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의 기록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읽고

by 노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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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광화문광장에서의 세월호에 관련된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었다. 당시에 나는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에서 살던 집에서 유진상가 인근 홍제동 산골고개로 이사를 와 있었다. 산골고개는 거의 다 쓰러져가는 단독주택이었다. 그래도 조그만 마당(1평정도)도 있고 처음에는 그나마 위안으로 살았지만 점점 이 집에서 고충들은 심해졌었다.(벌레들이 많고 특히 곱등이가 많았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곱등이가 나온다). 회사의 광화문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이다. 무악재 언덕만 넘으면 광화문으로 갈 수 있다. 출근과 퇴근을 모두 걸어서 갔다. 걸어가면 복잡한 생각들이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아 좋고, 이것 저것 풍경들을 볼 수 있어 좋다.


이사 간 날, 첫날 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비록 여섯 칸짜리 집이지만 없는 게 없었다. 안방, 마루, 건넌방, 부엌, 아랫방, 대문간 이렇게 여섯 개의 방이 공평하게 한 간씩이었다. 마당도 있었다. 마당이 네모나지 않고 삼각형인 게 흠이었다. 엄마는 이런 마당을 '우리 괴불마당' 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마당의 가장 변이 긴 쪽이 남의 집 뒤쪽으로 난 담인데 그 밑이 어마 어마하게 높은 축대였다.

(p66, 엄마의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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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홍제동 집까지의 중간은 무악재언덕이다. 독립문 사거리 인근에 있는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은 서대문형무소 맞은편 마을이다. 집에 가는 길을 좀더 오래 걸으려면 인왕산 산줄기를 타고 가면 되었다.


이 지역 재개발사업조합이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다 주민ㆍ시민단체와 충돌했다. 재개발사업조합측 용역업체 직원 40여명은 5월17일 오전 6시40분경 옥바라지 골목에서 퇴거에 불응하고 농성하던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 50여명을 끌어내고 마지막까지 헐리지 않았던 구본장 여관에 진입해 집기를 들어내는 등 강제퇴거를 진행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5170996726689)


내가 살던 산골고개도 재개발이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서 우리도 정릉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지껏 세입자로 살았고, 2~3년의 전세살이는 30년동안 10여차례를 이사한듯 싶다. 처음 결혼해서 살던 서교동 반지하 집에서 연희동, 부암동으로 이사를 다녔고, 재개발과 재건축의 차이도 홍제동 집에서 알게 되었다. 재개발은 세입자에게도 혜택이 주어지지만, 재건축은 건물주에게만 혜택이 주어져 우리는 이사비용도 못받고, 전세비용도 재건축 사무소에서 받아가라는 등 별 이상한 주인을 만나, 힘들게 이사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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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은 내가 어린 시절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놀던 곳이었다.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 밤늦게까지 깔깔대고 논다. 다방구놀이, 망까기, 비석치기, 돌멩이로 하는 놀이, 딱지치기,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땅따먹기, 구슬로 땅에 홈을 파거나, 삼각형으로 그려놓고 구슬치기 등 대부분 아스팔트가 되어 있지 않은 흙들이 많아서 놀수 있었던 같고, 차들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놀이터라는 곳이 마을 곳곳에 있지만, 예전에는 인근 골목과 동네 뒷산 정도였고, 내가 초등학교 시절 조그만 언덕 같은 곳, 일명 빡빡산이라고 하고, 안양천 1호선 전철이 지나가는 곳에는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이 살던 판잣집이 있었다. 여기는 고척동과 광명 철산동의 사이 섬과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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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재개발에 따른 세입자의 이동은 봉천동, 상계동, 난곡,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은 서울 외곽 도시 광명시, 부천 역곡으로 밀려났던 것 같다. 최근은 용산참사도 그러했고, 순화동에서도 세입자와 재개발을 시행하는 건설사와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 앞 대로변은 독립문 전철역 위 도로변에 천막이 세워졌고, 이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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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적골에서 늘 도도하던 엄마는, 서울에서는 매사에 주인집의 눈치를 보며 늘 쩔쩔맸다. 엄마는 바느질품팔이를 해서 오빠와 나를 키웠다. 비록 지금은 천한 기생의 옷을 바느질 하지만, 품위 있는 집안의 며느리였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을 상것들이라고 무시한다. 그리고 나를 상스러운 동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 이것저것 못하는게 많았던 나의 생활은 무료했다. 어느 날 나는 땜쟁이 딸과 석필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엄마의 말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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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소설은 위장전입을 해서 매동초등학교에 입학하게 했던 엄마, 동네사람들은 상것들이라고 하고, 공부를 해서 신여성이 되라고 했던 서울 사대문 안은 아니지만 서울 생활의 말뚝으로 현저동의 기억, 엄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한다. 나의 어린시절도 비슷한 경험들을 했던것 같다. 평양 진남포가 고향인 아버지는 건설회사를 다녔지만 내가 어렷을적 위수술로 그만 두시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옷을 팔아 우리 형제 둘을 키우셨다. 학교도 들어가기전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새벽 평화시장에서 옷을 사던 어머니의 고생을 잊지 못한다. 재래시장이었던 고척동시장은 30촉 백열전등으로 낮에도 항상 어두컴컴 했었고, 지붕은 슬레이트라 비가 오면 빗소리가 통통 튀는 소리가 들렸었다. 시장은 여러 집들이 있었다. 우리집은 여성 양품점이었고, 포목집, 아동복집, 쌀집, 떡방앗간등 식당등이 있었고, 쌀집 아들, 포목집 아들 등과 동네에서 놀던 기억이 난다. 중산층인지, 서민인지 모르겠지만서도, 부족하지는 않았던 같다. 엄마의 말뚝1은 서울생활로 터전을 잡은 현저동의 말뚝이고, 엄마의 말뚝2는 죽은 아들에 대한 엄마의 가슴에 박힌 말뚝이고, 엄마의 말뚝3은 엄마의 무덤에 꽂힌 묘비의 말뚝이다. 나는 얼마나 엄마에게 말뚝을 박으며 힘들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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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의사는 어머니에게 유일한 방법은 수술뿐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수술을 거부했으나 갑자기 ‘산골’을 언급하며 수술을 받아들인다. ‘산골’이란 현저동에서 어머니가 손목이 부러졌을 때 먹었던 ‘명약’이었다. 오빠와 나는 무악재의 굴에서 힘겹게 ‘산골’을 구해왔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이 구해온 영험한 명약을 먹고는, 열흘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목은 보기 싫게 삐뚤어졌다. (엄마의 말뚝2)


