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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04. 2023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영화 <백치> 2011년

이반 피르예브 감독 영화 <백치>(1958)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는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졌는데, 라이너 사르넷(Rainer Sarnet) 감독의 영화 <백치>(2011)는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되었다. 구로자와 아키라 일본감독의 영화 <백치>(1951)는 종전 직후의 삿포로로 무대를 옮겨 번안한 작품이다.      

[1]

예를 들어, 고문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고문을 받게 되면 고통을 느끼고 상처를 받게 되지요. 다시 말해 육체적인 고통이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고통은 영적인 괴로움을 앗아 가게 해요. 죽을 때까지 상처를 통한 아픔만 느낄 뿐이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한 고통은 아마 육체적인 상처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 당신도 아실 테지만, 한 시간 후에, 그 다음엔 10분 후에, 30초 후에, 그리고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에서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모두 <분명>하다는 데 있어요. 가장 끔찍한 건 바로 그 확실성입니다. 작두 날 밑에 머리를 올려 두고 나서 그 작두 날이 모가지 위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4분의 1초보다 더 섬뜩한 순간이 어디 있겠어요. 이건 나의 상상이 아니에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왔어요. 나는 그런 말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직선적으로 나의 견해를 얘기해 주는 거요. 살인을 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범죄에 비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오. 선고문을 낭독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살인 강도 자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혹한 짓이오. 밤중에 숲속에서 강도의 칼에 맞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한 희망을 가지는 예가 허다하지 않나요? 그런데 열 배나 편히 죽을 수 있는 이 마지막 희망을 <분명히> 빼앗아 가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바로 사형 선고가 그렇게 한다는 뜻이지요.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분명히 없을 거라는 사실 속에 처참한 고통이 있는 겁니다. 이보다 더 심한 고통은 이 세상에 없어요.           (P41)     


장군은 다시 말을 막고 꼬치꼬치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공작은 이미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해 주었다. 알고 보니 장군은 죽은 빠블리쉬체프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고 개인적으로 그를 알기까지 했었다. 공작은 빠블리쉬체프가 왜 자신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그의 선친과의 옛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이 아주 어렸을 때 양친이 사망했는데, 그 후 그는 줄곧 시골을 전전하며 자라왔다. 건강상 그에게는 시골의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빠블리쉬체프는 공작을 친척뻘이 되는 어느 늙은 여지주들에게 맡겼다. 공작을 위해 맨 처음에는 여자 가정교사가, 그 다음에는 남자 가정교사가 채용되었다. 공작은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지만, 많은 점에서 분별력이 없던 때라 제대로 다 설명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의 잦은 발작으로 인해 거의 완전히 백치가 되었다. (공작 스스로가 <백치>라고 말했다.) 언젠가 빠블리쉬체프가 베를린에서 스위스 인 의과 대학 교수 슈나이더를 만났던 얘기를 공작은 자세히 말해 주었다. 바로 그러한 병을 전공하는 슈나이더 교수는 스위스의 발레 주에 의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작과 같은 환자들을 냉수와 체조 요법으로 치료했으며, 백치와 정신병 환자를 고쳐 주었다. 동시에 그는 환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정신 발달 과정을 연구했다. 그런 연유에서 빠블리쉬체프는 약 5년 전에 공작을 스위스로 보냈고, 자신은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2년 전에 돌연 사망했다. 슈나이더는 그 후에도 2년 남짓 공작을 맡아서 치료를 해왔지만 완치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슈나이더 교수 덕분에 미쉬낀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슈나이더는 미쉬낀 공작이 원하기도 하고 본인에게도 어떤 사정이 생겨서 그를 러시아로 보내게 된 것이다.       (P48-49)     


