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287. 사진의 용도

by 노용헌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를 읽고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는 암투병을 하고 있는 그녀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사랑을 나눈 후 그 현장을 일기처럼 글을 쓰고 사진으로 남기는 내용이다. 사진의 용도는 그의 기억을 남기는 일기의 용도로 사용되어진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사진에 매료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물질적인, 유기적인 얼룩. 글을 쓸 때 역시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나는 단어들이 떼어내지 못하는 얼룩이기를 바란다.”


“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진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과거 속에서 노래는 확장되어 나가고, 사진은 멈춘다. 노래는 시간의 행복한 감정이며, 사진은 시간의 비극이다.” (p114-115)


1.어디에 쓸 사진인가

사진을 처음 접한 분들이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은 아마도, ‘카메라 뭐가 좋아요?’ 라는 말일 것이다. 대답은 난감할 때가 많다. 뭐를 추천해 줘야 할지 말이다. 카메라 종류는 캐논, 니콘, 파나소닉, 소니, 라이카 여러 가지가 있고, 가격대비 100만원이든, 500만원이든, 고가의 카메라가 아닌 전문가용이 아닌 비전문가들의 취미 생활로 어떤 것이 좋을지? 대답은 중고로 싼 것 사다가 좀더 재미가 붙으면 렌즈도 지르고, 카메라 바디도 사게 되며, 돈 들어가는 고급 취미예술인 셈이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에 쓸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구입하려고 하세요?’ 단지 혼자서 집에서 개인적으로 감상하려고 촬영하시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돈 받고 파는 사진을 찍을 려고 하는 것인지?, 사진은 용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포토저널리즘이든, 광고 브로셔나 홍보물에 사용할 광고사진이든, 전시장에서 작품을 걸기 위한 사진이든, 그 용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삼익악기가 좋은 것인지, 야마하악기가 좋은 것인지, 또는 모나미 볼펜이 좋은 것인지, 파카Parker 볼펜이 좋은 것인지, 그런데 악기나 볼펜의 물성(物性)이 아니라 좋지 않다면 아마도 그것은 조율이 되어 있지 않거나, 무엇을 쓸려고 하는지를 잘 모르고, 단지 장비 탓만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2.내 사진은 칼인지, 밥인지?

‘전적으로 위대한 사람의 지배 하에서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Beneath the rule of men entirely great,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말이 있다. 에드워드 불워-리튼의 희곡 <리슐리외>에서 나오는 이 말의 뜻은 언론의 영향력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어진다. 과연 사진은 그 용도에 따라서 칼이 될 수도 있고, 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사진이 칼인지, 밥인지를 떠나서 우리는 사진의 용도를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나는 사진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인지, 주제의식이 없이 신변잡기용 사진을 찍을 것인지, 정리도 되지 않은 사진들을 찍으면서 과연 우리는 사진에 남기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나도 한 몫을 하며 엄청난 정보 쓰레기들을 핸드폰에 남기고, 컴퓨터에 남기고, 여기 저기에 나의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돌아와 칼이 될지, 밥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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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쓸모있슴과 쓸모없슴

쓸모가 있다, 쓸모가 없다. 내게 필요한 물건은 쓸모가 있고, 내게 전혀 필요없는 물건들은 쓸모가 없어서 버리게 된다.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사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내게 쓸모가 있다는 기준은 내가 정하게 된다. 말라 비틀어진 화분의 나무일지라도, 그 가치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에 따라서 쓸모가 있다, 쓸모가 없다로 나뉘어진다. 쓸모는 결국 내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나눈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위에서 조차 말로써는 영원한 친구라고 운운 하면서도 영양가 있느냐 없느냐 등등으로 구분하여 당장 쓸모 있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간다.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그곁에 머물던 나무꾼은 나무를 베려 하지 않았다. “왜 이 나무를 베지 않소?” “이 나무는 너무 커서 쓸모가 없다”

장자는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없기 때문에 하늘이 내린 수명을 누릴 수 있구나?”

