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Oct 28. 2022

헨릭 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

영화 <쿼바디스> 1951년

영화 <쿼바디스>의 감독은 머빈 르로이로 엄청난 양의 다작 감독이며 가장 유명한 작품이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의 <애수>이다. 그리고 준 앨리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자넷 리 주연의 고전 <작은 아씨들>을 연출했고, 말년에 존 웨인과 함께 <그린 베레>라는 전쟁 영화도 찍었다. <쿼바디스>의 배우진은 먼저 히로인 리기아 역에 데보라 카, 남자 주인공인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역에는 로버트 테일러가 출연하고 있다.   

   

성서와 관련된 영화들이 굉장히 많이 제작되었는데, <벤허>, <십계>,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밧세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소돔과 고모라>, <바라바>, <성의> 등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쿼바디스>는 네로 황제 시절의 로마 제국, 정복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비니키우스는 기독교도인 리기아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가공의 인물인 두 남녀 주인공과 함께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네로 황제와 베드로, 그리고 사도 바울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가장 중요하게 전하려고 했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은 로마를 급하게 떠나는 베드로 앞에 주 예수가 나타나는 장면이다. 빛의 형상으로 예수가 베드로 앞에 나타나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왜냐하면 황제가 겉치레를 중시하기 때문이지. 인질을 잡아왔다는 소문은 온 로마에 퍼질 거야. 리기아는 볼모로 붙잡혀 온 것이니,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황제의 궁전에 잡아두었다가 슬그머니 네 집으로 보내면, 만사가 순조롭게 되는 게지. 붉은 수염은 겁 많은 강아지야. 자신의 권력이 무한한 데도 불구하고, 모든 행동에 명분을 만들고 합법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어 하지. 자, 이제 철학적인 사색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진정되었느냐? 나는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해봤다. 왜 무엇 때문에 모든 범죄자들은 자신의 죄를 법률이나 정의, 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미화시키려 하는가? 심지어 황제의 경우처럼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또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처벌받지 않을 유력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조차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연하는 것은 왜일까? 도대체 그런 절차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기의 어머니나 아내를 죽이는 것은 아시아의 어느 미개한 나라에서나 하는 짓이지, 대 로마 제국의 황제가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원로원에 변명의 서신 따위는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로는 즉시 편지를 보냈다. 그가 체면치레에 안간힘을 쓰는 건 겁쟁이이기 때문이야.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에는 겁쟁이는 아니었는데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일일이 변명을 했지, 왜 그랬을까?

어째서 악은 덕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걸까? 들어보렴. 그 이유는 간단하단다. 악행은 추한 것이고, 덕행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진정한 탐미주의자는 동시에 진정한 도덕주의자라는 결론이 성립되는 것이며, 고로 나는 덕망 높은 인자(仁者)가 되는 셈이지. 오늘이야말로 지하의 프로타고라스, 프로디쿠스, 고르기아스의 망령들에게 포도주라도 따라주어야 할까 보다. 소피스트들의 궤변도 제법 쓸모가 있으니 말이다.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더 들어봐라. 내가 아울루스 집에서 리기아를 끌어낸 것은 리기아를 네게 주기 위해서다. 위대한 조각가 리시푸스가 너희 둘을 보았다면, 두 사람의 모습을 본떠 훌륭한 군상(群像)을 빚어냈을 것이다. 그만큼 너희 두 젊은이는 아름답다. 그러니 내 행동 또한 미를 추구하는 아름다운 것이며, 아름답기에 덕이 되는 것이다. 자, 보아라. 마르쿠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것은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덕’ 그 자체이다. 만일 아리스티데스가 살아 있다면, 내게 와서 덕에 관한 이 짤막한 강의를 듣고 100무나도 아깝지 않다고 했을 걸?“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 바디스1, P104-105>     


덕과 진리는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선과 덕의 최고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p323)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해야 하며, 그 악을 선으로써 갚아야 한다. 선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악한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악한 사람들로부터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힘에 의해서이다. (p324)     


저는 바오로에게 이 종교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면 세계는 테두리가 빠진 나무통처럼 조각나 버릴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사랑은 그 어떤 위협보다 강하게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테두리입니다.”라고요. (P446)     

예수의 일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왕자 벤허를 이야기하는 영화 <벤허>와 마찬가지로, 쿠오바디스는 상당히 종교적인 소설이다. 소설보다는 영화로 잘 알려진 영화 <벤허>의 전차 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일 것이다. 벤허가 고난을 극복하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면 쿠오바디스는 비니키우스와 리기아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의 믿음을 이야기한다.       

 

“사도님! 구세주께서는 당신께 어린 양들을 돌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들은 이미 이곳에는 없습니다. 설령 오늘은 살아 있다 해도 내일이면 다 사라질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님께서는 새로운 양들을 모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샤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도 있고, 안티오크와 에페소, 그 밖의 수많은 도시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사도님께서 지금 로마에 남아 계신다고 무슨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곳에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야수들의 승리를 더 빛나게 해줄뿐입니다. 주께서는 아직 요한 사도에게는 죽을 날을 정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처벌을 하려면 반드시 재판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만일 악마의 힘이 사도님에게까지 뻗치게 된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어린 양들은 ‘과연 네로보다 더 강한 힘은 없단 말인가.’하고 의구심을 갖게 되어 용기를 잃고 말 것입니다. 사도님은 그리스도 교회의 반석이십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신 사도님께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무리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셔서는 안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짐승 같은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눈물로 간청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외쳤다.

