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그림La Tabla De Flandes> 1994년
소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짐 맥브라이드 감독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으로 1994년 영화<비밀의 그림La Tabla De Flandes>으로 제작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신은 체스 두는 사람을 움직이고, 체스 두는 사람은 말을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 게임을 시작한 신 뒤의 신은 누구인가?“
--호르헤 루이스 부르헤스
봉인된 봉투는 하나의 수수께끼나 다름없다. 그 속에 예측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담고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좌측 하단에 연구소의 이름이 인쇄된 그 봉투는 크고 두툼한 마닐라산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훌리아는 한 손으로 붓과 물감과 광택제 사이에서 칼을 찾는 동안, 다른 손으로 가만히 그 봉투의 무게를 헤아려 보고 있었지만 그 내용물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게 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사실 훌리아는 봉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봉투에서 내용물인 엑스레이 사진들을 끄집어내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기대감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테이블 위에 엑스레이 사진들을 펼쳐 놓는 순간, 정확히 말해서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 자신의 손으로 복원 중이던 작품 <체스 게임>이 단순한 예술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림 속에 글자가 감추어져 있다니. 하긴 그녀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난 6년 동안 골동품이나 고서 혹은 그림 등의 예술품,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림을 복원하면서 누군가 가 원작에 손을 대거나 덧칠 한 것을 비롯해서 심지어 위작을 발견한 것도 적지 않았는데, 이번처럼 글자가 감춰진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담배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꾸깃꾸깃 구겨진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동안에도 엑스레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5세기 플랑드르 화가의 그림은 30X40 크기의 뢴트겐 필름을 통해 그리자유 기법을 바탕으로 한 밑그림과 그 위에 덮인 색상의 세세한 층위, 패녈의 구조물인 세 조각의 판을 붙인 접합부와 나뭇결, 화가의 독특한 선과 색감에 의한 붓 터치를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맨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고딕 문자까지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QUIS NECAVIT EQUITEM.
Quis는 <누구>라는 뜻의 의문 대명사, necavit는 <죽이다>는 뜻을 지닌 neco의 파생어, equitem은 <기사>를 뜻하는 eques의 대격 단수.... 훌리아는 사전 없이 그 문장을 번역할 만큼 라틴 어에 정통한 편이었다.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그런데 라틴 어 quis는 의문 부호와 함께 사용되자 신비한 분위기를 띠었다.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그녀는 그림 속에 감춰진 문장을 중얼거리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림 속에 수수께끼를 감춰 두고 그 위에 물감으로 덮은 이는 누구였을까? 그녀는 탁자 위에 흩어진 엑스레이 사진과 복사물들을 정리하는 한편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화가 자신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었을까? 누가 되었든, 만일 어떤 의도가 있었다면, 그자는 수수께끼를 숨겨 놓고 무려 5백 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풀리게 되어 있어. 그녀는 짐짓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손에 걸려들었으니까. (P9-11)
그녀는 <체스 게임>의 복원이 시장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할 때 합당한 대가를 안겨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불과 수년 사이에 미술관이나 골동품 소장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예술품 복원가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철저하고 엄격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재능 있는 화가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로서 원작을 대하는 진지함과 그런 부류들 사이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윤리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복원가로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작업 사이에 갖게 되는 정신적인 괴리나 보수와 혁신 사이에 제기되는 논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켜 나갔다. 예술 작품의 복원이란 때때로 심각한 손상을 감수하지 않으면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없다는 것과 작품의 산화나 색상과 유약의 변질은 물론이고 작품의 결점, 덧칠, 손질 등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작의 일부로 변하는 부수적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의뢰된 그림들이 본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과욕으로 인해 엉뚱한 빛과 색상으로 바뀌는 --세사르는 그것을 <화장을 고친 창녀>라고 불렀다-- 경우 없이 그녀의 손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에 배어 있는 세월의 흔적까지 작품의 일부로 대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결과였다. (P19-20)
훌리아는 알바로 오르테가를 보는 순간 자신의 직업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적어도 그의 의상과 외모에서 뒷받침되었는데, 그는 영국산 교직천 재킷에다 편물 타이를 맨 옷차림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40대 나이의 다정다감한 표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훌리아는 강의실에 들어오는 알바로를 쳐다보느라 그의 수업 --그날 강의는 <예술과 인간>이었다-- 이 귀에 들린 것은 거의 15분이나 지난 뒤였다. 수업 내내 거의 정신이 없었다. 알바로가 다음 주 수업을 예고하며 강의를 끝내자 그녀는 학생들이 복도로 밀려 나오는 틈에 서 있다가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사실 그녀는 그 순간에 이미 두 사람의 만남이 스승과 제자 관계라는 틀에 박힌 고전적 플롯의 바탕 위에서 반복되는, 그다지 독창적이지 못한 스토리로 전개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의 만남은 그가 문 옆에서 그녀에게 처음으로 웃음을 던져주고자 몸을 돌리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의 만남은 그 결과를 따져 보기 전에 불가피한 어떤 것, 즉 그녀가 학교에서 저 그리스의 천재인 소포클레스의 복잡하고 훌륭한 가계사를 번역할 때부터 한번은 부딪쳐 보고 싶어했던 달콤하고 고전적인 fatum(신탁)이나 흔한 <운명>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P28-29)
QUIS NECAVIT EQUITEM. 그녀가 그림의 표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글자가 감추어진 곳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 그림 속에 감춰져 있던 글자들이 어슴푸레한 스탠드 불빛의 여광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그녀는 불길한 느낌으로 와 닿는 그 구절을 생각하면서 RUTGIER AR. PREUX라는 글자 부분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로제 드 아라, 아니 로제 드 아라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설사 그것이 그의 이름이 아닐지라도 그 구절이 그를 가리키는 것만큼은 확실하지 않는가. 이것은 일종의 수수께끼일까?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에서 체스 게임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녀는 어수선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단지 체스 게임을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아. 아니야. 어쩌면 이것은 체스 게임 이상의 어떤 것을 다루고 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차츰 혼란에 빠져 들고 있었다. 마치 다루기 힘든 유약을 벗겨 내기 위해 메스를 들이댈 때 느끼게 되는 불쾌감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떼서야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다음 목덜미를 감사 안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애를 썼다.
