로 이끌어갔다. 그는 명예에 맞서, 감정에 맞서, 모든 더 나은 이해관계에 맞서 외적으로는 그 사랑을 떨쳐냈지만, 이제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그 사랑이 그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아무런 가책도 없이 자기 동생을 비참한 상태에 빠뜨리고 떠나 얻어낸 그 관계가 이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불행의 근원이 되어버리고 만 꼴이었다. 수 분간 이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데, 그녀와 마찬가지의 고통스러운 상념에서 깨어난 월러비가 갈 준비를 하려고 벌떡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군요. 전 가야겠습니다.” (P43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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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함께 멀리까지 산책 나가자. 목초지 끝에 있는 농장까지 걸어가서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봐야지. 우리 바턴크로스에 있는 존 경의 새 경작지로, 그리고 애비랜드로 걸어가자고. 그리고 오래된 수도원 폐허에도 자주 가서 터가 어디까지였는지 한번 답사해 보자. 우린 정말 행복해질 거야. 여름을 행복하게 날 거야. 6시 넘어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고, 그때부터 정찬까지 시간을 쪼개서 음악과 독서에만 바칠 거야. 계획을 다 짜놓았는데,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어. 우리 집 서재는 내가 샅샅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일거리 정도밖에 안 되기는 해. 그렇지만 파크에는 읽을 만한 작품들이 많이 있어. 그리고 좀 더 최근에 나온 작품은 브랜던 대령한테서 빌릴 수 있겠고. 하루 여섯 시간만 독서하면, 열두 달이면 내가 지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식을 많이 쌓게 되겠지.”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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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처지는 별로 닮은 점이 없었어.”

“처신보다야 처지가 더 닮았지. 엘리너 언니, 언니 판단력에 따르면 비난해야 하는 일을 괜히 나를 생각해 준다고 옹호하려 하진 마. 아프니까 깊이 생각을 하게 되더라. 병 때문에 진지하게 한번 사색해 볼 여유도 생기고 침착도 찾게 되었어. 말을 할 정도로 회복되기 오래전부터, 난 사색할 힘은 완벽하게 얻었지. 과거를 생각해 보았어. 지난 가을 그이하고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이래로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켜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경솔한 짓의 연속이었고 남에 대해서는 야박한 짓의 연속이었어. 나 자신의 감정이 내 고통을 예비했던 것이고 그런 고통을 겪으며 꿋꿋하지 못했던 탓에 거의 무덤으로 갈 뻔했던 거야. 내 병은 자신이 자초했다는 걸 나도 잘 알았지. 건강을 너무 소홀히 해서 그 당시에도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다니까. 내가 죽었다면..... 그건 자살 행위가 되었을 거야. 난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 몰랐어. 그 고비를 넘겼을 때까지 말이야. 그러나 이런 사색의 선사한 감정을 간직한 채 내가 회복된 것에 난 경이를 느껴. 너무나 살고 싶고, 내 하느님한테 보속할 시간을 얻고 싶은 마음이 당장은 나를 죽이지 않았구나 하는 경이 말이야. 내가 죽었다면, 내 간호원이자 친구인 언니를 얼마나 둘도 없는 비참함 속에 몰아넣게 되었을까! 최근에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하면서 안달복달했고, 마음속에 어떤 불평불만이 가득 차 있었는지를 다 알고 있는 언니가 아니냐 말이야! 언니의 기억 속에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되었을까! 어머니도 그렇지! 언니가 어떻게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표현도 못 하겠어.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보였어. 모두가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어. 제닝스 부인의 친절, 끊임없는 친절을 나는 배은망덕한 경멸로 갚아주었지. 미들턴 부부, 파머 부부, 스틸 자매, 그냥 하는 모든 사람들한테도, 난 무례하고 부당했지. 그들의 미덕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걸고, 그들의 관심에 대해서는 짜증을 내면서 말이야. 존한테, 페니한테..... 그래, 그 사람들한테조차, 자격이야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받아야 할 만한 대접조차 해주지 않았어. 그러나, 언니...... 누구보다도 언니가, 어머니보다도 더, 나 때문에 쓰라림을 겪었지. 내가, 오직 나만이 언니의 마음과 그 슬픔을 알았는데. 그렇지만 그게 나한테 무슨 영향을 주었지? 언니나 나한테 도움이 될 만한 연민이라고는 없었던 거야. 언니의 모범이 내 앞에 있었어. 그런데 무슨 소용이 있었어? 내가 언니와 언니의 평안에 대해서 더 생각이라도 했어? 내가 언니의 인내를 흉내 내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언니 혼자서 처리하게 팽개치든 정중한 예의라거나 특별한 감사라거나 그런 일거리들을 분담해서 언니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었어? 아니지.... 언니가 불행하다는 것을 안 다음에도 언니 마음이 편하다고 믿었던 때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았지, 의무라거나 우정을 발휘해야 할 때마다 달아나 버리기로는 말이야. 세상에 혼자서만 슬픔을 짊어진 사람처럼 굴면서, 나를 버리고 망친 그 마음만을 아쉬워하고, 언니를 나 때문에 비참한 상태로 내버려두었던 거지. 말로는 한없는 사랑 어쩌고 하면서 말이야.”

여기서 청산유수처럼 빠르게 쏟아지던 그녀의 자책은 멈추었다. 엘리너는 입에 발린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동생의 솔직함과 참회가 받아 마땅한 그런 칭찬과 지지를 즉각 던졌다. 메리앤은 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언니는 너무 착해. 앞으로 꼭 내 말대로 할 테니 지켜봐 줘.... 난 감정을 절제하고 성격도 고칠 거야. 더 이상 내 감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야. 이제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 살래. 언니, 어머니, 그리고 마거릿이 이제부터는 나의 전 세계가 될 거야. 내 사랑은 우리끼리만 나눌 거고. 식구들이나 우리 가정을 떠나서 다른 데로 갈 생각은 이제 손톱만큼도 품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하고 섞인다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겸손하고 착해졌고, 예절을 지킨다거나 하는 인생의 작은 의무들을 다소곳하고 참을성 있게 해낼 수 있다고 말이야. 윌러비에 대해선.... 곧, 아니 아주 그이를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을 테지. 그이에 대한 추억은 아무리 여건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져도 지울 수가 없어. 그러나 다스려지긴 할 거야. 종교에 의해서, 이성에 의해서, 늘 무언가를 함으로써 통제가 되겠지.” (P458-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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