베드로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베드로는 일어서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있기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바디스 2, P439-440>     

이윽고 산등성이로 태양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도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황금빛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고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산등성이를 따라 땅으로 내려오면서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베드로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저 밝은 빛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자리우스가 대답했다.

베드로는 잠시 후 한 손으로 이마를 가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햇빛 속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귀에는 희미한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은 적막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나자리우스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마치 멀리서 보이지 않는 손이 흔들기라도 하는 듯 떨고 있는 나뭇가지와 들판 위로 멀리 퍼져나가고 있는 햇살뿐이었다.

나자리우스는 당황하여 사도를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도님. 무엇을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베드로 사도의 손에서 지팡이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입을 벌린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환희, 그리고 황홀한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

마치 누군가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사도는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나자리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베드로의 귀에는 온화하면서도 슬픈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내 어린 양들을 버렸으니,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사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그대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나자리우스에게는 사도가 기절했거나 아니면 죽은 것 같이 보였다. 이윽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베드로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집어 들고 말없이 일곱 언덕이 우뚝 서 있는 로마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소년은 사도를 향해 베드로가 방금 전에 한 말을 메아리처럼 되풀이했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

“로마로!” 사도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베드로는 로마로 되돌아왔다.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바디스 2, P442-443>      

 

그는 비로소 주님이 왜 자기를 다시 로마로 돌려보내셨는지 알 수 있었다. 오만과 죄악, 타락과 폭력의 소굴이었던 로마가 서서히 그리스도의 도성으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이 도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사랑으로 지배하는 세상의 중심이 되리라. (p445)     

[페트로니우스가 비니키우스에게 보낸 답장]

물론 너희들의 올림푸스는 한층 더 놓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는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올라오십시오. 그러면 지금껏 보지 못한 새 세상을 보게 되실 겁니다.”라고 외치며 나를 부르려 할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구나. “진리여, 내게는 거기까지 올라갈 두 발이 없네.” 이 편지를 끝까지 읽고 나면 너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새벽의 여신’을 아내로 맞은 행복한 남편이여! 너희들의 가르침은 내게는 맞지 않는다. 너희들은 누구나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가마를 메고 다니는 비티니아 인이나 목욕물을 데우는 이집트 인을 나더러 어떻게 사랑하란 말이냐? 붉은 수염이나 티겔리누스와 같은 작자들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카리스 여신들의 흰 무릎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것 같구나. 로마에는 어깨가 구부정한 사람, 무릎이 퉁퉁 부은 사람, 종아리가 빼빼 마른 사람, 눈이 흉측하게 생긴 사람, 머리가 지나치게 큰 사람이 적어도 십만 명은 있다. 그런 사람들까지 모조리 사랑하란 말이냐? 도대체 가슴으로 느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느냐? 만일 너희들의 신이 내가 그런 사람들까지 모두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그 전능하신 힘으로 왜 처음부터 그들에게, 팔라티움 궁전에 있는 니오베의 어린 자식들의 조각상 같은 아름다움을 주시지 않았단 말이냐?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도저히 나는 추악한 것을 사랑할 수 없구나. 우리의 신들을 믿지 않는 것과 그 신들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p466-467)     


그렇다고 나를 위해 슬퍼하진 말아라. 지금껏 내게 불멸을 약속해 준 신은 하나도 없었으니, 내 죽음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꼭 너희들의 신만이 의연하고 평화롭게 죽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란다.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 사람들은 최후의 잔을 마시고 나면 영원한 휴식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침착하게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일찍이 플라톤은 “덕은 음악이며, 현인(賢人)의 삶은 하나의 조화로운 화음”이라고 말했다. 만일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덕망 있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을 때도 덕망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p468-469)      

 

1888년 헨릭 시엔키에비츠는 미국 작가 L. 윌리스의 <벤허>(1880)를 읽으면서 역사와 허구를 적절하게 접목시킨 이 소설에 매료되었다. 시엔키에비츠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말>지의 편집장인 고들레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벤허>는 예수의 생애와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긴밀하게 연계시킨 독창적인 작품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실주의적인 경향과는 달리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고, 성경에서 그대로 인용한 대목도 많지만, 제가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엔키에비츠의 적극적인 권유로 <벤허>는 <말>지에 연재되기 시작했고, 단행본으로 출판될 때는 시엔키에비츠 자신이 직접 교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1892년 시엔키에비츠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겪은 마지막 수난과 허구를 접목시킨 <주님의 뒤를 따르라!>라는 단편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시엔키에비츠로 하여금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역사소설을 집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굳혀주었다. (p501)     

    

시엔키에비츠가 <쿠오 바디스>를 쓰게 된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빼앗긴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 그리고 절망에 빠진 동포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어야겠다는 작가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으로부터 박해받는 폴란드인들의 비참한 현실 또한 나로 하여금 <쿠오 바디스>의 집필을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력과 권위에 의해 다스려지던 네로 시대는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압제에 신음하던 폴란드의 시대상과 여러모로 일치했다. 박해받는 기독교인은 외세의 지배하에 고통받는 폴란드 인들의 수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시엔키에비츠는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숭고한 모습을 통해 폴란드 민족에게 정의와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p504-505)  


이전 10화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