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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25. 2023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영화 <올란도> 1992년

그는 덧없이 흘러가는 이 여름날 하늘 아래에서 땅의 등뼈를 느끼며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대지의 등뼈로 여겨졌던 것이다. 혹은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뿌리는 그가 타고 있는 큰 말의 잔등이 되고 혹은 요동치는 배의 갑판이 되었다 ─ 단단한 것이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는 떠도는 자기 마음을 끌어다 맬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옆구리를 잡아당긴 그 마음을. 저녁나절 이 시간쯤에 산책을 나올 때마다 자극적인 사랑의 질풍으로 채워지는 듯한 그 마음을. 그는 그 마음을 참나무에 묶었다. 거기 누워 있다 보면 그의 내면과 주위의 소란한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P19)     

그는 엎어져서 얼굴을 빙판에 대고 얼어붙은 물속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행복과 우울함을 갈라놓는 것은 칼날보다도 두껍지 않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철학자는 행복과 슬픔이 쌍둥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모든 극단적 감정은 광기와 결합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면서, 우리에게 참된 교회(그의 견해로는 재세례파 교회)에서 위안을 구할 것을 당부한다. 참된 교회야말로 이 바다에서 세파에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항구이자 피난처이고 정박지라고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올랜도는 똑바로 앉아서 우울하고 어두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그의 마음이 지금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삶과 죽음 사이를 맹렬하게 오가고 있고 중간의 어딘가에서 멈추지 않으므로, 그의 전기 작가도 멈춰서는 안 되고 가급적 재빨리 날아올라 이 무모하고 열정적이며 어리석은 행동과 돌연히 터져 나오는 엉뚱한 말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인생의 이 시기에 올랜도가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물은 죽음으로 끝나지.’ 올랜도는 얼음 위에 똑바로 앉아 말하곤 했다.        (P47)     

기억이란 재봉사이고, 더군다나 변덕스러운 재봉사이다. 기억은 안팎으로, 위아래로, 여기저기로 바늘을 놀린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이후에 무엇이 이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탁자에 앉거나 잉크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서로 무관한 수 천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뒤흔들어 놓아, 때로는 밝은 조각이, 때로는 어두운 조각이 빨랫줄에 걸린 열네 명 가족의 속옷이 돌풍에 나부끼듯 매달려 까닥이고 펄럭이다가 떨어진다. 더없이 일상적인 우리의 행위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의기양양하게 장담했던 한 가지 일이 아니라, 펄럭이며 퍼덕이는 날개짓과 명멸하는 빛으로 시작한다. 그런 까닭에 올랜도는 펜을 잉크에 담갔을 때 실은 사라진 공주의 조롱하는 얼굴을 보았고, 독화살 같은 수백만 개의 질문을 즉시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이다. 그녀는 어디 있을까? 왜 그를 떠났을까? 러시아 대사는 그녀의 삼촌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정부였을까? 그들은 음모를 꾸민 것일까? 그녀는 강요당했던 것일까? 그녀는 기혼이었을까? 그녀는 죽었을까? 이런 질문들이 그에게 독을 쏟아부었기에 그는 고뇌를 다른 곳으로 분출하려는 듯 깃털 펜을 잉크병 깊숙이 찔러 댔고, 그 바람에 잉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이 행동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 기억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므로), 당장 그 공주의 얼굴을 전혀 다른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저게 누구의 얼굴이지? 그는 자문했다.      (P82-83)    

 

시간은 동물과 식물이 놀랍도록 때맞춰 번성하고 서서히 사라지게 하면서도, 불행히도 인간의 마음에는 그처럼 단순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시간에 작용한다. 한 시간이 언짢은 상태의 인간 마음에 머물 때는 시계 시간의 50배나 100배 길이로 늘어날 수 있다. 반면에 한 시간이 마음의 시계에서 정확히 1초를 나타낼 수도 있다.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희한하게도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이 알려져야 하고 더욱 깊이 연구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관심사가 매우 제한된 전기 작가는 한 가지 단순한 진술에 국한해야 한다. 지금 올랜도처럼 서른 살에 이른 인간에게는 생각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어지는 반면에 행동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랜도가 지시를 내리고 방대한 자기 장원(莊園)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하지만 그가 홀로 언덕에 올라 참나무 밑에 주저앉으면 그 즉시 1초1초가 둥글어지며 채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1초1초는 더없이 기이하고 다양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도 곤혹스럽게 여겼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에 직면하여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기면 매우 길고 복잡다단하게 보였던 자신의 과거가 그 즉시, 사라져 가는 1초에 밀려 들어가, 그것을 원래 크기의 열두 배로 부풀리고 수천가지 색채로 물들이며 세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채워 넣었다.          (P102-103)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격정이었느냐고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사랑 그 자체만큼이나 양면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 하지만 사랑을 잠시 논외로 하자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 

