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클리브의 <일곱번째는 내가 아니다>

영화 <Dark City: The Cleaner> 2024년

by 노용헌

느긋하게 주방으로 걸어간다. 위층 욕실에서 안젤라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안젤라에게는 나중에 가도 된다. 일단 뭘 좀 마셔야겠다. 스테인리스 냉장고 문에 비친 내 모습이 꼭 유령 같다.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앞에 1분 가까이 쪼그리고 앉아 시원한 냉기를 쐰다. 맥주와 콜라가 있다. 맥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비틀어 연 뒤 식탁 의자에 앉는다. 평소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닌데도 20초 만에 한 병을 모두 들이킨다. 냉장고에 맥주가 한 병 더 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의자에 편히 기대앉아 두 발을 식탁 위에 올리고는 신발을 벗을까 말까 고민한다. 그 기분을 아는가? 무더운 날 직장에서 종일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맥주를 들고 의자에 앉아 식탁에 다리를 올린 채 신발을 벗을 때의 그 기분.

천국이 따로 없다.

위층에서 안젤라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올해 최고의 맥주를 가볍게 홀짝인다. 5분에 걸쳐 두 번째 병을 비우고 나니 배가 고프다. 다시 냉장고를 열자 식은 피자 한 조각이 눈에 띈다. 안 될 거 없다. 다이어트 중도 아니고.

다시 의자에 앉아 식탁에 발을 올린다. 신발을 벗으면 이 피자도 맥주처럼 천국을 선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피자를 급하게 먹어 치운 뒤 서류 가방을 집어 들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침실 스테레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요란하게 흘러나온다. 제목이 뭐더라? 제목도 가수도 모르지만 침대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몇 시간은 이 멜로디가 귓전에 맴돌 것 같다. 서류 가방 옆에 앉아 신문을 꺼낸다. 1면에 요즘 잘 팔리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런 기사 중 절반은 신문사가 판매 부수를 늘리려고 지어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수요가 분명 있으니 말이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잦아들지만 무시하고 계속 신문을 읽는다.

온 도시를 떨게 한 어떤 남자에 관한 기사다. 여자들을 죽이고 고문한 살인마에 관한 기사.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소재다. 몇 분 뒤 안젤라가 하얀 수증기와 로션 냄새에 휩싸인 채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욕실에서 나온다.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미소를 짓는다.

안젤라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당신 누구야?”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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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도감은 금세 사라지고 이내 기분이 더러워진다. 걸으면서 두 발을 내려다본다. 그렇다. 지금 나는 기분이 더럽다. 울적하다.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나는 결국 목숨을 빼앗았다. 잔디밭에 멈춰 서서 덤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꺾고 냄새를 맡아봐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다. 장미 가시로 손가락을 찌른다. 상처 난 손가락을 입속에 넣으니 안젤라의 맛이 피 맛으로 바뀐다. 장미를 주머니에 넣고 안젤라의 차로 향한다. 이제는 낮게 깔린 태양이 내 눈을 똑바로 비춘다. 날이 선선해진 걸 보면 지금 느껴지는 열기는 태양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웃으며 남은 하루를 즐기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가엾은 플러피. 가엾은 야옹이.

가끔은 동물을 도구로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인 이 미친 세상에서 내가 그것까지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작은 고양이의 목을 부러뜨린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속이 울렁거린다.

안젤라의 차에 타 시동을 건다. 훔쳐서 진입로에 세워둔 차를 피해 나가려니 앞마당 잔디를 가로지르는 수밖에 없다. 승차감이 좋다. 구매한 지 길어야 2년밖에 안 된 것 같다. 계속 몰고 다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림처럼 완벽한 가족이 사는 그림처럼 완벽한 집이 백미러 속에서 점점 작아진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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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실에는 히피 스타일 녹음실에 있을 것 같은 작은 소파가 있고 그 앞에는 작은 탁자가 있는데, 탁자 위에는 내 가장 친한 금붕어 친구들, 피클과 제호바가 사는 큰 어항이 놓여 있다. 피클과 제호바는 불평하는 법이 없다. 금붕어는 5초마다 기억이 초기화돼 화나는 일이 있어도 곧 잊어버린다. 내가 깜박하고 먹이를 주지 않아도 배고프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것이다. 내가 바닥에 내던져도 파닥거리기만 할 뿐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제일 아끼는 녀석은 2년 전 먼저 입양한 피클이다. 피클은 중국에서 온 알비노 금붕어로, 몸통이 하얗고 지느러미가 붉으며 내 손바닥보다 약간 크다. 제호바는 피클보다 조금 더 작고 금색이다. 금붕어는 최대 40년까지 살 수 있다. 나도 적어도 그 정도는 살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안 볼 때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직까지 새끼 금붕어가 태어난 적은 없다.

먹이를 조금 뿌려주고 녀석들이 수면으로 올라와 먹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동시에 신이 된 기분이 든다. 내가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금붕어는 나를 우러러본다. 두 녀석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고 언제 밥을 먹는지가 모두 내 손에 달렸다. 그런 책임을 지고 있는 게 좋다. 금붕어들이 먹이를 먹는 동안 말을 건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플러피를 죽인 고통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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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는 마틴과 자라면서 간호사가 되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간호 학교 재학 3년차였지만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간호사로 일할지, 아니면 마틴과 조 같은 사람을 곁에서 도울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틴이 세상을 떠났고 그 일로 샐리는 누군가를 돕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질병과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옳은 일과 옳은 선택만 해도 어떤 병은 태어날 때부터 몸 안 어딘가에 숨어 때를 기다리다 덮쳐온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너무 많았고 샐리는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또 하나의 요인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2년 전 파킨슨 병 진단을 받고 실직한 이후로 계속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주마다 보조금이 지급되는데 그것만으로는 치료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학업을 마치는 건 샐리에게 사치였다. 샐리는 아버지를 돌보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돈을 벌어 가족들이 이 시련을 헤쳐 나가게 도와야 했기에 학업을 지속할 여유는 없었다. 마침 경찰서에 상주하며 건물을 관리하던 아버지의 친구가 퇴사를 앞두고 자기 자리를 물려줄 조수를 찾고 있었다. 평소 손재주가 좋았던 샐리는 그 자리를 꿰찼고 6개월이 지난 지금은 그의 책상과 창밖 풍경까지 제 것으로 만들었다. (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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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찰서에서 일한 지는 4년이 넘었다. 그전에는 실업자였다. 그때 누군가를 죽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돈’이나 ‘댄’,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시신이 발견되고 두 달 뒤에 5만 달러의 보상금이 걸린 걸 보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남자의 지갑에서 몇 백 달러밖에 챙기지 못했는데 말이다. 나는 억울했고 이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경찰의 수사망이 어디까지 좁혀졌는지 알아야 했다. 수사 진행 상황이 궁금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미쳐갔다. 아침마다 거지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창밖을 빤히 내다보면서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끼니도 대충 때웠다. 만신창이가 된 나는 자포자기로 가장 대담한 일을 감행했다. ‘자백’을 하러 경찰서를 찾아간 것이다.

