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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07. 2023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영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975년

영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귄터그라스의 <양철북>과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영화화한 감독인 폴커 슐렌도르프(Volker Schlöndorff, 1939~)에 의해 1975년에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에서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이 다루는 주제는 공론장(public sphere)의 폭력이다. 내용은 성실하고 평판이 좋은 이혼녀 가정관리사인 카타리나 블룸이 한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살인범의 정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음탕한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언론의 폭력에 의해 명예를 잃어버린 그녀는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간지 기자를 살해한 다음 자수를 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P7)     

축제 분위기로 술렁이는 이 도시 서쪽 숲에서 재의 수요일에야 역시 총에 맞은 사진 기자 아돌프 쇠너의 시체가 발견되자 한동안 그도 블룸의 희생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밝혀졌다. 후에, 그러니까 어느 정도 순차적으로 사건의 경과를 따져 보았을 때, ‘증거 불충분’으로 여겨졌다. 나중에 어느 택시 기사가 역시 아랍 족장 차림의 쇠너를 안달루시아 여자처럼 차린 젊은 여자와 함께 바로 그 숲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퇴트게스는 이미 일요일 정오에 피살되었지만, 쇠너는 화요일 정오에 피살되었다. 퇴트게스 옆에서 발견된 범행 도구가 절대 쇠너를 죽일 때 사용한 무기일 수는 없음을 일찍이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 당국은 한동안 블룸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다. 바로 동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퇴트게스에게 복수할 이유가 있었다면, 쇠너에게 복수할 이유도 최소한 그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수사 당국이 볼 때 블룸이 두 자루의 권총을 소지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범행 당시 블룸은 냉정하고 영리하게 일을 처리했다. 나중에 쇠너도 살해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미심쩍은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요, 왜 그를 죽이면 안 되나요?” 그러나 이후 경찰은 쇠너 살해 혐의를 그녀에게 두지 않기로 했다. 특히 알리바이 조사로 그녀는 거의 확실하게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카타리나 블룸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조사 과정에서 그녀의 성격을 알게 된 사람들 중, 그녀가 쇠너를 살해했다면 분명히 자백했을 것임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P13-14)  

   

분명히 괴텐은 카타리나의 집에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무튼 하흐는 그것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다. 확실한 것은, 카타리나의 아파트가 철저하게 감시되었다는 점이다. 목요일 오전 10시 30분까지 전화 통화도 없고 괴텐이 아파트를 떠나지도 않자, 불안해진 바이츠메네는 더 참지 못하고 중무장한 경찰관 여덟 명을 데리고 그녀의 아파트를 덮쳤다. 철두철미한 경계 태세를 취하면서 안으로 들이닥쳐 샅샅이 수색했지만, 괴텐은 발견하지 못했다. 집에는 “긴장을 풀고 아주 편안해 보이는,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카타리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부엌 싱크대 옆에 기대서서 큰 머그잔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버터와 꿀을 바른 하얀 빵을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고, “의기양양하지는 않아도” 태연해 보였다는 점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녀는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마거리트 꽃문양이 수놓인 초록색 면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괴텐이 어디 있느냐는 바이츠메네 수사과장의 질문에 블룸은 그가 언제 아파트를 떠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9시 30분에 잠에서 깼고, 일어나 보니 그는 벌써 가고 없었다는 것이었다.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 “네.”         (P20)     

그녀는 계속 “하지만 왜, 도대체 왜 이러는데요,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죠?” 하고 물었고, 결국 플레처 여경이 공손하게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루트비히 괴텐은 오랫동안 수배 중인 강도로, 은행 강도임은 거의 확실하고 살인과 그 밖의 다른 범죄의 혐의를 받고 있다고.        (P22)     

오래전부터 수배 중이던 강도가 카타리나의 집에서 잔 게 확실하고 그녀는 대략 오전 11시부터 심문을 받고 있노라는 말을 듣자, 블로르나는 당장 돌아가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차이퉁> 지의 그 녀석은 --그는 정말 그렇게 느끼하게 생겼나, 아니면 블로르나가 나중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나?-- 상황이 지금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며 그녀의 성격을 좀 말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블로르나가 거절하자, 그건 나쁜 징후이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녀석이 말했다. 이런 사건, 즉 신문의 “1면 기삿거리”가 될 만한 사건인 경우 그녀의 성격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분명 나쁜 성격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블로르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고 몹시 흥분해서 “카타리나는 매우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P36-37)     

토요일 아침에 이미, 여전히 카니발 시즌답게 흥겨워 술렁이는 이 도시의 역 플랫폼 바닥에 다시금 카타리나가 1면을 장식한 <차이퉁>이 완전히 뭉개져 비참한 꼴로 널브러져 있다. 이번에는 한 사복 경찰이 동행한 가운데 경찰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살인범 약혼녀 여전히 완강! 괴텐의 소재에 대한 언급 회피! 경찰 초비상!       (P41)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분명히 해 둘 점은, 카타리나가 아파트에서 몰래 빠져나갈 수 있게 괴텐을 도와준 것은 정말로 처벌받을 만한 짓이라는 것을 엘제 볼터스하임이나 블로르나도 물론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 자신도 그의 도주를 도왔을 때, 설사 이 경우 진짜 범죄는 아니라 해도 분명 범법 행위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플레처 여경이 심문을 위해 엘제 볼터스하임과 카타리나를 연행하기 바로 직전에, 볼터스하임 부인이 그녀에게 대놓고 그건 범법 행위였다고 말했다. 블로르나는 바로 가까운 기회를 보아 카타리나에게 그녀의 행동이 처벌 가능함을 지적해 주었다.          (P61)     

