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의 <클레브 공작부인>

영화 <아름다운 연인들> 2008년

by 노용헌

라파예트 부인(Madame de Lafayette, 1634~1693)의 <클레브 공작부인>(La Princesse de Clèves, 1678)의 배경은 1558년~1559년 경으로 앙리 2세 말기에서 프랑수아 2세 집권 초기 프랑스이다. 이 시대는 마르그리트 드 발로아 공주가 아직 '여왕 마고'(La Reine Margot)가 되기 전이고, 왕세자비인 메리 스튜어트가 아직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Mary, Queen of Scots)가 되기 전이며, 엘리자베스 공주가 막 '엘리자베스 1세'로 등극한 시대이다. 주인공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클레브 공작부인'과 그녀를 연모하는 당대 최고의 미남 귀족 느무르 공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느무르 공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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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과 연애, 이것이 궁정의 정신이었고 사내들이건 여자들이건 하나같이 그 일에 전념했다. 숱한 이해관계와 각기 다른 파벌이 있었고, 거기에 여자들도 깊이 관여했다. 사랑은 항상 사업과 뒤섞였고, 사업은 항상 사랑과 뒤섞였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무관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더 올라가기를, 누구의 마음에 들기를, 누구를 떠받들기를, 누구를 해치기를 염원했다. 권태도 몰랐고 여유도 몰랐다. 쾌락에 혹은 밀통에 바빴다. (P23)


느무르 공은 그녀의 미모에 너무나 놀랐고, 가까이 다가선 자신에게 그녀가 살짝 인사를 하자 그만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왕과 왕비, 왕세자비는 두 사람이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면서도 춤을 추는 둘 사이에 뭔지 모를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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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열상으로는 둘째 아들인 앙리 왕자가 왕세자가 되는 게 당연했는데, 국왕이 총애하는 아들은 셋째인 오를레앙 공이었으니 형제간에는 일종의 경쟁심이 생겼고 나중에는 증오로 발전했단다. 이런 경쟁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줄곧 계속되었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프랑스에 들렀을 때도 왕세자보다 오를레앙 공에게 전적인 호의를 보였으니 왕세자는 너무 분개해 카를 5세가 샹티이에 있을 때 몽모랑시 원수를 시켜 전하의 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를 체포하라 했지만, 원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 전하께서는 아들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나중에 원수를 나무랐지만 말이야. 전하께서 원수를 궁에서 내보낸 이유도 사실 이 사건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단다.

두 형제의 내분을 보면서 에탕프 공작부인은 오를레앙 공을 지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래야 왕 옆에 더 바싹 붙어 발랑티누아 공작부인한테 밀리지 않을 거라고 본 거지. 결국 성공했단다. 오를레앙 공은 에탕프 공작부인을 연모하진 않았지만, 형이 발랑티누아 공작부인과의 관계를 통해 취하는 실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겠지. 너도 충분히 짐작이 가겠지만, 그래서 궁에 두 파가 형성된 거야. 하지만 이런 암투관계가 여자들이 얽히고설킨 사안에서 끝난 것은 아니었어. (P42)


너 자신을 붙잡으려면 정말 많은 노력과 고통이 필요할 거다. 남편에게 해야 할 의무를 생각하거라. 너 자신에게 해야 할 의무도 생각하고. 네가 얻은, 내가 너에게 그토록 바란 좋은 평판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 얘야. 궁을 멀리하거라. 그리고 클레브 공작에게 널 다른 곳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해. 그건 너무 무자비하고 힘든 일이라고? 처음에만 그럴 뿐이다. 지나고 나면 불행한 연애보다 훨씬 나은 행복이 찾아올 게야. 아내로서의 의무와 정숙.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이 세상과 이별하는 내게 괴로운 것이 있다면 내 딸이 다른 여자들처럼 타락하는 모습을 보는 거란다. 만일 그런 불행이 내게 닥친다면, 난 차라리 어서 빨리 죽고 싶구나. 그런 너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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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때까지 시기와 질투로 인한 치명적 불안을 모르고 있었다. 느무르 공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싫다는 생각은 아직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편지로 인한 의심은 해소되었지만, 또 속을 수도 있으니 의심의 눈은 언제든 다시 열릴 수 있었고,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시기와 질투를 느껴야 할 수도 있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여자들을 가볍게 사귀는 느무르 공 같은 남자가 진지하고 오래가는 사랑을 하는 일이 얼마나 그럴 법하지 않은지를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데 놀랐다. 그녀 자신은 그의 사랑에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이 과연 언제일까? 클레브 공작부인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도 비로소 속물적인 연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일까? 클레브 공작을 모욕하려는 걸까? 나 자신을 모욕하려는 걸까? 결국 사랑이 가져올 잔인한 후회와 극심한 고통 속에 나를 몰아넣으려는 걸까? 아무리 버텨보려 해도 버틸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결국 무너지고 마는가? 이 모든 결심이 다 무슨 소용일까? 오늘 나의 생각은 다 어제의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 결심한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느무르 공이 나타나는 곳에 내가 없어야 한다. 시골로 가야 한다. 이런 내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만일 남편이 고집을 피우며 만류하고, 그 이유를 집요하게 묻는다면, 이유를 다 말해버리리라. 아마도 그는 아파할 테고, 나 역시 그렇겠지만.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대공의 가짜 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러 왕세자비께 가봐야 했지만 가지 않고 저녁 내내 집에만 있었다. (P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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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것만은 묻지 말아주세요.” 클레브 공작부인이 대답했다. “그것만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게 옳다고 믿고 있어요.”