그날 나를 담당한 경찰은 슈뢰더 형사였다. 그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를 만난 지 몇 초 만에 두려움은 사라졌다. 내가 그곳의 어떤 경찰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시체를 태워 내 DNA를 제거했고 타고 남은 시체는 강물에 던져 모든 게 씻겨 내려갔다. 나는 내가 한 사후 처리에 확신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절대 안 할 짓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날 나는 두 경찰의 안내를 받아 작은 취조실에 앉았다.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취조실은 바깥이 내다보이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고 껌과 땀 냄새가 났다. 한가운데에 나무 탁자 한 개와 의자 두 개가 있고 화분이나 그림 따위는 없이 거울만 딱 하나 있었다. 의자는 앞다리가 약간 짧아 몸이 계속 앞으로 미끄러지는 바람에 상당히 불편했고, 탁자 위에는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지금은 내가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는 곳이다.

나는 취조실에서 몇 달 전 살해된 여자를 죽인 범인이 나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어떤 여자 말씀인가요?

아시잖아요. 보상금이 걸린 여자요.

남자였는데요, 선생님.

네, 제가 그 남자를 죽였어요. 이제 돈을 주시겠어요?

자백의 진실성에 대한 경찰의 의심을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살인을 자백했으니 보상금을 달라고 우긴 뒤 피해자를 그냥 ‘밖에서’ 칼로 찔렀다고 말하니 다들 내 ‘멍청한 조’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 나는 한니발 렉터에서 포레스트 검프로 변신하면서 경찰이 용의자를 한 명도 특정하지 못했단 걸 알아냈다. 보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커피와 샌드위치를 받았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가 단잠을 잤고, 다음 날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깼다. 기분이 끝내줬다. 그날도 내가 전혀 모르는 살인을 ‘자백’하러 가자 경찰은 나를 안쓰럽게 여겼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관심을 너무 받고 싶은 나머지 엉뚱한 곳을 찾아온 착한 사람이었다. 마침 경찰이 청소부 중 한 명이 ‘우연히’ 실종됐고 그 자리에 지원한 나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포용이니 공정이니 하는 요즘 세상 분위기에 맞추느라 뉴질랜드의 경찰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망가진 사람을 일정 수만큼 고용하는 할당제를 따라야 한다. 어쨌든 청소부는 청소기를 돌리고 대걸레를 물에 담글 줄만 알면 된다고 여긴 크라이스트처치 경찰서는 기꺼이 나를 고용했다. 다른 장애인을 뽑았다가 어떤 폭탄을 떠안을지 모르니 차라리 날 뽑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최저임금을 받고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경찰서 복도를 활보하는 세상 무해한 종이 됐다. 덕분에 잠 못 이루는 밤은 사라졌다. (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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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내가 죽인 일곱 명 중 두 번째 희생자였고 아직 그 주차장에 있다. 사방이 뚫린 옥상이라 바람이 불면 냄새가 흩어지는데다 아무도 옥상에 올라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저였다면 절대 트렁크를 열어보지 않았을 거예요. 슈뢰더 형사님.

주차권은 기념품으로 아직 갖고 있다.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두었다.

살인을 처음 할 때는 시신을 꼭 어딘가에 버려야 하는 줄 알았다. 요즘에는 귀찮은 일을 하기 싫어 그냥 피해자 집에 두고 온다. 어차피 경찰에 붙잡힐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를 쳐다보는 사진 속 얼굴 중에 장기 주차 중인 그 여자는 없다. 대신 낯선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일곱 장의 사진 중 네 번째 사진 속 여자다. 이제는 이름과 얼굴을 알지만 이곳에 사진이 붙기 전까지 나는 4번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6주 전 그녀의 사진이 붙은 뒤로 나는 매일 잠깐씩 멈춰 서서 그 여자의 이목구비를 바라본다. 다니엘라 워커. 금발에 미인이다. 확실히 내 취향이긴 하지만 내가 죽이지는 않았다. 다니엘라의 눈동자는 죽은 뒤에도 은은한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사망 전 사진과 사후 사진을 보니 그랬다. 처음에 슈뢰더 형사는 이 사진들 때문에 내가 회의실에 들어오는 걸 꺼렸지만 얼마 뒤부터는 잊어버렸는지 상관하지 않는 건지 그냥 내버려둔다.

