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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12. 2023

마이클 커닝햄의 <디 아워스>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2002년

“이것은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사는 세 여인들의 단 하루동안의 이야기이다. 세 가지 이야기는 겉으로는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주인공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어떤 이미지로든 모두 연결되어 있다.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에서의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울프 부인>, 1951년 미국 LA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빠져있는 로라(줄리안 무어)<브라운 부인>,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 편집자인 클래리사(메릴 스트립)<댈러웨이 부인>.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각각 시간상 다른 인물, 울프, 로라, 클래리사를 통해 어느 하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닮아 있고, 댈러웨이 부인의 등장인물인 클래리사, 리차드를 교묘하게 엮어놓았다.    

  

[댈러웨이 부인]

사물의 세계에는 위로받을 만한 게 전혀 없는 것 같다. 클러리서는 예술, 예술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까지도(심지어 리처드의 시집 세 권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유일한 소설조차) 영락없이 사물의 세계에 속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서점의 창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불현 듯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어디에선가(아래층인가?) 갑자기 재즈 밴드의 구슬픈 음악이 축음기에서 흘러나올 때, 창문을 건드리던 나뭇가지 하나. 그것은 그녀의 첫 번째 기억도(갓돌의 가장자리 위를 기어가던 달팽이도 있었던 것 같다) 아니고, 두 번째 기억은(어머니의 밀짚 샌들, 아니면 두 기억이 서로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이 기억은 다른 어떤 것보다 끈끈하고 그윽해서 거의 불가사의할 만큼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때는 클러리서가 위스콘신 주의 어느 집에 머물렀던 것 같은데, 여름마다 부모님이 전전했던 수많은 집 중 하나였다(같은 집에 두 번 머문 적은 거의 없었고, 각각의 집은 어머니가 말하던, 본 가문이 위스콘신 델즈에서 보낸 피눈물 나는 이야기와 들어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그 집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호른 소리가 시작되면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던 그 나뭇가지가 음악을 불러일으키듯 창을 두들기던 것밖에 없지만, 어제 일어난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선명하게 각인된 그 집에 머물던 시절의 그녀는 아마 서너 살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했고, 또 인간의 행복보다 더 큰 어떤 질서가, 비록 그 질서는 여러 감정뿐만 아니라 행복까지도 포함하지만, 넌지시 암시하는 약속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P43-45)  

   

[울프부인]

그녀는 탁자의 시계를 바라본다. 거의 두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쓴 글을 내일 다시 보면 지나치게 부풀려졌고 공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여전히 힘이 솟구친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종이에 옮길 수 없는 훌륭한 책을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다. 그녀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 지금까지 쓴 글을 다시 읽어본다.

글은 꽤 훌륭한 것 같다. 어떤 대목은 정말 멋져 보인다. 물론 그녀는 사치스러운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작품이 자신의 가장 훌륭한 책이 되리라는, 마침내 자신의 기대에 빈틈없이 부합하는 책이 되리라는 희망, 하지만 평범한 여자의 하루가 소설로 쓸 만한 이야기가 될까? 버지니아는 엄지로 입술을 가볍게 두드린다. 클러리서 댈러웨이는 죽을 것이다. 아직 초반 도입부를 쓰는 중이라 어떻게 죽는지, 심지어 정확히 왜 죽는지조차 말할 수 없지만, 죽는다는 건 확실하다. 버지니아의 생각대로 클러리서는 자기 삶을 스스로 정리할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자살할 것이다.          (P110-111)   

  

[브라운부인]

너무 많은 남자들이 예전 모습과 달라지고(여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많은 여자들이 여기에 대해 불평하지 못하고 변덕과 침묵, 우울증과 술로 살아간다.     (P165)     


누군가가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더는 필요 없다고. 그러고는 이 하얀 벽들과 천장 아래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자기 삶의 명세표를 전부 버려두고 중립의 영역으로, 깨끗한 하얀 방으로, 죽음도 이제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곳으로 들어섰음을 알았다. 