황녀 해리엇 그리젤다가 잠금장치를 끼우려고 몸을 숙였을 때, 올랜도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이 멀리서 퍼덕이는 사랑의 날갯짓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흔들리는 부드러운 깃털이 급히 밀려드는 물결, 눈 속의 사랑스러운 자태, 홍수 속의 부정(不貞), 이런 수천 가지 기억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다. 날갯짓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다시는 이렇게 동요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동요했다. 그는 양손을 들고 그 아름다운 새가 자기 어깨에 내려앉게 하려 했다. 그때 -끔찍하게도!- 까마귀가 나무에서 굴러떨어지며 찢어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기는 거친 검은 날개에 덮여 어두워졌다. 깍깍 소리가 들렸고, 지푸라기와 잔가지, 깃털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모든 새들 가운데 가장 육중하고 더러운 콘도르가 그의 어깨에 거꾸로 처박혔다. 그래서 그는 방을 뛰쳐나갔고, 하인을 보내 황녀 해리엇을 마차까지 전송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사랑은 두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다. 두 개의 몸이 있어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북숭이다. 그것은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개의 발톱이 있고, 실로 모든 부위가 두 개이고 정확히 상반된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아주 단단하게 결합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다. 이번에 올랜도의 사랑은 하얀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고 매끄럽고 사랑스러운 몸은 바깥쪽으로 향한 채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녀는 순수한 기쁨의 공기를 퍼뜨리며 점점 다가왔다. 갑자기(어쩌면 황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빙 돌아 몸을 돌리더니 검은 털투성이의 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어깨에 떨어진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은 낙원의 새, 사랑이 아니라 콘도르, 욕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아났고, 그래서 시종을 불렀다.           (P121-122)       

  

올랜도는 여자가 되었다 -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밖의 다른 점에서는 예전과 똑같았다. 성이 달라짐으로써 미래가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정체성이 바뀌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얼굴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똑같았다. 그의 기억은 - 그런데 앞으로는 관례에 따라 <그의> 대신 <그녀의>라고 말해야 하고, <그> 대신 <그녀>라고 말해야 하니 - 그녀의 기억은 아무런 장애도 맞닥뜨리지 않고 과거 생애의 온갖 사건들을 생생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기억의 맑은 연못에 검은 물방울 몇 개가 떨어진 것처럼 약간 흐릿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일들은 조금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고통 없이 완벽하게, 올랜도 스스로도 놀란 기색이 전혀 없게끔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성의 변화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것이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입증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1) 올랜도는 언제나 여자였다. (2) 올랜도는 이 순간도 남자이다. 이 문제는 생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자. 우리로서는 단순한 사실을 기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올랜도는 서른 살까지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어 이후 여자로 살아갔다는 것이다.            (P144-145)   

  

인간의 가슴에서 가장 강력한 열정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믿는 대로 믿게 만들려는 욕망이다. 자신이 더없이 고귀하게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이 저급하게 평가한다는 자각만큼 그의 행복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의 마음을 분노로 채우는 것도 없다. 휘그당과 토리당, 자유당과 노동당 -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려는 것 아닌가? 한쪽 사람들과 다른 쪽 사람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어느 교구가 다른 교구의 몰락을 열망하게 만드는 것은 진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압도하려는 욕망이다. 각 측은 진실의 승리와 미덕의 고양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마음의 평화와 상대의 종속을 추구한다 - 그러나 이런 집단적 도덕률은 도랑물처럼 혼탁하므로 역사가들의 본령이고,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P154-155)    

 