내가 산골고개까지 걸었던 것은 2008년 광우병사태로 시위가 밤마다 촛불집회를 했었고, 사진을 찍기위해서 시위대를 따라 다녔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왼쪽 무릎에서 뚝하는 소리가 났었고, 왜 그런지도 모르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다시 생활을 했었는데 도저히 무릎이 나아지지 않아서 큰 병원에서 X레이를 찍고 연골파열과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을 백병원에서 하게 되었다. 재활의 과정을 거치고, 조금씩 운동삼아 걷기 시작했다. 뛰는 운동은 가급적 하지 않게 되고, 걷는 것이 운동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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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양공전(지금은 동양미래대학)이 있는 곳에서 살았고, 작은 언덕같은 산 뒷동네는 장독골이라고 불렀다. 구로에서 개봉동으로 가는 안양천 다리 근처이다. 중학교에 입학을 오류중학교를 다녔는데, 이때는 버스가 없어서 학교까지 걸어다녔었다. 비가오면 흙탕길이 된 길을 지나면 지금의 고척근린공원의 언덕을 넘으면 오류중학교였다. 이 근처는 동네 불량배들이 돈을 뜯는 장소이기도 했다. 건너편 여학교는 금옥여고였다. 중학교 1학년때 머리를 빡빡밀었던 마지막세대이다. 검정 교복 호크에 중1 마크와 가방등은 2학년이 되어서 두발 자율화가 되었고, 일상복으로 바뀌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기준은 도시락 반찬을 보면 알수 있었다. 옷차림도 그러하지만, 반찬의 종류가 차이가 났다. 맛있는 반찬을 가지고 오면 친구들이 빼어먹기 일수 였기 때문이다. 학교내 난로에 올려놓던 양은 벤또들 생각난다.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까지의 길은 멀었다. 더군다나 오류동성당을 갈려면 굴다리를 지나야 했고, 어쨋든 이동네에서 저동네로 멀리 가보는 것이, 무용담처럼 여겨졌다. 개봉동에서 다리를 건너면 광명시장까지도 꽤 먼 거리였던것 같았다. 한번 갔던 곳은 잘 기억을 했으니깐 그랬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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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동 옥바라지 골목 앞. 자유인문캠프 후배들이 준비한 영화상영 <옥상자국>. 세월호 참사로 광화문은 시위가 이어졌고, 시청광장에서 청계광장, 광화문사거리의 차벽은 점점 더 앞으로 압박되었고, 세종대왕상, 그리고 광화문 현판까지 전경들의 바리케이드는 밀려났고, 촛불집회는 박근혜대통령탄핵으로 시위는 이어져 청와대 앞까지 시위가 허용되었다. 안국동 로타리에서도 물대포로 샤워를 하고, 이때 중대 재학생들을 많이 만난것 같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활동도 활발했었고, 2014~2017년은 넘 바쁘고, 힘이 들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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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딸이 아파트 사니까 우리 집 골목이 지저분해서 싫어할까봐 청소를 했더니 조합놈들이 와서 언제 나가냐고 묻는 거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나간다고 했어”- 구본장여관 이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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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또 1전만, 1전만 사정을 해서 군것질 할래? 안할래? 너 엄마가 무슨 고생을 해서 그 돈을 버시는지 알기나 하고 엄마를 그렇게 조르냐 조르길. 이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야. 그 돈은 엄마가 기생 바느질 품팔이를 하셔서 번 돈이야. 우리 엄마가 천한 기생 바느질 품팔이를 하신단 말야. 그 돈을 네가 매일 장작 한 단 살 만큼이나 까먹는단 말야. 우리가 아무리 어려도 그럴 순 없어. 다신 안 그런다고 해. 어서 다신 안 그런다고 항복을 하라니까” 오빠는 회초리로 사정없이 내 여윈 종아리를 후려치면서 목멘 소리로 내 잘못을 꾸짖었다. <엄마의 말뚝1>