또쯔끼는 만의 하나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의혹이 생겼다. 장군과 가브릴라 사이에 상호 교감하는 묵계에 가까운 것이 있을 거라는 의혹이었다. 게다가 열정의 노예가 된 인간은 아무리 나이가 들었더라도 완전히 눈이 멀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도 희망을 품는 법이다. 그뿐이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이성을 잃으면 어리석은 아이처럼 유치하게 행동하게 마련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장군은 나스따시야의 생일 선물로 엄청나게 비싼 놀라운 진주 목걸이를 장만해 놓았다. 그는 나스따시야가 욕심이 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선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매우 궁금하게 여겼다. 나스따시야의 생일 전날 그는 열병에라도 걸린 듯했지만 그런 자신을 교묘히 감추었다. 예빤친 장군 부인도 바로 그 진주 목걸이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사실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러한 소문에도 어느 정도 무감각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눈감아 주기가 불가능했다.          (P82)  

   

장군 부인은 친정 가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 미쉬낀 공작이 거지나 다름없는 가엾은 백치에다 남에게 구걸이나 하며 살아가야 할 정도의 인물이란 소식을 느닷없이 듣는다면 그녀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장군의 계략은 바로 적중했다. 그는 일순간 부인의 관심을 진주 목걸이에서 어떻게 해서든 엉뚱한 쪽으로 돌리려 했다.   (P83)     

“러시아를 떠나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지날 때 나는 그 도시들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지요. 거기에 대해 물어보았던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지요. 그때 나는 심하고 고통스런 발작을 몇 번 일으키고 난 뒤였지요. 항상 그렇지만 나는 병이 악화되고 발작이 몇 번쯤 되풀이되면 멍한 상태가 되어 기억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그런데 머리는 제대로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논리적 사상의 흐름은 차단되는 것 같아요. 두 가지나 세 가지 이상의 사상을 순리적으로 연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렇단 말입니다. 발작이 잠잠해지면 난 지금처럼 다시 건강해지고 원기를 회복합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그럴 때 내 마음은 참을 수 없이 우울합니다. 울고 싶을 정도이니까요. 나는 줄곧 놀라고 불안해 했어요. <낯설었던> 그 모든 게 나에게 무섭게 작용했던 거였어요. 난 그걸 깨달았지요. 낯설다는 것이 나를 죽도록 압박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러한 암흑 속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됐는데, 지금도 기억하지만, 스위스로 막 들어서던 저녁, 바젤 시에서였지요. 도시 장터에서 들리는 당나귀의 비명이 나를 잠에서 깨웠습니다. 나는 당나귀 때문에 몹시 놀랐지만, 왜 그런지 그 당나귀가 귀여워 보였어요.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의 모든 것이 맑은 하늘처럼 활짝 개었지요.”     (P89-90)     

     

아이들은 자주 나에게 찾아와 이것저것 얘기해 달라고 청했어요. 아이들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던 걸 보면 내가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던 모양이에요. 나중에는 오로지 그들에게 얘기를 해주기 위해 공부를 하고 독서를 했습니다. 그 후 3년 내내 나는 그들에게 얘기를 해주었지요. 훗날 슈나이더를 포함해서 모두들 나를 비난했죠. 내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어른들 대하듯이 그들에게 할 말 안 할 말 다 털어놓는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어차피 모든 걸 다 알아낸다.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알아내면 나쁜 방향으로 해석을 하지만 내가 알려 주면 그럴 염려가 없다. 모두들 자기가 아이였을 때를 회상해 보라. 그러나 사람들은 내 말에 수긍을 하지 않았어요.......         (P114)     


나는 열차 안에서 생각했지요. <이제 나는 속세로 간다. 나는 아마 그 세계에 대해 무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삶이 찾아온 거다.> 나는 정직하고 확고하게 나의 일을 이행할 것을 다짐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아마 지루하고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우선은 그들 모두에게 공손하고 솔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아무도 나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어쩌면 여기서도 나를 어린애 취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들 나를 백치로 여기고 있어요. 사실 언젠가 나는 병 때문에 백치와 흡사해 보였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백치란 말인가요? 사람들이 나를 백치로 여기고 있는 것까지 본인 스스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백치로 여기고 있지만 나는 현명한 인간이다. 저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다.....>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베를린에서 스위스 아이들이 벌써부터 나를 못 잊어 보내기 시작한 작은 편지들을 받았을 때,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P120-121)  