자신이 영국을 떠나 있는 동안 제기된 세 건의 큰 소송에 걸려 있으며, 그뿐 아니라 그 소송들에서 파생되었거나 관련된 수많은 소규모 소송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걸려 있는 주요한 쟁점은 이런 것이었다. (1) 올랜도는 사망했고, 그러므로 어떤 재산도 보유할 수 없다. (2) 올랜도는 여자이고, 그러므로 거의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3) 올랜도는 영국 공작으로서 로시나 페피타라는 댄서와 결혼했고, 그녀에게서 세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들은 부친이 사망했으므로 그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중대한 쟁점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물론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그 소송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전 재산은 법원에 계류되었고, 그녀의 작위는 일시 정지된다고 선고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 있는 인물인지 죽은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공작인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 매우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그녀는 시골 저택으로 급히 내려갔다. 법원의 판결이 날 때까지 그곳에서 (법원에서 앞으로 입증해 줄) 그의 혹은 그녀의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채 거주해도 좋다는 법원의 허락을 얻었던 것이다.            (P175)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10여 분간 매우 활기차게 남자와 여자 역할을 연기했고, 그러고 나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황녀가(하지만 앞으로는 그녀를 대공으로 불러야 한다)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 자신은 남자이고, 언제나 남자였으며, 올랜도의 초상화를 보았을 때 절망적인 사랑에 빠졌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자로 변장하여 제과점에 와서 머물렀고, 올랜도가 터키로 달아났을 때 쓸쓸했으며, 그녀가 여자로 변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이 부분에서 그는 참지 못하고 낄낄 웃었다) 그녀에게 봉사하려고 서둘러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올랜도는 여성의 <전형>이자 <진주>이고 <절정>이었고,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해리 대공이 말했다. 이 세 가지 <ㅈ>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낄낄 소리와 히히 소리가 뒤섞이지 않았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구석이 있군.> 올랜도는 난로망 맞은편에 앉은 대공을 쳐다보며 이제 여자의 관점에서 속으로 말했다.            (P185-186)     

의상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우리에 대한 세계의 관점을 변화시킨다. 가령 바르톨루스 선장은 올랜도의 스커트를 보았을 때 당장 그녀를 위해 차양을 쳐주었고, 그녀에게 쇠고기 한 조각을 더 먹으라고 권했으며, 자기와 함께 대형 보트를 타고 물에 오르자고 요청했다. 그녀의 스커트가 흘러내리지 않고 반바지 모양으로 다리에 달라붙게 재단되었다면 그녀는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접을 받을 때 보답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올랜도는 무릎을 굽혀 절했고, 그의 뜻에 순응했고, 그 선량한 남자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의 말쑥한 바지가 여자의 스커트였더라면, 그리고 그의 편직 코트가 여성의 공단 보디스였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옷이 우리를 입는 것이지, 우리가 옷을 입는게 아니라는 견해를 많은 사실이 뒷받침한다. 우리는 팔이나 가슴의 모양새에 맞게 옷을 만들지만, 옷은 우리의 마음과 두뇌, 혀를 그것에 맞게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제 스커트를 입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으므로 올랜도에게, 심지어 그녀의 얼굴에서도 어떤 변화가 드러났는데, 독자들이 5번 그림을 보면 달라진 점을 찾아낼 수 있다. 남자 올랜도와 여자 올랜도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 두 사람은 의심할 바 없이 동일 인물이지만 어딘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남자의 손은 거리낌 없이 칼을 잡고 있지만 여자의 손은 어깨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공단 숄을 붙잡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남자는 세상이 자신의 사용하도록 만들어졌고 자신의 기호에 맞게 형성된 것처럼 세상을 똑바로 직시한다. 그에 반해 여자는 미묘한 눈으로, 심지어 의혹을 품은 눈으로 세상을 곁눈질한다.            (P193-194)     


진실은 - 이런 맥락에서 진실이라는 단어를 감히 들먹이자면 - 이런 집단의 사람들이 모두 마법에 걸린 것 같다는 사실이다. 파티를 개최한 여주인은 현대판 마녀였다. 그녀는 손님에게 주문을 거는 마녀이다. 이 집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저 집에서는 재치가 넘친다고 생각했고, 세 번째 집에서는 심오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 환상이지만(이 말은 환상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환상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며,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은인 중 하나이다) 환상이 현실과 부딪칠 때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므로, 환상이 만연한 곳에서는 진정한 행복이니 진정한 재기, 진정한 심오함이 용인되지 않는다.           (P205-206)     