잠시 후 훌리아는 눈을 뜨고 그림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맨 먼저 머문 곳은 심각한 표정으로 체스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기사였다. 보면 볼수록 온화하고 매력적인 그의 용모는 화가가 그 인물의 주위 배경을 위엄 있는 후광으로 묘사한 덕분에 더욱 돋보였다. 그런데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는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림에서 기사가 위치한 곳은 정확하게 황금 분할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황금 분할점. 그것은 비트루비우스 시대 이후부터 고전적인 화가들이 적용하던 회화 법칙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 법칙에 의거하면 황금 분할점에 위치할 인물은 신분이나 지위를 고려할 때 기사가 아니라 오스텐부르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되어야 하는 게 옳았지만 대공은 좌측으로 밀려나 있었다. 아울러 그것은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법칙이었지만 베아트리스 역시 배경의 우측이 아닌 뒤편의 창문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므로 그 그림에서 베일에 휩싸인 체스 게임을 주재하는 인물은 대공 부부가 아니라 로제 드 아라로 추정되는 RUTGIER AR. PREUX로 보아야 하는 모순을 낳고 있었다. 더욱이 로제 드 아라는 반 호이스가 그 그림을 그리던 당시만 해도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P50-51)
“믿어지지 않구려.”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가 있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날마다 그 그림을 쳐다보며 살아왔소. 하루도 빠짐없이 들여다보았건만 그런 얘기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오.” 노인의 눈길이 벽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반 호이스가 걸려 있었던 텅 빈 공간이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러니까, 반 호이스가 수수께끼를 좋아했다......”
“그런 것 같아요.” 훌리아가 그 말을 받았다.
노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한쪽 구석에서 여전히 바흐의 음악을 흘러 보내고 있는 낡은 전축을 가리켰다.
“그것은 바흐도 마찬가지였소.”
돈 마누엘의 설명에 따르면, 예술 작품에 기이한 게임들처럼 미처 예기치 못한 비밀들이 감추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듣고 있는 “음악의 헌정”이 바흐의 음악에서 10개의 카논으로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작품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에게 일련의 수수께끼들을 제시하는 작곡가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바흐가 활동하던 시대에 자주 등장하던 음악 형태이기도 했다. 그 당시 작곡가들은 하나의 테마를 바탕으로 곡을 쓰지만 그 속에 수수께끼 같은 지침을 덧붙임으로써 나중에 그 음악이 다른 음악가의 손에서 또 다른 형태로 다루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던 것이다. 노인의 말처럼 음악도 일종의 게임이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듣고 보니 재미있네요.” 멘추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기왕 나온 얘기니 조금만 더 할까 하오.”
노인은 화두가 음악으로 흐르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바흐는 많은 예술가들처럼 장난기가 없지 않는 작곡가였다. 그는 끊임없이 놀랄 만한 음악적 장치, 즉 음계와 가사, 기발한 변주, 곡의 삽입과 생략 등을 통해 음악을 듣는 청중들을 상대로 장난을 쳤다. 이러한 그의 재능은 특히 위대한 유머 감각에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6개의 음을 위한 곡들 중에서 가장 높은 2개의 음에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넣기도 했다. 바흐와 똑같은 경우는 음악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학자이자 작가였고, 대단한 체스 애호가였던 루이스 캐롤은 자신의 시에 종종 아크로스틱을 도입하곤 했었다.
“어떻소?” 노인은 마치 학생들을 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이렇듯 음악은 물론이고 시나 그림에는 원작자가 짜낸 교묘한 방법이나 장치들이 숨겨져 있는 거요.”
“그 점에 대해선 저도 동의해요.” 훌리아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현대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작품들 속에 감춰진 메시지를 풀 열쇠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거죠. 오래된 예술품일수록 더욱 그렇고요.” 훌리아는 그쯤에서 말을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길은 노인의 시선이 멈추다 간 빈 벽에 가 있었다. “이번만큼은 <체스 게임>을 보다 진지하게 검토했으면 좋겠어요.”
