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34
“un monde que nous ne savions ou ne pouvions voir”,
“a world that we neither know nor can know”
Know를 See로 바꾼다면, 우리는 보지 못하고 볼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百聞이 不如一見(백문불여일견)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한다라는 말에서처럼, 우리의 인식은 시각과 청각, 그 외의 감각에서 단연코 시각(이미지)이 주는 힘은 크다. 그만큼 믿음의 척도는 본다는 것에 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믿음. 믿음에 대한 신뢰.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 아마도 사진은 현재의 모든 순간을 고정시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사진관에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은 자신의 사진에 불만을 토로한다. 좀 더 젊고 아름답게 찍혔으면 하고, 얼굴에 검버섯이나, 주근깨 등은 이전 아나로그 시절에는 일일이 암실에서 스포팅을 통해서 수정되곤 했다. 지금은 디지털로 리터칭을 하면 쉽게 되지만. AI로 디지털 이미지는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이미지를 생성해준다. 사진은 과연 사물의 현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그것을 100% 유사하게 재현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단지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의무적인 곧잘 속음(credulousness)일 수 있다. 쉽게 우리는 믿고 있다. 사진은 진실을 말한다고. 그리고 대변한다고. 사실인척 할 뿐일지도.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1945)에서 시각적 유사성에 대한 회화의 강박적인 추구는 세 가지 신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재현(representation), 욕망, 존재라는 세 가지 신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유사성에 대한 집착은 미라 콤플렉스(mummy complex)처럼, 유사성의 집착에 대한 욕망은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에서 기원한다. 인간의 욕망은 죽은 자를 방부 처리하여,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욕망. 사진은 시간이 지나도 과거를 방부처리하고, 외형을 그대로 고정시킨다.
인지 수단으로서의 시각은 각각의 단면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입체적이거나 전체적으로 보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의 눈은 2개이지만 카메라의 눈은 하나, 평면적인 2차원의 단면 속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축소되고 편평해진(flat) 3차원의 압축된 것이다. 개별적인 층을 겹겹이 쌓여있고, 그것은 어쩌면 전체의 일부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이. 지금의 사본은 원본을 능가하고 있다.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디지털 시대에 사본은 원본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다. 원작(Original)의 진품성(眞品性)에 대한 기준은 점점 모호해졌다.
우리가 봄으로써 안다는 것. 사진은 사진가의 경험과 인지를 보여준다. 사진가는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 그 지점에서 사진가는 사진을 찍고 보여준다. 사진이 두 번째 믿음, ‘사진가는 현장에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세상은 사진에 담기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세상을 어떻게 찍는다는 말인가. 사진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상황이 있어야만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가. 완전히 만들어진 상상속의 현실. 그것은 아마도 알 수 없는 사진이다. 보이지도 않은 것을 말하려는 것인지. 보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믿음은 그 사진가의 몫이 되었다. 눈부신 빛과 시커먼 어둠 사이에서 사진은 복잡한 세상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안다고 말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