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리안 그레이> 2009년
영화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는 2009년 공개된 영국의 판타지 스릴러 드라마 영화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영화화한 것이다. 올리버 파커 감독이 연출했고, 벤 반스가 도리언 그레이 역을, 콜린 퍼스가 헨리 경 역을 연기했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비평가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른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논거(論據)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저급한 형식의 비평에서와 같이 비평이 추구하는 최고의 형식 역시 자서전의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것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타락한 사람이다. 이건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오롯이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 이 둘 중 하나다. 그뿐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길길이 날뛰는 것과 같다. 반면에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해 화가 나서 미친 듯이 날뛰는 것과 같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어떤 예술가도 무엇을 입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실제로 입증할 수 있는 것조차 굳이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지니지 않는다.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윤리적인 동정심이란 용납될 수 없는 문체상의 버릇이다.
병적으로 우울한 예술가는 없다. 예술가는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사고와 언어는 예술의 도구다.
예술가에게 악과 선은 예술의 질료다. 형식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예술의 모범은 음악가가 내보이는 예술이다. 감정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의 기교가 바로 유형이 된다.
모든 예술은 표면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표면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상징을 읽는 사람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진정으로 예술이 반영하는 것은 관객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 작품이 새롭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살아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비평가가 예술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때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을 때다.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유용한 물건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었을 때 그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그것을 지독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정말 쓸모없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P7-9)
“가장 멋진 작품이야, 바질. 네가 그린 작품 가운데 단연 최고야.” 헨리 경이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작품을 내년엔 반드시 그로브너 갤러리에 보내야 해. 왕립 미술원은 규모가 너무 크고 너무 세속적이야. 거기 갈 때마다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그림을 볼 수가 있어야지. 끔찍해. 어떤 경우엔 전시된 그림이 너무 많아 사람을 볼 수 없을 때가 있어. 그건 더 끔찍한 일이지. 그로브너 갤러리가 딱 안성맞춤이야. 거기밖에 없다고.”
“아무 데도 안 보낼 거야.” 그는 고개를 뒤로 던지듯 젖혔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다닐 때 고개를 젖히는 그의 이 별난 행동을 볼 때마다 친구들은 재미있다며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안 보내, 어디가 됐든 안 보내.” (P12-13)
도리언 그레이를 만난 뒤로 내가 만든 작품은 모두가 훌륭한 작품이야. 내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지.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네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개성을 보고 예술에서 완전히 새로운 양식이,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스타일이 나에게 떠올랐거든. 나는 사물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고,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재창조할 수 있게 된 거야, <사상의 시대에 꾸는 형식에 대한 꿈> 이 말, 누가 했는지 알아? 잘 기억이 안 나. 아무튼 도리언 그레이가 나에게는 바로 그와 같았어. 내 눈앞에 보인 이 소년의 모습, 사실은 스무 살이 넘었지만 나에게는 소년의 모습, 그것이었어. 그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 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자네 알 수 있겠나. 그 친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새로운 학파에 대한 윤곽을 잡아 주었어. 낭만적 정신의 그 모든 열정, 그리스적 정신의 극치를 구현하는 학파 말이야. 영혼과 육체의 조화, 바로 이것이었지! 광기에 휘둘린 우리는 그 둘을 분리시켜 한편으론 속된 리얼리즘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론 공허한 이상주의를 내세웠어. 해리! 정말 자네가 도리언 그레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24-25)
홀워드가 소리쳤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야지 자기 삶을 조금이라도 작품 속에 개입시켜서는 안 돼, 우리는 예술을 자서전의 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 미(美)의 추상적인 의미를 상실했다고. 언젠가는 내가 세상에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 줄 거야. 바로 이런 이유로 세상이 내가 그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봐서는 안 된단 말이야.” (P26)
“그건 당신이 가장 멋진 청춘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청춘이라는 게 우리가 지니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것이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헨리 경.”