노인은 휠체어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길은 훌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새로운 게 나타나는 대로 꼬박꼬박 일러 주구려. 이 늙은이에게 그것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을 테니까.” (P80-82)
“이 그림에 새겨진 글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Quis necavit equitem>, 즉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라는 문장을 로제 드 아라의 죽음이나 암살과 연관시켜 생각했단다. 그렇지......? 하지만 이 <기사>가 사람이 아닌 체스의 <기사>, 다시 말해서 오늘날까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는 체스 게임의 <말>인 <나이트>의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단다.” 그는 그쯤에서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서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하는 문장은 체스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린다면 <누가 기사를 잡았는가>, 혹은 <누가 말을 잡았는가>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겠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각기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맨 먼저 입을 연 쪽은 멘추였다.
“사람을 불러 놓고 한다는 얘기가 겨우 그거였어?” 그녀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서 여태 공연한 짓을 했단 말이잖아.”
“언니, 꼭 그런 것만은 아냐.” 훌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미스터리는 여전히 남아 있거든. 그렇죠?” 그녀는 세사르에게 동의를 구하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제 드 아라가 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살해되었다는 거야.”
훌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림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반 호이스가 그 그림을 그린 게 로제 드 아라가 살해된 지 2년 후라는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문장이었다. Petrus Van Huys Fecit me, anno MCDLXXI(1471년 피터 반 호이스 제작). (P90-91)
“물론 단서는 있겠지.” 한참만에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단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거든.” 그는 체스를 두는 인물들과 체스판을 비추고 있는 그림 속의 볼록 거울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우리는 어떤 물체와 그것을 비추는 거울의 이미지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단다. 하지만 이걸 봐.....” 그는 그림에 그려져 있는 볼록 거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보이지? 볼록 거울에서 보듯 이 실제 모습은 전도(顚倒)되어 있단다. 그것은 체스도 마찬가지야. 체스판 위에서는 모든 게 거꾸로 보일 수가 있거든.”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 멘추가 답답하다는 듯이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 머리는 그런 얘기를 들을 만큼 복잡하지 않아. 차라리 난 술이나 한잔해야겠어.” (P103-104)
“무례하더라도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그는 먼저 격식을 놓치지 않았다. “두 분이 말씀하시는 그림 속의 체스 게임과 중세의 살인 사건 이야기는 내가 듣기에 황당한 느낌으로만 들리는군요...... 좋아요. 두 분 말씀대로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렇지만 그게 나 같은 사람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두 분 앞에 굳이 신분을 밝힌다면, 난 한 회사의 경리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무원에 불과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체스를 둔다는 사실이오.” 세사르는 호의적인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런가요?” 체스 플레이어는 다시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도전적인 태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체스를 두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난 하필 내가 왜.....”
“다들 당신이 최고라고들 하잖소.”
순간, 체스 플레이어가 세사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이 기이하게 바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훌리아는 그의 표정과 심중을 읽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당신들이 얘기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최고? 좋습니다. 그러나 최고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최고라는 것은 머리칼이 금발일 수도 있고, 발이 평발일 수도 있는 경우와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특별하게 증명해야 할 그런 것이 아닙니다.> (P120-121)
훌리아는 그때서야 무뇨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난 체스가 그저 그런 게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녀는 스스로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기껏해야 도미노나 파치지 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어려운 규칙을 지닌 게임, 혹은 상당한 집중력과 지능을 요구하는 게임으로 말이지, 체스 플레이어 무뇨스는 반 호이스에 의해 재현된 거울, 방, 창문 등의 공간 --화가의 기발한 창조성으로 인해 훌리아가 경험했던 아찔한 공간-- 에 대해, 그리고 그 그림에 숨겨진 사건에 대해 알 턱이 없었지만 그 그림에 나오는 체스 게임만큼은 전혀 낯설지 않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훌쩍 건너뛸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말의 위치를 포착하고 그것을 자신의 게임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체스 게임”에 몰두하자 이전까지 보여 주던 어색함이나 당혹감 혹은 과묵함을 잊은 채 자신감과 냉정함이 번득이는 체스 플레이어의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다. 역시 이 남자는 --세사르의 지적처럼-- 체스의 세계에 안주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인물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이 그림의 체스 게임을 거꾸로 두다 보면 결국은 첫 수까지 도달하는 게 가능하단 말씀인가요?” 훌리아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체스 플레이어는 마치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첫 수까지는 몰라도.... 글쎄요, 적어도 마지막 부분의 몇 수만큼은 재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마치 새로운 각도에서 그림을 쳐다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화가는 그걸 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는 세사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가의 노림수, 바로 그거요.” 세사르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누가 기사를 잡았느냐, 그걸 알고 싶은 거요.”
“체스판 밖에 나온 백 기사를 두고 하는 말씀이군요.” (P128-129)
“그렇게까지 멀리 가고 싶진 않습니다. 아가씨, 당신은 피해자의 두개골이 함몰되기 전에 피해자를 만났어요. 그것도 불과 몇 시간 전에 말이오.”
“방금 몇 시간 전이라고 했나요?” 그녀의 입장에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때가 언제죠?”
“사흘 전이오. 정확히 수요일. 오후 2시에서 자정 사이였소.”
“그건 불가능해요.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군요.”
“착오?” 돌연 형사 반장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내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럴 가능성은 없소. 그건 감식을 맡았던 부검의의 정확한 소견이니까.”
“틀림없어요. 그것도 무려 24시간의 오차가 있어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분은 목요일. 그러니까 내가 그분을 만난 다음날, 자료를 보내 왔으니까요.”