죽기 몇 년 전 일상을 찍은 사진에서 다니엘라 워커는 행복한 30대로 보인다.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인데 머리칼이 어깨 위로 반짝이며 흘러내린다. 입술은 미소를 띠며 벌어져 있다. 다니엘라의 사진은 회의실 벽에 붙은 뒤로 매일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냐고? 그녀를 죽인 놈이 내게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놈은 겁이 많은 게 분명하다. 오죽하면 자기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날 이용했겠는가!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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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오늘 밤 누굴 죽일 건 아니다. 내가 늘 살인 충동에 시달리는 짐승은 아니다. 누군가를 죽일 핑계를 찾으면서 어린 시절의 공격성을 마구 분출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인 테드 번디나 제프리 다머처럼 이름을 떨치고 싶어 안달 난 놈도 아니다. 번디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과 끝난 뒤에도 추종자를 거느렸고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결혼까지 한 괴짜였다. 서른 명이 넘게 죽였지만 결국 붙잡힌 패배자이기도 하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고 결혼하고 싶지도 않다.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면 존 레논을 너무 사랑해 총으로 쏘아 죽인 채프먼처럼 유명한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특별한 취미가 있을 뿐 평범한 조다.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환청이 들리지도 않는다. 신이나 사탄이나 이웃집 개를 위해 살인을 하지도 않는다. 종교도 없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뿐이다. 복잡할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들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게 좋다. 이 세상에는 30억에서 40억 명의 여성이 있다. 그러니 한두 달에 한 명씩 죽이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다 관점의 문제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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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속 사진들을 휙휙 넘기다 안방 벽과 복도와 연결된 출입구를 찍은 사진에서 멈춘다. 사진을 들어 올려 찬찬히 살펴본다. 사진을 옆으로 치우고 눈앞의 범죄 현장을 찬찬히 살펴본다. 사진 속 출입구와 현장의 출입구를 비교한다. 똑같은 벽, 똑같은 카펫, 똑같은 실내장식. 사진에서는 푸른 잎이 무성했던 화분이 지금은 갈색으로 시들고 축 늘어져 있다.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사진에는 벽 아래쪽을 등진 싱싱한 화분 옆에 만년필이 있는데, 지금은 시든 화분 옆에 볼펜이 놓여 있다. 물론 전체 사건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펜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볼펜은 증거물 목록에도 안 올랐고 수거되지도 않았다.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볼펜은 꽤 중요한 단서다. 이 자리에 원래 있던 만년필이 흉기였을 수도 있다. 칼보다 강력한 흉기 말이다. 볼펜 옆에 쭈그리고 앉아 벽을 유심히 살펴본다. 자세히 보니 한 군데가 작게 움푹 파여 있다. 몸을 더 가까이 기울인다. 파인 곳 한가운데 아주 작은 잉크 자국이 나 있다. 만년필을 벽에 던진 걸까? 그 만년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왜 볼펜으로 바꿔치기 했을까? 다니엘라가 만년필로 범인을 찔렀나? 그래서 여기로 던져졌나? 만약 그렇다면 그 펜에는 범인의 DNA가 묻어 있을 것이다. 범인을 찾을 지도인 셈이다. 그 만년필은 따로 사진을 찍을 가치가 있는 증거다. 아마 두세 장은 찍었을 것이다. 파일에도 따로 들어갔을 테고 말이다.

장갑 낀 손으로 볼펜을 집어든다. 하얀 가루가 얇은 막처럼 덮여 있다. 지문을 채취했지만 별다른 게 안 나와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다. 볼펜을 벽에 움푹 들어간 자국에 대보지만 어떤 방향으로 대봐도 일치하지 않는다. 분명 만년필 사진을 찍고 나서 거기서 지문을 채취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걸 볼펜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누가 그랬을까?

답은 명백하다. 범인이다. 그날 이 방에는 범죄 현장을 조사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러니 범인이 경찰이라는 것 또한 명백하다. 그러고 보니 부검 보고서에 범인이 경찰의 법의학적 수사 과정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내용이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날 벌어진 일을 그려본다.

범인이 안방에 들어온다. 다니엘라를 공격한다. 얼굴을 때린다. 다니엘라가 만년필로 범인을 찌른다. 심각한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화가 난 범인이 만년필을 벽에 던진다. 펜촉에 벽이 파인다. 범인이 다니엘라를 침대로 던진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범인은 자기 얼굴을 본 다니엘라를 없애야 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다니엘라를 묶을 때 이 집에 있던 물건을 쓴 걸 보면 알 수 있다. 다니엘라가 죽자 범인은 곧바로 죄책감을 느꼈다. 증거를 지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뒤 눈을 감기고 시신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급하게 이곳을 빠져나갔다. 다니엘라를 위해 기도를 했을 수도 안 했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가 그때는 만년필의 존재를 잊었던 것이다. 동료들과 현장을 조사하러 이곳에 돌아왔을 때야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보았다. 사진은 이미 다 찍힌 뒤였다. 만년필을 그냥 주워서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바꿔치기할 다른 만년필도 없었다. 그래서 범인은 아무도 만년필과 볼펜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도박을 했고 한동안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나도 그 ‘아무도’에 해당했고,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방 한가운데에 시체가 있는데 누가 겨우 구석 화분 옆에 놓인 만년필 한 자루에 신경을 쓰겠는가, 결국 시체는 맥거핀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한 가지를 보느라 다른 것을 놓친 것이다. (P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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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내 귓바퀴를 또 탁 때린다. “엄마한테 말대꾸하지 마.”

“말대꾸하는 거 아니에요, 엄마. 그냥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말한 것뿐이에요.”

엄마는 또 손을 올렸다가 내가 얼른 사과하자 화가 가라앉는지 손을 내린다. “미트로프를 만들었단다, 조. 미트로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니.”

“매번 말해줄 필요 없어요.”

“무슨 말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가져온 꾸러미를 열고 꽃다발을 꺼내 엄마에게 건넨다. 이번에는 가시가 없는 꽃이다.

“아름답구나, 조.” 엄마가 신이 난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나는 엄마를 따라 주방으로 간다. 서류 가방을 식탁 위에 내려 놓는다.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든 칼들을 바라본다. 총도 바라본다. 글록 권총 손잡이에 손을 얹고 거기서 버틸 힘을 얻으려 애쓴다. 엄마는 내가 준 꽃을 꽃병에 꽂고는 물을 넣지 않는다. 내가 어제 준 장미는 없다. 이미 일주일이 지난 줄 알고 버린 모양이다. 엄마가 찬장에 손을 뻗어 아스피린 상자를 꺼내더니 꽃병에 한 알을 떨어뜨린다.

