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의 <슬픈빌라>

영화 <이본느의 향기> 1994년

by 노용헌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중 <슬픈 빌라>, <청춘시절>, <8월의 일요일들>, <잃어버린 대학>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설 <슬픈 빌라>는 주인공인 ‘나’가 십여 년 전 자신의 청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는 영화배우를 꿈꾸는 이본느라는 여인,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신을 파괴하는 의사 맹트,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에 시달리는 나 자신이 있다. 삶이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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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이라는 프랑스 영화 제목처럼. <이본느의 향기>는 많은 관객들이 좋아했던 영화는 아니다. <이본느의 향기>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영화다. 카메라는 호숫가에 부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세세하게 포착한다. 영화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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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나는 그때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원인 모를 이 공포감과 대참변이 이 세상을 덮칠 것만 같은 이다지도 절박한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시사성이 없는 문학이라든가, 영화, 패션, 음악 등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싶었다. 커다란 흔들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눈을 감고 온몸의 긴장을 풀고, 특히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싶었다. 모든 걸 잊어버리자, 결국 그런 생각은 아니었던가?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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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일 가까운 잔디밭에서 빙빙 돌아가고 있는 분수대의 중얼거리는 것 같은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한 남자가, 멀리서도 눈에 띄는 흐릿한 노란색 양복을 입고 우리를 향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다가서며 팔을 번쩍 들어 보이고는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들고 다른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녀는 내게 그 사람이 르네 맹트라고 소개해주었고, 그러자 그도 암송이라도 하듯이 “닥터 맹트라고 합니다”라고 특히 닥터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내 차례로 “빅토르 슈마라”라고 내 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름은 하숙집 숙박 명부를 채우기 위해 내가 아무렇게나 생각해냈던 이름이었다.

“이본느의 친구시오?”

그러자 그녀가 나서서 방금 에르미타주 호텔 홀에서 나를 만났다고 대답하며 덧붙여 내가 외알박이 안경을 쓰고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결국 그 사실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녀는 나에게 외알박이 안경을 쓴 모습을 닥터 맹트에게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고 나는 시키는 대로 안경을 끼었다. 닥터 맹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근사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본느라 불렸다. 그런데 그녀의 성은? 나는 그녀의 성을 잊어버렸다. 그처럼, 당신들의 생애에서 소중했던 사람들의 호적을 망각하는 데는 12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P35)


1939년 7월 12일, 나는 마음속으로 상상들을 펼쳐갔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청년이 붉은색과 초록 줄무늬가 있는 수영복 가운을 걸치고 에덴 로크의 수영장에서 약혼녀가 헤엄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처럼 라디오 듣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곳 앙티브 갑에서조차도 그는 전쟁에서 완전히 도망칠 수 없으리라. 그의 머릿 속에서 피란민들의 이름이 뒤죽박죽되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털어내버릴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한순간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물에서 나와 일광욕을 하기 위해 내 곁으로 와서 드러누웠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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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문을 일부러 열어놓아 그 웅성거림과 음악소리가 우리에게 들리도록 했다. 그런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고, 그렇게 모든 일이 날마다 같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한 이 세계가 아직도 운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P162)


세월이 이 모든 것을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뒤섞여 있는 안개 같기도 하고 수증기 같기도 한 것으로 뒤덮고 말았다. 때로는 희끄무레한 초록빛, 때로는 약간 분홍빛이 나는 푸른색으로 그 추억들은 채색되어 있다. 수증기....... 아니다. 차라리 모든 소리를 감싸 들리지 않게 하고 도저히 찢어버릴 수 없는 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그것으로 가려진 이본느와 맹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행여나 그 장막으로 해서 그들의 실루엣마저 사라져버리고 이제 그들에 대한 추억의 한 조각마저도 잃어버리게 될까봐 조바심이 난다......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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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트의 집은 장 샤르코 가와 마를리오 거리가 만나는 길의 귀퉁이에 있었고 다른 별장들에 비해 조촐했다. 푸른색과 회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그 집에는 장 샤르코가로 면한 작은 베란다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길까지 툭 튀어나온 창이 있고 맨 위층에는 다락방이 있는 3층 건물이 있었다. 자갈이 깔린 정원,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울타리, 흰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나무로 된 대문 위에 맹트는 검은색 물감으로 서툴게 ‘슬픈 빌라’라고 써놓았다(이것은 맹트가 나에게만 해준 얘기다).

사실 그 별장에서는 유쾌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혀. 나는 처음에는 ‘슬픈’이라는 수식어가 그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픈’이라는 말 속에서 감미롭고도 투명한 그 어떤 것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되자 맹트의 생각이 옳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 작은 별장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나는 웬일인지 말갛게 떠오르는 서러움 같은 것에 사로잡히고 말았으니까. 그토록 적막하고 평온한 그 집 안으로 들어가면 공기마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속을 사람들은 붕 떠서 헤엄쳐 다닌다. 가구들은 사방으로 흐트러져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방의 창문 곁에 있는 단 하나뿐인 가죽으로 된 긴 의자에는 손톱자국들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P222-223)


나는 어느 곳에도 애착을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이본느 역시 그녀의 뿌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에 나와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을 시작할 것이다. (P248)

모든 것에 대해 방임하는 나의 태도는 사실은, 움직임에 대한 공포. 흘러 사라져 버릴까봐. 바뀌어 버릴까봐.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어딘가에 나를 정착시키고 돌처럼 굳게 뿌리를 내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P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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