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 레임바흐의 <다니엘>

영화 <사랑을 위하여Dying Young> 2007년

by 노용헌

<사랑을 위하여>(Dying Young)는 미국에서 제작된 조엘 슈마허 감독의 1991년 멜로/로맨스, 드라마 영화이다. 마르티 레임바흐(Marti Leimbach)의 소설 <다니엘Dying Young>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줄리아 로버츠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샐리 필드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어떤 교회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사는 1만명에 관한 통계가 있다. 그중 혼자 아이를 키우는 1인 부모가 375명, 혼자사는 사람 1,200명, 미약하게나마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 1,100명, 아픈 친구나 친척, 병든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 1,280명, 범죄의 피해자가 된 적 있는 사람이 2,800명이라한다. 이중 정신질환을 앓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부모가 있다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 보게하는 소설이다. 자폐아 다니엘을 키우는 멜라니 라빈, 즉 자신의 경험담을 쓴 자전적소설이다. 소설과는 달리 영화 <사랑을 위하여>는 자폐아동의 이야기가 아니라, 백혈병을 앓고 있는 환자 빅터를 간병하는 여인 힐러리와의 둘 사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자폐아를 다룬 영화로는 <레인맨>(1989), <카드로 만든 집>(1993), 한국영화 <말아톤>(2005) <맨발의 기봉이>(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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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이 좋아하는 장난감은 딱 하나다. 수백 개나 되는 다른 장난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다니엘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장난감은 나무로 만든 토마스 기차다. 토마스 기차는 검은 틀 안에 시계모양의 얼굴이 달렸고 머리 위로는 앙증맞은 모자처럼 작은 굴뚝이 솟아 있는 장난감 기차다. 토마스 기차는 다니엘의 손에 들리거나 입에 물린 채 다니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에밀리는 가지고 놀 수 없는 장난감이었고, 깨끗하게 닦아주려고 내가 잠깐 들고 있을 뿐인데도 다니엘은 미칠 듯 울부짖었다. 나는 오늘 다시 토마스 기차를 씻어 보기로 했다. 일 분만 아니 일 분 안에 돌려주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고 장난감을 다니엘의 손에서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다니엘이 작은 주먹으로 내 허벅지를 마구 때리며 목구멍 안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입을 쩍 벌리고 원숭이처럼 꽥꽥 울어댔다. 나는 다니엘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니엘, 그만 울어야지.”

토마스 기차를 되돌려준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다니엘은 멈출 줄 몰랐다. 양미간에 주름이 잔뜩 질 만큼 눈을 꼭 감고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턱을 아래로 쑥 집어넣고 악을 쓰며 울어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니엘의 어깨를 양팔로 감쌌다. 다니엘은 나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온몸을 더 세게 비틀다가 결국 쿵 하고 카펫 위로 넘어졌다. 바로 그때 퇴근해서 돌아온 스티븐이 문을 열었다.

“길거리까지 소리가 들려.” (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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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조용히 카펫 위에 앉아 있는 다니엘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봤을 땐 다니엘은 아무렇지 않아.”

“감쪽같이 사라졌었어.”

나는 에밀리에게 주려고 샌드위치를 잘랐다. 다니엘은 샌드위치를 먹지 않는다. 쿠키와 크래커, 우유를 탄 시리얼만 먹을 뿐이다. 고기도, 과일도, 채소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비타민을 먹여야 하고 케이크를 만들 때는 당근이나 으깬 호박을 넣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불렀는지 몰라.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 귀라도 먹은 것처럼 말이야.”

“다니엘, 너 어디에 숨어 있었어?”

스티븐이 다니엘을 놀렸다. 다니엘이 고개를 들다가 제 아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빠를 보고도 웃는 법이 없다.

“다니엘은 게임을 했던 거야. 그게 그렇게 안달할 일이야?”

“게임이라구?”

나는 들고 있던 칼을 세게 던져 버렸다. 싱크대에 작은 흠이 생겼다. (P30-31)


다니엘이 보고 싶으면 내가 가야 한다. 내가 직접 다니엘을 찾아서 데려와야 한다. 다니엘은 따가운 햇살 아래 드러누워 작은 손가락으로 기저귀를 후벼 파고 있었다. 발로는 일정한 박자로 문을 계속 찼다. 내가 큰 소리로 단어를 말해도 나를 바라보거나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내 눈에는 다니엘이 의도적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내 얼굴을 피하려고 다른 쪽을 멀뚱멀뚱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한 나의 간절한 눈, 자신이 따라해야 할 단어를 필사적으로 말하는 내 입술을 어떻게든 무시하려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나는 다니엘이 따라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옆에 있던 에밀리는 동생이 짜증스러운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다니엘은, 문을 발로 차든 말든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그렇지 않으면 방으로 들어가 버리겠다고 경고라도 하듯,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다니엘, 엄마라고 해!”