“이렇게 하면 꽃이 더 오래 산다는구나.” 엄마는 가문의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돌아보며 윙크한다. “오늘 본 TV 프로그램에서 그러더라.”

“그래도 물은 넣어야 할 거예요.”

엄마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닐걸.”

“확실해요.”

확신 없는 표정으로 엄마가 말한다. “이번에는 내 방식대로 해보고 효과가 없으면 다음에 네 방식대로 해보자. 어떠니?”

나는 괜찮을 것 같다고 하고는 엄마를 위해 가져온 게 또 있다고 말한다.

“그래?”

초콜릿 한 상자를 꺼내 엄마에게 건넨다.

“나를 독살하려는 거니, 조? 안 그래도 콜레스테롤이 높은데 설탕을 먹이려고?”

아, 제발 좀. “그냥 잘해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럼 초콜릿 같은 건 사 오지 마. 그게 잘해주는 거야.” 엄마가 짜증 난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지만 콜라에도 설탕이 들었잖아요.”

“지금 엄마한테 잘난 척하는 거니?”

“그럴 리가요.”

엄마가 내게 초콜릿 상자를 던진다. 상자 모서리가 이마에 부딪혀 잠시 눈앞에 별이 번쩍인다. 부딪친 곳을 문질러보니 작은 자국이 생겼지만 피는 나지 않는다.

“네 저녁이 다 식었구나. 나는 먼저 먹었다.”

나는 엄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초콜릿을 가방에 다시 넣는다.

저녁을 데워주겠다는 말이 없지만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아 직접 데우려고 전자레인지로 다가간다.

“네가 늦게 와서 식은 거야. 내 전기로 데울 생각은 하지 마라.” (P10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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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경찰은 나에 대한 단서가 하나도 없으니 급할 건 없다. 며칠이나 몇 주가 걸려도 된다. 하지만 내 안에는 승부 근성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도 그놈은 내게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라고 몰아붙인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다. 단지 경찰에 잡히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경찰보다 사건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 싶다.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남자, 스스로를 시험하려 하지 않는 남자를 과연 남자라 부를 수 있을까.

내 안의 또 다른 나, 유희를 좋아하는 내가 속삭인다. ‘수사가 더 복잡해지게 만드는 게 어때? 조사할 피해자를 하나쯤 더 던져주라고.’ 피해자가 한 명뿐일 때도 수백 명, 아니, 천 명의 관계자 진술을 받아낼 수 있다. 경찰은 이 진술들을 상호 참조해 피해자의 활동을 지도로 그린다. 하지만 피해자가 한 명 더 생기면 진술의 수는 두 배로 늘고 업무량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러면 이젠 살인과 관련된 사람들은 덜 조사하게 되고 그보다 더 앞선 살인과 관련된 사람들은 거의 방치된다. 새로운 흔적이 발견되면 나머지 흔적들은 희미해진다. 결국 기존의 증거는 포기하고 결정적 단서가 나타나길 기대하며 다음 피해자를 기다리게 된다. 일손이 점점 부족해져 형사들이 과로에 시달리는 건 물론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형사는 빈틈이 많아진다. 두 명이 연달아 살해되면 이전 진술들은 죄다 회의실 탁자 밑에 있는 커다란 상자에 처박힌다.

나는 이틀에 한 번씩 그 상자 주변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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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샐리를 도와주기로 한다.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어요.”

샐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정말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꿈꾸던 일은 아니지만 남자라면 IQ가 높든 낮든 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달을 올려다보며 달 위를 걷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달에서 살 수는 없지만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 달의 흙으로 눈사람 천사를 만들 수는 있잖아요.”

“멋진 생각이네요.”

멋지고말고. 나는 계속 말을 잇는다. “달에서는 나 혼자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평화로울 거예요.”

샐리는 미소가 흔들린다. “사람들이 조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돼요?”

“가끔은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내 진짜 능력을 눈치챌까 봐 걱정된다. “지능이 ‘덜’어지면 힘들어요.” 나는 일부러 틀리게 발음한다.

“떨어지면.”

“네?”

“아니에요, 하느님은 어때요?”

“하느님요?” 나는 그런 사람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 묻는다. “하느님도 지능이 ‘덜’어진다고요?”

“아뇨, 하느님이 조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한 적 있느냐고요.”

좋은 질문이다. 하느님이 너를 사랑한다거나 벌줄 거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었다면 나도 당연히 걱정했을 것이다. 온 세상에 ‘나는 뭐든 다 믿는다’ 라고 광고하는 샐리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가 보인다.

“늘 걱정하죠. 하느님은 항상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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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가서 나무에 기대선다. 멜리사가 핸드백을 뒤져 수갑을 꺼낸다. 맙소사. 멜리사가 수갑을 내 쪽으로 툭 던지지만 나는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주워요.”

“왜요?”

멜리사가 내 음경에 총을 겨누자 나는 수갑을 집어 든다.

“왼쪽 손목에 수갑 한쪽을 차요.”

“뭘 하려고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불알을 쏠 거예요.”

나는 내 손목에 차가운 금속 쇠고랑을 내리쳐 채운다. 톱니가 제자리에 걸리면서 딸깍 소리가 난다.

“드러누워서 양팔을 위로 해서 나무를 두른 다음 반대쪽 손목에도 수갑 채워요.”

“정말로요?”

“정말로요.”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짜증나게 하지 말고 그냥 하지 그래요.”

시키는 대로 한다. 바닥에 드러누우니 등에 풀이 닿아 간지럽다. 자세가 몹시 불편하지만 멜리사는 신경도 안 쓸 것이다. 두 팔을 위로 뻗어 나무를 감싸 안은 뒤 반대쪽 손목에도 수갑을 채운다. 멜리사는 내게 총을 겨눈 채 나무를 빙 돌며 확인하고는 내가 느슨하게 채운 수갑을 더 꽉 채운다. 수갑이 손목뼈를 꽉 눌러 아프지만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픈 티를 낼 순 없다. 그렇다.