“물론 지금이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그러나 언젠가 당신이 늙어 주름살도 패고 추해지면, 생각이 당신 이마에 주름살로 낙인을 찍고 열정이 당신 입술을 섬뜩한 불길로 지질 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느끼게 될 거요. 소름 끼치도록 느끼게 될 겁니다. 지금이야 어딜 가더라도 당신의 매력으로 온 세상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될까요........? 그레이 씨,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소. 그렇게 인상 쓰지 마시오. 그 잘생긴 얼굴에, 미(美)는 천재성의 한 형태지요. 실제로는 천재성보다 더 지고 한 것입니다. 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미라는 것은 햇빛이나 봄날, 혹은 우리가 달이라 부르는 은빛 조개가 검은 물 위에 반사되어 비치는 것과 같이 세상의 위대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요.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나름의 신성한 주권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지요. (P40-41)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도리언 그레이가 자기 초상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런데 이 그림은 항상 젊은 상태로 남을 것이 아닌가. 6월의 오늘보다 더 늙지 않을 게 분명한데……. 거꾸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 간다면! 그걸 위해서라면 -- 그럴 수만 있다면 -- 무엇이든 다 줄 텐데! 내 영혼이라도 내줄 용의가 있는데!」
(P47)
“전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면 무엇이든 부럽습니다. 제 모습을 그린 당신의 저 초상화도 부럽고요. 제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을 왜 저 초상화는 계속 가질 수 있는 거지요? 흘러가는 순간순간이 저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 저것한테 주겠지요. 아, 반대로만 되었어도! 그림이 변하고 나는 지금 모습대로 영원할 수 있다면! 저 그림을 그린 이유가 뭡니까? 언젠가는 저 그림이 저를 비웃을 겁니다.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조롱할 거라고요!” 뜨거운 눈물이 그의 눈에서 솟아났다. (P48)
“도리언, 밀짚 빛깔 머리칼을 지닌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게.” 헨리 경은 담배를 몇 모금 빨고 난 뒤 심드렁하니 말을 내뱉었다.
“왜요, 해리?”
“그런 여자들은 너무 감상적이야.”
“전 감상적인 사람이 좋던데.”
“절대 결혼하지 말게, 도리언. 남자는 지쳐서 결혼하는 거고,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결혼을 하지. 결국엔 둘 다 실망하게 돼.”
“제가 결혼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해리, 깊은 사랑에 빠졌거든요. 그게 당신의 경구 가운데 하나였지요? 저는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제대로 실천해 보려고요.”
“누굴 사랑하는데?” 잠시 뜸을 들인 뒤 헨리 경이 물었다.
“여배우예요.” 도리언 그레이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헨리 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첫발 내디디는 것치고는 너무 진부한데.”
“그 여자를 보면 그런 말 못 할 겁니다. 해리.”
“누군데?”
“시빌 베인이란 여잡니다.” (P78)
“당신은 제 본질이 그렇게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도리언 그레이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무슨 소리. 아주 심오하다고 생각한다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이봐, 친구. 살면서 일생에 딱 한 번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짜 천박하고 세상살이를 겉만 보는 사람들이야. 그들이 말하는 충성심이니 정절이니 하는 것을 난 관습의 무기력 혹은 상상력 결여라 생각한다네. 정서적인 삶에서 충실함을 얘기하는 것은 지성의 삶을 살면서 일관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그건 실패했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라고. 충실함! 언젠가 내가 그걸 분석하고 말 걸세. 그런 태도 속에는 소유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는 거야.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주워 가도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버릴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그건 그렇고. 난 자네 말을 끊고 싶지 않네. 계속해 보게.” (P82)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던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그의 친구 두 사람도 그런 그에게 아무 말 붙이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녀는 무능한 연기자일 뿐이었다. 그들이 대단히 실망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P133-134)
“도리언,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닐세. 사랑은 예술보다 훨씬 훌륭한 일이야.”