   

공작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몹시 걱정을 했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격려하며 애쓰고 있었다. <십중팔구 들여보내 주질 않겠지. 그리고 나에 대해 좋지 않게들 생각할 거야. 아니면 들여보내 주고 나서 대놓고 나를 비웃겠지...... 아, 그까짓 것은 괜찮아!> 정말로 그것은 대단치가 않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하고, 왜 그녀를 찾아가야 하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만약 어떻게 해서든 나스따시야에게 <그 사람과 결혼하지 마세요. 자신을 파멸시키지 마세요.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돈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다고 직접 말했어요. 아글라야 예빤치나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걸 당신에게 말해 주러 온 겁니다.>라고 말할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면에서 잘하는 짓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떠올랐다. 그것은 공작이 생각하고 거론하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중대한 것이었다. 공작은 그 문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고, 다만 거기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덜덜 떨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불안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 나스따시야를 만나러 왔노라고 밝혔다.           (P212-213)     


“진짜인데요.” 마침내 쁘찌찐이 편지를 접어 공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은 논란의 여지없는 이모의 유언에 따라 아무런 절차 없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겁니다.”

“그럴 리가 없어.” 장군은 총알이 튀어나올 듯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모두들 입을 벌리고 있었다. 

쁘찌찐은 주로 이반 표도로비치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주었다. 5개월 전 공작과는 생면부지인 큰이모가 사망했다. 공작의 외할아버지 빠뿌신은 파산하여 궁핍 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역시 얼마 전에 사망한 외할아버지의 형은 부자로 소문난 상인이었다. 1년 전쯤에 그의 두 아들이 거의 한 달 사이에 모두 죽었다. 두 아들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노인은 얼마 가지 않아서 병이 들어 그만 죽고 말았다. 그는 홀아비였기 때문에 조카딸 한 명 이외에는 아무런 상속인이 없었다. 그녀가 공작의 큰 이모였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남의 집에서 빌어먹고 사는 처지였다. 그녀는 유산을 상속받을 당시에 종양으로 인해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죽어 갈 당시 그녀는 살라즈낀에게 공작을 찾아 줄 것을 부탁하며 간신히 유언을 남길 수 있었다. 공작이나 스위스에서 그가 신세를 지던 의사는 공식적인 통보를 기다리거나 조회하기를 원치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그 후, 공작은 살라즈낀의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P259-260)       

나스따시야가 이 광경을 보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장군님! 난 이제 공작 부인이에요. 아시겠지요. 공작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 줄 분이 아니에요! 또쯔끼 씨, 나를 축하해 주세요. 나는 이제 어디에서든지 당신의 아내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몸이 되었어요. 이런 남편을 둔다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1백50만 루블. 게다가 공작은, 사람들 말에 따르면 백치라고 하니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이제서야 진짜 인생이 시작되나 봐요! 로고진, 한 발 늦었군요! 이 돈 뭉치를 가져가세요. 나는 공작과 결혼하겠어요. 이젠 당신보다 부자라고요!”

이제야 로고진은 사건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P262)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어요?” 나스따시야 필로뽀브나가 깔깔거리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어떻게 이런 어린애를 망쳐 놓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 짓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또쯔끼에게나 걸맞는 짓이에요. 어린 애송이들을 사랑하는 자는 다름 아닌 그런 사람이에요. 갑시다. 로고진! 돈 뭉치를 챙기세요. 나랑 결혼하든 않든 간에 돈은 나에게 주세요. 나는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나와 결혼하면 그 돈 뭉치는 다시 당신 것이 된다고 생각했지요? 천만의 말씀! 나는 몰염치한 여자예요! 나는 또쯔끼의 정부였어요....... 공작! 당신에게는 나스따시야가 아니라 아글라야 예빤치나가 어울려요. 안 그러면 저기 페르디쉬첸꼬가 손가락질할 거예요!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나는 당신의 인생을 파멸시켰다고 나중에 원망을 들을까봐 두려워요.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영광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또쯔끼 씨가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가브릴라, 당신은 아글라야 예빤치나 양을 간파하지 못했어요. 그걸 알겠어요. 당신이 그녀와 흥정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기꺼이 당신과 결혼했을 거예요! 당신네들 모두 똑같아요. 마음이 깨끗한 여자건 더러운 여자건 그들을 상대할 때는 오로지 한 가지만 선택하세요. 안 그러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법이에요..... 이럴 수가, 장군님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계셨군요........ ”     (P266)     