나는 진짜 사나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진짜 사나이.

멜리사가 내 쪽으로 돌아와 수갑을 하나 더 꺼낸다. 멜리사는 계획이 다 있었다.

내 발목에 수갑을 채우는 멜리사를 발로 차볼까 고민하지만 그래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멜리사에게는 총이 있다. 수갑을 여는 열쇠도 있다. 내게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는, 발기한 음경만 있을 뿐이다. 수갑과 나무를 당겨보지만 소용없다.

“편해요, 조?”

“별로요.”

멜리사가 내 재킷 양쪽을 움켜쥐고 쫙 펼친다. “여기 또 뭐가 들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답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확인할 것이다. 역시나 멜리사는 주머니를 뒤져 칼을 찾아낸다.

“재미있는 물건을 갖고 다니네요.”

어깨를 으쓱하지만 멜리사는 보지 못한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은 채 누워 있으면 제대로 으쓱할 수가 없다. 멜리사가 내 칼을 허공에 던져 한 바퀴 돌리고는 날이 앞으로 향하게 칼자루를 잡는다. 나보다 칼을 더 잘 다룬다. 사실은 요리사일지도 모른다. 멜리사가 이번엔 청바지를 뒤져 지갑을 찾아낸다.

“신분증은 없어요?”

“술 마실 때 신분증 검사 받을 나이는 아니니까요. 그 뜻으로 물어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이 된 지는 얼마나 됐어요?”

멜리사는 내가 경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마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알았을 것이다. “당신이 건축가로 산 시간과 비슷할걸요.”

그녀가 웃는다. “경찰이 이 칼을 보면 아주 좋아하겠네요. 요즘 벌어진 몇 가지 나쁜 일과 연관 지을 수 있을 테니까요. 총에 담긴 사연도 꽤 많을 것 같은데요?”

“뭐든 사연이 있기 마련이죠.” 내가 말한다. “당신의 사연은 뭔데요?” (P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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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가 웃는다. “카버 맞잖아. 다 알아. 날 다음 표적으로 점찍었던 거.”

“잘난 척하지 마.”

“잘난 척하는 건 아니야. 내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술집에서 우연히 낯익은 얼굴을 봤을 뿐이야. 난 가끔 경찰을 집까지 미행하는 취미가 있는데 그러다 네가 경찰서에 드나드는 걸 봤어. 작업복을 입고 다니던데 뭐 하는 사람이야? 청소부? 아무튼 잠깐 얘기해보면 재밌겠다 싶었지. 그런데 네가 경찰이라고 거짓말하니까 갑자기 흥미가 확 생겼어. 어디까지 그 거짓말을 밀고 갈지 궁금하더라고. 그러다 사건 이야기가 나왔어. 네 사건, 넌 화장실 청소나 하는 사람치고는 수사 중인 사건이며 살인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두 번째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네가 누군지 감이 왔어. 내가 원래 사람 마음을 잘 읽거든. 전에는 안 그랬는데 한번 호되게 당한 뒤로 달라졌지. 인간은 실수의 대가를 크게 치를수록 빨리 배우니까. 어쨌든 그 덕분에 요즘에는 전문가 뺨쳐. 테스트만 해보면 돼. 방법은 간단해. 내가 외지 사람이라고 슬쩍 흘리니까 넌 곧바로 날 다음 피해자로 점찍었어.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테니까.”

“잘못 봤어.”

“아니, 제대로 봤어.”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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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조.” 샐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기본에 충실하자, 라텍스 장갑을 끼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고 그러다 주변에 같은 장갑이 여러 개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조는 이 라텍스 장갑을 어디에 쓸까? 아마 청소할 때 쓰겠지. 샐리는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들여다보려고 조의 허벅지 안쪽 살을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한쪽 고환이 공구로 조여지고 으깨지고 훼손된 상태였다. 펜치나 바이스 그립을 쓴 것 같았다.

“강도를 만났어요.” 조가 다시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강도가 누군데요?”

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앞만 똑바로 볼 뿐이었다.

샐리는 계속 상처를 살폈다. 고환을 제거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고환은 분명 없애야 하고 샐리에게 그런 수술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병원에 가야 해요, 조.”

“안 돼요. 그자들이 다시 올 거예요. 날 해칠 거예요. 제발..... 어떻게든 낫게 해줄 수 있어요?”

샐리는 조를 내려다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럼요.”

제일 먼저 창문부터 열었다. 실내 온도가 40도는 되는 듯 벌써 땀이 흘렀다. 창밖에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물이 끓는 동안 천에 차가운 물을 적셔 조의 이마에 올렸다. 조는 느끼지도 못하는 듯 했다. 샐리의 구급상자는 간호학교 시절부터 써온 물품을 갖추고 있어 전문가용에 가까웠다. 딱 하나 국소 마취제가 없지만 운이 좋으면 조의 의식이 돌아오기 전에 수술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가 운이 좋아야 했다. (P23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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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백인, 이런 범죄는 대부분 인종을 넘나들지 않으므로 피해자는 모두 백인 여성이다. 30대 초반. 살인이 모두 밤에 벌어지는 걸 보면 낮에는 일을 하는 게 분명하다. 다만 하찮고 단순한 직업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은 그런 하찮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나 이모 등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여자와 함께 산다.

멜리사도 나에게 군림하는 엄마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글을 쓴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데 다 헛소리다.

그 여자에게 직접 맞서지는 못해 전이 작용을 통해 다른 여자들을 살해함으로써 그녀에게 복수한다. 범인이 원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지배하고 군림하는 힘이고 섹스를 무기로서 사용한다. 훔쳐보는 관음증 관련 전과나 절도 전과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음으로 내가 다중 인격도 아니고 정신 이상도 아니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래도 하나는 맞췄다.