에밀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다니엘은 몸부림을 치면서 내게서 빠져나가 소파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줄기 햇살이 들어와 벽에 예쁜 무지개를 만들었다. 다니엘은 비명을 지르며 소파 등받이 위로 올라가서 무지개를 빨아 먹으려는 듯 혀를 쭉 내밀었다.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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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모르겠어요’, 다니엘이 뭐가 잘못됐는지.”

다니엘은 내 손을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리며 내 손가락을 펴서 제 기차 위에 올려놓았다. 나에게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기차를 움직이라는 뜻이다. 다니엘은 까르르 웃으며 어지러워서 넘어질 때까지 뱅글뱅글 제자리 돌기를 했다. 정원의 가장자리로 얼마나 열심히 뛰어 다녔는지 아예 조그만 길이 생겨 버렸다. 비스킷과 우유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바보 같은 장난감 하나만 가지고 노는 우리 다니엘.

“다니엘은 장난감 ‘한 개’ 만 가지고 놀아요! 그 장난감에 최면이 걸린 것처럼요.”

“무슨 장난감이죠?”

제이콥이 물었다. 제이콥은 항상 이렇게 물었다. ‘그럼 다른 장난감을 사 줘 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제이콥이 좋다. 그는 내가 상점에서 파는 장난감의 반 이상을 이미 사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차요.” (P71)


아이가 언제 처음 앉았나요? 거리 시작한 때는요? 걸음은요? 언제 처음 말하기 시작했나요? 단어를 함께 붙여서 사용하던가요, 아니면 한 단어씩 따로따로 말했나요? 지금 정확히 몇 단어를 말할 수 있습니까? 소꿉장난 같은 ‘역할놀이’를 하던가요? 다니엘이 뭘 잘 먹나요? 잠은 얼마나 자주 자나요? 시끄러운 소리에 민감한 편입니까?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도 합니까? 계속 반복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똑같은 일을 몇 번이고 계속합니까?

이런 질문들에 서글픈 대답을 하고 얻은 결론은, 다니엘이 19개월 쯤까지는 지극히 정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다니엘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때 다니엘은 오렌지든 단추든 동그란 것이면 무조건 ‘공’이라고 말했고, 그다음에 ‘돕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대신 ‘공’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다음엔 두 단어 모두 쓰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물쇠를 풀고, TV를 켜고, 카시트를 떼어내는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지만 장난감과 노는 데는 영 신통치 않았다. 9개월밖에 안 된 아기처럼 빛이 번쩍거리고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밤에는 잠을 잘 자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낮에도 잘 자지 못했다. 소음에 관한 한, 나는 다니엘을 데리고 공중 화장실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손 건조기 소리가 났다 하면 다니엘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개 짖는 소리부터 초인종까지 조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도 다니엘은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소리가 안 들리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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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아드님은 자폐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네요. 다니엘의 언어구사능력 기록서를 한번 봐야겠어요.”

나는 도저히 스티븐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아이들에게 너무 신경을 쓴다고 항상 불만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려고 자신과 나까지 희생해야 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줘야 하니 함께 영화관에 갈 수 없다고 말하거나, 컴퓨터 상자로 인형 집을 만들어야 하니 디너파티 준비는 못 한다고 말하면 짜증을 냈다. 자기 회사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는 대신 마루에 앉아서 에밀리와 함께 인형을 들고 소풍놀이를 하거나 다니엘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나를 보고 스티븐은 불같이 화를 냈었다. 갑자기 명치끝이 짜릿해졌다. 다니엘이 숨바꼭질 놀이를 안 한 지가 얼마나 된 거지?

“스티븐, 다니엘이 언제부터 숨바꼭질 놀이를 안 하게 되었지?” (P78)


나는 당연히 다니엘이 우리 생활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나는 아주 당연히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CD를 틀지 않은 채 집으로 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표정이다. 아빠와 엄마와 함께 차를 탄 것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다니엘은 항상 이랬다. 물론 자폐증이라는 반갑지 않은 꼬리표가 생겼다고 우리 다니엘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아침 나는 내 아들과 함께 외출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지금은 전혀 낯선 외계인,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는 시한폭탄을 안고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다드 박사는 다니엘도 어떤 면은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면은 점점 더 나빠져서 ‘자폐증세’가 현저하게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폐증은 유전이며, 특히 다니엘의 경우는 양가(스티븐의 아버님도 우울증이 있었다.) 모두 우울증 병력이 있으므로 유전이 확실하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자 다드 박사는 아주 당연한 결과라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드 박사에게 우리 아버지의 자살은 결정적인 단서였다. 다니엘의 고통은 유전자의 불운한 조합의 결과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양가에 자폐증 병력이 없다는 사실이 다드 박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다니엘을 즉시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의료계가 앞으로 개발할 확률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만약 죽고 나서도 입만은 그대로 살아서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다니엘이 MMR 백신을 맞은 후 몇 주 동안 눈에 띄게 이상해졌다고 끝까지 말할 것이다. 백신 주사 이후에 찍은 다니엘의 사진을 보면 아이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이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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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알람 시계의 불빛이 깜박이고 냉장고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차 소리가 공기를 울리며 지나갔다. 나는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살짝살짝 부풀어 오르는 다니엘의 가슴과 그때마다 내 볼 위로 불어오는 다니엘의 따뜻한 입김. 다니엘이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다니엘에 대해 내가 바라는 소원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소원, 다니엘이 보통이 되는 것이다. 그냥 보통 사람으로, 평범한 어린아이로. 슈퍼스타도 천재도 아닌, 그냥 평범한 동네 아이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째깍째깍 바쁘게 지나가는 시계 초침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시계 종소리도 들렸다. 나는 내 말을 듣지 못하는 다니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P102-103)


