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밤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 2012년
인도 태생의 환상적 이야기꾼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은 세 번의 부커상 수상과, 신화와 역사, 환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장편소설이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는 순간 태어나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게 된 1001명의 아이들 중 0시 정각에 태어나 가장 뛰어난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게 된 살림 시나이의 서른 해를 그려내고 있다. 인도가 20세기에 경험한 독립과 분열의 역사를 상징하는 살림의 일생을 따라간다. 살림이 회고록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연인인 파드마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다. 책은 모두 3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 담긴 이야기와 그 제목을 피클공장의 요리사인 살림을 통해 피클병으로 환치하는, 미각을 자극하는 서술과 함께 생소한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한다.
... 내 원고에서 처트니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그러니 더는 얼버무리지 않고 속 시원히 말해버리겠다. 역사상 가장 예민하고 섬세한 후각기관을 가진 나 살림 시나이는 요즘 각종 양념장을 대량생산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 지금쯤 여러분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요리사였어? 별 볼일 없는 솥뚜껑 운전수였단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네!’ 요리와 언어에 두루 통달한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재능을 가졌다. 여러분은 경악했겠지만 나는 월급 이백 루피를 받는 하찮은 요리사 나부랭이가 아니라서 나만의 네온 여신상이 번갈아 비춰주는 노란색과 초록색 불빛 아래서 혼자 일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각종 처트니와 카손디는 결국 야간의 글쓰기와도 관계가 있다. 낮에는 피클통 사이에서, 밤에는 이 종잇장 사이에서 나는 보존이라는 위대한 작업에 시간을 바친다. 그리하여 과일처럼 기억도 시간의 부패 작용을 이겨내게 된다.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1, P87-88>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부위별로 사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 모든 부위가 하나로 통합된 후 그녀는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탈바꿈하여 한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한평생 ‘원장수녀님’이라는 특이한 호칭으로 불렸다.
할머니는 나이보다 빨리 늙었고 몸집이 펑퍼짐했으며 얼굴에는 마녀의 젖꼭지처럼 커다란 사마귀 두 개가 있었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살았다. 온갖 전통과 확신으로 쌓아올린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해 초에 아담 아지즈가 식구들의 사진을 실물 크기로 확대하여 거실 벽에 걸어두려고 한 적이 있었다. 세 딸과 두 아들은 그럭저럭 고분고분하게 포즈를 취했지만 원장수녀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가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사진사가 몰래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원장수녀님이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사의 머리통에 내리쳐 박살내고 말았다. 다행히 사진사는 죽지 않았지만 우리 외할머니의 사진은 지구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누군가의 시꺼먼 상자 속에 순순히 갇힐 분이 아니었다. 베일도 안 쓰고 뻔뻔스럽게 얼굴을 드러낸 채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심란한데 증거물까지 남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1, P93>
그러나 물론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만약 그렇다면 무사는 -고령과 노예근성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정해진 시간이 될 때까지 조용히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 -낙관적으로 생각할 경우- 모든 일이 미리 예정되었으니 우리는 저마다 의미 있는 존재인 셈이고, 따라서 우리가 한낱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고 ‘존재이유’ 따위는 없다는 끔찍한 생각은 안 해도 되니까 일제히 일어나 환호할 수도 있고, 반면에 -비관적으로 생각할 경우-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차피 모든 일이 예정대로 펼쳐질 테니 일체의 사고 판단 행동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당장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낙관주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운명 속에서, 아니면 혼돈 속에서? 어머니가 (이미 동네 사람들 모두가 들어버린)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소, 다 시간문제라고” 그렇게 대답했던 아버지는 그 순간 낙관론자였을까, 아니면 비관론자였을까? 어머니의 임신은 운명이었던 듯싶다. 하지만 나의 탄생은 적잖이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다 시간문제라고,’ 그렇게 말할 때 아버지는 어느 모로 보나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시간은 불안정한 것이므로 결코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심지어 조각조각 분할되기도 한다: 파키스탄 시계는 인도 시계보다 반 시간 늦고..... 분리주의 운동이라면 질색을 하던 케말 씨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그게 어처구니 없는 수작이라는 증거를 보여줄까? 분리주의자들은 자그마치 30분이나 떼어먹으려는 거라고!” 케말 씨는 힘주어 부르짖었다. “‘시간은 분할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을 강조해야지!” 그러면 S.P.부트는 이렇게 따졌다. “시간을 그렇게 간단히 바꿔버릴 수 있다면 도대체 뭐가 현실이야? 어디 말해보게. 도대체 뭐가 진실이야?”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1, P173-174>
모든 놀이에는 교훈이 따르는 법인데, 뱀과 사다리에는 다른 어떤 놀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이 있다. 이 놀이는 사다리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로 그 너머에는 뱀이 기다리고 있으며 뱀 한 마리를 만날 때마다 곧 사다리가 보상해준다는 영원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것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이 놀이는 모든 일에 수반되는 불변의 양면성, 즉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선이 있으면 악도 있는 이원성을 암시한다. 사다리의 든든한 합리성은 뱀의 신비로운 유연성과 균형을 이루고, 계단과 코브라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립관계의 은유를 발견한다. 자, 여기 메리와 무사의 전쟁이 있고, 무릎과 코의 대결이 있고.... 그러나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벌써 이 놀이에 한 가지 중요한 요소, 즉 양면성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어날 여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때로는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질 수도 있고, 때로는 뱀의 독을 이겨내고 기어올라 승리를 거둘 수도 있고....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야기를 단순하게 풀어가는 편이 낫겠고, 따라서 어머니가 경마장에서 행운을 거머쥐면서 승리를 향한 사다리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이 나라의 시궁창에는 아직도 뱀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만 여기 기록해둔다.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1, P305-306>
