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

영화 <어웨이 프롬 허> 1976년

by 노용헌

단편 작가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여류 작가인 앨리스 먼로(Alice Munro)의 소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단편 중에서 마지막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영화 <어웨이 프롬 허>이다. 2006년 캐나다 출신의 여자 감독 '사라 폴리'(Sara Polley)가 만들어서 여주인공 '줄리 크리스티'에게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받게 해 준 "어웨이 프롬 허" (Away from her)는 감동과 아픔,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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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는 규칙이 있다. 30일간 가족면회 금지. 적응기를 두기 위해서다. 한달 뒤 수선화를 품에 안고 찾은 남편(그랜트). 그러나 아내(피오나)의 곁에는 옛 기억이 씻겨 나가고 새 기억이 자라 있다. 요양원의 다른 노인 오브리와 단짝이 된 것이다. 이제 선택할 때다. 이럴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돌려야 할까. 현재의 기억을 ‘선물해야 할까’.


그날그날의 상태라, 그러나 사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랜트는 그 상황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다. 피오나는 차츰 그에게 익숙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를 그저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지속적인 방문개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혹은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에게 형식적인 친절함을 유지했는데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오십 년간이나 함께 산 남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을 하면 그녀가 당황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아니라 그랜트가 안됐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소리 내어 웃으며 당황스러운 표정과 예의 바른 태도로 억지로 응대한 후 긍정도 부정도 없이 대화를 끝낼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무런 진지함 없이 '네' 혹은 '아니요'하고 아무렇게나 대답할지도. (P39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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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쌓인 눈 위로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늪지대 주위에 스컹크릴리가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제 막 돋아 난, 먹어도 될 것 같은 그 일들은 자그마한 찻 잔 정도 크기였다. 촛불처럼 곧게 올라오는 꽃봉오리들의 순수한 노란색은 마치 오늘처럼 구름 낀 날, 대지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불빛처럼 보였다. 피오나는 그 꽃이 특이한 열을 낸다고 말해 준 적이 잇었다. 이런저런 정보를 담아두는 그녀만의 주머니를 뒤적이면서 그녀는 그 구부러진 꽃잎 속에 손을 넣으면 열기를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길 읽었다고 말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해본 적이있지만 자신이 느낀 것이 진짜 열기였는지 아니면 상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도 덧붙였다. 그 열은 곤충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자연은 장식용으로 뭘 만드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요."

그는 오브리의 부인을 설득하진 못했다. 거절당할 거라고 예측은 했지만 거절의 이유가 이런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질투심이나, 질투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분노가 장애물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종류의 세계관에 대해서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우울하게도, 그들이 나눈 대화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이나 친지들 역시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역시 메어리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녀 역시 메어리언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아니면 워낙 멍청하거나 많이 배우고 편하게 산 덕분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 돈 많고 학식만 있는 일부 사람들. 그랜트의 장인 장모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들 눈에는 그저 현실과 동떨어져 사는 사람들로 비춰졌다. 편하게 물려받은 재산이나 타고난 어리석음 덕분에 말이다. 그랜트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고 그런 사람들은 평가할지 모를 일이다.

메어리언도 그가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집을 유지할 걱정 따위 없이 어려운 생각이나 하면서 어슬렁거릴 여유가 있는, 삶의 진실을 직시할 필요 없는 지루하고 어리석은 인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들을 몽상할 자유가 있는 그런 자들의 하나라고.

참 어처구니 없는 인간이군. 그녀는 지금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는 좌절감과 무력감, 절망감을 느끼곤 했다. 왜일까? 그런 사람들에 맞서 자신을 지킬 힘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결국은 그들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피오나는 그런 종류의 불안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그녀를 때리거나 야단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성장 배경을 흥미로워했고 그의 험악한 경험들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맞다, 그들의 의견에는 분명 진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와 논쟁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는 피오나일까?) 그런 구체적 세계관은 분명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메어리언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음식을 훔치고 거리의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내며 생존 능력을 과시할 것이다.

