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탠리 큐브릭 감독 <시계태엽 오렌지> 1971년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는 열다섯살 십대인 주인공 알렉스를 통해서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질문을 한다. 인간은 과연 사회의 시스템에서 국가권력은 악을 추방하고 사회윤리를 지키기 위해 인간 말종(소설속 비행청소년들)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해도 괜찮은 것인가? 겉보기엔 '선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폭력은 우리의 역사 속에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삼청교육대와 같은 일들이 수없이 벌어져왔다. 개인의 자유의지, 선(善)한 의지를 선택할 수 있는가? 1부는 알렉스의 세계이고, 2부는 살인죄로 수감이 되어 형량을 감형받는 대가로 루도비코 기법이라고 불리는 실험적인 행동 수정치료를 받는 과정이고, 3부는 출소 후에 알렉스가 겪는 이야기이다.
“책이군, 당신이 쓰고 있는 책이로군.” 나는 거칠고 지긋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어. “나는 책이란 걸 쓸 수 있는 작자들을 항상 존경해 왔지.” 맨 첫 장을 보았더니 제목이 있더군. ‘시계태엽 오렌지’라고. 그걸 보고 내가 말했지. “거참 멍청한 제목이로군. 도대체 누가 태엽 달린 오렌지에 대해 들어 보기라도 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일부분을 설교하듯 위엄 찬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었지. “인간, 즉 성장하고 다정할 수 있는 피조물에게 기계나 만드는 것에 적합한 법들과 조건들을 강요하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나는 나의 칼, 펜을 든다.” 이 말을 듣자 딤 녀석은 푸르르 야유를 했고 나 또한 웃어야만 했지.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P62>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와 함께 스탠리 큐브릭의 미래 영화 삼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다. 큐브릭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기계의 인간화를 다루고 있다면,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어떻게 인간이 기계화 되어가는가를 강조하면서 어두운 미래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충격적이고 대담하게 표현했다.
내용도 충격을 주지만 폭력 안에 숨겨져 있는 큐브릭의 스타일에 주목하게 한다. 선정적인 스타일에 익살맞은 이 전반부 장면들은 오렌지색, 붉은색, 핑크색 등의 따뜻한 색조를 사용한 반면, 알렉스가 희생자로 그려지는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파란 색과 회색 같은 차가운 색조로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려진다. 즉, 인간성은 오렌지색으로 상징되고 인간의 기계화는 파란색으로 상징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통제를 상징하는 제목 자체로도 암시된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아카데미 작품상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영화음악으로 들어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음반판매를 증진시켰다. 또한 <시계태엽 오렌지>는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영국에서의 개봉을 철회하게 되었다. 역대 가장 논쟁을 부른 영화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말을 듣고 신부 놈은 담배를 피우는 동안 자신이 아는 것을 어느 정도 이야기해 줄까 궁리하면서 내 제안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더군. 그때 놈이 말했지. “루도비코 요법”에 대해 말하는 것 같구나.“ 놈은 몹시 걱정하던군.
..... 놈이 대답했지. “그 요법은 아직까지 사용된 적이 없어. 이 교도소에서도 말이야, 6655321번. ‘그분’도 그것에 대해선 깊이 회의하시거든. 나도 그 회의에 공감한다고 말해야겠구나. 문제는 그 요법이 과연 진짜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란다. 6655321번아. 선함이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어떤 것이야.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는 거야.” 놈이 이런 말을 계속 지껄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다음 순번 죄수 무리가 ‘종교’를 위해 철 층계를 내려오는 철컥철컥 소리를 들었지. 그러니까 신부 놈이 말하더군. “언제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 자, 이젠 너의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래서 나는 낡은 스테레오로 가서 바흐의 [‘깨어나라’합창 전주곡]을 틀었고, 더럽고 구린내 나는 죄수들과 변태 자식들이 한풀 꺾인 원숭이처럼 우물쭈물 들어오자 교도관, 즉 간수 놈들이 소리치고 두들겨 패 대는 걸 보았지. 그러나 곧 교도소 신부 놈이 녀석들에게 물었어. “자,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여기가 바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얘기를 처음 시작한 곳이지.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P138-139>
아, 그건 황홀했고 맛깔스러웠어. 3악장인 스케르초 부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아주 날렵하고 신비한 발길로 뛰어다니면서 멱따는 면도칼로 신음하는 이 세상의 낯짝 전부에 조각하는 내 모습을 보았지. 그러고는 느린 악장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으로는 합창이 나오는 아름다운 악장이 기다리고 있었어. 난 제대로 치료가 된 것이야. (p257)
그때 난 몸뚱이 속에 텅 빈 자리를 느꼈고 스스로도 놀랐어. 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거야. 형제 여러분. 철이 든다는 것이겠지.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 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쪼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서 태엽을 드르륵드르륵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쪼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내 아들이라, 아들이라. 아들을 낳아 녀석이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의 나이가 들면 이걸 설명해 줄 거야. 그러나 그때도 녀석이 이해하지 못하든지 또는 듣고 싶어 하지 않든지 해서, 내가 저지른 짓거리, 즉 야옹거리는 암수 고양이에 둘러싸인 못생긴 할망구를 죽인 것과 같은 일을 벌인다고 해도 말릴 수는 없겠지. 누구도 제 아들놈을 막을 수 없을 거야. 여러분. 그런 일은 세상 끝날 때까지 돌고 돌아서 계속될 테니까. 마치 거인처럼 된통 큰 녀석, 그러니까 하날님(다 코로바 밀크 바 덕분이지)이 커다란 손짝에서 구리고 기름때 낀 오렌지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처럼 말이야.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P270-271>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 <율리시스(Ulysses)>에 등장하는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는 이 세상을 가리켜 “찌부러진 오렌지(oblate orange)"라고 말한다. 인간은 소우주이고, 마치 과일과 같은 유기체처럼 성장해서 색깔, 향기, 당도를 가질 수 있다. 이를 간섭하거나 조건 반사를 통해 조절하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일이다.(p340)