“...... 그럼 우리 다니엘은 어떨까요? 그 애는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해요. 자폐증이니까요, 알겠어요? 내가 죽을 때가 되어도 우리 아들은 여전히 미성숙인 상태로 남아 있을 거라구요. 운전도 못 하고 침대에서 몸을 돌려 아내를 안아 주지도 못할 거예요. 사나이들의 세계에서 올바른 남자로 인정받기도 글렀어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누가 엄마를 데려가 버렸지? 왜 엄마가 다시는 안 돌아오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 하는 불쌍한 아이로 남을 거예요. 내가 죽으면 우리 다니엘은 너무 슬퍼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거예요. 그게 바로 내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난 영원히 살 수 없으니까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이상은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 시간인지 두 시간인지, 제이콥은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P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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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대학에서 사회학 수업을 들을 때였다. 우리는 나치 강제수용소에 감금된 유태인들이 자신을 감금한 나치의 흉내를 내며 동료 유태인을 억압했다는 그의 논문을 읽어야 했다. 수용소 내에 실제로 2류 나치 군대 같은, 유태인을 지배하는 유태인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 베텔하임은 유대인들 중 일부가 나치의 군복을 차지하려고 안달했다는 것과 동료들 위에 군림하며 같은 유태인을 학대하고 반유대주의자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조사와 연구를 거듭했다.

“난 믿지 못하겠어.”

마커스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느라 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진정시키려고 알로에 베라 젤을 바르는 중이었다. 그는 논문을 읽는 내내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어깨가 너무 따가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베텔하임이 강제수용소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것을 설명한 글이 너무 공격적이었거나, 마커스는 고개를 계속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사실일 리 없어.”

나는 마커스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다니엘의 증상을 알고 자폐증과 관계된 정보를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베텔하임 박사가 그런 논문을 썼는지 기억도 못 했을 것이다. 베텔하임 박사는 나치 수용소의 유대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허황되게 지어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자폐증에 걸린 것이 모두 부모들의 미숙한 양육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내 유명해졌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나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1939년 베텔하임은 미국에서 자폐증에 관한 전문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그가 자폐증 어린이에 관해 정말 뭘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프로이드를 만났고(정말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서 정신분석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그건 거짓말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오기 전에 책을 두 권 냈고(그 책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럽의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 감정에 문제가 있는 어린이와 어른들을 연구했다고 한다(증거가 없다).

그러나 그가 딴 것은 철학 미학 박사 학위뿐이었다. 철학 미학이란 ‘예술은 무엇인가’ 같은 문제와 관련 있는 학문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자폐아 치료의 권위자로 세계에 알려졌다. 시카고 근교에 자폐아 치료 기관으로 알려진 학교까지 세웠다. 그는 자폐아를 가진 엄마들을 분노하는 마녀에 비교했다. 광분하는 왕이나 나치 수용소의 무장 친위대에 비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곧 자폐아 치료과정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다. 아무도 그에게 감히 대들어 논쟁을 벌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니엘이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사람들은 다니엘의 정신을 파괴한 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다니엘의 정신을 빼앗았고 아이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자폐증에 걸려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학력과 업적을 스스로 조작한 베텔하임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엄마인 내가 무의식적으로 다니엘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고, 그럼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겠지! 성치 않은 아이들 때문에 안 그래도 가슴 아픈 엄마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것도 모자라 억지로 아이들을 포기하게 만들다니. 그러면서 돈을 벌고 싶었을까. 자폐아들을 자신이 세운 학교에 데려다놓고 정신 분석학을 이용해서 모두 고쳐놓겠다고 전 세계 사람들을 속인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은 범죄였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베텔하임 같은 사기꾼에게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갈 것인가? 그리고 그런 일은 얼마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

자폐증 아이들을 돌보는 소위 최고의 시설이라는 곳에 다니엘을 보내고 싶으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런 곳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의 센터에서 실시하는 교육 프로그램 또한 애당초 잘못 만들어진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요? 자폐증을 정신분석학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네 의사들은 아이들이 사고와 감정이 급진적으로 발달하는 ‘중요한 시기’에 다니엘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그저 조사해 보고 싶은 것 아닌가요? (P1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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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엄마라는 말을 못 해요. 사실 다니엘은 사람들이 대화 중에 자기 이름을 불러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엔 다니엘에게 복잡한 공포증세가 있다는 걸 밝히려고 선생님이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마쉬 부인, 우리는 모두 자격이 있는.....”

