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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23. 2023

피츠 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8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0년대에 쓴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마크 트웨인의 명언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에서 피츠제럴드가 작가적 영감에 의해 충동적으로 쓴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은 근 60년의 세월이 걸렸다. 처음 제작화가 추진된 것은 1950년 대. 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을 떠돈 끝에 지금의 제작자를 만나게 되었고 10년에 가까운 각본 작업 후, 또 다시 10여 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온전한 모습의 영화로 탄생했다.   

  

버튼 씨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내 아이죠?”

“저기요!” 간호사가 말했다.

버튼 씨의 눈이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따라갔고, 다음이 그가 본 것에 대한 설명이다. 침대 안에는 큼직한 흰 담요를 두르고서 억지로 몸을 쑤셔 넣어 불편스럽게 앉아 있는 한 노인이 있었는데, 분명히 일흔 살은 되어 보였다. 그의 성긴 머리카락은 거의 백발이었고, 턱에서는 긴 잿빛 수염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수염은 창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날려 앞뒤로 우스꽝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의문이 담긴 흐릿하고 빛바랜 눈으로 버튼 씨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미친 거요?” 버튼 씨가 소리쳤다. 그의 두려움은 분노로 변했다. “이거 무슨 병원에서 하는 지독한 농담인 거요?”

“우린 농담 같지 않군요.” 간호사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미쳤는지 아닌지는 몰라요. 하지만 당신 아이는 분명 그런 것 같네요.”        (P253-254)     

열두 살에서 스물한 살 사이의 벤자민 버튼의 삶에 대해서는 나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나날들이었다는 것만 기록하면 그로 족하다. 벤자민이 열여덟 살이 되자 그는 쉰 살의 남자처럼 몸이 곧게 퍼져 있었다. 머리카락도 더 풍성하였고 색깔도 검회색이었다. 걸음걸이는 힘이 들어가 안정적이었고, 목소리는 쉰 소리와 떨림이 사라져 건강한 바리톤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를 코네티컷으로 보내 예일 대학 입학시험을 보게 했다. 벤자민은 시험에 합격했고 신입생의 일원이 되었다. 

입학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는 대학의 학적부 직원인 하트 씨로부터 사무실에 들려 수강 등록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거울을 본 벤자민은 머리를 다시 갈색으로 염색해야겠다고 판단했지만, 서랍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염색약은 그곳에 없었다. 그제야 그는 그 전날 염색약을 다 쓰고 병을 버렸던 것이 기억났다. 

그는 궁지에 처했다. 등록 사무실에 오 분 내로 가야 했다.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 상태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갔다. 

“안녕하십니까?” 하트 씨가 공손하게 말했다. “아드님 일을 문의하러 오셨습니까?”

“아, 실은, 제 이름은 버튼이라고......” 벤자민이 그렇게 입을 떼었으나 하트 씨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버튼 씨. 아드님이 곧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접니다!” 벤자민이 이야기해 버렸다. “제가 신입생입니다.”

“뭐라고요!”

“제가 신입생입니다.”

“분명 농담이시겠지요.”

“전혀 아닙니다.”

직원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기 앞에 놓인 카드를 보았다. “여기 벤자민 버튼 씨의 나이는 열여덟 살로 적혀 있는데요.”

“그게 제 나이입니다.” 벤자민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주장했다. 

지친 직원의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하시지요. 버튼 씨. 제가 그 말을 믿기를 기대하십니까?”

벤자민도 지쳐서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열여덟 살입니다.” 그가 되풀이했다.

직원이 단호하게 문을 가리켰다. “나가시오.” 그가 말했다. “학교에서 나가시오. 그리고 이 도시에서도 떠나시오. 당신은 위험한 미치광이요.”

“난 열여덟 살이오.”             (P264-266)     

벤자민은 잠시 주저했다. 그녀가 자신을 아버지의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를 일깨워 주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그는 예일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자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아한 순간을 자신의 출생에 대한 괴이한 이야기로 망치는 것도 범죄나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아마도.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고 그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며 행복했다. 

“나는 당신 연배의 남자들이 좋아요.” 힐데가르드가 말했다. “젊은 남자들은 너무 멍청해요. 대학에서 얼마나 샴페인을 많이 마셨는지, 카드 게임을 하다가 돈을 얼마나 잃었는지 저에게 얘기하죠. 당신 나이 남자들은 여성의 가치에 감사할 줄 알아요.”

벤자민은 금방이라도 프러포즈를 하고 싶은 자신을 느꼈지만, 애써 그 충동을 삼켰다. 

“당신은 아주 낭만적인 나이이지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쉰 살. 스물다섯 살은 너무 처세에 능하고, 서른 살은 과로로 활기가 없는 편이죠. 마흔 살은 온갖 사연들이 많은 나이라 시가 한 대를 다 피우며 이야기를 해야 하고요. 예순 살은, 아, 예순 살은 거의 일흔이잖아요. 하지만 쉰 살은 원숙한 나이이지요. 나는 쉰 살을 사랑해요.”       (P270-271)     

벤자민 버튼이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힐데가르드는 서른다섯의 여인이었고 열네 살짜리 아들 로스코도 두고 있었다. 결혼 생활 초기에는 벤자민도 그녀에게 큰 애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꿀빛 같던 머리는 지루한 갈색이 되었고, 푸른 에나멜 같던 눈은 싸구려 도기 그릇처럼 되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방식에 너무 안주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하고 자기만족적이었고 열광하는 일이 부족했으며 취향도 너무 수수했다. 새 신부였을 때 그녀는 벤자민을 ‘끌고’ 댄스파티와 저녁 식사 자리들을 다녔지만, 지금은 상황이 뒤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함께 사교 모임을 다녔지만 아무런 열정도 없었고, 이미 우리들에게 오게 마련인, 그러고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머무르게 되는 그 영원한 무기력에 함몰되어 있었다. 

