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신념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36

by 노용헌

믿음과 신념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음과 신념은 믿을 신(信)에서 출발한다. 단지 믿음과 신념이 다르다면 아마도 그 행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믿고 행한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보통 종교적으로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처에 대한 믿음,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그러나 과도한 잘못된 믿음과 신념은 오히려 더 삶을 피폐하게도 만든다. 정치인들이 가지는 신념,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믿음. 이것을 현실세계에서 실현하고 적용하고자하는 신념. 종교적 믿음과 정치적 신념 사이에 우리는 그 길에 서 있다. 그리고 갈팡질팡 하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어쨌든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사진도 믿음과 신념이 있을 수 있겠다. 재현과 표현 사이에서, 그리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의 예술세계라는 것이 믿음과 신념에서 출발한다. 나는 그 양 극단에서 믿음과 신념을 바라본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 eidos)’는 라캉이 말한 것처럼, 상상계와 현실계(실재계) 사이에 있다. 사진은 현실에 있는 대상들을 찍고 있지만 끊임없이 상상속의 관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을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믿음에 대한 해석은 수많은 상상을 만들어낸다. 사진을 강력한 포토샵으로 보정을 하고,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상상을 넘어선 현실보다 더 실재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어쩌면 상상의 동물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12지신(十二支神) 중에 인간은 ‘용(龍)’이란 동물을 만들어냈다. 물론 상상속의 동물 용의 모습은 현실계의 뱀이라든지 등등의 동물들의 조합, 또는 변형, 합성의 과정이다. 지금의 AI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마치 상상속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꿈이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꿈이된 아이러니. 사진은 과연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을까.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고 믿고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독배를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한 진짜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 진영을 오가며 조국을 배신했고, ‘크리티아스’가 아테네 시민을 유린하고 착취하던 폭군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처단되면서 배신자와 폭군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히고 사형에 처하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기소되었을 때 곧바로 망명할 수 있었지만 아테네에 남았고, 사형선고 후 마지막 변론에서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神)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신념은 과연 옳은 길을 가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신념)였을까.


4년 전 나는 가로등에 걸린 보름달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 사진은 우연한 일치인 셈이다. 달이 마치 가로등의 불빛 모양을 했고, 이것은 시각적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성경(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은 말하지만, 시각의 원근법은 사실 허구적 믿음에서 출발할지도 모른다. 이성은 믿음을 볼 수 없고, 그렇다고 신념은 과연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내가 사진을 하고 있는 이유가 될는지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난 또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그런 현실을 사진에 담고 있다.

2020.2.8 정월 대보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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