“자격이오? 누가 준 건가요? 누구를 위해서요? 전문가입네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정작 우리 다니엘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 일도 못 하나요? 무엇을 더 낫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전문가가 무슨 소용이죠? 당신들은 도대체 뭘 하고 돈을 받는 건가요?”

두 의사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금과 설탕처럼, 흰 옷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런 인형 같았다.

“더 이상 서로 할 말이 없는 것 같네요.”

나는 다니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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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항상 남편과 같이 갔어요. 한 손에 음식을 들고 말이에요. 당신은 아주 용감한 거예요.”

그녀가 너무 착해서 그 말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말을 꺼냈다.

“아드님이 자폐아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말을 하나요?”

지금의 나에겐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다니엘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지, 아이의 말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가 똑바르게 말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알수 없었다.

“말하는 거요? 오, 불쌍해라.”

그녀는 나를 보며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가 난 나를 달래주던 우리 엄마의 표정이 떠올랐다. 엄마는 내가 왜 화가났는지 내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고 했었다. 물론 엄마는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이죠, 말을 잘해요. 당신의 아드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분명히 말을 할 겁니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바지면서 무릎이 바르르 떨렸다. 다니엘이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동그란 모양의 비스킷이 한꺼번에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은 화가 나서 과자를 몇 개 집어 던지다가 무릎에 남은 비스킷을 가슴에 꼭 품었다. 에밀리는 나를 잡아당기며 안아달라고 보챘다. 에밀리를 안으면 넘어질 것 같았다. 너무 떨려서 내 몸 하나도 주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알죠?”

되묻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질문이 비꼬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이 여자, 하느님..... 이 여자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

“왜냐하면 당신 아들은 우리 아들만큼 심하지 않으니까요. 아드님은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난 여러 경우를 봤거든요. 내가 전문가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엄마로서요. 아드님은 분명히 말을 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올 때는 오늘만큼 소란을 피우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모든 일이 점점 좋아질 거예요. 두고 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조심스레 접어서 내 청바지의 앞주머니에 살짝 찔러 넣었다. 청바지의 앞주머니는 내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을 넣어두는 곳이었다. 내 차 열쇠가 바지 앞주머니에 있었고 크레디트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녀의 전화번호까지. 쪽지에는 그녀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녀는 아이리스였다. 아이리스는 꽃 이름이다. (P1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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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전체가 쩌렁쩌렁 거렸다. 스티븐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이들을 잠시 잊고 그냥 사랑만 나누기는 이제 불가능하다고, 아이들이 옆에 있든 없든 우리는 항상 아이들 걱정에 찌들려 산다고 투덜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었다. 스티븐이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다니엘에게 또 다니엘의 자폐증 탓으로 돌릴까 봐,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우리 결혼생활 때문에 짜증이 나서 못살겠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시아버님의 말씀처럼 다니엘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매정하게 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스티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멍하니 천장만 주시할 뿐이었다. 나는 잠옷을 입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올렸다.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숨고 싶었다. 아니면 뛰쳐나가든가.

“스티븐, 이러지 마.”

“뭘 이러지 마?”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스티븐이 어쨌기에? 나에게 화를 냈다고? 스티븐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 다니엘의 증세를 알고 난 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감정이란 없다. 그러나 뭔가 더 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스티븐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스티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그동안 스티븐이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가 소리치는 것도, 손으로 벽을 내리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다니엘이 자폐아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가 깊이 상심한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그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처럼 처절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그를 달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등을 보며 말했다.

“나를 욕하지 마, 당신 자신도 욕하지 말구.”

스티븐은 내 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P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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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어머님. 전 할 수 없어요.”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수표도 가지고 왔고, 시간도 많았다. 다니엘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어치료사가 못 하겠다니?

“‘응용행동분석’이란 방법은 어떤가요?”

나는 캐서린 모리스라는 여자가 쓴 <네 목소리를 들려줘, (Let Me Hear Your Voice)>라는 책을 찾아냈다. 자폐증 아이를 둘이나 키운 엄마가 쓴 책이었는데, 그녀는 응용행동분석 방법을 쓰고 단 2년 만에 아이들을 정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불가능한 이야기 같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 실현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용행동분석법은 로바스라는 방법이에요. 제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신인데, 로스앤젤레스에선 로바스 방법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로바스 방법으로 교육받는 아이들은 대화를 할 때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요. 그저 특정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훈련을 받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네 이름이 뭐니?’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이름을 말하긴 하는데 사실 제 말을 ‘이해하고’ 대답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언어치료사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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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응용행동분석 책에서 읽은 대로 다니엘을 연습시켰다. 그것은 앤디 오코너 박사의 치료법이었다. 다른 언어치료사들이 사기라고,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방법이었다. 오코너 박사는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시간이 없다고 했다.

“기다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요. 엄마들이 너무 몰려와서 죽을 지경이에요!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자폐증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모두 잠을 못 자고 있는데, 어떻게 ‘선생님’이 잠을 잘 수 있죠?”

나는 약간 심통이 났다.

