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사진적 행위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현장에 있지 않아도, 마치 현장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TV 생중계 장면을 보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논리적으로 그 상황을 평론을 한다. 오히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국소적이거나 지엽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는 사진가에게 “왜 찍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어떻게 말을 할까? 왜 찍느냐에 대한 물음에 각기 다른 대답을 할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내가 인지한 상황의 나의 내재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할 것이다. 이 이외에도 여러 의도들이 존재하지만, “왜 찍는가”라는 질문은 “왜 이 음악을 좋아하느냐”, “왜 사는냐”라는 질문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려울때도 많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수없이 던지며 살아간다.
『사진을 찍는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역시 두 부류의 사진적 의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왜 찍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 혹은 공통된 명분(I Like)으로서 나타난 사진과 “왜 찍는가”에 대한 모호한 대답(I Love)으로서 출현한 사진(사진적인 것)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가 명분과 이슈를 위한 진술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비록 사진이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변형도 허락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ca a ete)”의 진술적 형태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짐을 보이느 징후(index)”로서의 사진적 재현이다.』 이 글은 1983년 필립 뒤바의 ‘사진적 행위’의 글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자화상이 아니라면, 대상이 존재한다. 사진가와 대상체(찍는 대상) 사이의 행위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기록하기 위해,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일 것이다. 그런데 사진가 주체가 행위에 참여한다면 사실 사진을 찍기 어렵다. 돌을 던지는 시위대에 참여하거나, 상을 당한 상주가 장례를 치르는데 본인이 사진을 찍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이는 행위의 주체로 상황에 개입할 수가 없다. 행위로서의 사진은 결과로서의 사진과 분명히 구별된다. 일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던 사진적 행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대상)과 사진가 주체간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즉흥적이고 순간적으로 이루러지기도 하지만, 그 관심에 대한 행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하고 그 행위로서 사진을 찍는 것일까. 단지 대상은 오브제로서 존재하고, 나의 표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지 고민해본다. ‘사진은 의미 이전에 우선 인덱스이다’라고 하는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사진은 인덱스나 오브제가 아니라 의미에 대한 기록이 우선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