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웨이 프롬 허> 1976년
단편 작가로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여류 작가인 앨리스 먼로(Alice Munro)의 소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단편 중에서 마지막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영화 <어웨이 프롬 허>이다. 2006년 캐나다 출신의 여자 감독 '사라 폴리'(Sara Polley)가 만들어서 여주인공 '줄리 크리스티'에게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받게 해 준 "어웨이 프롬 허" (Away from her)는 감동과 아픔,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영화다.
요양원에는 규칙이 있다. 30일간 가족면회 금지. 적응기를 두기 위해서다. 한달 뒤 수선화를 품에 안고 찾은 남편(그랜트). 그러나 아내(피오나)의 곁에는 옛 기억이 씻겨 나가고 새 기억이 자라 있다. 요양원의 다른 노인 오브리와 단짝이 된 것이다. 이제 선택할 때다. 이럴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돌려야 할까. 현재의 기억을 ‘선물해야 할까’.
“새 친구를 사귀었네.” 그가 고갯짓으로 좀 전까지 그녀 옆에 앉아 있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때 그 남자가 피오나를 쳐다보았고, 그랜트가 그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등 뒤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인지 피오나 역시 그를 돌아보았다.
“저인 오브리예요. 나는 오브리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재미있지 않아요? 오브리는 제 할아버지가 다니던 정비소 직원이었거든요. 우리는 늘 농담을 하며 놀곤 했는데 저 사람은 숫기가 없어서 한 번도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못했죠.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나를 야구장에 데려갔는데 게임이 끝나자마자 할아버지가 와서 날 집으로 데려갔어요. 여름방학 동안만 할아버지 댁에 놀러간 거였거든요. 그때는 농장에 살고 계셔서.” 그녀가 말했다.
“피오나, 나도 할아버지가 어디 사셨는지 알고 있어. 우리가 지금 그곳에 살고 있잖아.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당신도 함께 거기서 살았고.” (P443)
“오브리가 대체 누구죠?”
“그 사람이 오브리예요. 피오나의 친구죠. 주스 드실래요?”
그랜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들이 생겨서 한동안 계속되곤 해요. 일종의 단짝 친구 같은 거죠. 그것도 하나의 단계예요.”
“그러면 피오나가 정말 날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어요. 오늘은 못 알아봤을 수도 있죠. 그러나 내일은 알 수도 있고요. 정말이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아시지 않아요? 상태가 계속해서 달라지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한동안 오가다 보면 그런 상황들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도요. 그날그날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해요.” (P446)
기억을 다 잃고 나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할까?
“어떤 사람들은 그냥 앉아 있죠.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울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집이 무너져라 소리를 지르죠.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거예요.” 크리스티가 말했다.
때때로 그들은 기억을 되찾기도 한다고 한다.
“일 년 넘게 방에 드나들어도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몰라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하면서 집에 언제 갈 수 있냐고 묻죠. 갑자기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와, 제정신을 찾았네, 라고 생각하지만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곤 해요. 그런 식인 거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P456-457)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곤 하죠.” 그가 말을 시작했다. 지금이 말을 꺼낼 적기인 것 같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슬픔에 사로잡히죠. 사실 제 아내 피오나가 지금 그래요.”
“당신이 그녀를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네, 하지만 아내가 원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그가 대답했다. (P474)
맞다. 그들의 의견에는 분명 진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와 논쟁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는 피오나일까?) 그런 구체적 세계관은 분명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메어리언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음식을 훔치고 거리의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내며 생존 능력을 과시할 것이다.
피오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좌절감을 안겨 주곤 했다. 그건 마치 신기루를 좇는 것. 아니 신기루 속에서 사는 것과도 비슷했다. 메어리언 같은 사람과 사귄다면 또 다른 문제를 경험하겠지. 어쩌면 그건 여지 열매의 씨를 깨우는 경험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커다란 씨를 덮은 얇은 과육의, 기이하게도 인공적인 유혹이며 화학적인 맛과 향에 이끌려 한입 성큼 베어 물었다가 돌 같은 씨를 만나 주춤하게 되는. (P483)
“피오나.......” 그가 말했다.
“한참 만에 왔네요. 우리 이제 나가도 되는 건가요?”
“피오나, 놀라지 마. 내가 누구와 왔는지 알아? 오브리 기억나지?”
바람결이 얼굴로, 피오나의 얼굴로, 그녀의 머릿속으로 불어와 모든 것을 흩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잠시 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름들을 잘 잊어버려요.”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장난기 어린 우아함을 회복하며 그 표정을 지워버렸다. 조심스럽게 책을 놓고 일어서더니 그녀는 팔을 올려 그랜트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피부와 숨결에서 희미하게 전과 다른 냄새가 났다. 물속에 너무 오래 담가둔 꽃줄기에서 나는 것만 같은.
“당신이 와서 기뻐요.” 그의 귓불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냥 가버린 줄 알았어요. 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버려두고 간 줄 알았죠. 버리고. 나를 잊어버리고.” 그녀가 말했다.
그랜트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분홍빛 속살. 사랑스러운 두상에 얼굴을 기댔다. 그런 적은 없어. 단 일 분도. 그가 대답했다. (P489-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