“어떤 자료였습니까?”
“복원 작업에 관계된 참고 자료였어요.”
“그걸 우편으로 받았습니까?”
“택배 회사 직원이 가져왔더군요. 저녁 무렵이었어요.”
“그럼 그곳 이름도 당연히 기억하시겠군요.”
“<우르르 익스프레스>. 정확히, 목요일 오후 8시경이었어요..... 자, 이제 방금 하신 말씀은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형사 반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미덥지 못한 눈치였다.
“말이 되지 않소. 목요일 저녁이라면 피해자는 이미 24시간 전에 죽었다는 말인데 서류를 보내다니..... 흠, 그렇다면......” 그러나 형사 반장은 그 부분에서 말을 끊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 생각해 보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피해자 대신에 그 일을 했다고 봐야 하겠군.” (P141-142)
논리와 비논리, 이성과 비이성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사고들이 그녀의 뇌리 속에서 어지럽게 교차되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중간자의 입장에 서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자신의 상상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비약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인, 그래, 우선 해야 할 일은 확인을 하는 거야.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은 뒤에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미지의 인물은 여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훨씬 좁혀져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스멀스멀 등 뒤로 안겨 들고 있었다. 어쩌면 알바로는 사고가 아니라 살해된 것일지도 몰라. 자료를 보낸 자, 그자가 바로 알바로를 살해한 자일지도 몰라. 순간 어떤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가고 있었다. “체스 게임”. 알바로. 훌리아, 살인자로 추정되는 인물...... 아! 나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선 거야.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팔짱을 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다시 경찰서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오히려 자신을 따라오는 미지의 인물에게 나를 잡아가라고 순순히 다가서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구원의 녹색 등을 켠 빈 차는 보이지 않았다. 입천장이 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차분해야 돼.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바보야, 이럴수록 차분해야 한다고. 그녀는 마침내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P148)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다. 체스 플레이어는 <일단 불가능한 것들이 배제되면 남아 있는 것들은 어쩔 수 없이 확실해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를 정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1.흑이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2.체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열 개의 흑 말들 중에 아홉 개는 움직일 수 없었다.
3.움직일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흑녀, 즉 흑 여왕이다.
4.흑 여왕의 가능성 있는 움직임 네 개 중에서 셋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흑녀가 움직였던 유일한 가능 행마는 b2에서 c2로의 이동이었다. 아울러 그 움직임은 b5와 b6에 위치한 백 성장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주 분명해요.” 훌리아가 대답했다.
“비로소 우리는 역순 체스 게임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다음 행마,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거꾸로 두고 있으니까 그 이전 행마를 볼까요?”
두 사람은 그림을 통해, 흑 여왕이 c2로 가기 전에 아직 b2에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P171-172)
훌리아는 베네치아 거울과 그림 속의 또 다른 거울 속에서, 현실과 그림의 경계를 흐트러 놓고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체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말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하는 한편, 한 손을 그림 속의 탁자와 녹색 천 위에 얹다시피 기댄 채 로제 드 아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플랑드르 산 벨벳을 걸친 오스텐부르크 대공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마주치고 있었다.
벽시계가 새로운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 3시였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쳐다보던 훌리아는 주위를 떠돌고 있는 환상을 지우기 위해, 전구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하나둘씩 들어오면서 현실의 시간과 공간도 예전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래, 훌리아는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정리하는 거야. 앨리스보다는 웬디가 되는 게 훨씬 낫잖아. 그러기 위해선 다시 눈을 감고 눈을 크게 뜨고서 반 호이스의 그림을 단지 5백년 전에 그려진 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연필과 종이를 집어 드는 거야. 그래서 자꾸만 두려움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는 엉뚱한 환상들보다는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과 정황들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거야. 이윽고 훌리아는 식어 버린 커피를 입 속으로 털어 넣으면서 연필을 들었다. (P209-210)
노화가는 덧칠을 하는 도중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놀림이 지나가는 캔버스의 표면 위로 촛불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피곤한 눈을 비볐다. 그의 시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은 해가 짧고 빛이 적은 겨울에 노화가가 자신의 유일한 소일거리인 체스를 두며 한가로운 휴식을 만끽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까지 앗아 가고 있었다. 노화가의 체스 상대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친구인 로제 드 아라였다. 생전에 로제는 그의 지위와 위치에도 불구하고 몸소 화가의 아틀리에를 찾아왔고, 유제와 진흙과 붓 등의 도구와 채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 사이에 앉아 화가와 체스를 두었다. 노화가가 아는 로제 드 아라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로제는 반상의 싸움에 몰두하면서도 예술과 사랑과 전쟁을 테마로 하는 이야기들을 나눌 줄 알았다. 아울러 로제는 어떤 무시무시한 전조처럼 여겨지는 말, 즉 체스란 악마의 목구멍을 향해 기꺼이 들어갈 줄 아는 사람들의 게임이라는 표현을 되풀이하곤 했었다.