강간하고 살해하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들었다면 그렇게 띄엄띄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은 대부분 한 달 정도 간격을 두고 벌어졌다. 범인이 살인과 무관한 다른 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떨 때는 일주일 간격으로 벌어졌다. 피해자들이 협조한 걸 보면 무기로 위협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피해자가 남편이나 파트너와 집에 함께 있을 때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걸 보아 범인이 다른 남성과 마주칠 위험을 피하려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계획적인 면이 부족해 피해자를 결박할 때는 사전에 준비한 도구가 아닌 현장에서 눈에 띄는 물건을 가져다 쓴다. 범행을 거듭할수록 변태적 성향이 심해지고 있다. 살해 계획은 한참 전부터 세운다. 피해자의 얼굴을 가리고 피해자의 사진을 엎어놓는 것은 피해자를 비인격화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죽인 뒤가 아니라 죽이기 전에 피해자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여자를 죽이는 상상을 하기 위해서다. 속옷이나 보석 등 현장의 물건을 전리품으로 챙겨 범행을 저지른 순간을 되새기는 듯하다. 소시오패스 성향이 있고 양심이 없으며 피해자를 실재하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묘지를 계속 감시해야 한다. 범인이 후회해서가 아니라 범행을 되새기기 위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에 전화해 제보를 하거나 목격자 진술을 할 수도 있다. 또는 경찰이 자주 가는 술집에 드나들면서 경찰들과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보고서는 이어서 강간은 섹스를 무기로 삼는 폭력 범죄라고 주장한다. 섹스는 권력과 통제력을 과시하고 상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나는 정말 보고서에 나온 이유로 피해자들의 얼굴을 가렸을까? 그들을 비인격화하고 다른 누군가로 상상하기 위해서였을까? 잘 모르겠다. 묘지 이야기는 맞다. 실제로 가볼까 고민했지만 경찰이 감시 중이란 걸 알았으니 이제 가지 않을 것이다. (P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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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든 돈이 기분 좋게 묵직하다. 내가 뭔가 가치 있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기분을 방해하는 게 딱 하나 있다. 바로 베키를 죽인 죄책감이다. 이렇게 빨리 죄책감이 들다니 믿기지 않는다. 플러피의 목을 부러뜨렸을 때와 비슷하다. 집에 가다가 차에 치인 매춘부라도 발견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하지만 죄책감은 후진으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희미해졌고 첫 번째 신호등에 걸렸을 때쯤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보다 칼훈은 왜 다니엘라를 살해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매춘부 베키와의 섹스는 그가 꿈꾸던 환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돈을 들이면 거친 섹스를 향한 욕망을 잠재울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베키는 두려워하는 척만 해서 생동감이 없었다. 베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고 칼훈도 그 사실을 알았다. 칼훈에게는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다니엘라 워커는 그에게 환상을 구현해주었다. 다니엘라를 집까지 따라가 맞닥뜨리고 그녀를 무너뜨리면서 칼훈은 어마어마한 자아도취에 빠졌을 것이다.

차가 무섭게 느껴진다. 4백 달러짜리 매춘부 ‘캔디 2호’가 트렁크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멜리사가 펜치로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공원 밖에 차를 세우고 뒤로 걸어가 트렁크를 연다. 또 다른 캔디의 짧은 블라우스가 피로 흥건히 젖어 있다. 퉁퉁 부은 눈이 떠져 있다. 내 뒤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는 듯하다. 무엇을 보려고 하는 걸까? 피부가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 마치 6개월은 트렁크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반면에 입술은 핏빛을 닮은 새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다. 트렁크를 닫는다.

불 켜진 집은 하나도 없고, 가로등도 절반 가까이 꺼져 있다. 공원의 나무들이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인다. 사람도 차도 없고 생명의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다시 트렁크를 열고 죽은 캔디를 내려다본다. 장갑을 끼고 몸을 굴린다. 시신 밑에 고인 피가 기름처럼 번들거린다. 처음 트렁크에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을 때만 해도 의식은 없지만 살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트렁크 문을 쾅 닫는 지금 캔디는 죽어 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다.

멜리사가 죽였다. 언제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아마 내 집에 와서 상처를 치료해준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멜리사는 나와 게임을 하고 있다. 날 장난감 취급하고 있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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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가방을 내팽개치고 금붕어 어항으로 달려간다. 칼 몇 자루가 가방 속 고정 장치에서 빠져나와 심벌즈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두 손으로 어항을 감싼다. 물이 혼탁해 앞이 잘 안 보인다. 비늘 수십 개가 물 위에 떠 있다. 손을 어항 속에 넣고 금붕어를 찾아 물속을 더듬는다. 그러다 바닥에서 녀석들을 발견한다. 한 마리는 침대 앞에, 또 한 마리는 주방 근처에 떨어져 있다. 둘 다 피는 나지 않는 상처가 잔뜩 나 있다.

멜리사가 한 짓이다!

내가 피클에게 다가가는 순간 침대 밑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와 죽은 피클을 발톱으로 낚아채더니 방 한가운데로 휙 던진다. 그러고는 얼른 쫓아가 피클을 입에 물고는 침대 밑을 향해 다시 달려간다. 그러다 입에서 피클을 떨어뜨리지만 그래도 계속 달린다. 들켜서 곧 큰일이 나리란 걸 눈치챘을 수도 있고, 아직 생선을 물고 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고양이는 다리가 부러졌던 게 맞나 싶을 만큼 힘껏 달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야 깨닫는다. 이건 멜리사가 한 짓이 아니다.

“씨발, 이 고양이 새끼가.” 소리를 지르며 성큼 다가가 피클을 들어 올린다. 몸이 차갑다. 하지만 물고기는 원래 차갑지 않나? 늦지 않았길 빌며 피클을 어항에 넣는다. 곧이어 제호바도 들어 올려 물속에 넣는다. 피클은 이미 배가 뒤집힌 채 둥둥 떠 있다. 몇초 뒤 제호바도 그 옆으로 떠오른다.

