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단순한 열정Simple Passion> 2020년
소설 <단순한 열정>은 1991년 발표된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현대 프랑스 문단의 대표 작가인 에르노는 ‘자전적 글쓰기’라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자전적 소설인 그녀의 작품들은 주체적 자아의식을 가진 여성이 화자로 등장한다. 1984년에 발표해 르노도상을 받은 '자리'로 작가는 글쓰기 태도에 중요한 변곡점을 형성하게 된다. 2008년,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내면 일기와도 같은 <단순한 열정>은 나에게 조금 어리둥절한 내용이다. 2022년 노벨문학상의 작가의 작품치고는 최악의 작품이지만, 그래도 뭔가 우리에게 질문하는 무얼까 생각해보게 한다.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걸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증언의 형식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여성잡지에서 흔히 보듯 고백 수기의 형태로 쓸 것인지, 아니면 선언문이나 보고서 또는 해설서의 모양새를 한 꾸밈없는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11월 11일에 다녀갔다”라거나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하는 식으로 정확한 날짜를 밝히는 연대기적인 서술방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도 않다(그런 것들은 절반가량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내 열정의 근원을 알기 위하여 정신분석학자들이 하듯이 내 오래된 과거나 최근의 경험을 더듬어 찾아낼 생각은 없다. 어린 시절 이래로 내게 영향을 준 심리적인 모델을 근거로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페드라’, 혹은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큼이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P25-27>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 -‘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 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p19-20)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도 에르노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진행중인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에르노가 연출한 가족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 에이트 시절(The Super 8 Years)>이 ‘와이드 앵글’ 섹션에 초대됐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에르노 가족의 여가 생활을 담은 작품으로 196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사회변혁 운동인 이른바 ‘68혁명’ 이후의 중산층 모습을 볼 수 있다. 에르노는 “한 가족의 아카이브일 뿐 아니라 1968년 이후 10년 동안의 여가 생활, 삶의 방식, 중산층의 꿈 등에 대한 증언”이라고 소개했다. 전 남편 필립 에르노가 가족의 모습을 슈퍼8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에르노와 아들 다비드 에르노가 함께 편집했다. 에르노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단순한 열정>을 원작으로 한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의 동명 영화는 2020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됐으며, 국내 개봉 일정을 잡고 있다.
<사건>을 원작으로 한 오드리 디완 감독의 영화 <레벤느망>은 지난 3월 국내 개봉했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 에르노가 임신 중단 수술을 받은 경험을 고백해 이슈가 됐다. 지난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 왓챠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며 각각의 작품이 만들어진 때와 특징등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내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그것이 열정과 관계가 있을 때뿐이었다. (p42)
passion(열정, 열망, 감정, 흥미)은 ‘아픔,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passio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에도 대문자로 쓴 ‘The Passion’이 예수가 로마군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겪은 고통과 수난을 뜻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중세 신비극(mystery plays)으로 종교극의 일종인 ‘그리스도 수난 성사극(Le mystere de la Passion)’이 국내에서는 ‘정념의 신비’로 오역(誤譯), 소개되기도 했다. passion은 14세기부터 감정과 욕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후 열정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왜 ‘고통’이 ‘열정’으로 바뀐 걸까? passion이 프랑스를 거쳐 영어에 편입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 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 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p60)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버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p6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