피오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좌절감을 안겨 주곤 했다. 그건 마치 신기루를 쫓는 것, 아니 신기루 속에서 사는 것과도 비슷했다. 메어리언 같은 사람과 사귄다면 또 다른 문제를 경험하겠지. 어쩌면 그건 여지 열매의 씨를 깨무는 경험과도 비슷할지도 모른다. 커다란 씨를 덮은 얇은 과육의, 기이하게도 인공적인 유혹이며 화학적인 맛과 향에 이끌려 한입 성큼 베어 물었다가 돌 같은 씨를 만나 주춤하게 되는. (P428-430)


“새 친구를 사귀었네.” 그가 고갯짓으로 좀 전까지 그녀 옆에 앉아 있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때 그 남자가 피오나를 쳐다보았고, 그랜트가 그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등 뒤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인지 피오나 역시 그를 돌아보았다.

“저인 오브리예요. 나는 오브리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재미있지 않아요? 오브리는 제 할아버지가 다니던 정비소 직원이었거든요. 우리는 늘 농담을 하며 놀곤 했는데 저 사람은 숫기가 없어서 한 번도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못했죠.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나를 야구장에 데려갔는데 게임이 끝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와서 날 집으로 데려갔어요. 여름방학 동안만 할아버지 댁에 놀러간 거였거든요. 그때는 농장에 살고 계셔서.” 그녀가 말했다.

“피오나, 나도 할아버지가 어디 사셨는지 알고 있어. 우리가 지금 그곳에 살고 있잖아.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당신도 함께 거기서 살았고.”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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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리가 대체 누구죠?”

“그 사람이 오브리예요. 피오나의 친구죠. 주스 드실래요?”

그랜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들이 생겨서 한동안 계속되곤 해요. 일종의 단짝 친구 같은 거죠. 그것도 하나의 단계예요.”

“그러면 피오나가 정말 날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어요. 오늘은 못 알아봤을 수도 있죠. 그러나 내일은 알 수도 있고요. 정말이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아시지 않아요? 상태가 계속해서 달라지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한동안 오가다 보면 그런 상황들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도요. 그날그날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해요.”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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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다 잃고 나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할까?

“어떤 사람들은 그냥 앉아 있죠.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울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집이 무너져라 소리를 지르죠.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거예요.” 크리스티가 말했다.

때때로 그들은 기억을 되찾기도 한다고 한다.

“일 년 넘게 방에 드나들어도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몰라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하면서 집에 언제 갈 수 있냐고 묻죠. 갑자기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와, 제정신을 찾았네, 라고 생각하지만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곤 해요. 그런 식인 거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P456-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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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곤 하죠.” 그가 말을 시작했다. 지금이 말을 꺼낼 적기인 것 같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슬픔에 사로잡히죠. 사실 제 아내 피오나가 지금 그래요.”

“당신이 그녀를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네, 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그가 대답했다.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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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그들의 의견에는 분명 진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와 논쟁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는 피오나일까?) 그런 구체적 세계관은 분명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메어리언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음식을 훔치고 거리의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내며 생존 능력을 과시할 것이다.

피오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좌절감을 안겨 주곤 했다. 그건 마치 신기루를 좇는 것. 아니 신기루 속에서 사는 것과도 비슷했다. 메어리언 같은 사람과 사귄다면 또 다른 문제를 경험하겠지. 어쩌면 그건 여지 열매의 씨를 깨우는 경험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커다란 씨를 덮은 얇은 과육의, 기이하게도 인공적인 유혹이며 화학적인 맛과 향에 이끌려 한입 성큼 베어 물었다가 돌 같은 씨를 만나 주춤하게 되는.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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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 그가 말했다.

“한참 만에 왔네요. 우리 이제 나가도 되는 건가요?”

“피오나, 놀라지 마. 내가 누구와 왔는지 알아? 오브리 기억나지?”

바람결이 얼굴로, 피오나의 얼굴로, 그녀의 머릿속으로 불어와 모든 것을 흩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잠시 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름들을 잘 잊어버려요.”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장난기 어린 우아함을 회복하며 그 표정을 지워버렸다. 조심스럽게 책을 놓고 일어서더니 그녀는 팔을 올려 그랜트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피부와 숨결에서 희미하게 전과 다른 냄새가 났다. 물속에 너무 오래 담가둔 꽃줄기에서 나는 것만 같은.

“당신이 와서 기뻐요.” 그의 귓불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냥 가버린 줄 알았어요. 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버려두고 간 줄 알았죠. 버리고. 나를 잊어버리고.” 그녀가 말했다.

그랜트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분홍빛 속살. 사랑스러운 두상에 얼굴을 기댔다. 그런 적은 없어. 단 일 분도. 그가 대답했다. (P489-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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