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231. 표현과 해석

by 노용헌

1.표현

우리는 말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소설가는 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사진가는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것이다. 소설가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려고 하고, 사진가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서 추상적인 관념을 전달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단지 표현을 좁게 보면 시각적 구도, 프레이밍이나 조명과 구성에 대한 기술적 문제에만 국한될 수도 있겠지만, 무엇을 찍고,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진가의 표현에 달려있다. 기록하고, 관찰하고, 그 다음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존 자코우스키(John Szarkowski)는 사진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보는 거울(Mirror)적 기능과 설명의 수단으로 보는 창문(Window)적 기능으로 현대사진을 구분하였다. 그는 <거울과 창문>전시에서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사진을 창문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이방인으로서 미국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이지만, 그의 사진은 대단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독특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사진들은 사전에 구성되거나 계획되지 않았고, 나는 구경꾼이 나의 관점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잡지를 위해 일을 하는 것과는 다른 상태이다. 그것은 상업적인 삽화가 또는 난도질하는 작가의 감각을 나에게 제안한다. 나는 나의 생각을 깨달은 이래로, 나의 마음과 나의 눈은 그 사진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잡지의 목적에 맞추기 위해 재연할 나의 사진들을 결국 결정할 편집자의 마음과 눈이었다.” -Robert Frank: A Statement, U. S. Camera Annual, p. 115, 1958

로버트 프랭크.jpg 로버트 프랭크

프랭크의 말처럼, 직장의 데스크가 원하는 사진들이 있다.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했던 사람이 유진 스미스였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순응을 하거나, 회사를 나와서 자신만의 사진을 찍게 된다. 그들이 생각했던,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사진은 어떤 사진일까. 내멋대로 찍고, 내맘대로 해석한다고는 하지만, 사진은 결국 표현의 매체인 셈이다. 나의 얼굴인 셈이다.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여질지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똑같은 공간에 있어도, 보는 방법과 보는 방식은 다 다르다.


“많은 것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에반스(Walker Evans)의 것과 다르다. 그가 했던 것보다 그 세계에서 내가 그것들을 위한 다른 종류의 관심을 가졌다. 나는 다른 종류의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오해받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확실히 나의 태도가 다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카메라,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르다. 그가 사진을 찍는 것들은 어떤 종류의 절묘한 맛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가 사진을 찍는 것들이 그것의 부족한 것을 묘사할지도 모른다.” -An Interview with Garry Winogrand

게리 위노그랜드.jpg 게리 위노그랜드

2.해석

찍는 사진도 각자의 시선에 의해 다르게 찍히지만, 그 사진을 보는 관객들의 해석 또한 다양하다. 책을 보는 독자나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관객들 모두 비평가가 될 수 있다. 나름 해석한 스포일러spoiler는 넘쳐난다. 다들 한마디씩 하는 셈이다. 영향력있는 비평가의 비평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들었다 놨다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판단되어지고 평가되어 진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말한다, “해석은 해방 행위이다. 거기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를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반동적이고 뻔뻔스럽고 비열하고 숨통을 조이는 훼방이다.” 그는 예술가를 길들이는 비평가의 해석에 반대했다. 더군다나 그 비평가의 정치적인 성향은 해석을 하는데 걸림돌이다.

쓸모없음에서 쓸모를 찾고, 의미없음에서 의미를 찾는다. 프레임안의 요소들을 의미와 형태로 분리해놓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해석한다. 우리는 사진이라는 언어를 자의식의 기준에 의해서 나름 해석하려고 한다. 그것은 과연 옳은가. 사진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고,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의미의 해석에 반하는 것중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림의 하단에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텍스트를 써놓았다. 사물과 그것의 이름의 관계를,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들을 역설적으로, 정반대로 뒤틀어 놓음으로써 다시 보게,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부조리한 현실은 마그리트의 그림보다 더 심하게 주장하지 않던가.


르네 마그리트.jpg 르네 마그리트

영화 퍼(Fur)는 비운의 여류사진가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이다. 다이안 아버스는 유복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 유명패션잡지에서 사진을 찍던 패션사진가로서 염증을 느낀 그녀가 어느날 자신과 너무나 다른 사람들인 기형인, 장애인등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손목을 끊고 자살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이러한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많이 찍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찍은 대상 중 하나로서 내게는 지독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곤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 몇몇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수치심과 경외심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됐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의 답을 요구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한 뒤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이안 아버스가 바라본 세계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고, 이해되고, 해석된다.

다이안 아버스1.jpg 카메라를 든 다이안 아버스

아버스의 시선은 어설픈 동정이나 ‘나는 정상인, 저들은 비정상인’이라는 우월적인 시선이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정면을 응시한 정면사진으로 그들을 담담하게 아버스의 해석을 엿볼수 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기준, 잣대로 평가하고 해석하게 된다. 그런 세속적인 잣대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아버스는 사진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있는 그대로’ 보기란 정말 힘든 것 같다. 자라온 환경, 생각의 기준은 얼마나 사물을 왜곡해서 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다이안 아버스2.jpg 다이안 아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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