“걱정 마시오, 부인.” 클레브 공작이 다시 말했다. “나는 남편을 생각해서 남편이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할 만큼 고지식한 사람은 아니오. 그자를 미워해야겠지만, 불평해서는 안 되지. 그러니 제발 알려주시오.”

“당신은 공연히 절 밀어붙이고 있어요.” 클레브 공작부인이 말했다.

“저는 말하면 안 된다고 믿는 걸 절대 말하지 않을 힘이 있어요. 당신에게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제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진실을 숨기는 일보다 진실을 고백하는 일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해요.” (P137)


둘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이 다 걷혔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뿐이었다.

이 모든 생각이 클레브 공작부인에게는 새로웠다. 클레브 공작이 죽은 후 상심한 탓에 한동안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느무르 공의 모습은 그녀를 다시 혼란 속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결혼할 수도 있는 남자로서 바라보는 그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자기가 사랑했던 바로 그 남자이며, 남편이 죽은 원인이기도 한 바로 그 남자라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더욱이 남편은 죽어가면서 그녀가 느무르 공과 결혼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만 해도 그녀의 준엄한 도덕성을 몹시 상처를 받았다. 느무르 공과 결혼하는 것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죄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녀는 행복과는 상반되는 이런 번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번민이 갖가지 이유를 끌어다 대면서 조용히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느무르 공과 결혼해 일어날 문제를 생각하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 두 시간이나 머문 후, 결국 그를 보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일이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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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자들이 영원한 약속 안에서 그 열정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기적이 제게 일어날까요? 제 모든 행복이 될 그 열정이 결국에는 사그라지는 걸 분명 지켜봐야 할 거예요. … 그[클레브 공작]의 열정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제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가 알아서였을 거예요. 당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 저는 우리 사이의 장애물이 당신을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걸요. … 당신에게는 이미 여러 사랑이 있었고, 앞으로 그렇겠죠. 우리가 이루어지고 나면 저는 더 이상 당신 행복의 이유가 되지 않을 거예요. (P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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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죽음을 멀지 않은 곳에서 느낀지라 클레브 공작부인은 건강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죽음의 필연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니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되었고, 병도 오래가니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병은 다소 나아졌어도 느무르 공은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가 떠오를 때마다 그와 영원히 결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믿었던 모든 이유들에 도움을 청해 자기 자신과 싸웠다. 그녀 안에서 벌어진 매우 커다란 전쟁이었다. 결국 남은 열정의 불씨들은 앓는 동안 성숙해진 감정들로 모두 진화되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클레브 공작 생각이 더 났다. 부덕의 의무와 일치하는 그 추억은 그녀의 가슴에 강하게 새겨졌다. 세상을 달관한 사람처럼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대한 열정도, 관심도 모두 무의미했다. 상당히 쇠약해진 건강 상태가 오히려 그런 초연한 감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이 결심도 어떤 상황에 처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만큼 자신이 사랑했던 이가 있는 곳에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P217)


결국 느무르 공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운명처럼, 숙명처럼 사랑했던 한 여자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을 안고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시간이 가니, 그녀를 보지 않으니, 서서히 고통도 누그러들었고 정열도 꺼져갔다. (P221-222)


17세기의 로맨스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을 현대적으로 각색, 그 무대를 파리의 한 고등학교로 옮겨놓았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이 10대를 보낸 1980년대의 기억은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지금 현재의 10대, 그들의 무겁고도 축복받은 젊음, 그들만의 비밀,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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