무장하지 않은 채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노 젓는 배로 대서양을 항해하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세인트 폴 성당 꼭대기에 한 발로 서 있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시인과 단둘이 집에 가는 것은 더더욱 경솔한 일이다. 시인은 대서양인 동시에 사자이다. 대서양은 우리를 익사시키고, 사자는 우리를 물어뜯는다. 설령 우리가 사자의 이빨을 견디고 살아난다 해도 파도엔 굴복할 수밖에 없다. 환상을 부숴 버릴 수 있는 남자는 짐승이자 밀물이다. 영혼에 환상이란 지구를 둘러싼 대기와 같다. 그 부드러운 공기를 둘둘 감아올리면 식물이 죽고 색이 바랜다. 우리가 딛고 걸어 다니는 대지는 시커멓게 타버린 잿더미가 된다. 우리는 타오르는 진흙을 디디고, 뜨거운 자갈이 우리의 발바닥을 태운다. 진실로 인해 우리는 해체된다. 인생은 꿈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죽음을 맞는다. 우리의 꿈을 앗아가는 자는 우리의 삶을 앗아간다(여러분이 원한다면 이런 식으로 대여섯 페이지를 계속 써나갈 수 있지만, 그 표현이 따분할 터이므로 생략하는 편이 좋겠다).         (P209-210)     

이때 그들은 지금 피커딜리 광장이 있는 곳 모퉁이의 큰 가로등에 이르렀다. 눈부신 빛이 번뜩이면서 그녀는 삭막하고 인적 없는 땅에서 자신과 같은 성의 타락한 사람들 옆에서 있는 가련한 난쟁이 두 명을 보았다. 그 둘은 헐벗고 외톨이에 허약한 사람들이었다. 둘 다 상대를 도와줄 힘이 없었다. 아니, 스스로를 돌보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포프 씨의 얼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이 나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나, 내가 당신을 숭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나 똑같이 공허한 일이야. 진실의 빛은 그림자도 없이 우리를 강타하고, 또 우리 둘 다에게 지독히도 맞지 않으니까.>        (P213)    

 

천재성이(그러나 천재병이라는 이 질병은 이제 영국 제도에서 뿌리 뽑히고 말았다. 세평에 의하면, 작고한 테니슨 경이 그 질병을 앓은 마지막 인물이다) 한결같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만물을 명료하게 봐야 하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불에 타 죽을지 모른다. 오히려 천재성이란 광선을 한 번 내쏜 다음 한동안 빛을 발하지 않는 등대와 비슷하다. 다만 천재성은 등대처럼 규칙적이지 않아서, (포프 씨가 그날 밤에 그랬듯이) 예닐곱 번의 광선을 재빨리 연속적으로 쏘아 대고는 1년간 혹은 영원토록 암흑 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광선을 믿고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재들은 암흑기에 빠져 있을 때 보통 사람들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P214)     

소설가나 전기 작가에게 적합한 단 하나의 주제는 인생이라고, 경청할 만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다. 인생이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그 동일한 권위자들은 판단했다. 생각과 인생은 정반대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올랜도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의자에 앉아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녀가 생각을 끝낼 때까지 전기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달력을 읽어 내려가고, 묵주를 세고, 코를 풀고, 난롯불을 쑤석이고, 창밖을 내다보는 것뿐이다. 올랜도가 너무 고요히 앉아 있었기에 핀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정말로 핀이라도 떨어졌다면 좋았을 것을! 그것도 일종의 인생이었을 텐데. 혹은 나비 한 마리가 파닥이며 창문으로 들어와 그녀의 의자에 앉았더라면 그것에 대해 쓸 수 있을 텐데. 아니면 그녀가 일어나서 말벌을 한 마리 죽였더라면. 그러면 우리는 당장 펜을 꺼내 들고 써내려 갔을 텐데. 비록 말벌의 피에 불과하더라도 유혈 사태이니까. 피가 난무한 곳에 인생이 있다. 말벌을 죽이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 비해 지극히 사소한 일일지라도, 소설가나 전기 작가에게는 이처럼 그저 부질없는 공상에 빠지고, 이처럼 생각에 잠기고, 이처럼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와도 담배와 종이 한 장과 펜과 잉크병을 놓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더 바람직한 주제였다. 주인공이 그들의 전기 작가를 좀 더 배려해 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우리는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고 있으므로) 불평할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노고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주인공이 우리의 손아귀를 완전히 빠져나가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그녀가 한숨을 쉬다가 숨을 헐떡이고, 얼굴을 붉혔다가 파랗게 질리고, 눈이 등불처럼 환히 빛나다가 새벽처럼 초췌해지는 것을 보라- 지켜보는 것처럼 짜증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감정과 흥분의 무언극을 일으키는 것 -사고와 상상력- 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라봐야 하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일이 있을까?               (P275-276)     