이윽고 작업은 끝났다. 젊었을 때만 하더라도 피터 반 호이스는 짧은 기도와 함께 마지막 붓질을 끝냈다. 그것은 새로운 작품이 끝났다는 감사의 기도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그의 머리카락이 은회색으로 바뀌고 안구가 건조하게 변한 것처럼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노화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하며 용제가 든 항아리에 붓을 넣고 작업용 가죽 앞치마에 손가락을 문질러 닦았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이어 그는 촛대를 높이 쳐들고 뒤로 물러나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천한 저는 이 그림에 어떤 긍지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체스 게임”을 완성한 노화가는 그것이 자신의 주군인 대공이 부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모든 것, 즉 삶과 죽음, 사랑과 배반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기에 화가 자신이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보다도 오래 살아남을, 아니 영원히 살아남을 역작이었던 것이다. 순간 플랑드르 노화가는 자신의 가슴속에 뜨거운 불멸의 열기가 타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P223-224)
“그건 아닙니다.” 무뇨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방금 상대를 비열한 인간이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표현 역시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거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난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봐왔던 상황을 객관적인 체스의 움직임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 한 말이 맞았는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흐릿한 포도주 --그는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잔 표면을 스치듯 문질렀다. “나는 체스를 두는 스타일이 당사자의 인간성을 반영한다고 봅니다만..... 아마 이 이야기는 언젠가 했던 것 같군요.”
“요 며칠 사이에 그 살인자의 인격을 충분하게 검토하셨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훌리아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자의 인간성에 대해 잘 알게 되었나요?”
무뇨스의 입술 주위로 언뜻 공허한 웃음이 스쳐 갔다. 그러나 훌리아는 보는 사람에 따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그 웃음이 심각한 상황에서 나오는 버릇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미소가 생각보다 심각할 때 나오는 표정임을 직감했다. 그녀가 아는 한 그는 남을 비웃거나 빈정거릴 타입이 아니었다.
“체스를 두는 사람에게도 유형이 있습니다.” 어느덧 그의 시선은 레스토랑의 벽 너머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스타일은 물론이고, 체스를 두는 동안에도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이나 매너를 갖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슈타이니츠는 체스를 두면서 바그너를 흥얼거렸고, 모피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절대로 상대편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어떤 플레이어는 라틴 어를 중얼거리거나 스스로 만들어 낸 은어를 지껄이기도 합니다. 듣는 사람이야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긴장을 풀면서 방심하지 않으려는 효과적인 방법인 셈이죠. 아울러 그러한 특징은 결정적인 순간만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거나 움직이기 전에도 종종 나타납니다.” (P262-263)
“그 말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침내 뮤뇨스가 입을 열었다. “우주는 논증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수학의 정수들이나 체스의 조합들만 하더라도.....”
“듣자 하니 젊은 양반은 모든 게 논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려.” 노인은 불쑥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보다시피 이 모양이지만 한때 음악을 하던 사람, 아니 지금도 음악가로서 하는 말인데 모든 법칙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결점 투성이였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의 그 논증 가능성이란 진리가 될 수 있는 그런 개념과는 거리가 먼 거요.”
“방금 말씀하신 진리란 체스 게임에서 훌륭한 행마와 같은 것입니다. 단지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뿐이죠. 시간만 충분하면 언제나 가능합니다.”
노인은 그 말에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나는 훌륭한 행마보다는 완벽한 행마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소? 하지만 완벽한 게임 역시 항상 논증이 가능한 것은 아니오. 진리를 꾀하는 모든 법칙은 한정적이고 상대적일 뿐이니까. 자, 나의 반 호이스를 화성이나 미지의 행성으로 보내서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게 어떻겠소. 그것보다는 지금 두 사람이 듣고 있는 디스크를 보내는 게 나을 것 같구려.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면 그 디스크를 깨뜨려서 보내도록 하시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천만에 아무것도.... 보아하니 당신은 정확한 법칙들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내 몇 가지만 상기시켜 드리리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180도가 되오, 그러나 그것은 타원 기하학에서는 그 이상이 되고, 쌍곡선 기하학에선 그 이하요. 알겠소? 그것은 유일한 법칙이나 천편일률적인 공리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오. 이렇듯 법칙이란 게 그 자체조차 서로 다르니 어떻게 해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거요. 가만..... 그리고 젊은 양반은 역설을 푸는 일에 무척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던데, 그렇소? 나는 음악이나 그림만이 아니라 체스 역시 그러한 역설들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오만.....”
노인은 테이블로 손을 뻗치더니 종이와 연필을 집어 들었고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것을 무뇨스에게 건넸다. (P288-289)
무뇨스가 세사르의 가게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한 시간 뒤였다. 깃을 세운 레인코트 위로 머리칼이 흠뻑 젖어 있었다. 훌리아는 입구에서 빗방울을 털어 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처량한 개를 떠올렸다. 도자기와 그림과 카펫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온 그는 먼저 훌리아에게 손을 내밀어 --온기는 고사하고 손을 잡는다는 의도조차 담기지 않은 차고 건조한 느낌이었다-- 악수를 하는 한편 스테인드글라스 창가에 앉은 세사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는 비에 젖은 구두가 양탄자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 --노천 시장에서 일어난 일--를 들었지만 청색 포드나 세사르의 부지깽이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서 생기가 돈 것은 훌리아가 내민 새로운 카드를 보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그는 요 근래에 휴대품처럼 지니고 다니던 체스 세트를 꺼낸 뒤에 새로운 말의 위치를 배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요.” 훌리아가 말했다.
