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사냥꾼인가? 흔적을 찾는 고고학자인가?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96

by 노용헌

우리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과 같은 SNS 사진이나 영상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지들로 소통하고, 퍼나르는 시대에 이미지라는 은유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깊이 있는 성찰보다는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감상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다. 쉽게 가짜뉴스를 믿고 엉터리 주장에 동조한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판단보다는 이미지의 표피적인 해석만에 의존한 즉각적인 반응은 진실은 묻어둔 채 은유의 이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우리는 질병의 본질보다 질병이 가진 상징과 은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간파했다. 본질로서보다는 이미지가 가지는 상징성과 은유는 과연 무엇을 남길까?


나는 사진작가와 촬영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의 불균형이 늘 불편했다. 카메라 앞 대상이 자신의 표정과 자세를 통제하기는 하지만, 프레임 안에 무엇이 들어갈지, 정확히 언제 셔터를 누를지는 작가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계속 권력을 행사하는데, 어떤 이미지를 인화하거나 온라인에 게시할지, 그 이미지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 On Photography>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을 촬영한다는 것은, 그들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일이다. 촬영 대상 자신은 결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당사자들이 스스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들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촬영 행위의 폭력성은 사진이 촬영 과정에서 이미지를 사냥하는 사냥꾼으로 여겨진다. 사냥꾼들은 자신이 죽인 동물의 시체를 전리품처럼 전시하기 위해 사진 찍었다. 이러한 관행은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것이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처럼 카메라로 사냥하는 일종의 취미를 넘어선 활동처럼 보여진다.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대상에 카메라를 조준한 다음, 셔터를 누른다(shoot). 사진작가들은 뭔가 그림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이미지 사냥꾼인지 그런 생각이 든다. 막연히 그림만을 만들려고 하다 보면, 자칫 본질을 놓치고 만다.


<카메라 루시다>는 좀 더 고뇌가 따르는 방향으로 옮기기 위해 다른 전략을 사용하지만, 그것 역시, 사진 지표의 개념에서 시작된다. 그 사람들-그리고 여기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은, 파스타를 먹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 주제(나중에 파스타로 돌아가겠지만)인-은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사진의 지시대상물'을 이미지나 기호가 지시하는 선택적인 실재계(real thing)가 아니라 렌즈 앞에 놓이게 되어, 사진에 없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실재계라고 부른다.” 그 사진은, 그때, 그 곳에 있었던 사람의 흔적이고, 자취(remnant)이다. 바르트가 사진을 탯줄(umbilical cord)로 묘사하는 한 구절을 보면, 그 흔적은 발자국처럼 촉각적이고, 어쩌면 배꼽처럼 더 정확하다. <Olin Margaret, Touching Photographs>


사진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진에 찍혀진 지시대상물 속에는 많은 흔적을 담고 있다. 1/500초이든, 1/2초이든 셔터를 누른 그 시간은 화석처럼 응고되어 있다. 많은 잔상들 속에 퇴적층의 지질처럼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지질을 담고 있다. 사진가는 그 지층의 다양한 함의(含意)인 레이어(layer)를 발견하는 고고학자들이다. 그 흔적을 찾는 사진가.


고고학자라는 캐릭터와 모험 그리고 대중물로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영화가 있다. 영화속의 고고학자는 단지 재미로 그려져 있고, 보물을 찾는 과정은 거의 재미로만 그려져 있지만, 어쨌든 유물과 유구에 대한 그의 시선이 도굴에 멈춰 있다.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 흔적을 보는 시선도 각자 다르다. 현장에 접근하는 방식도 각기 다르다. 그 시선이 사냥꾼인지, 흔적을 기록하려는 것인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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