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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29. 2023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

영화 <줄리에타> 2016년

영화 <줄리에타>(Julieta)는 2016년 4월에 개봉한 스페인의 드라마 영화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으며, 앨리스 먼로의 단편 소설 <런어웨이Runaway>가 영화의 원작이다.    

 

2016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 부문 후보였다. 제29회 유럽 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등 네 부문에 지명됐다. 제89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부문 스페인 출품작이다.     

그때 칼라가 해준 키스는 줄곧 실비아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키스일 뿐이었다. 그저 힘내라거나 거의 다 됐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우리는 슬픈 일을 함께 겪은 친구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해가 났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고 집에 있는 말들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실비아는 그 키스를 폐경기에 나타난다는 열감처럼 그녀의 내면에서 어마어마한 열을 내뿜으며 꽃잎을 활짝 피운 눈부신 한 송이 꽃으로 여겼다.       (P31)     

버스가 시골길에 접어들자 칼라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코팅된 유리 때문에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들판에 눈길을 주었다. 제이미슨 부인의 존재 자체로 자신의 주변이 매우 안전하고 깨끗해진 느낌이었고 자신의 탈출도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인 것 같았다. 사실 칼라의 입장에 처한 사람이라면 탈출만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했다. 딱하게 여길 수밖에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고 정직하게 제이미슨 부인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고 보니 생소한 자신감도, 심지어 어른스러운 유머 감각마저도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서 제이미슨 부인 그러니까 실비아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 예민하고 엄격할 것만 같은 제이미슨 부인을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걱정은 접기로 했다.      (P50-51)     

“넌 네가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 건지 모를 거야.”

어느 날 어머니한테 받은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 일찍 사랑의 도피를 했던 그 떨리는 순간에 칼라는 비록 어디로 가게 될지는 잘 몰랐어도 자신이 무엇을 버리고 온 건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칼라는 부모도, 집도, 뒷마당도, 가족 앨범도, 휴가도, 쿠진아트(주방용 소형 가전 브랜드)도, 파우더룸도,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높았던 붙박이 옷장도, 지하에 설치해놓은 잔디용 살수 장치도 못 견디게 싫었다. 길지 않은 쪽지에 칼라는 진짜라는 단어를 썼다. 

늘 진짜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 아빠는 이해 못 하시겠지만요.     (P52-53)   

  

그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안개 속에서, 점점 커지는 빛을 뚫고(나중에 보니 이 빛은 주차할 자리를 찾아 뒷길을 달리던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었다) 나온 것은 흰 염소였다. 기껏해야 양치기개만 한 자그마한 염소가 춤을 추고 있었다. 

클라크가 실비아의 어깨를 놓으며 말했다. “너 도대체 어디 있다가 온 거냐?”

“당신네 염소군요. 맞죠?”

“플로러라고 합니다. 플로러.”

염소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약 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더니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플로러, 너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다가 나타난 거냐? 너 때문에 우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우리?

플로러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플로러가 클라크의 다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빌어먹을 염소 같으니라고.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클라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길을 잃었군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래요, 길을 잃었어요. 우린 플로러를 다신 못 보는 줄만 알았다고요.”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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