“텅빈 스프레이 깡통을 왜 보닛 위에 놓아두었느냐 말이에요. 서둘러서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면 몰라도 굳이 눈에 띄는 곳에 놔둘 이유가 없잖아요.”
“그건 어쩌면 단순한 경고로 그치겠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 세사르가 그 말을 받았다. “경고치고는 아주 고약하지만 말이다.”
“타이어 바람을 빼고 다시 공기 주입기로 바람을 넣으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려요. 그 여자가 그러다 남의 눈에 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가만......” 훌리아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되뇌었다. “제가 방금 여자라고 했나요?” 그녀는 무심코 웃고 잇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가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요.” (P322-323)
그녀는 요 근래에 체스 두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많이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들 모두가 반 호이스의 그림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무뇨스. 그는 수수께끼가 시작된 이후에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일 때 악몽의 이미지와 연관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그는 풀리지 않는 털실 뭉치나 체스 게임 앞에서 늘 한쪽 끝이나 다른 사람들의 반대편에 위치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무뇨스. 그는 그녀가 수수께끼와 맞닥뜨린 후에 만난 인물이지만 동시에 모든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간 뒤에 만난 인물이었다. 그는 노인의 설명처럼 음악의 흐름이 다른 음조를 띠기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그 이전에 만난 인물인 셈이었다.
일순 그녀는 발길을 멈추었다. 축축한 안개가 작은 물방울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야.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이 가방에 들어 있는 테린저와 함께 말이지. 이윽고 훌리아는 체스 클럽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P350-351)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다시 모질게 되돌려 세우며 현실로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은 경찰의 수사 방향이었다. 페이호 반장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진술을 그저 수사 절차에 필요한 요식 행위로 보고 있었다. 그는 사건의 내막을 이해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요지부동이었다. 형사 반장의 수사 방향은 단순했다. 사건 현장, 현장에서 발견된 피살자의 모습, 종적을 감춘 용의자, 용의자를 목격한 증인의 확보..... 형사 반장은 피상적인 흐름에서 읽혀지는 것을 사건의 동기로 보았고, 용의자를 추적하여 신원을 확보함으로써 수사가 종결될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체스에 얽힌 이야기는 사건의 부분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재미있고 단순한 삽화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 결정적인 단서는 피살자의 가랑이 사이에 박힌 술병이었다. 이른바 범죄 병리학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페이호 반장은 추리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게 모든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속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확신을 거듭 되풀이했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어요.” 마침내 훌리아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형사 반장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말문을 열었다. “알바로 교수도 멘추 언니처럼 살해당했던 거예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가 그 그림을 노리고 있었던 게 확실해요.” (P365)
“그림이 있든 없든, 이 게임은 계속됩니다.” 그가 종이를 보여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한 가지가 아니라 한꺼번에 세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Q x R
Qe7?-Qb3+
Kd4?-Pb7xPc6
세사르와 훌리아는 종이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그사이 레인코트가 놓여진 의자로 갔던 무뇨스는 휴대용 체스 세트를 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여기 적혀진 것처럼 눈에 훤히 보입니다. Q x R. 이것은 흑녀(Q)가 백 성장(R)울 잡았다. 즉 백 성장인 멘추 로치 씨는 살해당했다는 거죠. 물론 백 성장은 이 게임에서 백 기사가 알바로 교수를 상징하고, 그림에서 로제 드 아라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체스 플레이어는 체스판의 말을 배치하며 말을 이었다. “한편 이 게임에서 지금까지 흑녀가 잡은 말은 두 개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흑녀로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사실은 두 수 전에 우리가 첫 백 성장을 잃었을 때 현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과로 뒷받침됩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선 말입니다.”
“여기 백이 앞으로 움직이게 될 두 개의 행마에 의문 부호를 찍어 둔 이유는 왜죠?” 훌리아가 손으로 부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P367)
그녀는 첫 계단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폈다. 천장이 낮은 탓인지 푸른색 보안등 주위의 사물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뜻 그녀의 시선이 반 데어 웨이덴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에 가 멈추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밝은 색이 강조되어 드러나는 그 그림이 여느때와 달리 장중하면서도 불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을 지키고 있는 것은 긴 세월의 잠에 빠져 든 그림 속의 인물들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들이 금방이라고 되살아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12호실 입구까지 다가가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그러나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언뜻 뒤를 돌아다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깊은 숨을 몰아쉰 그녀는 마음속으로 셋을 세었다. 동시에 데린저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동작으로 12호실의 어둠 속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순간 그녀는 막연한 안도감과 함께 맥이 풀리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거의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보슈의 “쾌락의 정원”이었다. 그녀는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입김이 뒤러의 “자화상”을 덮고 있는 유리창을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뒤에 브뢰헬이 걸려 있는 세 번째 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브뢰헬의 형체와 밝은 색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것은 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라 어둠 속에서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비극이 강조되는 붓 터치, 잔혹하고 숙명적인 분위기를 뿌리는 무수한 형상들의 몸부림 등 그림 전체를 구성하는 무수한 테마들은 여러 해 동안 그녀의 상상을 휘저어 놓던 장면이었다. 대지의 내부에서 떼를 지어 나오는 해골들, 멀리 지평선 위의 불길에 휩싸인 어두운 폐허들, 기둥 위에서 돌고 있는 탄탈로스의 바퀴들, 그 곁에 칼을 들어 올린 해골 하나가 눈을 가린 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죄수의 목을 내리치는 모습 등이 푸르스름한 불빛에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그 그림의 전경에는 연회 도중에 깜짝 놀란 왕, 마지막 순간을 잊고 있는 연인들, 심판의 북을 치며 미소짓는 해골들, 공포에 떨면서도 아직은 저항의 용기를 잃지 않은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 기사는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이 사라진 최후의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드는 거기, 그림과 액자 사이의 금박 부분에 있는 제목, 즉 “죽음의 승리” 위에 놓여 있었다. (P407-409)
사실 훌리아는 낡은 잡지 속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15세 소년의 눈빛을 읽어 내는 순간 연극의 마지막 장을 예상했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되고 있었다-- 그 마지막 연극의 종말이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것도 예견할 수 있었다. 이제 훌리아는 응접실에 놓여 있는 엠파이어풍의 소파에 앉은 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두 인물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클라이맥스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가만히 내버려 둘 참이었다. 세상에 어느 극장에서 이렇게 완벽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은 낮과 밤으로 빚은 체스판
그곳에서 운명은 사람들을 체스의 말처럼 다루노라.