두 녀석을 물속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억지로 수영을 시키듯 밀어본다. 조그만 가슴을 눌러보기도 한다. 다 소용없는 짓 같지만 10분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한다. 뒤로 홱 돌아 침대 쪽을 본다. 이 망할 비싼 고양이가 내 둘도 없는 친구들을 죽였다. 와락 침대로 달려들어 매트리스 가장자리를 잡고 옆으로 들어 올린다.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매트리스가 미끄러지면서 시트도 함께 쓸려내려 간다. 사타구니가 쑤시듯 아프지만 마음만큼 아프지는 않다. 고양이가 놀란 듯 고개를 갸웃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몸을 숙여 들어 올리려 하자 고양이가 뒤로 물러선다. 귀를 뒤로 젖히고 날 공격할 태세를 취한다. 등짝을 밟아버리려 하자 녀석이 눈치를 채고 재빨리 몸을 피한다. 그 바람에 나는 이동하는 표적을 향해 발을 뻗었다가 빈 바닥에 쿵 헛발질을 한다. 순간 사타구니에 격통이 밀려온다. 제거된 고환 부위가 칼로 찌르듯 아파 결국 무릎을 꿇고 주저 앉는다.

고양이는 방 한가운데에 앉아 나를 조용히 바라본다. (P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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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훈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기절하기 직전에 본 얼굴과 지금 눈앞의 얼굴이 같을 리 없다는 눈빛이다. 조가...... 청소부 조, 멍청이 조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낮게 끙 하는 소리를 낸다. 놀라움을 표현하려는 건지 이유를 묻는 건지 재갈의 효과를 시험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의도가 뭐든 큰 소리는 내지 못한다. 턱의 통증이 엄청날 것이다. 아랫입술에 핏방울이 매달려 있다. 고환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 일을 남들이 알게 하고 싶진 않다. “그 여자, 네가 죽였지?”

칼훈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네가 죽였어.”

칼훈은 이번에는 고개를 저으며 재갈을 문 채 응얼거린다. “이이히 해기.”

미친 새끼라고 한 것 같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제 재갈을 빼줄 거야. 잘 알겠지만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칼훈의 입 앞에 칼을 들이대며 말한다. “안 좋은 결말을 맞게 될 거야. 이해했으면 고개 끄덕여.”

나는 미친 새끼답게 칼훈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찔리도록 칼끝을 그의 턱 밑에 대고 있는다. 칼훈의 입을 막고 있던 속옷은 잘라내자 탁 하고 풀리며 그의 목에 옷깃처럼 감긴다. “좀 낫나?”

“저기 조,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멍청한 질문이지만 답해준다. “그럼, 알지.”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사람을 묶는 건 범죄예요. 특히 경찰은 묶으면 안 돼요.”

“난 바보가 아니야.”

“당연히 아니죠. 나도 알아요. 조가 힘들다는 거, 뭐랄까...... 조 같은 특별한 사람들은 사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다 아는데....”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는다. “저기 밥, 거기까지만 하지.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네가 이 도시에 온 뒤로 매일 본 그 멍청이 조가 아니야.”

칼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꼭 필요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친 끝에 내가 ‘느린 조’가 아니라 ‘화난 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초지능 조’다.

“저기 조,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야. 그러니까, 뭐랄까..... 네가 연기를 워낙 잘했잖아. 속은 게 잘못은 아니지 않아?” 칼훈이 아부하듯 말한다.

“그래, 잘못은 아니지. 근데 아부는 집어치워, 밥” (P36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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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손을 꾹 내리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구해준 이 작은 고양이는......

구해줬다. 그렇다. 난 이놈을 구했다. 돈도 써서 집으로 데려왔건만 놈은 내 금붕어를 죽이는 것으로 은혜를 갚았다. 그랬는데 나는 놈을 또다시 구해주고 있다. 죽이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칼을 도로 집어넣는다.

금붕어는 두 마리 모두 증거 보관용 봉지에 넣는다. 묻는 건 나중에 할 생각이다.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른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어준다.

몇 분 후 고양이가 잠이 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 소파 앞 탁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고기를 다시 살지 생각해본다. 이 일이 다 끝나고 나면 그럴지도 모른다. 피클과 제호바가 없으니 삶의 한 조각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공허하지만 어제보다는 덜하다.

다음 날 아침 땀에 젖어 눈을 뜬다. 침대 끝에 고양이가 있다. 또 꿈을 꿨다. 멜리사가 나오는 꿈이다. 꿈속에서 우리는 해변에 함께 있었고 나는 내가 우리의 관계를 폭력적인 것으로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멜리사를 죽이기는커녕 같이 누워 모래와 파도 소리, 햇살을 즐겼다. 정말로 좋은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맡은 바다 냄새가 현실까지 따라와 방 안에 잠시 머문다. 냄새에서 벗어나려고 샤워실로 간다. 온몸에 들러붙은 밤의 잔재와 꿈의 찌꺼기를 씻어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고양이가 주방에서 몸단장을 하고 있다. 냉장고를 뒤져 고기처럼 보이는 걸 꺼내주니 고기라고 믿고 기쁘게 먹는다.

출근 전 서류 가방을 열어 여러 도구를 점검한다. 특히 칼훈에게 빼앗은 글록에 총알이 가득 장전돼 있는지 확인한다. 장전되어 있다. 총을 다시 서류 가방에 넣는다. 고양이를 아파트 밖으로 내보내고 출근한다. (P39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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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아냐, 일어날 거 없어.” 손사래를 치며 농담하지만 칼훈은 웃지 않는다. “좋아, 형사님. 거래 조건은 이거야. 2만 달러로 네 귀랑 머리를 살 거야. 알겠지? 총은 내가 갖고 있다는 거 잊지 마. 간밤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도 있고.” 몇 달 동안 화분 속에 있었던 녹음기를 꺼내 보여준다. “괜한 짓을 하거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녹취는 네 동료들한테 전해질 거야. 이해했으면 고개 끄덕여.”