유산에 얽힌 소문은 거짓이 아님이 판명되었으나, 유산 자체는 애초에 떠돌던 소문만큼 엄청나지는 않았다. 재산의 절반은 혼란스런 상태였다. 빚이 있는가 하면, 자기 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서기도 했다. 게다가 공작은 온갖 충고에도 불구하고 극히 비사무적으로 행동했다. 장군은 <진심에서> 공작의 그러한 행동에 관해 <침묵의 얼음>이 깨진 이상 <물론, 그렇게 하라고 해>라고 기쁘게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그리 탐탁진 않지만, 그 사람에겐 그렇게 해줄 가치가 있어.> 그러나 어찌 되었든 공작은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예를 들어 고인이 된 상인의 빚쟁이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의심쩍은 서류를 들고 오거나 아니면 공작의 됨됨이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냥 맨손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 식의 빚쟁이들에게는 돈을 요구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친구들이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섭섭하지 않을 만한 금액을 지불했다. 그는 이들 중 어떤 자는 정말로 공통을 받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군 부인은 이러한 소식을 자기도 벨론꼰스끼 부인에게서 편지로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그건 너무 멍청한 짓이야. 대단히 멍청해. 바보는 어쩔 수 없나 봐>라고 신랄하게 덧붙이고는 <바보>의 그러한 행동에 내심 기뻐했다. 결국 장군은 자기 아내가 공작의 일에 친아들 일처럼 나서고 있고 그녀가 아글라야에게 웬일인지 유난히 상냥하게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군은 얼마 동안은 극히 사무적이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P285-286)   

  

“물 속이나 칼날 밑이라!” 로고진이 마침내 입을 떼었다. “흠! 그거군. 그 여자가 나에게 시집오겠다는 것은 아마 내 칼을 기다리겠다는 뜻일 걸세! 이보게 공작, 자네야말로 지금까지도 사건의 요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난 자네를 이해 못 하겠네.”

“물론 그렇겠지. 쉽게 이해가 안 되겠지, 헤, 헤! 하기야 사람들이 자네에 관해서 하는 말이 있지. 그 여자는 다른 놈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네.... 그 사실을 이해하란 말일세! 내가 지금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그 여자도 지금 다른 놈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바로 그 다른 놈이 누군지 자네는 알겠나? 그놈이 바로 자네야! 그래,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나라고?”

“그래, 그 여자는 생일 파티 날부터 자네에게 빠진 거야. 단 그 여자는 자네와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자기가 자네의 일생을 망쳐 버리고 파멸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지. 그 여자는 <내가 어떤 여자인지 다들 알고 있잖아>라고 말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그 말을 하고 다니니까. 그것도 내 면전에서 말이야. 자네의 일생을 망치고 파멸시키기가 두려운 거야. 그러나 나 같은 놈하고는 결혼해도 괜찮다는 얘기야. 내 일생을 망치거나 말거나 상관할 바 아니라는 속셈이지. 이게 그 여자가 나한테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네.”     (P335-336)     