훌리아는 세사르와 무뇨스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모든 게 준비된 이상 남은 것은 시작의 순간뿐이었다. 잉글랜드 램프의 양피지 갓에서 흘러나오는 노르스름한 불빛이 두 사내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세사르가 고개를 숙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대화를 알리는 신호였을까. 그때서야 무뇨스가 한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세사르 씨. 체스판은 준비하셨겠죠?” (P420)
“방금 체스라고 했나?.......” 세사르는 마치 테이블 위의 체스 말들을 향해 경멸의 눈짓을 보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존경하는 친구, 내가 말하는 것은 체스 이상의 어떤 것이지....” 그의 파란 눈이 깊은 어둠 속으로 꺼져 가고 있었다. “난 지금 인생 그 자체, 시인이 말했던 검은 밤들과 하얀 낮들로 이루어진 64개의 칸들, 아니 하얀 밤과 검은 낮에 대해 말하고 있소. 물론 그 이미지는 플레이어에 따라 다르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상징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우리가 거울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지.”
순간 훌리아는 분명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느꼈다.
“이분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죠?” 그녀가 무뇨스에게 물었다.
이번에 놀란 쪽은 세사르였다. 그의 표정에서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세사르가 그날 밤 처음으로 훌리아에게 보여 주는 감정의 표현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그동안 지켜 온 두 사람 간의 묵시적 밀약이 이런 식으로 깨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사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 그의 입가에 흐르던 씁쓰레한 미소가 우울한 웃음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P430)
“물론이지. 세상이란 우리를 믿게 만드는 사물들처럼 늘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란다. 세상은 희거나 검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윤곽이 정확하지 않고 색조가 다양하단 말이다. 예를 들어 악은 선이나 미의 가면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듯이 반드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진 않아.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존재는 한 연인을 사랑할 수 있고 배신할 수도 있지만 본연의 속성만큼은 잃을 수가 없지. 또한 인간은 아버지나 형이나 아들이나 연인일 수 있고, 마찬가지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도 있어..... 원한다면 너도 그런 예들을 들을 수 있을 게다. 인생이란 지속적으로 그 경계가 뒤바뀌는 산만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불확실한 모험이란다. 그 풍경 속에 있는 경계는 인위적이고, 모든 것은 순간마다 끝나거나 새로이 되살아나는가 하면 도끼로 내리찍듯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우린 인간은 절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죽음 앞에서 영원한 밤과 밤 사이에 빛을 발하는 미미한 번개 불빛에 불과할 뿐..... 공주야, 그속에 있는 우리에겐 시간이 거의 없단다.”
“지금 이 얘기가 알바로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죠?” 훌리아가 따지듯 물었다. (P449-450)
그는 갑자기 말꼬리를 놓친 사람처럼 말을 끊더니 훌리아와 무뇨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 잘못된 듯한 모호한 표정과 사악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가 이 모든 일에 대한 영감을 받은 것은 그 순간이었단다. 느닷없이 내 눈앞에 거대한 계획이 펼쳐지는 거야. 제멋대로 허공을 부유하던 조각들이 경이롭게도 각자의 위치를 되찾아 구체적인 모습을 만들어 가도 있었지. 마치 숲속의 요정 이야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장면이었어. 불과 몇 초 사이에 각각의 인물과 생각과 상황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각각의 상징을 지닌 채 제 위치를 찾아갔으니까. 그것은 <위대함(Grande)>과 똑같은 이니셜인 대문자 G로 시작하는 게임(Game), 즉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체스 게임이었지. 얘야, 하지만 그것은 네 인생의 게임이기도 했단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체스, 모험, 사랑,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게 있었고, 그 끝에 네가 서 있었으니까. 너는 모두로부터, 아니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지닌 채 순수한 거울 속에 투영되어 있었으니까. 얘야, 체스를 두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였단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너의 운명이었지. 얘야, 너는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어야 했단다.”
“하느님 맙소사!” 훌리아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어쩌면 이렇게.......”