벤자민의 불만은 점점 강해졌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집에서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그는 입대하기로 결심하였다. 사업상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는 대위로 임관했고, 그 일에 매우 유능함을 증명하여 소령으로 승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중령이 되어 시기적절하게 그 유명한 산후안 고지 돌격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메달을 받았다.         (P274-275)     

“세상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 과정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제 서른 살의 남자처럼 보였다. 기뻐하는 대신에 그는 걱정스러웠다. 그는 어려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단 그의 육체적인 나이가 몇 년 후 그의 나이와 일치하게 되면 그가 태어나면서 겪었던 기이한 현상이 작동을 멈추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의 운명은 그에게 너무나도 끔찍하고 믿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힐데가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그녀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됐음을 발견한 것일까 생각했다. 그들 사이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며, 그는 저녁 식사 때 나름 상당히 섬세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끄집어내었다.

“있잖소.” 그가 가볍게 말했다. “사람들이 다 내가 전보다 젊어 보인다는 군.”

힐데가르드가 냉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자랑거리라고 생각해요.”

“자랑하는 게 아니오.” 그가 불편한 마음으로 말했다.        (P276)     

“전 시간이 없습니다.” 로스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북하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가 덧붙였다. “이제 이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제 그만두시라고요. 그만두고, 그만두고서......” 그는 말을 멈추고 붉어진 얼굴로 적당한 표현을 찾고 있었다. “그만두고 뒤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가시란 말입니다. 농담치고도 너무 심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에요. 제발, 제발 처신 똑바로 하세요!”

아들을 쳐다보는 벤자민에게 눈물이 그렁거렸다. 

“그리고 또 하나.” 로스코가 말을 이었다. “집에 손님들이 오면 저를 ‘아저씨’라고 부르세요. ‘로스코’가 아닌 ‘아저씨’로 아시겠어요? 열다섯 된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면 우스꽝스럽지요. 차라리 늘 ‘아저씨’로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그래야 익숙해질 테니.”

엄격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본 후 로스코는 돌아서 가버렸다......      (P281)     

“대령!” 벤자민이 날카롭게 불렀다. 

대령은 가까이 오더니 고삐를 잡아당기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침착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어느 집 아들이냐?” 그가 친절하게 물었다. 

“내가 어느 집 아들인지 곧 알려주겠다!” 벤자민은 화가 난 목소리로 응수했다. “말에서 당장 내려!”

대령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친구를 원하시오? 예, 장군?”

“그만!” 벤자민이 다급한 마음에 외쳤다. “이걸 읽어보게!” 그러곤 그의 임관 임명서를 내밀었다. 

대령은 그것을 읽더니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이게 어디서 났니?” 그가 서류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정부에서 받은 것이다. 대령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나와 함께 가자.” 대령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본부로 가서 이야기를 하자구나. 따라오너라.”

대령은 고개를 돌리더니 본부 방향으로 말을 걷게 했다. 벤자민으로서는 최대한 위엄을 지키며 그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따라가면서 그는 준엄한 복수를 해주리라 스스로 약속하고 있었다. 

그 복수는 구체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틀 후 아들 로스코가 볼티모어로부터 구체화되어 나타났고, 급히 서둘러 온 여행으로 흥분하여 성질이 잔뜩 난 그는 군복도 없이 울먹이는 장군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갔다.         (P284-285)     

어린아이 같은 잠에는 고달픈 기억이란 것이 없었다. 대학시절 용감했던 나날들의 기억도, 많은 아가씨들의 마음을 취하게 하던 화려하던 시절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아기 침대의 하얗고 안전한 벽만이 있을 뿐이었고, 나나와 가끔씩 그를 보러 오는 한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막 어스름 무렵 잠자리에 들기 직전 나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태양’이라고 부른 오렌지색 커다란 공이 있을 뿐이었다. 그 태양은 그의 눈이 졸음에 잠기자 가버렸고, 이제 그곳에 꿈이, 그를 괴롭히는 꿈이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산후안 고지에서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지휘했던 거친 돌격, 사랑하는 젊은 힐데가르드를 위해 여름날 어둠이 질 때까지 분주한 도시에서 늦게까지 일하던 신혼 시절, 그 시절 이전, 먼로가에 있던 음침한 옛 버튼 저택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 밤늦도록 시가를 피우던 날들, 그 모든 것들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처럼 그의 정신에서 비현실적인 꿈이 되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번에 먹었던 우유가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또는 어떻게 나날들이 지나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아기 침대와 나나라는 친숙한 존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배고프면 울었다. 그게 다였다. 낮에도 밤에도 그는 그저 숨을 쉬었고, 그의 위에서 부드러운 중얼거림과 소근거림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구분되는 냄새들, 빛과 어둠.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하얀 아기 침대와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흐릿한 얼굴들, 우유의 따뜻하고 달콤한 내음,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그의 마음에서 점점 희미해지다 사라졌다.        (P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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