한 시간이 지나 여관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젖먹이를 안고 있는 한 아낙네와 마주쳤네. 그 아낙네는 아직 젊었고, 젖먹이는 세상에 나온 지 이제 6주 정도밖에 안 돼 보였어. 그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었지. 이때 아기 엄마가 갑자기 아주 근엄하게 성호를 긋더라고. <젊은 부인. 왜 그러는 거요?>하고 물었어. <나는 그때 모든 것을 꼬치꼬치 캐묻던 버릇이 있었지.> 그녀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군. <아이가 처음으로 웃는 것을 본 어머니의 기쁨이란 죄인이 진실을 털어놓고 신 앞에 기도를 드리는 것을 저 하늘에서 신이 내려다보시고 크게 기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에요.> 이 아낙네가 나에게 한 말은 기독교의 모든 본질이 한데 표현되어 있는 진정으로 섬세한 종교 사상이었네. 말하자면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처럼 인간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신 안에서 발견한 거지. 그것도 단순한 아낙네가! 그거야말로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지! 사실 어머니는....... 혹시 누가 아나, 그 아낙네가 아까 그 병사의 아내가 될지. 로고진. 자네가 아까 한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들어 보게. 종교적 감정의 본질은 그 어떤 이성적 논리로도 접근할 수 없어. 그 어떤 과실이나 범죄. 그 어떤 무신론도 그걸 붙잡을 수 없지. 그런 것들과는 무언가 틀려. 영원히 틀릴 거야. 거기에는 무신론이 영원히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영원히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라고.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가장 선명하게 러시아 인의 가슴속에서 가장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야. 그것이 바로 나의 결론이라네! 그것이야말로 내가 우리 러시아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신념 중의 하나이지. 로고진.         (P343-344)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던 간질병 발작이 일어난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간질병 발작은 순간적으로 온다. 이 순간에는 갑자기 얼굴, 특히 시선이 유난히 일그러진다. 전신과 모든 안면 근육은 경련을 일으킨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상상 불가능한 무서운 비명이, 인간적인 모든 것을 일순간에 토해 버리려는 듯 한꺼번에 가슴속에서 터져 나온다. 그래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조차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의 비명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 사람의 내부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간질병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언가 신비스러운 듯한, 지독한 공포감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래서 추정할 수 있듯이, 그처럼 지독한 인상을 수반하는 공포감이 갑자기 로고진을 그 자리에서 마비시켰다. 이로써 공작은 이미 로고진이 뽑아 든 피할 수 없는 칼 세례를 면할 수 있었다. 로고진은 그게 간질병 발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공작이 비틀거리며 뒤로 벌렁 자빠져 층계 아래로 굴러 떨어져 돌계단에 뒤통수를 부딪히는 것을 보고, 넘어진 공작을 우회하여 허둥지둥 여관에서 도망쳤다.             (P364)     


공작이 자네에게 빚이라도 진 건가? 뭘 믿고 공작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떻게 고마워할 수가 없다는 거지? 미친 사람들이야! 사회가 유혹에 넘어간 처녀를 지탄하면, 사람들은 으레 그런 사회를 야비하고 몰인정하다고 하지. 몰인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면 그 처녀는 그 사회 속에서 살아 나가기가 괴로운 거야.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자네들은 신문을 통해 그 처녀를 이 사회로 끌어내어, 아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신이 나간 사람들, 속이 텅 빈 사람들이야!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자네들처럼 허영과 자만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끝내는 서로를 잡아먹고 말 거라고! 안 그러면 내 손에 장을 지져! 이래도 자네들이 하는 짓이 황당 무계하고 막돼먹고 추하지가 않단 말인가? 그런 꼴을 당하고서도 창피한 줄도 모르는 이 사람은 잘못했다고 용서나 빌고 있다니까! 어디 자네들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뭘 키득거리고 있어? 내가 자네들과 같이 망신살이 뻗쳐서인가? 난 망신당할 만큼 당해서 더 이상 당할 게 없네! 이보게, 자네, 날보고 버릇없이 그렇게 히죽거리지 마!          (P440-441)

[2]