그러나 세사르는 고개를 저었다. (P458)
“돌무더기처럼 무너지더구나.” 다시 입술을 뗀 그의 음성에는 힘든 시험을 치른 사람처럼 홀가분하고 덤덤한 어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 사이에 파이프를 문 채 바닥에 쓰러졌는데 신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그대로 놔두지 않고 정말로 숨이 끊어지도록 다시 한 번 가격했는데 그건 잘했던 것 같더구나. 무슨 일이든 돌이켜보면 마무리가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제부터는 너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겠구나. 샤워 꼭지의 물줄기를 틀어 놓은 일 따위는 그저 예술적인 손질에 불과했지 Bruilez les pistes(흔적을 흩뜨려라)라고, 아르센 위팽도 그러지 않았느냐. 아마 멘추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신이여. 그 여자를 편히 쉬게 하소서..... 보나마나 그 말을 코코 샤넬이 했다고 우겼겠지.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그는 그쯤에서 잔을 들어 진을 한 모금 마신 뒤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은 멘추를 회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손수건으로 지문을 닦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을 떠날 때 재떨이를 챙겼고, 밖으로 나와서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단다. 얘야,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습다면 그 정도면 초보자치고는 감탄할 만한 솜씨라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난 그곳을 빠져나오기 전에 알바로가 작성했던 그림에 대한 보고서 봉투 겉봉에다 타자기로 네 주소를 쳤단다.” (P459-460)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뇨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훌리아는 깜짝 놀라 무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한쪽으로 기울인 채 세사르를 쳐다보는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시선이었다. “선생이 뛰어난 체스 플레이어라는 사실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적어도 뛰어난 체스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지녔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께서 이번에 두었던 방식의 게임을 치를 만한 능력까지 지녔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무려 40년 동안 체스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사람이 만들어 낸 조합치고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체스에서 중요한 것은 연습과 경험입니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선생이 우리를 속이는 게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선생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아무도 몰래 체스를 연구했거나 누군가가 도와준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요. 선생, 당신의 허영심에 상처를 안겨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당신에게는 공범이 있습니다.”
무뇨스의 말 뒤로 길고 무거운 침묵이 뒤따랐다. 훌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체스 플레이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훌리아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막 입을 여는 순간, 평소에 관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사르의 가면 같은 얼굴에서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곤혹스런 웃음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웃음은 무뇨스의 판단을 인정하고 감탄하는 역설적인 표정이었다. 이어 세사르는 깊은 숨을 내쉬더니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세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필요 이상 말을 질질 끌고 있었다. “당신은 역시 동호회 클럽의 후미진 구석에서 주말을 보낼 무명의 체스 플레이어가 아닌 게 분명해. 아니 그 이상의 자격이 있어.” 그는 마치 줄곧 그들의 대화를 듣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듯 오른손으로 어두운 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소. 사실 나에게는 공범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 그 친구는 그 어떠한 사법적 판결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할 거요. 어쨌든 그 이름을 알고 싶소?”
“선생께서 직접 밝혀 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해 주겠소. 설사 그 이름을 밝힌다 해도 그다지 큰 충격을 입지 않을 테니까.” 그는 다시 웃고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큰 웃음이었다. “하지만 친구, 미리 말하지만 내가 그 비밀을 혼자 간직했다고 해서 당신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시오. 사실 나는 당신이 모든 것을 다 밝혀 내지 못해 내심 즐거워하고 있었으니까. 혹시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하겠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그 말은 맞아요. 그 친구 이름은 <알파 PC-1212>. 족히 20수를 읽어 낼 수 있는 체스 프로그램이 내장된 개인용 컴퓨터니까. 난 알바로를 죽인 다음날 그것을 구입했소.”
훌리아는 무뇨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 표정의 변화는 처음이었다. 그의 눈빛이 희미해지고 가만히 열린 입이 채 닫히지 못하고 있었다. (P475-476)
“다른 얘기는 없었나요?” 무뇨스가 다시 물었다.
훌리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세사르가 남긴 말을 되뇌었다. “<Nec sum adeo informis.... 난 그렇게 추하지 않아. 얼마 전에 바다를 찾았거든. 거기서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단다.>” 베르길리우스를 인용한 것은 역시 세사르다운 착상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가 막 응접실을 뒤로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벽면에 걸린 그림들의 어두운 색조, 가구의 표면 위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양피지 갓의 잔영, 서재에 꽂힌 책들의 금빛 등배, 이어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세사르의 뒷모습이었다. 이목구비는 볼 수 없었다. 명암이 교차하면서 드러나는 그의 형체는 양탄자의 적황색 아라베스크 무늬 위로 길게 늘어뜨려져 거의 그녀의 발치까지 와닿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섰다. 문을 닫자 마치 무덤의 석판이 닫히는 듯한 종소리가 울렸다. 순간 그녀는 모든 게 작품에서 오래전에 예견되었고, 각각의 것이 작품에서 할당된 역할을 어김없이 수행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순간은 체스판 위에서 첫 막이 열린 지 정확히 5백년 뒤에 수학적 정확성과 함께 찾아온 흑녀의 종말, 그것이었다.
“아뇨.” 이윽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응접실의 이미지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그 이미지가 자신의 기억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아무 말씀도 없었어요.”
무뇨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유감이군요.” 그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분은 훌륭한 체스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P489-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