박완서의 시대에서 내가 살던 시대는 한참 뒤의 70년대이다. 1전만은 십원만, 그리고 백원만으로 바뀌었고, 백원만 엄마에게 받으면 동네 오락실에게 갤러그나 제비우스 게임을 하거나, 더 돈을 모으면 아카데미 과학사에서 나온 신상품을 사서 조립하는게 유일한 초등학생의 기쁨이었던 것 같다. 그시절에 학교는 대변을 가지고 오라고 하질 않나, 쥐를 잡아오라고 하질 않나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고 하질 않나, 그랬던 것 같고, 집에 TV가 있냐, 냉장고가 있냐, 피아노가 있냐 집에 뭐가 있는지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 집사정을 왜 알려고 했을까. 아마도 육성회비나 학교에 돈을 더 달라고 했겠지. 유일한 TV에서는 어린이 프로라곤, 요괴인간이나 똘이장군같은 괴물들 시리즈아니면, 육백만불의 사나이나 소머즈와 같은 기이한 사람들이 주제였다. 밤늦게는 석양의 무법자나 장고시리즈같은 영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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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와봤어야 했다. 나라가 그리고 정부가 무책임하게 짖밟은 곳에... 앞으로도 내가 가봐야할, 자식들에게 보여줘야할 소중하고 귀중한 역사도 무참히 짖밟을까 두려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뜨거운 뙤약볕아래서 이글을 남긴다...” <옥바라지 공사 가림막 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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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선교센터는 2016년 5월에 재개발이나 인권문제에 관심 있는 신학생들로부터 출발해서 지금도 20대가 대부분인데요, 저희가 철거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종교가 다르거나 종교가 없는 청년들도 하나둘 찾아오더라고요. 지금은 에큐메니칼(교파, 교회의 차이를 초월한 기독교운동) 사회선교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체 회원은 200여 명이고, 분과위원회에 소속돼서 실무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은 30여 명 정도 되죠."

옥바라지선교센터 소개문에는 "우리는 쫓겨나는 이들의 곁에 십자가를 세웁니다. 쫓겨남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고자 오늘도 거리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35582&CMPT_CD=P0001&utm_campaign=daum_news&utm_source=daum&utm_medium=dau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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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는 흰 홑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쓴 일단의 인민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주둔하고 있는데 거기서 산동네를 쳐다보면 매일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는 집이 몇집 있더라는 것이었다. 연기 나는 집을 하나하나 다 뒤져봐도 재수 없게 다 죽게 된 늙은이 아니면 병자가 고작이더니 이 집엔 웬 젊은 여자가 다 있냐고 마침 문을 열어준 나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엄마의 말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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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척동에서 오류중학교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았는데, 오류동 성당은 더 멀었다. 우리집 바로 옆은 대신교회가 있었다. 주말마다 교회의 노래소리와 신도들의 기도소리가 바로 옆집이라 소음(?)이 심했다. 바로 옆이 기독교 교회가 있었는데 굳이 멀리 오류동까지 성당을 간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었다. 할머니는 11남매를 해방전에 서울로 터를 잡고, 나의 아버지 형제들을 키우셨다. 삼촌 고모중에서 2분은 신부로, 3분은 수녀로 성직자이다. 집안이 천주교로 할머니, 할마버지 묘소도 경기도 송추 천주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집안 대소사 모임이 있어 모이면, 손자들 중에서도 성직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지만, 그리 강요는 심하게 하지 않았다. 어쨋든 이런 영향때문인지 몰라도,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세례를 받았다. 유아세례를 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중학교 시절 성당도 가는 듯 마는 듯 했기 때문이다.