“둘 다 모방의 형식에 불과할 뿐이네.” 헨리 경이 말을 꺼냈다. “아무튼 우리 가자, 도리언, 자네도 여기 더 있어서는 안 되네. 서툰 연기를 보는 것이 사람의 품행에는 좋지 않아. 더군다나 난 자네가 아내 될 사람의 연기를 보길 원하지 않네. 설혹 그녀가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줄리엣 연기를 한다 한들 무슨 상관이겠나?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운 아가씨일세. 그녀가 연기만큼 인생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여자라면 아마 자네한테는 매우 즐거운 경험이 될 걸세. 정말 매혹적인 사람들은 딱 두 부류야.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다 아는 사람하고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이렇게 딱 두 부류라고. 저런, 저런, 그렇게 비극적인 표정 짓지 말게!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절대 격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품지 않는 데 있다네. 자, 바질과 나랑 같이 클럽에 가세. 가서 담배도 피우고 시빌 베인의 아름다움을 위해 건배도 하자고. 아름다운 여자잖아. 그 이상 뭘 원하는 건가?”
“가고 싶으면 가세요.” 도리언이 소리쳤다. “전 혼자 있고 싶습니다. 바질, 당신도 가세요. 아! 제 가슴이 찢어지는 거 모르세요?” 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P136)
“도리언, 도리언.” 그녀는 소리쳐 불렀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연기가 제 삶의 유일한 현실이었어요. 저는 극장에서만 살았던 거예요. 그게 전부고 진실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밤엔 로절린드가 되고 다른 날엔 포셔가 되었지요. 베아트리체의 기쁨이 저의 기쁨이었고, 코딜리어의 슬픔이 저의 슬픔이었답니다. 전 모든 걸 그대로 믿었어요. 저와 함께 연기했던 다른 연기자들이 저에겐 신과 같은 존재들이었어요. 물감으로 그린 무대 배경이 제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어요. 전 환영밖에 몰랐어요. 그게 진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타나셨어요.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랑이여!- 당신이 제 영혼을 감옥에서 구해 낸 거예요. 당신은 저에게 실제 현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어요. 오늘 밤 전 난생처음으로 제가 그동안 연기한 그 모든 이름뿐인 아름다운 광경이나 화려함이 얼마나 공허하고 얼마나 거짓인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어요. 정말 처음으로 오늘 밤 저는 로미오가 가증스러운 늙은이로 화장을 잔뜩 칠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수원의 달빛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장면은 얼마나 저속한지, 제가 해야 하는 대사가 실제의 것이 아니며 제가 하고 싶은 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밤에야 알았어요. 당신 때문에 저는 더 높은 어딘가로 오를 수가 있었어요. 모든 예술은 단지 제가 올라선 그 세상의 반영에 불과할 뿐이지요. 당신으로 인해 저는 진정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나의 사랑! 오, 나의 사랑! 아름다운 왕자님! 인생의 왕자님!
저는 그림자에 불과한 환영이 이제 지긋지긋해요. 당신은 저에게 모든 예술보다 더 소중한 존재랍니다. 연극 속의 꼭두각시와 제가 무슨 상관인가요? 오늘 밤 무대에 오를 때만 해도 전 그 모든 것이 저에게서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저 훌륭하게 연기할 거라고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문득 제 영혼 속에 떠오르는 의미가 있었어요. 아주 강렬한 것이었죠. 사람들이 야유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하지만 전 미소를 지었어요. 그들이 어찌 우리 사랑과 같은 사랑을 알겠어요? 도리언, 저를 데려가 주세요. 우리 둘만 호젓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젠 무대가 싫어요. 제가 느끼지 못하는 열정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불길이 되어 저를 불태우는 감정은 제가 흉내 낼 수가 없어요. 오, 도리언, 도리언, 당신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죠? 설혹 제가 흉내 낼 수 있다 해도 사랑을 연기하는 것이 저로서는 신성 모독과 같은 것이랍니다. 당신으로 인해 제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도리언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 사랑을 죽였어.” (P138-139)
침실 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던 그의 눈에 바질 홀워드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왔다. 흠칫 놀란 듯이 그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코트의 단추를 풀고 난 뒤 그는 머뭇거렸다. 마침내 그는 다시 그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크림색 비단 블라인드를 겨우 뚫고 들어와 방 안에 갇힌 흐린 불빛에 드러난 초상화의 얼굴이 그가 보기엔 약간 변한 것 같았다. 표정도 달라져 있었다. 누구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마 입가에 은근히 잔인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분명히 이상하게 바뀌었다. (P144)