산의 나무는 스스로 쓸모있게 자라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베게 만들고, 등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힌다. 계피나무는 먹을 수 있어 베어지고, 옻나무는 옻칠에 쓸모가 있어 잘리고 만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 사람이 걸어가자면 발 디딜 땅만 있으면 된다. 그렇지만 필요 없다고 그 외의 땅을 다 깎아 없애버린다면 사람은 걸어갈 수 없게 된다.

쓸모없다는 것이 쓸모있는 것의 가치를 밝히는 것을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한다고 장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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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하지 못한 채 잊고 있던 몸짓과 움직임, 낯선 법칙을 따라 니트, 스타킹, 신발 같은 요소들이 예측할 수 없는 늘 새로운 구성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 구성을 함께 발견하고 사진 찍는 것에 금세 호기심과 흥분마저도 느끼게 됐다.

자연스럽게 우리 둘 사이에 규칙이 생겼다. 옷의 배치에 손대지 않을 것. 하이힐이나 티셔츠의 위치를 바꾼다는 것은 거짓을 조작하는 일이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기장속 단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사랑 행위의 실재를 해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만약 우리 둘 중 한 명이 부주의로 속옷을 집게 된다고 해도,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내려놓지는 않았다.

M은 보통 한 장면을 여러 번 찍었다.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 전체를 포착하기 위해 여러 앵글을 잡았다. 나는 그가 사진을 찍는 편이 더 좋았다. 그와는 달리 나는 사진을 많이 찍어보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건성으로 찍어 본 것이 전부다. 초기에 그는 내가 갖고 있던 무거운 검은색 삼성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 후에는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 소유였던 미놀타를, 더 나중에는 고장 난 나의 삼성 카메라를 대신하여 소형 올림푸스를 썼다. 세 개 모두 필름 카메라였다.

필름을 다 쓰고 포토서비스에 가져가서 인화하는 시간, 일주일 혹은 몇 주의 기간은 사진을 찍는 일과 보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나눠 놓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식으로 이뤄진다.

사진을 찾으러 간 사람이 봉투를 열어 보지 않을 것.

음악을 틀고 마실 것 한 잔을 앞에 두고 소파에 나란히 앉을 것.

사진을 한 장씩 꺼내어 함께 볼 것.

매번 놀라웠다. 사진을 찍었던 방도, 옷가지들도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보았던, 우리가 구원하기 원했던, 곧 사라져 버릴 장면이 아니었다. 난해한 형태의, 주로 화려한 색깔을 쓴, 낯선 그림이었다. 아침 혹은 밤의 -이미 날짜를 기억하기도 어려운- 사랑 행위들이 구체화되고 미화되어 이제는 여기 아닌 ‘다른 곳’, 신비로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우리는 사진을 찍고 보고 쌓아두는 것에만 만족했다. 사진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어느 날 저녁, 식사 중에 문득 떠올랐다. 누가 먼저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둘 다 사진에 형체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다. 마치 그때까지 사랑한 순간의 흔적을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 것처럼 무언가를 더 필요로 했고, 그것이 글이었다.

우리는 40여 장의 사진 중에 14장을 골랐다. 그리고 완성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에게 보여 주지 않고,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기로 합의했다. 이 규칙은 마지막까지 엄격하게 지켜졌다.

한 가지 예외는 있었다. 우리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 나는 유방암 치료 중이었다. 글을 쓰면서 사진에는 부재한, 삶과 죽음 사이의 불명확하고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이것이 나인가, 과연 나인가, 누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일어나는 내 몸 안의 ‘또 다른 장면’들을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M에게 이야기를 했고, 그 역시 몇 개월 동안 우리들의 관계에서 중요했던 그 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작품들’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그때뿐이었다. ‘작품들’, 이 프로젝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임시 명칭으로, 우리는 그 이름이 이중적인 의미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들의 기획의 이익이나 가치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점점 더,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는, 존재의 과도한 이미지화에 관련된 일이기도 했다. 사진과 글은 매번 우리에게 표현할 수 없어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쾌락의 순간에 현실감을 더욱 부여해 주었다. 현실적인 흔적에서 성의 비현실성을 포착하는 것. 그러나 글로 쓰인 이 사진들이 기억 속에서 혹은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야만, 현실 그 이상의 것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 사진의 용도, P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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