한마디로 자유주의란 무엇인가요? 기존 질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사실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러시아 사실주의가 기존 사물의 질서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사물의 본질 자체, 즉 사물 자체에 대한 공격이지, 결코 질서나, 러시아의 질서, 러시아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자는 러시아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말하자면 그 자유주의자는 자기의 어머니를 증오하고 두들기고 있는 겁니다. 자유주의자는 러시아에 불행하고 불운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의 환희에 가까운 조소를 보내지요. 자유주의자는 민족의 관습과 러시아의 역사를 증오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증오해요. 거기에 대한 변명이 있다면, 자유주의자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을 가장 유익한 자유주의로 착각하고 있다는 겁입니다(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자가 환영을 받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장 졸렬하고 우둔하고 위험할 수 있는 보수주의자임을 간파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요)!   (P516-517)    

   

“로고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 여자가 오래전에 자네에 관해 나한테 얘기한 적이 있네. 그런데 아까 나도 자네가 음악회에서 아가씨와 앉아 있는 걸 자세히 보고 알았지. 그 여자가 맹세하다시피 어제도 오늘도 말했네. 자네가 아글라야 예빤치나에게 홀딱 빠져 버렸다고. 공작, 그런 얘기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네. 그 일은 어차피 나의 일이 아니니까. 만약 자네가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아글라야를 사랑하게 되었다 해도, 그 여자가 여전히 자네를 사랑하고 있다면, 나한테는 마찬가지네. 그 여자는 자네와 그 아가씨를 꼭 결혼시키고 싶어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약속까지 했네. 하하! 그러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지. <만약 둘이 결혼을 안 하면 나는 당신한테 시집가지 않을 거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납득이 가질 않네. 단 한 번도 이해를 해본 적이 없단 말일세. 그 여자가 자네를 무한히 사랑하고 있는 걸까? 게다가 사랑한다면 왜 자네를 다른 여자와 결혼시키려 하는 걸까? 그러면서 <난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라고 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자네를 사랑하는 거란 말이야.”

“내가 편지에서도 썼듯이 그 여자는 ....... 제정신이 아냐.” 공작이 로고진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괴로운 듯이 말했다.         (P562-563)     


마침내 노르마는 천천히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기회를 보며 공격할 채비를 갖추다가 부지불식간에 그 괴물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괴물은 개의 커다란 입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래서 노르마는 재빠르게 꿈틀거리고 있는 괴물을 다시 한번 물었다. 노르마는 쩍 벌린 입을 허공에 쳐든 채 두 번에 걸쳐 괴물을 꿀꺽 삼키듯이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갑골이 그의 이빨에 부딪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괴물의 꼬리와 다리는 개의 입 밖으로 나와 있는 채로 몹시 버둥거렸다. 갑자기 노르마는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다. 괴물이 입 안에서 혀를 물었던 것이다. 개는 아픔에 못 이겨 컹컹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나는 그때 반쯤 으깨진 그 파충류가 개의 입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다. 바퀴벌레를 밟았을 때 잘린 몸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한 하얀 액체가 개의 혀로 흐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공작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P600-601)     


한마디로 나는 무능한 바보 짓을 했을 따름이었다. 바로 이 시각에 나에게 <마지막 확신>이 불타올랐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어떻게 <확신>없이 살아왔는지 놀라울 뿐이다! 나는 내게 폐병이, 그것도 치유 불가능한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았으며 문제를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문제를 분명하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더 경련이 일어날 만큼 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생겨났다. 나는 삶에 집착을 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인정한다. 난 그때 왠지도 모르면서 나를 파리처럼 짓이겨 버리기로 결정한 어둡고 적막한 운명에 화낼 수 있었다. 왜 나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가? 더 이상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나는 삶을 <시작>하려 했는가? 더 이상 시도해 볼 만한 것이 없는 걸 알면서도 왜 시도를 해보려 했는가? 게다가 나는 책마저 읽을 수가 없어서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던가. 6개월 동안 무얼 위해 독서를 하고, 무얼 위해 지식을 쌓아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책을 내던졌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P603)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현실이란 고리에 잡혀 있었다. 난 그 현실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기까지 했다. 아니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심지어는 무슨 일까지 꾸며 보았다. 말이 나온 김에 그때의 개인적 상황에 대해 말을 해보련다. 8개월 전쯤 병세가 몹시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모든 교제를 끊고 친구들과 만나기를 중단했다. 나는 워낙 침울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친구들은 쉽게 나를 잊어버렸다.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라도 나를 잊었을 것이다.          (P608)   