“잠을 자야 일을 하죠.”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성격이 좋은 사람 같았다. 부드럽고 긍정적인 목소리, 말을 하지 않는 아이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충분히 이해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정말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못 오는 것이다.

“미국 분이신가요? 전 미국인이 좋아요. 제 말은, 여자들의 경우 말입니다.”

나도 오코너 박사가 좋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카드를 쥔 사람이고 그 카드를 얻기 위해 나는 액수에 상관없이 돈을 지불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어떤 과정이든 하루빨리 다니엘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답은 특수학교였다. 스티븐은 회사에서 전화를 걸어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다니엘을 위해 노력이라고 좀 해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와 함께 다니엘에게 동화책이라도 읽어주자고 제안했다. 그럼 자폐증을 앓는 아이라도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걸 당신도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지금은 못 가.”

그가 말했다.

“도대체 왜?”

“우선, 당신의 그 성질, 그것 때문에 집에 가기 싫어.”

“아, 그래? 그렇지. 내가 좀 무서운 여자야!”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니까 특수학교에.....”

“일단 다니엘을 거기 보내고 나면, 다시 나오기가 힘들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보내도 되잖아? 싸워보지도 않고 벌써 항복하면 어떡해?”

“당신과 싸우기도 지친다.”

“그래서, 무슨 말이야? 특수학교에 보내는 걸 내가 찬성하지 않으면 집에 안 들어오겠다고?”

“아니, 그런 말은 아니야.”

“그럼 왜 집에 안 들어오는 거야?”

내 목소리가 커졌다. 사실은, 소리를 꽥 질러버렸다.

내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스티븐은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다른 전화를 받느라고 내 전화를 이미 끊어버린 후였으니까.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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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줄 아는 애는 그래요.”

내가 말했다. 문득 완다의 ‘미친 골통’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자폐증, 더 정확히 얘기하면 ‘시설보호 자폐증’(Institutional Autism)이라는 증세의 원인에 대한 베텔하임의 이론과 비슷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보호와 사랑, 장난감,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주지 않으면 아이는 퇴행하여 더 이상 발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앵무새들은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나요?”

내가 물었다.

“당근이죠. 다 사람 때문에 그런 거니까. 지랄, 염병할.”

“그럼 더 좋아지는 건가요?”

“그러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한참 걸리겠죠.”

“만약 앵무새를 절대 버리지 않으면요? 그래도 새들이 충격을 받나요?”

“아니오, 절대로. 첫 번째 주인과 함께 있으면 절대 미치지 않아요. 아주 행복하게 지내죠. 말 그대로 활짝 웃는 앵무새가 돼요.”

“만약 새들이 태어나자마자 보살피고 같이 놀아주면요?”

나는 다니엘을 그렇게 돌보았다. 하루라고 다니엘에게서 떨어져 본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느 날 전혀 낯선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스스로 이로쿼이 인디언이었다고 믿는 이 여자에게서 나는 할 만큼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왜요, 앵무새 키우려고요?”

완다가 묻는다.

“만약 그렇게만 하면요. 아까 내가 말한 것처럼 앵무새를 사랑해주면 앵무새는 당신의 평생 동반자가 될 거예요! 하지만 이런 미친 앵무새를 키우진 말아요. ‘엄청난’ 골칫거리밖에 안 돼요.” (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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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분명히 멜라니를 깎아 내리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멜라니도 그냥 호락호락 당하고 있으면 안 돼요. 알았죠? 어제 내가 어떤 여자를 수술했는데, 그 여자 남편은 시의회에서 용역을 받아 일을 하는 사람이래요. 이번에는 마이다 베일의 어느 아파트를 청소하고 벽을 새로 페인트칠하는 일을 받았다는데, 그 여자는 남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분명히 자폐증처럼 보이는 아이가 한밤중에 아파트에 들어와서 벽에 똥을 발라놓았다지 뭐예요? 부모가 왜 애를 안 가도고 그렇게 풀어놓느냐고, 그런 부모들은 욕을 먹어도 싸다고 하면서 화가 대단했어요. 자기 남편이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남편이 골병이 드는 거다 하면서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나는 유리를 삼킨 기분이었다. 속이 묵직해졌다가 갑자기 콕콕 찌르는 듯 아팠다. 산산이 깨진 유리 파편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냥 책상에 있던 수술용 라텍스 장갑 한 상자를 줬어요. 그리고 말했죠.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 이 장갑은 의사들이 매일 쓰는 거니까 남편 분도 쓰면 괜찮으실 거다, 하구요.”