이해했나 보다.

“자, 이제 잘 들어. 5분쯤 뒤에 누가 올 거야. 여잔데 이리로 올라와서 날 협박할 거야. 그 여자도 너처럼 살인자여. 너도 아는 얼굴일 거고. 네가 할 일은 이 욕실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거야. 그 여자가 자백하면 나는 욕실 문을 열고 여자에게 널 보여줄 거야. 그럼 셋 다 꼼짝없이 살인 사건에 엮이게 돼. 삼자가 대치하는 교착 상태가 되는 거야. 동의하지?” 칼흔이 낮게 끙 소리를 낸다. “동의한 걸로 알게.”

칼훈은 다시 한번 끙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계획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상관없다. 나는 욕실 문을 닫고 8만 달러가 들어 있지도 않은 서류 가방을 옆에 둔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기다린다.

10분 뒤 현관문이 열린다. 나는 같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다. 멜리사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냉장고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정말 나는 멜리사와 닮은 걸까? 제발 아니길 바란다. (P40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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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해명할 필요 없어.”

나는 욕실 쪽으로 턱을 까딱 움직인다. “다시 생각해봐.”

“설마 카메라를 설치한 거야, 조? 유치하게 왜 이래. 카메라부터 처리한 뒤에 네 고환에, 아니 하나뿐인 고환에 총알을 박아주겠어.”

“카메라보다 훨씬 좋은 거야. 가서 한번 보지 그래?”

멜리사가 총을 앞으로 겨눈 채 욕실로 다가간다. 그러고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자신을 위해 최고의 선물을 준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경찰? 네가 경찰을 죽이겠다고?” 멜리사가 묻는다.

“아니, 죽이진 않아. 쓸모 있는 놈이거든.”

멜리사를 보고 칼훈의 눈이 놀라 휘둥그래진다. 경찰서에서 본 기억이 났을 것이다. 칼훈은 나와 멜리사 중 누가 더 위험한지 판단하려는 듯 눈동자를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멜리사는 그에게 범인의 인상착의를 알려준 여자다. 그런데 지금은 내게 총을 겨누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를 기절시키고 결박한 남자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 돈은 도대체 언제 받는 거야?’ 칼훈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

멜리사의 머릿속도 복잡해 보인다. 멜리사는 경찰 관련 물건을 수집하길 좋아하니 이 남자도 수집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일 것이다. 이 남자를 집 안 어디에 두면 좋을까? 거실 구석? 아니면 냉장고 옆?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모르겠네.” 멜리사가 말한다.

“네 정체를 증언해줄 증인이야.”

“그래? 넌 이 남자에 대해 뭘 알고 있는데?”

“필요한 만큼은 알아.”

멜리사가 방 안을 둘러본다. 지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멜리사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네가 잊은 게 하나 있어, 조.”

“그게 뭔데?”

“난 이 인간이 필요 없어.”

멜리사가 순식간에 내 서류 가방에서 컬을 낚아채 욕실로 달려간다. 칼훈은 멜리사가 자기 뒤에 서는 걸 보고는 겁에 질려 동공이 확장된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도 나처럼 아는 것이다. 의자를 덜컹거리며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하지만 소용없다. 멜리사가 칼훈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나는 돌처럼 굳어버린 칼훈의 눈에서 멜리사의 눈으로 시선을 옮긴다. 멜리사의 눈동자가 쾌감으로 반짝거린다. 경찰을 죽일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내게 필요한 증인을 없앨 수 있어서 들뜬 눈빛이다. 나는 간신히 한 발을 내딛지만 그 이상 다가설 엄두는 나지 않는다.

“잘 생각해, 멜리사.” 말이 급하게 쏟아져 나온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지금 네가 뭘 하려는 건지 생각해봐. 넌 경찰을 사랑하잖아, 기억 안 나?” (P408-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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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당신이 이 집에 안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타났으니까요. 당신 집은 내가 와본 적이 있어 경찰에 알려줬어요. 조, 당신을 도운 건 나예요. 직장에서도 도왔고 퇴근 후에도 도왔어요. 당신이 다친 날에도 치료해줬고요, 그러니 그날 이후로 사람들이 더 죽은 건 다 나 때문이에요.”

“날 도운 건 당신이 아니에요. 멜리사예요.” 나는 샐 리가 내 말 뜻을 알 리 없지만 쏘아붙이듯 말한다. “이봐요, 샐리.”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지만 사실 나는 침착하지 않다. 목소리가 떨린다. 온 세상이 내 위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경찰이 뭘 어쨌다고요?”

“당신이 나한테 전화를 걸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당신 집에 갔고요. 내가 당신을 보살폈어요. 조.”

길거리를 좌우로 훑어본다. 양쪽 끝에서 차들이 하나둘씩 밀려들어온다. 그중에는 밴도 있다. 길가에 주차된 차는 이제 문이 두 쪽 다 열려 있다. 여자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남자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재킷 안으로 손을 넣는다. 샐리는 차량이 갑자기 몰려드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본다. 구질구질한 동네에 이렇게 많은 차가 밀려드니 놀란 눈치다. 샐 리가 주차권을 발견하고 경찰에 내 집을 알려줬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을 울린다. 온 세상이 축에서 벗어나 기우뚱 기울고 있다. 나는 지퍼를 열고 재킷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줄줄이 다가오는 자동차와 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와 여자를 바라본다.

“난 당신이 특별한 줄 알았어요.” 샐리가 실망한 목소리로 말한다.

“난...... 난 특별해요.”

“당신이 그들을 죽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느림보 샐리가 경찰도 알아내지 못한 진실을 알아내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샐리의 어깨 너머를 보며 내가 묻는다.

“당신이 그 사람이잖아요. 크라이스트처치 카버요.” (P440-441)

영화 다크 시티 3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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