  

그런데 나는 나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내세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모든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세와 내세의 법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거나 완전 불가능하다면, 불가사의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과연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실제로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공작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경우에는 복종해야 한다. 따지지 말고 오로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복종해야 한다. 그렇게 순종하면 나는 저 세상에 가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에게 우리 식의 개념을 뒤집어씌워 신을 지나치게 비하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인간의 능력으로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을 지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그렇다면 진짜 신의 의지와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나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이젠 종교에 대해 얘기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                (P636-637)     


테라스에서 층계로 다가왔을 때 이뽈리뜨는 오른손을 외투의 오른쪽 주머니에 찔러 넣고 왼손에 술잔을 쥔 채 멈춰 섰다. 나중에 껠레르가 확신하는 바에 따르면, 이뽈리뜨는 공작과 말을 하고 있을 때부터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왼손으로 공작의 어깨와 칼라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오른손은 주머니에 계속 넣고 있었다는 말이다. 껠레르의 확언에 따르면, 이때부터 그에게 첫 번째 의혹이 생겼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는 이뽈리뜨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그가 이뽈리뜨의 오른손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번쩍거리는 것을 본 순간 조그만 권총이 그의 정수리 옆에 와 있었던 것이다. 껠레르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뛰어들자마자 그는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방아쇳소리가 날카롭고 건조하게 찰칵거렸다. 그러나 발사되지는 않았다. 껠레르가 이뽈리뜨를 끌어안으려 하자 그는 의식을 잃은 듯 껠레르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아마 그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권총은 벌써 껠레르의 손에 있었다. 사람들이 이뽈리뜨를 부축하여 그를 의자에다 앉혔다. 모두들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소리를 지르며 무슨 영문인지 물어보았다. 모두들 방아쇠의 찰칵 소리를 들었으나 찰과상조차 입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람을 본 것이었다. 이뽈리뜨 자신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앉아 있었다.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베제프와 니꼴라이가 이때 달려왔다. 

“불발인가요?” 주위에서 사람들이 물었다. 

“아마 장전도 되지 않았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추측했다.

“장전되었어요!” 껠레르가 권총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런데........”

“불발이었나요?”

“뇌관이 아예 없었어요.” 껠레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P645)    

 

당신은 이 모든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 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당신의 이성은 꿈속을 가득 채웠던, 불을 보듯 뻔한 황당 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사건들과 어떻게 타협을 할 수 있었던가? 살인자들 중 한 명이 당신이 보는 데서 여인으로 변했고, 그 여인에서 다시 교활하기 짝이 없는 난쟁이로 둔갑한다. 이 모든 과정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존의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당신의 이성은 극도로 긴장하여 막강한 힘, 영특함, 추리력, 논리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또한 잠에서 깨어나 완전히 현실로 들어가면서 왜 당신은 거의 매번, 때로는 비상하게, 당신이 수수께끼와 비슷한 것을 꿈속에 남겨 놓고 왔다는 인상을 받는 것일까? 당신은 당신의 꿈이 황당무계하다고 웃어넘기면서도, 그러한 황당무계함 속에 어떤 사상이, 그것도 현실적인 사상이 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 사상은 당신의 현실 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 당신의 가슴속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항상 존재하고 있는 무엇이다. 당신의 꿈은 당신에게 기다려 오던 무언가 새롭고, 예언적인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당신의 인상은 강렬하다. 그것은 환희와 고통이 엇갈리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받은 그 인상과 꿈속에서 들은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당신은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다.     (P695-696)     