캐서린은 나와 무슨 공모라도 한 것처럼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캐서린과 나는 크게 웃으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멜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좋은 친구예요, 그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서린은 나에게 자기 오빠가 나와 이혼하려 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P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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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럼 손으로 딱 누르기만 하면 나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줄 스위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니엘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데도 쳐다보지 않을 때,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내 전화를 받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할 때, 신발이 맞지 않을 때, 근처 슈퍼에서 괜히 다니엘 또래 아이와 어마를 쳐다보는 바람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나는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자그마한 입으로 긴 문장을 제법 능속하게 구사했다. 초콜릿을 얼마나 사야 할지 같은 제법 어려운 말도 곧잘 했다. 그런 아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것 같다. 반질반질한 윤이 나는 투명비단에 싸인 듯 주위의 모든 빛을 끌어들였다. 또 한편으론 아주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 다니엘은 쇼핑카트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눈만 끔벅거렸다. 입술을 너무 세게 빨아서 아랫입술 밑에는 항상 반원 모양의 불그스름한 자국이 있었다. 어쩌다 스스로 사물을 가리키거나 단어를 말할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내가 말을 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손으로 크랭크를 세게 돌려야 시동이 걸리는 구식 자동차 같았다. 그래도 일단 입을 뗐다 하면 꽤 말을 많이 했다.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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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모든 전문가를 만나 보았다. 신경과 의사도 만나보았고 소아과 의사도 만나보았다. 정형외과 의사, 족병 전문의, 안과 의사, 소화기과 의사, 언어치료사, 음악치료사, 동종요법 의사, 두개 천골 치료요법 의사, 대체의학을 한다는 모든 피곤에 절은 의사들을 만나 보았다. 의외로 전문가들이 정말 많았다. 아주 미비하게나마 도움이 된 의사들도 있었고 전혀 무용지물인 의사도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일반학교에 가거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거라고 믿는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코너 박사, 아니 앤디는 예외였다. 그는 공책과 진료차트를 들고 다니며 지금 다니엘이 몇 개월 정도의 수준인지 확인했고 앞으로 다니엘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될 것인지도 알려주었다. 그는 이제 내 돈을 받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고, 그럼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말했다. 원래부터 그는 돈이 떨어진 대부분의 환자 가족들에게 아주 조금만 받고 치료를 해주었다. 액톤에 사는 어떤 남자는 정원도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아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아내는 가출했고 아이는 심각한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앤디는 그 남자에게 처음부터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홀랜드 파크 근처 의사들은 엄청난 진료비를 챙긴다.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납부제를 실시한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냥 그런 표만 내걸어 놓은 것이다.

“별장이 팔려서 돈이 생기는 즉시 진료비를 내도록 할게요.”

내가 약속했다.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그야말로 진료비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유일한 의사다. (P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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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있네

쇄골을 지나, 구멍에 고리를 걸고

당신의 뼈가 부스러지지 말라고

무너진 링 위를 무사히 걸어 나오라고.

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시를 음미했다. 뼈만 앙상한 내 몸이 떠올랐다. 이미 손가락에서 사라진 결혼반지도 생각났다. 약혼반지와 함께 팔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결혼반지는 그냥 금반지라 약혼반지만큼 값이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자폐증이란 단어도 떠올렸다. 절대 잊혀지지 않을 말, 모든 생각의 끝에 붙어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폐증이란 메두사의 머리처럼 평생 내 어깨를 짓누를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다.

시를 읽을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음미하는 내 습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단어들을 똑바로 바라보면 정확하게 조합할 수 없다. 단어들을 고요함 속에서 음미해야 하기 때문에 먼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럼 나의 이 습관을 다니엘이 물려받은 것인가?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다니엘은 고개를 돌린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을 동시에 하지 못하니까. 다니엘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말을 할 땐 나를 쳐다보라고 다니엘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때마다 다니엘이 약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환한 빛을 정면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다니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세 살 난 우리 귀여운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약속했다. 네가 온전한 네 자신의 모습으로 자라게 해줄게. 원한다면 언제나 먼 곳을 쳐다봐.

다니엘이 나에게 새 신발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정작 다니엘은 내 왼쪽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리 신발 사줘.”

모두 세 단어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천장을 쳐다보며 다니엘이 말했다.

“고리 달린 신발 사줘.”

이제 네 단어로 된 문장이다. (P259-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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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이 떠나자 내 인생이,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한때 주방 칼이나 가위, 차 열쇠, 배터리처럼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도구들로 가득했던 서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랄까. 그러나 텅 빈 서랍에서 새로 발견한 것도 있었다. 내 안에, 스티븐과 살던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내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랑스러운 손길이, 미묘한 사람의 감정이 나를 바꾼 것이다. 예전의 나를 지우고 새로운 나로 변신시킨 것이다. 그러나 앤디는 사람들이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스티븐이 떠난 뒤 내가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티븐을 원하는 마음, 그를 이 집에, 우리의 아이들 옆에 두겠다는 생각은 스티븐이 떠난 뒤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항상 그를 기다린 것은 나였다. 그것은 우리의 결혼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그가 직장에서 돌아오기를, 내 전화에 응답전화를 해주기를, 침대로 돌아오기를 바란 것은 나였지 그가 아니었다. 나는 항상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예의 바르게 옷을 입었고 올림머리를 하고 파티에 나갔으며, 이제 ‘바지’를 하의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릴 때 쓰던 말투도 버리고 그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한 쌍’이란 둘이 한 배에 탔다는 뜻이다. 사냥개 한 쌍도 먹잇감을 쫓을 때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 스티븐과 나도 한 쌍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나보다 조금 앞서 나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야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속도를 조금만 늦추고 나를 기다려주길 바랐다. 그것이 기다림인 줄 몰랐다. 나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비나를 떠나버린 남자, 아니 비나가 떠난 남자도 스티븐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나는 비나에게 물었다.

