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2013년
페터 비에리(1944~)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철학 교수로 살면서 파스칼 메르시어를 필명으로 소설을 써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독일에서 출간한 이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각광받았다. 2007년 국내에 소개되었고, 2013년 영화로 개봉되었다. 소설의 저자는 필명 파스칼 메르시어로 사용했지만 페터 비에리의 철학책 <삶의 격>, <자기 결정>, <자유의 기술>이란 책도 같이 보면 좋을 듯하다. <자기 결정>에서 페터 비에리는 타인이 정해준 방향이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에 관해 결정하는 것의 한 형태입니다. 때로는 과거의 실수나 과오에 어떤 것이 있는지 인식하면, 그에 대항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고, 새로운 행동을 삶의 받아들일 만한 한 부분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소설 속 화자 그레고리우스는 베른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지루한' 교수로 살아왔다. 그는 평생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몰두해 살아오다가 어느 비 오는 날 출근길, 베른의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포르투갈 여인과 마주친 뒤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고, 수업 중 밖으로 나와 서점에 들러 우연히 접한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읽으면서, 프라두가 써내려간 깊은 불안과 열정의 사유를 곱씹어나가며 그의 실체를 리스본행 열차를 탄다.
고등학교 고전문헌학 교사를 천직으로 여겨온 그레고리우스는 급작스럽게 교실을 떠난 배경을 교장에게 설명하는 편지에 그들이 공통으로 존경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한 구절을 인용한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 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가 갑자기 여행을 떠난 이유이다.
_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건 서문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말하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저자는 장마다 숨어 있는 경험들을 파헤치는 것 같군요. 스스로의 고고학자가 되는 거지요. 몇 쪽이나 되는 장도 있고, 아주 짧은 장도 있어요. 여기 이건 단 한문장이네요.”
_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페터 비에리, 리스본행 야간열차, P27-28>
_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페터 비에리, 리스본행 야간열차, P55>
안경이 깨지는 바람에 만난 마리아나 에사로부터 카네이션 혁명 당시 슈베르트를 연주하던 손가락이 고문으로 짓뭉개진 그녀의 삼촌 '주앙 에사'를 만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태주강을 건너 요양원으로 가서 주앙과 마주앉아, 아마데우 프라두와 그의 절친이었던 조르지, 그리고 그들 두 남자 사이에 있었던 여성 에스테파니아에 얽힌 아픈 사연을 듣기 시작한다. 안경으로 비롯된 이야기는 소설속의 또 다른 소설이 담겨져 있다. 프라두와 조르지는 코임브라대학 의학부에서 청춘을 함께 보낸 절친이었다. 척추경직증으로 평생 고생하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1889~1970) 독재정부 아래 판사로 복무한 자괴감까지 겹쳐 자살한 부친의 강요로 프라두는 의대에 다녔다. 독재자의 하수인인 잔혹한 비밀경찰, '리스본의 인간 백정'으로 불리던 루이스 맹지스의 생명을 의사로서 살려준 '죄책감'으로 조르지가 먼저 복무하던 저항운동에 프라두도 가세했다. 낡은 옛 안경이 부서지는 행위는 그레고리우스가 여행을 통해 관점의 변화를 갖게 된 지점이다.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보게 되는 경험인 셈이다.
리스본으로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에 상징은 안경과 책. 주인공인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인 ‘문두스’가 인용한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의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책>이 아닐까 싶다.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_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절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영원히 멈추어버리지 말기를, 그런 일은 절대 없기를.
나는 코임브라의 딱딱한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 기차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기차가 보이지도 않고,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가 신호를 제대로 읽는지, 전철이 잘못되어 있으면 알아채는지도.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칸을 바꾸지 못한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이 있는 칸은 내 칸과 아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가서 볼 수 없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못 볼 승무원은 내 칸의 문을 잠그고 막아버렸다. 창문을 열고 몸을 바깥으로 한껏 뻗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기차가 부드럽게 철로를 달린다. 마지막 칸은 아직 터널에 있는데, 처음 칸이 또 다른 터널로 들어간다. 어쩌면 기차는 계속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운전사도 느끼지 못한 채, 난 이 기차가 얼마나 긴지도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뭔가 보기 위해, 뭔가 알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 쪽에서 인사를 건네지만, 바람이 내 말을 흩어버린다.
<중략>
나는 기억을 일깨우며, 숨을 헐떡이며, 흩어지는 빠른 인상들을 모아 뭔가 이해할 만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주의력의 빛이 사물의 뒤를 아무리 빨리 쫓아가도, 난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다. 늘 속수무책이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채. 밤이 되어 기차 칸 안쪽 모습이 유리창에 비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난 터널을 좋아한다. 터널은 희망의 상징이다. 지금이 밤만 아니라면 이제 곧 터널 밖으로 나가 밝아지리라는 희망.....
내 칸에 가끔 손님이 오기도 한다. 문이 닫히고 잠겨 있는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방문객은 있다. 거의 언제나 나에게 맞지 않는 시간에 온다. 대부분 현재라는 시간의 손님들이지만, 과거에서 온 손님들도 많다. 이들은 자기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오가며 나를 방해한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구속력이 없으며, 잊혀질 운명이다. 그저 기차에서 하는 일상적인 대화들. 몇몇 방문객은 소리 없이 사라지지만, 끈끈하고 냄새나는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환기를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럴 때면 이 칸의 모든 것을 떼어내고 새것으로 바꾸고 싶다.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페터 비에리, 리스본행 야간열차, P485-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