교외선 일영역에서 가까운 신천지묘지의 사무실은 석유난로도 없이 미적지근한 연탄난로 하나로 여간 을씨년스럽지가 않았다....

“더러 다녀보셨는지 모르지만 이 근처에 이만한 묘지 없을걸요. 공원묘지제도가 생기고 나서 초창기에 개발했기 때문에 돈푼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넓게 잡아 호화묘도 꾸밀 수가 있었죠, 교통 편하죠, 노적봉을 마주보고 있어서 자손들이 부자되죠, 이만하면 묘지 중엔 압구정동 아닙니까” (엄마의 말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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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에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머물며 옥바라지한 골목으로 알려진 서울 무악동 일대 '옥바라지 골목'에 대한 재개발 철거 작업이 재개됐다. 재개발사업조합과 시공사인 롯데건설은 2016년 8월22일 오전 9시 반부터 이 지역에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을 철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332654&re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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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공부를 잘해야지 바느질 같은 거 행여 잘할 생각 마라. 손재주 좋으면 손재주로 먹고살고 노래 잘하면 노래로 먹고살고 인물을 반반하게 가꾸면 인물로 먹고살고 무재주면 무재주로 먹고살게 마련이야. 엄만 무재주도 싫지만 손재간이나 노래나 인물로 먹고사는 것도 싫어. 넌 공부를 많이 해서 신여성이 되야 해. 알았지?" (p48, 엄마의 말뚝1)


오류중학교 2학년때 우리반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정말 그림을 잘 그렸고, 한번 본 것은 다 그리고, 당시 남자 아이들 책받침으로 소피마르소나 피비케이츠 같은 여배우의 얼굴도 똑같이 그렸다. 더군다나 이친구는 직접 만화책도 만들었고, 당시 남자들이 몰래 보던 빨간책도 직접 그려서 친구들에게 돌려보여주곤 했다.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좋은것인지, 남자들은 기술과목을 여자들은 가정과목을 들었고, 나에게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였다. 집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보일러를 고치거나 전기제품 고장이 나면 고쳤고, 나도 어른이 되면 뭐든 뚝딱 고칠수 있어야 하는줄 알았다. 그리 손재주는 없어 시계고 라디오를 뜯다보면 다시 조립이 안되는 게 나는 손재주가 별로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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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화장실에 갈 수 없게 됨으로써 비롯됐다. 어느 날, 결국 어머니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 기저귀를 찬 어머니는 자주 헛것을 보았고 혼수상태가 길어졌다. 임종이 점점 다가오자 나는 ‘화장해서 강화도 바다에 오빠처럼 뿌려 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킬 자신이 없어진다. 장조카는 사회적 체면을 고려하여 어머니를 화장하지 않고 매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엄마의 말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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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별의별걸 다 가지고 있었다. 새총, 팽이, 제기, 연, 딱지, 썰매, 크레용, 지남철, 유리조각......그 중에서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건 지남철뿐이었다. 지남철로 오빠가 화로를 휘저어 쇠붙이를 모조리 끌어올리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내가 온종일 찾다 못한 할머니가 바느질하다 놓친 바늘이 오빠의 지남철 끝에서 방금 낚아 올린 붕어처럼 비늘을 반짝이며 파르르 떨고 있는 걸 볼 땐 시샘과 경탄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고 신기한 게 마침내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오빠는 나에게 더 신기한 걸 가르쳐 주고 떠났다. (엄마의 말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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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복원된 성벽이 도로와 만나면서 끊어지는 데서 나는 성벽과 갈라섰다. 성벽은 길 건너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갈라지면서 돌아다 본 성벽은 꼭 신흥 부잣집 담장 같았다. 아아, 내가 오빠한테 회초리를 맞던 허물어진 성터의 이끼 낀 돌은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엄마의 말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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