그는 의자에 몸을 던지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불현 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초상화가 완성되던 날 바질 홀워드의 화실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말을 한 자도 빼먹지 않고 기억했다. 그것은 그 자신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초상화가 늙어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망이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고 화폭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이 그의 격정과 죄의 무게를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었고, 그림 속 얼굴이 고통과 많은 생각으로 생긴 주름을 떠안고 자신은 자의식이 강한 청년의 섬세한 청순함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당연히 그런 그의 소망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그림이 있고, 더욱이 입가에 잔인함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P145)
그 초상화의 변화를 통해 그는 자신이 시빌 베인에게 얼마나 부당하고 잔인하게 굴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하는 일이 아직 늦지는 않았다. 아직은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될 여지가 남아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이기적인 그의 사랑이 더 높은 어떤 힘에 눌려 고귀한 열정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고, 바질 홀워드가 그려 준 초상화가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그를 이끌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스럽게 다가오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양심으로 다가오며 우리 모두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은 것이 될 터다. 회한을 달래 줄 아편이 있고 도덕적 양심을 얼러 잠들게 할 마약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타락한 죄를 나타내는 가시적인 상징이 있지 않은가. 여기에 인간이 자신의 영혼에 가한 파멸을 내보이는 영원한 표시가 있지 않은가. (P153)
“도리언, 무섭네, 무서워! 자네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어. 지금 자네의 모습은 초상화를 위해 매일 내 화실에 와서 얌전히 앉아 있던 때의 멋진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그때 자네는 정말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애정이 넘치는 젊은이였지. 자네는 이 세상 전체에서 아름다움을 가장 잘 간직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자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투가 심장도 없고 연민의 정도 없는 냉혈한 같아. 이게 다 해리의 영향 때문이야. 난 안다고.”
도리언은 얼굴이 상기된 채 창가로 다가가더니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정원의 푸르름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질, 저는 해리에게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마침내 도리언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한테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받았죠. 당신은 저에게 공허한 것만 가르쳤잖아요.” (P172)
“바질!” 도리언은 떨리는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꽉 쥔 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깜짝 놀란, 흥분된 눈길로 홀워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봤군, 말하지 말게. 내 말 다 듣고 나서 말하게. 도리언,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순간부터 자네의 그 독특한 개성이 나에게 아주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네. 난 자네에게 압도당하고 말았어. 영혼이고 머리고 힘까지 모두, 나에게 자네는 어떤 멋진 꿈처럼 우리 예술가들의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존재가 가시적으로 현현한 그런 존재가 되었다네. 그래서 내가 자네를 숭배하게 되었지. 자네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면 질투를 느끼기도 했어. 자네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게지.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오로지 자네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어. 