“미국 남자들은 항상 친절할 줄 알았어요.”

비나의 몸이 의자에 쑥 들어가는 바람에 머리가 팔에 닿았다. 골풀로 만든 바닥 매트와 테이블 위로 비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에 따라 달라요.” (P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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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베텔하임이란 남자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어요. 시카고에 자폐아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사람인데 자기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떠들고 다녔어요. 사람들은 그를 영웅처럼 떠받들었죠. 우리는 자폐아들과 그 아이들의 엄마에 대해 그 사람이 쓴 논문을 공부했죠. 내가 보기에 그는 그냥 미친 사람일 뿐이었어요. 하지만 시험을 칠 때는 베텔하임의 논리에 따라 교수님이 원하는 답을 적어야 했어요. 물론 요즘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는 않지만......”

“알아요. 베텔하임 박사.”

“우리 제일 큰 형 리암이 자폐증이었어요. 아주 심각했어요. 내가 어릴 때 형에 대해 기억하는 건 형이 벌거벗은 채 집 안을 뛰어다녔고 머리에 온통 퍼렇고 검은 멍이 들 때까지 벽난로에 머리를 찧어댔다는 것뿐이에요. 엄마가 헬멧을 씌워주셨지만 형은 항상 그걸 벗어 던지고 벽난로를 향해 돌진했죠.”

다니엘처럼 흐느적거리는 긴 다리로 거실을 뛰어다니는 앤디 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아이는 다니엘보다 키만 조금 더 클 뿐이다.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머리에 난 주먹만 한 혹이 함께 들썩거린다. 이마에 심장이 또 하나 붙어 있는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순진해서 사람을 잘 믿었어요. 무리에 복종하는, 수줍은 어린 양 같은 사람이었죠. 사람들은 형이 우리 일곱 형제를 해칠 거라고 말했어요. 그때 어린 우리들은 형을 피해가며 한창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는데 형의 행동이 도저히 걷잡기 어려웠나 봐요. 형은 십 대가 되어서도 가구들 사이를 원숭이처럼 뛰어다녔어요. 그래서 우리 엄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죠.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까요. 아버지도 허락하셨고요. 아버지도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몰랐어요.”

나는 앤디의 아버지를 그려 보았다. 장화 벗는 기구에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를 끼우고 발을 세게 잡아당겨 신발을 벗는 아버지, 굳은 실투성이에 마디마디마다 흉터가 진 손,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아들 때문에 억울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한 채 당신이 손수 다듬은 집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앤디의 아버지가 눈에 선했다.

“우리 형은 죽었어요. 간질이었죠.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작을 하는 바람에 그대로 떨어졌대요. 형이 소위 학교라는 곳에 간 지 채 1~2년도 안 되었을 때 일이었어요. 형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못 배웠을 거예요. 엄마는 항상 형을 집으로 데려오길 원했어요. 만약 형이 얼마 못살고 죽을 운명이라면 다른 식구들처럼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아야 된다고 하셨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손으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난 화가 나지 않았어요. 내가 아홉 살인가열 살 때였죠. 형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는데 아무리 해도 이야기가 안 통했거든요.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 당신도 상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달랐어요. 우리 일곱 형제들이 형 한 사람의 자리를 메우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항상 슬퍼하셨어요. 우리가 잘 될 때는 기뻐하셨고, 기분 좋게 지내려고 항상 최선을 다하셨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죠, 멜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배 위에 내 몸을 뉘였다. 그를 따뜻하게 덮어주고 싶었다. 그의 목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피부에서 땀 냄새가 났다.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언제 한번 같이 가요. 아이들을 좋아하는 분들이시죠. 당신도 좋아하실 거예요.” (P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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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를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고, 혹은 그냥 되는 대로만 보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그들에게 있어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위험을 물리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꺾는 일과 같다. 불길 속을 뚫고 들어가서 포악한 마법의 용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다. 나쁜 방법이라도 뭐든 해보는 것이 훨씬 낫다.

나는 아들이 동네 친구들의 칼에 찔려 죽은 아버지를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어느 으스름한 토요일 초적녁, 신고 있던 새 운동화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동네 깡패들의 칼에 찔려 죽었다. 몇 년 전 일이었다. 그 후 아이의 아빠는 계속 꿈을 꿨다고 한다. 다니엘이 자폐증이란 진단을 받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밤이나 낮이나 쉴 새 없이 꿈이 꿔지더라는 것이다. 아이의 아빠는 자신도 아이가 찔려 죽는 그 현장에, 아이를 둘러싼 깡패들 뒤에 있었다고 했다. 어떤 꿈에서는 깡패들 뒤로 무성하게 자란 덤불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기도 했고, 그 사건이 일어나려는 순간 자신이 버스에서 내려서 깡패들을 무찔러 아이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구해내는 꿈도 꿨다고 했다. 아이는 가슴팍에 10센티미터가 넘는 칼을 맞고 죽었지만, 그의 꿈에서는 그 칼이 아이의 몸에 터럭만큼의 흉터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아이를 갓난아기처럼 양팔에 감싸 안고 초인적인 스피드로 달렸다고 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몰랐지만 꿈속에서는 분명히 어떤 곳을 향해 날아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명의 흉악한 깡패들에게서, 그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칼에서 무사히 도망쳤다고 했다.