하나는 틀에 박힌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행복하다. 틀에 박힌 <평범한> 사람은 자기가 비범하고 독창적인 인간이라고 가장 편안하게 상상함으로써 아무런 심적 동요 없이 흡족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러시아 상류층 아가씨는, 단발을 한 뒤 푸른 안경을 쓰고 니힐리스트라고 자칭하기만 하면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이 독자적인 <신념>을 얻게 되는 것이라 믿어 버린다. 어떤 이는 마음속에서 동포애적이고 선량한 감정을 털끝만큼이라도 느끼기만 하면 자기야말로 사회 발전의 선구자라고 자각하며, 누구보다도 그러한 자각을 철석같이 믿게 된다. 또 어떤 이는 남들에게서 들은 사상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어떤 책 한 쪽을 다짜고짜 잠깐 들여다보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독자적 사상>이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생겨난 사상이라고 즉시 믿어 버린다.             (P710)   

  

“아니, 아닙니다. 비단 신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이건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우리와 밀접합니다. 단순히 신학적인 면만 보고 그 이면은 보지 못하는 데서 이미 하나의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사회주의라는 것도 결국은 가톨릭과 그 교리의 산물이지 않습니까! 사회주의라는 것도 그 형제나 다름없는 무신론과 마찬가지로, 가톨릭에 대한 회의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가톨릭과 반대되는 정신적 입장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주의는 종교가 상실한 정신적인 권위를 차지하려 하고, 인류가 애타게 호소하고 있는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려 하고, 인류 구원을 <그리스도>가 아닌 <폭력>을 통해 얻으려 한다는 점은 가톨릭과 별다른 점이 없습니다. 사회주의 역시 폭력에 의한 자유, 칼과 피에 의한 결속을 다지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을 믿지 마라, 사유 재산도 가지지 마라, 개성도 살리지 마라, 2백만 민중이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는 죽는다.> 그들이 하는 짓거리로 미루어 보아 어떤 부류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설마 이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고, 위협을 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우리가 소중히 지켜 온 그리스도를, 저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그리스도를 앞세워, 무지한 서유럽에 대해 위대한 투쟁을 펼치고 그 이름을 떨쳐야만 합니다.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회 신자들이 던져 놓은 미끼에 걸려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러시아 문명을 전해 주고 서유럽 사회에 당당히 진출하여, 방금 전 누군가 말씀하셨듯이 감언이설로 위장한 그네들이 더 이상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P836)     


적어도 여러 시간이 더 경과한 후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때 살인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공작은 꼼짝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서, 환자의 비명소리와 헛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뻗어 그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져 달래 주듯이 쓰다듬었다. 하지만 공작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방으로 들어와 그를 에워싼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슈나이더 교수가 스위스로부터 나타나 예전의 제자이자 환자인 공작을 지금 본다면, 치료차 스위스에 처음 도착했던 공작의 상태를 기억해 내곤, 손을 내저으면서 마치 그 당시처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백치!>       (P938)   

  

나스따시야는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고 거기에 대한 복수를 원하고 있다. 미쉬낀 역시 간질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폐병환자로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18세 청년 이뽈리뜨는 자신의 상처에 대해 신을 원망하고 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한 달밖에 살 수 없고, 더 이상 오래 살 수 없다는 뻔한 상황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대한 그의 반항이다. 공작은 그러한 이뽈리뜨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으나, 이뽈리뜨는 공작을 증오하고 있다. 공작이 사는 세상은 그의 연민과 동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사악해지고 있다.

공작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글라야는 공작을 독점할 수 없음을 깨닫고 폴란드 인과 결혼하여 국외에서 체류한다. 나스따시야는 로고진에게 살해당한다. 그는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예빤친 가족은 외국에서 체류한다.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는 자신의 것을 찾지 못한 러시아 인을 한탄하며, 외국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미쉬낀 공작은 원래 자신의 모습인 백치 상태로 돌아간다.       (P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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