자네가 내 곁을 떠나 있을 때에도 자네는 늘 내 예술 속에서 자리하고 있어 내 곁에 있었던 셈이지...... 물론 이런 사실을 자네한테는 감췄네. 자네가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알았더라도 자네는 이해하지 못했을 걸세.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데 말이야.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내가 완벽함을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 눈에 세상이 점점 경이롭게 보인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네. 세상이 정말 경이로웠지. 그렇게 맹목적으로 숭배하다 보면 숭배의 대상을 상실할 위험이 있으니까. 그리고 숭배의 대상을 지키는 데도 그 못지않은 모험이 필요하니까...... 한 주 두 주, 그렇게 여러 주가 지나면서 난 점점 더 자네한테 빠져들었다네. (.....) 지금도 나는, 창조행위에서 느끼는 열정이 창조된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 아니었나 생각하네. 예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추상적이거든, 형식과 색채는 형식과 색채를 말해 줄 뿐. 그게 전부야. 지금도 종종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예술은 예술가를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더 완벽하게 예술가를 감춘다고 말이야. 그래서 파리에서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나는 자네의 초상화를 내 작품 전시회의 핵심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다네. 자네가 거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그런데 지금 보니까 자네가 옳은 것 같네. 그 그림을 보여 줘서는 안 될 것 같아. 도리언, 내가 한 말 때문에 나한테 화를 내지는 말게. 언젠가 해리한테도 말했지만 자네는 마땅히 숭배받아야 할 사람이야.” (P180-182)
여러 해 동안 도리언 그레이는 그 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책에서 벗어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 책 초판본의 확대판을 아홉 권씩이나 파리에서 구입해서는 각기 서로 다른 색 종이로 포장했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때로는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변덕을 부리는 환상에 따라 마음에 맞는 색 책을 고르기 위함이었다. 파리의 훌륭한 젊은이인 주인공은 낭만적 기질과 과학적 성향이 묘하게 뒤섞여 있어 도리언이 보기에는 자기 자신을 미리 그려 넣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그 소설 전체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미리 예상해서 담아 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한 가지 점에서는 그가 소설의 주인공보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파리의 젊은이가 일찍부터 맞닥뜨리게 된 사실, 즉 한때는 분명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아름다움이 갑자기 시들해지면서 거울이나 반질반질한 금속의 표면이나 잔잔한 수면을 대하는 일이 얼마나 기괴하고 무서운 일인가하는 사실, 그 사실을 도리언은 몰랐던 것이다. (P199)
그리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바질 홀워드가 그려 준 초상화 앞에 거울을 들고 서서 캔버스의 그 사악하게 늙어 가는 얼굴을 보고 난 다음엔 반짝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젊은 얼굴을 보곤 했다. 극단에 가까운 이러한 대조가 그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더욱 빠져들었고 자기 영혼의 타락에도 점점 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P201)
그러나 사람에게는 혈통에 따른 조상도 있지만 문학 작품 속에서도 자기 조상을 찾을 수 있다. 그 유형과 기질에서 자기와 아주 가까운 인물들. 스스로 확신컨대 자기에게 영향을 듬뿍 끼쳤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 많이 있다. 가끔 도리언은 역사 전체가 자신의 삶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었다. 실제로 그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이 그를 위해 창조한 삶의 역사, 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정열적인 삶의 자취가 바로 역사가 아닌가 싶었다. 세상의 무대 위를 지나며 죄를 그렇게 멋진 것으로 만들고 악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 기이하고 무서운 인물들 모두를 도리언은 다 알 것 같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방식에 의해 그들의 삶이 바로 그 자신의 삶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226)
“그러니까 바질, 당신은 오직 하느님만이 영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커튼을 걷어 보세요. 제 영혼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차갑고 가시가 돋친 목소리였다.