하지만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다. 아빠는, 아이가 죽었다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 다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현실은, 우리 아이가 비정상적인 뇌로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동안 나는 자폐증이라는 끔찍한 지옥에서 우리 두 사람이 무사하게 빠져나올 방법을 찾아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지도록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놀이 치료와 응용행동 치료법을 병행하고, 앤디가 개발한 방법이면 무엇이든 연습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다니엘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늘어나고, 또 어느 순간 놀이에 흠뻑 빠진 다니엘을 보면 다니엘도 점점 보통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자폐증’에 굴복당한 아이가 아니었다.

다니엘이 앤디에게, 나나 에밀리에게 하는 것처럼 다른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다면, 어떤 위기가 닥쳐도 다니엘의 인생이 처절하게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시간이란 요인이 꼭 필요하다. 다니엘이 발전하는 동안 다른 아이들도 발전한다. 그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다니엘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안다. (P34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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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약간 피곤했다. 다니엘이 가구들 사이를 마구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은 아무 말 없이 자꾸 벽에 머리를 짛으려 했다. 다니엘을 위해 부엌에서 특별 머핀을 만들고 있을 때 다니엘이 낮은 소리로 킥킥거리며 뱅글뱅글 돌아 나에게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어지러워서 제자리에 풀석 주저앉았다. 그런 다니엘이 너무 다행스러웠다. 다니엘은 정상이야, 그러니 불평하지 말자, 나는 혼자 되외었다. 다니엘은 껍질이 벗겨진 바나나처럼 통통한 입술을 꾹 닫고 있다가 원숭이처럼 입술을 쭉 내밀어 나에게 키스했다.

“사랑해.”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니엘도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

“왜 엄마를 사랑해?”

내가 물어보았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엄마가 기차를 좋아하니까.”

다니엘이 명사를 정확하게 사용한 건가? ‘자기’가 기차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나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내가 기차를 좋아한단 말이니?”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마음속으로 한 줄기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P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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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일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래서 지금 그런 일이 생긴 거야? 항상 끔찍한 사건들만 일어나는 거야?”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얼굴을 가진 내 남편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스티븐은 설사 말로 설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얼굴 하나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 내 잘못이야, 멜라니. 그땐 정말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어. 이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잊고 있었던 거야. 내가 당신의 어떤 점을 사랑했는지 기억하냐고 물었지, 이제 말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날카로운 저항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됐어.

스티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신은 나와 달랐어. 어떤 것이 되려고 철저하게 계산하지도 않았고 일부러 그렇게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어. 격식 있게 차려입거나 멋을 부리려고 하지도 않았지. 난 그런 당신을 좋아했던 거야. 지금까지 난 어떤 특정한 타입의 남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런 남자가 되고 싶어 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내가 화려한 건물에 붙어 있는 장식품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동안 당신은 풀밭 위를 날아갈 듯 뛰어다니며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자라났지. 내가 당신의 어떤 점을 사랑했냐고? 바로 그런 당신이야. 과거의, 또 지금 이대로의 당신.”

이런. 갑자기 앤디가 한 줄기 연기로 변해서 내 인생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냉랭한 한기가 밀려왔다.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기쁨에 마음속 깊이 전율을 느꼈었는데, 이제 내 남편이 나타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려고 한다. (P37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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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이 나를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대화가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난 가야 돼.”

나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쫓아와 주길 바랐다. 아이들의 아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괴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공원을 가로질러 공원 문을 나와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인도가 흔들렸고,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절뚝거리다가 내 발이 걸려 넘어졌고, 겨우 일어났다가 다시 휘청거렸다. 정말 힘든 일이다. 그도 힘들 것이다. 나는 걸음걸이에 집중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아주 조심히 움직였다. 내가 걸어가는 방향만 생각했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나를 기다릴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집에 도착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는 에밀리의 모습이 보였다. 에밀리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창가에서 사라졌다가 다니엘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다니엘이 나를 가리키며 제 누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에밀리가 다시 활짝 웃었다. 스티븐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가 따라오지 않아서 오히려 감사했다.

나는 앤디에게 전화를 걸어서 좀 늦겠다고 했다.

“이제 막 애들을 태웠어요.”

그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에서 그가 무엇을 알아챈 듯했다.

“잠깐, 아직 끊지 말아요.”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멜라니,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난 그냥 여기 있을게요. 당신을 기다릴 수 있어요.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요.”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아니까. 나는 그를 믿으니까. (P382-383)

영화 사랑을 위하여 4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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