그렇다면 행복이여, 오라. 그러나 행복이 가버린 후, 시골 여관 응접실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드는 얼룩진 거울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부풀리는 그런 꿈은 오지 마라. 우리가 자고 있는 한밤중에 전체를 쪼개서 우리를 갈기갈기 찢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분열시킬 꿈들은 오지 마라. 그런 꿈이 아니라 깊은 잠에, 모든 형체가 마모되어 무한히 부드러운 먼지나 헤아릴 수 없이 어둑한 강물이 되도록, 깊은 잠에 빠지라, 거기서 미라처럼, 나방처럼 몸을 포개고 장막에 뒤덮인 채 잠의 밑바닥 모래 위에 엎드리자.

그러나 기다려라! 기다려라! 지금 우리는 눈먼 자들의 나라에 가지 않을 것이다. 안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어진 성냥처럼 푸른빛을 내며 그 새는 날아가고, 타오르고, 잠의 봉인을 뜯어 버린다. 물총새, 그래서 생명의 붉고 진한 물줄기가 조수처럼 역류하며 거품을 일으키고, 방울방울 떨어지며 흘러든다. 우리는 일어서고, 우리의 눈은(대단히 편리한 각운이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의 불편한 이행을 무사히 넘어서게 해주므로) 갑자기 주목한다 - (이 부분에서 손풍금이 돌연 연주를 멈췄다).

“아주 건강한 사내애예요, 마님.” 산파인 밴팅 부인이 올랜도의 첫아이를 품에 안겨 주며 말했다. 다시 말해서, 올랜도는 3월 20일 목요일 새벽 3시에 무사히 아들을 낳은 것이다.        (P304-305)   

  

만일 마음속에 ( 되는대로 어림잡아 말해서) 76개의 서로 다른 시간대가 동시에 재깍거리고 있다면, 인간의 영혼에는 이 시간대나 다른 시간대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수없이 존재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2,052명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혼자 있을 때 <올랜도?>(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세상에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 부름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나는 이 특정한 자아가 싫증 나서 죽을 지경이니까. 나는 다른 자아를 원해. 그런 연유로 우리는 친구들에게서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자아의 출항이 전적으로 순탄한 일은 아니다. 올랜도가 (시골에 갔으므로 아마도 다른 자아가 필요했기에) 말했듯이 누군가 <올랜도?>라고 부르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그 올랜도는 그래도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터의 손에 쌓인 접시처럼 차곡차곡 쌓여 우리를 형성하는 그 자아들은 다른 곳에 애착과 공감을 느끼고 있고, 여러분이 그 자아들을 뭐라 부르든 간에(이 자아들 중 많은 것들은 이름이 없다) 자기들 나름의 소소한 기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자아는 비가 내려야만 올 테고, 다른 자아는 녹색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만 올 것이며, 또 다른 자아는 존스 부인이 옆에 없어야 올 테고, 또 다른 자아는 포도주 한 잔을 주겠다고 약속해야 올 것이며, 이런 식으로 기타 등등 조건이 맞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상이한 자아들과 맺은 상이한 조건을 자기 경험을 토대로 대폭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 어떤 조건들은 너무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워서 활자로 기록할 수도 없다.              (P317-318)     

엘리자베스 시대에 귀족 청년이었던 주인공 올랜도가 17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에서 여자로 변한 뒤 집시들과 생활하다 영국으로 돌아와 18세기와 19세기를 거쳐 1928년 현재 시점에 서른여섯 살의 여성으로서 시집을 출간하고 남편과의 합일을 기대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플롯은 이 작품이 사실주의 소설의 틀을 벗어나 판타지의 영역에 있음을 알려준다. 3백년 넘게 이어지는 올랜도의 일생과 놀라운 성적 전환이 주인공에게 별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판타지 장르의 한 특징이다.          (P344)    

 

이 소설은 연극이나 영화, 심지어 오페라로 제작되기도 하고 여성학이나 동성애, 젠더, 트랜스베스타이트(이성의 옷을 즐겨 입는 사람) 연구의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성전환을 겪는 주인공을 통해 성 정체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랜도는 대사로 근무하던 터키에서 혁명이 발발한 수 느닷없이 여자로 변신하고, 올랜도를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청혼하는 대공 해리는 트랜스베스타이트적 면모를 보인다. 올랜도의 남편인 선장 셸머다인은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에 가깝지만 남성인 동시에 여성적인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을 통해 울프는 성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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