“자네 미쳤군, 도리언.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지.” 홀워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안 하시겠어요? 그럼 제가 직접 걷어 드리죠.” 도리언은 이 말과 함께 긴 막대에 걸린 커튼을 뜯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희미한 불빛 속에 캔버스에 그려진 추악한 얼굴, 자신을 향해 씩 웃는 듯 보이는 그 역겨운 얼굴을 보자 홀워드의 입에서 기겁에 가까운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림 속 얼굴 표정에는 역겨움과 혐오로 그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럴 수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었으니! 그 얼굴을 훼손시킨 것이 공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직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P243)
도리언은 흘끗 그림을 쳐다보았다. 순간 캔버스의 얼굴이 그 빙글거리는 입술로 그의 귀에 속삭이며 자극하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바질 홀워드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증오심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포획된 짐승의 발광에 가까운 격정이 그의 몸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홀워드가 혐오스러웠다. 여태 살아오면서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역겨운 존재였다. 그는 미친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놓인 색이 칠해진 함 위에 뭔가 반짝이는 게 있었다. 그의 눈이 그 물건에 고정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 줄 하나를 끊으려고 가지고 올라왔다가 그만 깜빡하고 놔둔 칼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 칼이 놓인 곳으로 움직였다. 홀워드 곁은 지났다. 홀워드의 뒤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얼른 칼을 잡아서는 돌아섰다. 홀워드가 일어서려는지 의자에서 몸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도리언은 홀워드에게 덤벼들어 칼로 그의 귀 뒤 큰 혈관을 찔렀다. 그의 머리를 테이블 위에 처박으면서 찌르고 또 찔렀다. (P247)
<감각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영혼으로 감각을 치유한다!> 이 말이 그의 귀에 얼마나 생생하게 울리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그의 영혼이 병들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그 죽은 영혼을 감각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순결의 피는 이미 흘려 버렸다. 그것을 무엇으로 보상한단 말인가? 아! 속죄의 길이 없었다. 그러나 용서가 불가능하다면 망각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잊어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밟아서 없애든지, 자기 몸을 문 작은 독사를 짓이겨 죽이듯 완전히 뭉개 버리기로 결심했다. 사실 바질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그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릴 권한을 주었단 말인가? 그는 끔찍하고 무서울 말을, 도저히 가만히 참고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P286)
도리언 그레이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선창을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애드리언 싱글턴을 만난 것이 묘하게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바질 홀워드가 모욕적인 언살 그에게 퍼부었듯이 정말 그 젊은이의 파멸이 자기 탓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고, 잠시 그의 두 눈에 슬픈 표정이 고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젊은이의 파멸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너무나 짧은 인생인데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각자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 삶에 대한 대가도 각자가 알아서 치러야 하는 게 아닌가.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단 한 번의 잘못에 대해 너무 자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거듭해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인간과 거래하면서 운명의 여신은 결코 손해보는 법이 없었다. (P293)
“이젠 다 잊었습니다.” 도리언이 말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실은 그 그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초상화를 그리는데 앞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 그림에 대한 기억조차 혐오스럽거든요. 근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죠? 그 초상화만 보면 어떤 연극 -<햄릿>이었던 같네요- 에 나오는 재미난 구절이 생각나요. 이런 표현이 아닌가 싶은데....
슬픔이 담긴 그림처럼
심장이 없는 자의 얼굴.
맞아요, 바로 제 초상화가 이런 것이었어요.”
헨리 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인생을 예술적으로 다루다 보면 자기 뇌가 바로 심장이 되는 걸세.” 그는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누이며 말했다.
도리언 그레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부드러운 선율을 들려 주었다. “<슬픔이 담긴 그림처럼 심장이 없는 자의 얼굴.>” 도리언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P329-330)
그러나 살인. 평생 그를 쫓아다닐 것이 아닌가? 늘 과거의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진정 고백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순 없다.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딱 하나 남았을 뿐이다. 초상화. 그게 증거였다. 없애 버릴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보관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예전엔 그것이 변하고 늙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그에게 쾌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 초상화 때문에 밤에 그는 깨어 있어야 했다. 집을 떠나 있을 때는 혹 누가 보지나 않을까 늘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초상화가 그의 감정에 우울함을 심어 주었다. 초상화를 기억할 때마다 많은 즐거운 순간이 엉망이 되곤 했다. 초상화가 그에게는 양심과 같은 것이었다. 맞다. 그것이 그의 양심이었다. 그는 그 양심을 파괴할 것이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질 홀워드를 찔러 죽였던 칼이 보였다. 그는 칼에 묻은 더러움이 다 지워질 때까지 그 칼을 여러 차례 깨끗이 씻었다. 그래서 칼은 반짝거렸고 빛이 났다. 그 칼이 화가를 죽였듯이 화가의 작품과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죽일 것이다. 과거도 죽일 것이다. 과거가 죽으면 그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 끔찍한 영혼의 정물도 죽일 것이다. 영혼의 그 무시무시한 경고만 없다면 그는 평화로울 것이다. 그는 칼을 꽉 쥐었다. 그리고 초상화를 찔렀다.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