죽음은 더없는 위안이 될 수도 있어,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해방감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솔직히 말하면 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어. 당신은 진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고, 나는 더 노력하고 싶지 않았어. 죽음에는 무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을 수도, 빙원(氷原)이나 이른 아침의 사막 같을 수도 있다. 그녀는 다른 풍경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그녀는 그들 모두를(그녀의 아이, 남편, 키티, 부모 그리고 모든 사람들) 이 망가진 세상에 내버려둘 수 있다(이 세상은 다시는 온전하게 되지 않을 테고, 다시는 깨끗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그녀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정상이라고, 그녀의 슬픔은 흔히들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그럴 줄은 몰랐다고.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깨끗하고 고요한 방에서 큰 소리로 내뱉는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삶을 사랑했다. 절망적일 만큼 사랑했다.            (P226-227)   

   

[울프부인]

개똥지빠귀 사체는 아직도 그곳에 있는데(이상하기도 하지, 이웃의 고양이와 개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한 마리 새라 해도 그것은 너무 작고 너무 완벽하게 죽어 있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처럼 여기, 어둠 속에서 한줌의 죽음으로 남아 있다. 버지니아는 몸을 기울여 무덤을 본다. 이젠 시시하다. 무덤은 버지니아가 차 탁자의 컵과 칠을 보고 감탄을 드러냈듯이, 온기를 드러내고 있는 오늘처럼 오후 한나절의 아름다움만 드러냈을 뿐이다. 아침이면 레너드는 새와 풀과 장미를 삽으로 퍼서 내던져 버릴 것이다. 버지니아는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차지하는 공간이 죽었을 때의 그것보다 얼마나 더 큰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우리가 몸짓과 움직임 그리고 숨결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를 얼마나 많이 착각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본다. 죽어서야 진짜 우리의 부피가 드러나는데, 그 크기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버지니아의 어머니는 남몰래 다른 데로 옮겨졌다가 크기가 작아진 채 창백한 쇠처럼 변해가지 않았던가. 그때 버지니아는 자기 안에 있는, 강렬한 감정이 있어야 할 그 공간이 놀랄 만큼 작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던가.           (P246-247)     


자유와 키스, 예술의 가능성과 광기라는 음흉한 암흑의 빛을 암시하는 런던이, 버지니아 생각에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가 곧 열릴 언덕 위의 집이고, 죽음은 저 아래의 도시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 도시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 도시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빠져나오는 길을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기를 바란다.       (P256)     

[댈러웨이부인]

“그래도 그 시간들(the hours)은 남아 있어, 그렇지 않아? 하나의 시간, 그러고 나면 또 그런 시간, 그 시간들을 당신이 다 견뎌낸다고 해도 또 그런 시간이 있어. 세상에, 또 그런 시간이라니, 지긋지긋해.”

“당신은 지금도 좋은 날을 보내고 있어. 당신도 알잖아.”

“별로,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다니, 당신은 참 착해. 그런데 요새 가끔씩 거대한 꽃의 꽃잎들이 나를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괴상한 비유인가? 아무튼 그래. 식물의 숙명 같은 거랄까. 파리지옥을 생각해봐. 숲을 숨 막히게 만드는 칡을 생각해보라고. 축축한 녹색이 어딘가로 번성해가는 과정이지. 어딘지는 당신도 알잖아. 녹색의 침묵, 웃기지 않아?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P293)     

“여긴 참 아름다워. 크나큰 자유가 느껴져. 내 어머니에게 전화해주겠어? 당신도 알다시피 어머니는 늘 혼자잖아.”

“리처드!”

“이야기를 하나 해줘.”

“어떤 이야기?”

“가장 좋은 날에 벌어진 일. 오늘 벌어진 일 말이야. 아주 평범하겠지만, 사실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일이 말이야.”      (P294)     

그렇게 로라 브라운은,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가 결국에는 실패했던 이 여자는, 가정을 뛰쳐나갔던 이 여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들이 모두 다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녀는 자기보다 먼저 남편이 간암에 걸려 저세상으로 훌쩍 떠난 후에도, 자기 딸이 음주운전자 때문에 죽은 후에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그녀는 리처드가 창밖으로 뛰어내려 산산조각 난 유리 위로 떨어진 후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클러리서는 노부인의 손을 꼭 잡는다. 이것 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줄리아가 부인이 차를 마시겠다고 한 걸 기억하고 있을까요?”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P323)     


우리는 삶을 살아내고, 할 일을 하고, 그러고는 잠자리에 든다. 그토록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몇몇 사람은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물에 뛰어들거나 알약을 삼친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죽는다. 우리 중 대부분은, 절대 다수는 어떤 병에 서서히 잡아먹히고, 아주 운이 좋더라도 시간 자체에 잡아먹힌다. 위로할 거라곤 우리 삶이, 그 모든 역경과 기대를 넘어선 우리 삶이 활짝 피어나 상상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어쩌면 아이들까지도) 그런 시간 뒤에는 필연적으로 그보다 더 암울하고 힘든 시간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도시를, 아침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그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더 많은 시간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P32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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