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293. 히로시 스기모토의 화석fossil 사진?

by 노용헌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의 <역사 쇼show의 역사(Japan Society, 2005-2006)>는 스기모토 자신의 사진 5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몇 가지 다른 종류의 인공물(人工物, artifact)(나무 조각이나 벽걸이 족자와 같은)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진도 인공물도 아닌 오브제(적어도 조각이나 벽걸이 족자와 같은 방식의 인공물은 아니다)로 시작한다—삼엽충, 암모나이트, 그리고 갯나리(sea lily)의 화석fossil 세트. 이 오브제들이 그 전시의 다른 것들과 다른 점은, 스기모토Sugimoto가 말했듯이, 그것들은 "인류의 발흥 훨씬 이전의 시대까지" 그리고 따라서 "예술의 개념"이 만들어지기 이전이라는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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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 예술에 선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스기모토가 선택한 화석은, 사실, 매우 아름답지만, 어떤 일몰은 매우 아름답고 어떤 바위는 그리고 어떤 산은 매우 아름답다. 우리는 일몰이 예술의 역사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기모토는 화석이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그것들이 "가장 오래된 형태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이 그 자신의 예술인, 사진을 위한 일종의 계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의 쇼와 특히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화석이, 일종의 "이전의-사진pre-photography"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진이 "인류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회화와 조각보다 훨씬 새로운, 예술적 표현의 새로운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회화와 조각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심지어 "인류"보다도 더 오래되었다. 사진은 선사시대의, 인류 발생 이전의, 최초의 예술이다.


이 견해는 약간 믿기 어려운 명백한 의미가 있다-어떻게 사람들이 만들지 않고 예술이 있을 수 있는가? 사진가 없이 어떻게 사진이 있을 수 있나요?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의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훨씬 더 분명한 의미가 있다. 화석-발자국, 그림자, 반영과 같은-은 이 책의 기고가들에게 깊이 (그리고, 나의 의견, 적절하게) 집착하는 주제인, 지표성의 일반적인 예이다. 사실, <예술 세미나>와 그것에 대한 평가의 다른 주요 주제 모두가 매체 특이성과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에 대한 개념인 한에 있어서, 이 책은 항상 지표성이라는 흥미로운 의미가 있고,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푼크툼은 단지 지표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방법이고, 지표성-만일 단지 한 문제의 형태로-은 사진의 매체 특이성과도 둘 다 중심적인 것이고,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아비게일 솔로몬-고도(Abigail Solomon-Godeau)가 "사진과 예술사적 담론의 관계"에 있어서, 이 책의 또 다른 관심과 논쟁의 주제이다.2)


그래서 스기모토의 화석은 사진의 표상(emblem)으로서 그리고, <예술 세미나>의 독자들이 이미 알아차렸듯이, 사진의 문제로서 모두 뜻이 통한다. 그것들은 사진의 표상으로서 의미가 있고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갯나리(sea lily) 화석군(化石群)의 화석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 당신은 그 화석군이 화석을 만드는 데 있어서 화석 그 자체가 그 화석의 사진을 만드는 데 할 것과 같은 인과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구성한 것은 그림painting이 필요 없는 것의 방식으로 사진에 인과관계를 나타내어 불가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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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스기모토는 자신의 화석 사진들을 "또 다른 종류의 화석", 마찬가지로, 요컨대, 화석의 화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각수(一角獸, unicorn)의 그림이 있지만, 유니콘의 화석은 없고 그것들의 사진도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화석들은 또한 사진의 문제로서, 그리고 같은 이유로 뜻이 통한다. 갯나리 화석군의 그림은 그것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의 그림이다. 갯나리 화석군의 화석은 둘 다 아니다. 발자국은 그것을 만든 발의 표현이 아니다; 연기는 불의 기호일 수 있지만 그것의 그림은 아니다. 그래서 조엘 스나이더(Joel Snyder)가 "인과관계의 물건stuff"(즉, 지표성)에 대해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이 사진을 그림으로 보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의 두려움이 완전히 예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사실, 두려움과 희망으로서 둘 다, 사진이 그림이 아니라는 생각은 최근 사진의 역사와 최근 예술의 역사에 더 일반적으로 중심적이다.


1) Hiroshi Sugimoto, History of History (New York, 2005). This brochure accompanied the exhibition at the Japan Society Gallery (September 23, 2005, though February 19, 2006). Its pages are unnumbered.

2) Indexicality is, but Peirce probably is not. We ought to disconnect the claim that the distinctive causal connection between the referent of a photograph and the photograph itself is important to the theory of photography from the claim that Peirce’s semiotics is similarly important. The latter claim might be true, but it does not follow from the former.


<Photography Theory-James Elkins 번역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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