교도소나 감화 시설은 이들을 더 악화시키기 마련이었다. 왜 국민의 세금을 아끼기 위해서 이들에게 조건 반사로 조절하는 쉬운 과정, 즉 일종의 혐오 치료처럼 폭력 행동을 하면 몸이 불편해지거나 구토, 또는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을 느끼게 하는 연상 치료를 받게 하지 않는가? 그 당시 정부가 내놓은 안은 아니었으나 개인이지만 영향력 있는 이론가들의 이러한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찬성했다. 그리고 아직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프로스트쇼에서 히틀러에게 혐오 치료를 강제로 받게 해서 새로운 쿠데타나 학살을 생각만 해도 먹은 크림 케이크를 토하게 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p341)
세가지 측면에서 알렉스는 인간을 대표한다. 즉, 남을 공격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언어를 사용한다.(p342)
영혼이란 선한 행동과 사악한 행동 중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비슷한 말이다. 한 개인에게 선할 수 있는, 오직 선할 수 있는 능력만 부여한다면 그건 추정컨대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개인의 영혼을 죽여 버린다. 나나 큐브릭 감독의 이야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행한 폭력, 즉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선택한 폭력이 있는 세상이 선하거나 남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조정된 세상보다 낫다는 것이다.(p343)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내가 1942년 등화관제가 실시된 어두운 런던에서 비열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는데, 그때 탈영한 미군 병사 세 명이 아내의 금품을 빼앗고, 구타를 했다. 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작품속에서 <시계태엽 오렌지>를 쓴 작가의 아내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알렉스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꽤 매력 있다는 사실에 불편해한다. 그를 미워하거나 자비를 베푸는 대신 정당하게 분노하기 위해서는 몇몇 사람들의 경우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혐오 치료를 실시해야 했다.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만일 우리가 인간을 사랑하려면 알렉스를 적어도 완전한 별종이 아닌 한 인간으로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알렉스와 그의 쌍둥이 같은 F.알렉산더가 혐오 및 폭력의 죄를 가장 크게 저지른 곳은 ‘집(HOME)'이라는 교정 시설이고, 자비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소설은 이야기한다.(p345)
최근까지도 나는 그 작품을 접시 위에 둔 오렌지라기보다는 선반에 둔 잼, 즉 마멀레이드처럼 밀봉된 유리병에 보관해 왔다. 내가 진정으로 보고 싶은 건 진짜 공격적인지 않은 내 다른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너무 큰 희망이란 걸 안다. 아마 위대한 영화의 샘이자 근원으로, 나는 살면서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사람들 중 나 자신이 가장 폭력적이지 않은 존재라고 주장하며 살아야만 하나 보다. 큐브릭 감독과 똑같이.(p347)
<리스너>, 1972년 2월 17일
기억해야 할 점은 시인, 예술가, 소설가에게 현실의 실체는 마음속으로 스치는 모호한 이미지가 아니라 말로 드러난다는 것이죠. 말이란 작가가 알고 있는 그대로 어떤 의미를 제시하거나 사건들을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순 없죠.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독자 스스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모의 시나리오 같은 걸 제시하는 것이죠. 작가는 선악이라는 기준으로 어떤 장면을 항상 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 덧붙일 점은 선이 항상 필연적으로 악의 반대인 것은 아니고, 악에도 어떤 주관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에도 옳고 그름을 초월하는 어떤 주관적인 가치가 있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선이란 아름다운 음악, 사과의 맛, 또는 섹스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를 알지 못하면 중도의 어떤 것도 알기 어렵거나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악을 저질러 본 적이 없는 남자나 여자는 선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죠.(p354)
<출판되지 않은 앤서니 버지스와의 인터뷰 중 일부> 1972년 10월 25일
폭력은 유일하게 폭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현재 잔혹함을 시행하는 일이 종종 천명된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는 제거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나는 단지 고문이나 살인만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이라는 장치로 사회의 안정에 행해진 폭력, 그리고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에 가해진 폭력 또한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폭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폭력을 낮에는 뉴스에서, 밤에는 오락물에서 본다. 한때는 내가 공적으로 그것을 제거하는 법을 알았지만, 지금 나의 유일한 희망은 개인으로서 폭력을 사회의 정상적 규범으로 수용하길 거부하고, 그 결과 순교자의 길을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두운 미래의 전망이다.(p432)
<폭력에 대한 마지막 말> 1982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