카타리나가 금요일 심문이 끝난 후 엘제 볼터스하임과 콘라트 바이터스에게 자기 아파트에 먼저 들르자면서, 제발, 제발 같이 아파트로 올라가 달라고 청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많은 것을 시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무섭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지난 목요일 밤, 괴텐과 통화한 직후 (그녀가 심문할 때는 아니라도 공공연하게 괴텐과 전화 연락을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제삼자는 그녀의 무고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뭔가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녀가 괴텐과 통화하고 수화기를 막 내려놓자마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괴텐일 거라는 ‘희망을 억누르지 못한 채’ 곧장 수화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것은 괴텐의 음성이 아니라 ‘섬뜩할 정도로 낮은’ 남자의 목소리로, ‘거의 속삭이듯이’ 그녀에게 ‘추잡한 얘기’를 지껄여 댔다는 것이었다. 불쾌했던 것, 아니 가장 불쾌했던 것은, 그자가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고 밝히면서, 그녀가 그리도 다정함을 원할 때 왜 그렇게 멀리서만 남자를 찾느냐며 그는 이미 그녀에게 모든, 모든 종류의 다정함을 서비스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 이런 전화 때문에 그녀가 한밤중에 엘제에게 갔던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두렵고, 특히 전화가 무섭다고 하면서 괴텐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고 그녀는 그의 번호를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전화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동시에 전화를 무서워하고 있다고 했다.       (P77-78)     

우리는 자유 국가에 살고 있고 자유로이 그리고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눌 권리가 있고, 당연히 전화상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이유로 혹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점잖거나 심지어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어떤 사람의 귀에 모든 이야기가 윙윙거리며 전달되거나 녹음기로부터 흘러 들어가게 해도 좋은가? 그것을 책임질 수 있는가? 정신과 상담은 보장되어 있는가? 공공 서비스, 운송과 교통 분야의 노동조합은 그런 점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사람들은 기업가, 무정부주의자, 은행장, 은행 강도와 은행 직원 들을 신경 써 돌본다. 그렇지만 우리의 국립 녹음기 부대는 누가 걱정해 주는가? 교회는 이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는가? 풀다 시의 주교회나 독일 가톨릭 중앙위원회는 이제 어떤 대책도 내놓을 수 없는가? 왜 교황은 침묵하고 있는가? 여기 이 순진한 자의 귀에는 캐러멜 푸딩에서 지나친 포르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엄청나게 부담스럽다는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공무원의 삶을 걷도록 권하고 있다. 공무원이 되면 그들은 누구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가? 전화 윤리 위반자들에게 인계된다. 여기에 마침내 교회와 노동조합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래도 최소한 도청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계획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녹음기 사용에 관한 교육과 더불어 역사 교육 프로그램도 세울 수 있다. 거기에는 그다지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P105)     

토요일 오후와 저녁은 거의 편안하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너무 편안해서 블로르나 부부, 엘제 볼터스하임,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콘라트 바이터스 모두가 꽤 진정되었을 정도였다. 마침내 사람들은 -심지어 카타리나 자신도- ‘긴장된 상황은 지나갔다’고 느꼈다. 괴텐은 체포되었고, 카타리나의 심문도 끝났고,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심한 고통에서 벗어났으며, 장례 절차가 시작되어 필요한 모든 서류는 사육제 월요일에 해 주겠다는 약속을 쿠이르의 한 공무원에게서 이미 받아 놓았다. 그는 이날은 공휴일이지만 서류를 발급해 주겠다고 알려 왔다.          (P114)     

그녀는 ‘때때로’ 블로르나에게 말했다. “나는 억지로 나 자신을 꾹 억눌러야만 했어요. 안 그랬다간 등골이 오싹한 게 어떤 건지 좀 배우라고 어떤 얼간이 같은 놈의 연미복에 감자 샐러드 사발을 내던지거나 멍청한 여자들의 푹 파인 가슴에 얇게 저민 연어 접시를 엎어 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들도 한 번쯤은 다른 쪽에서,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상상해 보아야 해요. 그들 모두가 저기서 입을, 아니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주둥아리를 떡 벌리고 서 있는 꼴이나, 그러다가 갑자기 모두 캐비아를 넣은 빵을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꼴을 말입니다. 이런 유형도 있어요. 내가 알기로는 백만장자나 그 부인이라는 사람들이 담배나 성냥, 과자를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비닐 봉지를 하나 가져와 거기에 커피를 넣어 가지요. 여하간 이런 게 모두 우리 세금으로 지불되잖아요. 아끼느라 아침이나 점심을 거르고 있다가 독수리처럼 뷔페에 달려드는 유형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비유로 오히려 독수리를 모욕하고 싶지는 않군요.”           (P133-134)     

어느 젊은 여자가 즐거운 기분으로 쾌활하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여기서는 선고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만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의 보고에 그쳐야 한다- 살인자가 된다. 사실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신문 보도 때문이었다.     (P136)     

<차이퉁>은 그들 자신들의 범죄 행위만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모조리 조작한다. 심지어 조작되지 않은 사실조차 그 신문에서는 거짓말로 보이게 되어 완전히 거짓으로 흡수된다. 간단히 말해,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 그들이 다시 장미꽃이 핀다고 쓰면, 설사 꽃이 피고 있는 장미 밭 앞에 서 있다고 해도 난 의심하게 될 것이다. “한 번 거짓말한 사람은, 설사 진실을 말해도 신뢰받지 못한다.”라는 속담을 이 경우에는 “수천 번 거짓말한 사람이 설사 한 번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나는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라고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활짝 핀 장미의 경우, 그 꽃을 거짓말을 하는데 알리바이로 이용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아름다운 이 꽃이 괴로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P148)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 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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