“중요한 건 말이지. 우리가 태어난 데는 틀림없이 어떤 목적이 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내 말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안 그래? 그래서 생각한 건데. 우리가 다 함께 의논하면서 그게 뭔지 궁리해보고, 그다음엔, 뭐랄까. 우리 인생을 바쳐서......” 그때 시바가 버럭 소리쳤다. “부잣집 꼬마, 넌 아무것도 몰라! 목적은 무슨 목적이 있다는 거야, 인마? 이 썩어빠진 세상에 이유는 무슨 이유냐?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너는 부자고 나는 가난하냐? 굶주리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 인마? 이놈의 나라에 사는 멍청한 새끼들이 몇 억이나 되는 아무도 모르는데, 인마. 너는 여기에 무슨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인마, 내 말 똑똑히 들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빼앗아서 실컷 쓰다가 뒈지면 그만이라고. 그게 이유란 말이야. 부잣집 꼬마야. 나머지는 다 웃기는 개소리라고!”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1, P464>
..... 어쨌든 나의 후각은 얼마나 대단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람에서부터 온갖 냄새를 구별할 수 있지만 그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반면에 나는 최근까지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면서 평생을 보냈고, 따라서 냄새와 관련된 온갖 금기사항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 방귀를 뀌었을 때 모르는 체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종종 부모님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류 전체가 물질적으로 발생한 냄새만 맡을 수 있는 반면에 나는 훨씬 더 차원 높은 냄새까지 자유자재로 감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 맞이한 사춘기 때부터 나는 세상의 은밀한 냄새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갓 태어난 사랑이 발산하는 향기는 황홀하지만 금방 흐려지고, 증오심의 자극적인 악취는 더 진하고 더 오래간다. (‘순수의 땅’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누이를 향한 나의 사랑에서 본질적으로 불순한 동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모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타는 불꽃은 처음부터 내 콧구멍을 엄습했다.) 코는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 사건을 다스리는 능력은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물려받은 코의 새로운 기능을 유일한 무기로 삼아(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파키스탄을 침략했으며 그 과정에서 냄새로-진실을-알아내는-능력, 냄새로-상황을-파악하는-능력, 냄새로-목표물을-추적하는-능력을 얻었지만 정작 침략자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능력-즉 적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은 지니지 못했다.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2, P149-150>
나는 누구-무엇인가? 내 대답은: 나는 나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내가 겪고 보고 행한 모든 일, 그리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의 총합이다. 나는 이-세상에-존재함으로써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이고 사건이다. 나는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이며 내가 죽은 뒤에도 나 때문에 일어날 모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나’가-즉 지금은-6억-명도-넘는-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모두-그렇게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풀이 한다: 나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
그러나 이제 내-안에-담긴-것들을 쏟아내는 작업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그리고 내부의 균열이 점점 더 벌어지면서-찌익 쫘악 우지끈,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낀다-나는 점점 더 여위어 반투명에 가까워진다. 이제 남은 부분이 많지 않다. 머지않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6억 개의 먼지, 유리처럼 투명해서 보이지도 않는 먼지가 되어.......
그러나 그날은 화가 났다. 고리버들 바구니 속에서 각종 분비샘의 활동이 지나치게 활발해졌다. 에크린샘과 아포크린샘이 땀과 악취를 마구 뿜어냈다. 마치 모공을 통해 나의 운명을 몰아내려고 애쓰는 듯했다.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2, P302-303>
정치라는 것은, 아이들아: 태평성대에도 언제나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멀리했어야 옳았다. 나도 존재이유 따위는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거대하고 거시적인 활동보다 차라리 사생활이-즉 개개인의 보잘것없는 인생이-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참는 수밖에 없다. (p404)
‘살림 시나이’ 개인의 역사와 인도의 역사를 서술한다.
나의 특별 조리법: 지금까지 그것들을 아껴두었다. 피클 공정의 상징적 가치에 대하여: 인도 전 국민을 낳은 난자 6억 개를 표준규격 피클병 하나에 모두 담을 수 있다. 정자 6억 마리는 숟가락 하나로 퍼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피클병 하나하나 속에는 (내 안색이 잠시 불그레하게 물들더라도 부디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지극히 숭고한 가능성이 담겼는데, 이를테면 역사를 처트니화(化)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시간으로 피클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희망!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 책의 각 장으로 피클을 만들었다. 오늘 밤 내가 특별 조리법 30번: ‘아브라카다브라’라고 적힌 병에 뚜껑을 단단히 닫으면 마침내 이 기나긴 자서전도 끝을 맺는다. 나는 언어와 피클을 이용하여 내 기억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에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불완전의 그늘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p453-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