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2017년

by 노용헌

애니메이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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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학교 도서실 서고에서였다.

먼지가 부옇게 떠도는 공간에서 책장에 꽂힌 책들의 순번이 올바른지 아닌지 확인한다, 라는 도서위원으로서의 임무를 한창 충실히 수행하는 참에 야마우치 사쿠라가 나에게 이상한 고백을 했다.

무시해버릴까 생각했지만 이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은 그녀와 나뿐이니까 역시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엽기적인 그 말은 나한테 던져진 것일 터였다.

별수 없이 등을 맞댄 책장을 살펴보고 있을 그녀에게 반응을 보여줬다.

“느닷없이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 눈을 떴어?”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다가 먼지 때문에 잠시 콜록거리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설명에 들어갔다. 나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거든, 옛 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대.”

“근데 그게 뭐?”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혹시 그 너라는 게 나?”

“너 말고 또 누구 있어?” (P12-13)


“글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아마도.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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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의 병.......? 죽는다......?”

내 입에서 저절로 일상에서는 발음할 리 없는 말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이건 질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누군가의 투병일기, 아니, 공병(共病) 일기인 것 같았다. 아차, 이건 내가 봐서는 안 될 내용이구나.

그런 점을 이해하고 얼른 노트를 덮었을 때, 내 머리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저기요........” (P26)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어떻게 되긴? 내 공병문고야. 읽어봤으니까 알잖아, 췌장 병을 선고받고 일기처럼 쓰고 있다는 거.”

“농담이지?”

그녀는 병원 안인데도 거리낌 없이 우와하핫 하고 웃었다.

“내가 그렇게 악취미로 보여? 그런 건 블랙조크도 안 돼. 거기 쓴 거, 다 사실이야. 내 췌장이 망가져서 이제 얼마 뒤에 죽는다네요, 네.”

“아, 그래?”

“헉, 겨우 그거뿐? 뭔가 좀 다른 말, 없어?”

그녀는 천만뜻밖이라는 듯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클래스메이트에게서 이제 곧 죽는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흠, 나라면 할 말을 잃을 것 같네.”

“그렇지. 내가 침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그녀는 “하긴 그렇다”라고 말하면서 킥킥 웃었다. 그녀가 뭘 우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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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로 고기를, 그녀는 주로 내장을 묵묵히 먹었다. 간간이 내가 내장을 집어먹으면 그녀는 짜증나게도 느물느물 웃는 얼굴로 넘어다보았다. 그럴 때는 그녀가 애지중지 굽던 내장을 냉큼 먹어주면 “에이이!”하고 약이 오른 눈치를 보여서 체증이 쑥 내려갔다.

“나는 화장(火葬)은 싫어.”

나름대로 즐겁게 숯불고기를 먹고 있는데 그녀가 명백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화제를 꺼냈다.

“뭐라고?”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확인했더니 그녀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되풀이했다.

“화장은 싫다니까, 죽은 뒤에 불에 구워지는 건 좀 그렇잖아?”

“그게 고기 구우면서 할 얘기야?”

“이 세상에서 진짜로 없어져버리는 것 같아, 다들 먹어준다거나 하는 건 좀 어렵겠지?”

“고기 먹으면서 사체 처리 얘기는 하지 말자.”

“췌장은 네가 먹어도 좋아.”

“내 얘기 듣고 있어?”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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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큰소리를 내지르며 나와 동석하고 있었을 터인 그녀가 방석에서 벌떡 일어나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역시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방관자로 남고 싶은 나, 항상 당사자가 되려고 하는 그녀, 결국 그런 얘기다. 나는 나 자신을 거울삼아 그녀는 분명 떨쳐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부축해 일으키고, 적으로 간주한 아줌마들을 향해 분연히 소리쳤다. 당연히 상대도 대항했지만, 바로 이 부분이 그녀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게 안에 있던 다른 손님들, 즉 가족팀의 아빠와 노부부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기꺼이 그녀 편을 들어준 것이다.

여러 방향에서 비난 세례를 받은 아줌마들은 소리를 내지른 장본인 외에도 하나같이 얼굴을 붉히고 불평을 주절거리며 도망치듯이 가게를 나갔다. 적들이 사라진 뒤, 그녀는 할머니에게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때도 여전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넘어진 테이블을 정리하고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다. “어서 와”라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아직도 씩씩거리는 기색이었다. 내가 참여하지 않은 것을 나무라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 아줌마가 갑자기 발을 쑥 내미는 바람에 할머니가 접질린 거래. 진짜 너무 못됐어!”

“그러게.”

세상에는 가해자와 방관자의 죄는 동급이라는 사고방식이 있다. 그렇다면 내 죄는 그 아줌마와 똑같은 셈이라서 나는 강한 비난은 자제했다.

정의를 위해 분노하는 시한부 인생의 그녀를 바라보며 ‘안에서 미움 받는 놈이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행세한다’라는 속담은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너보다 먼저 죽는 게 세상에 도움이 될 인간이 너무 많다.” (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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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맹목적이라는 것은 소설 속 얘기로서 알고 있는 것일 뿐, 실제 사람의 마음을 접해보지 못한 내가 살아있는 인간의 행동을 파악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과 실제 인간은 다르다.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소설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인적 없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 등에 얼얼한 시선이 꽂혔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돌아다봤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수학식처럼 생각해버리는 나를 그녀가 좋아할 리 없다, 라고 등 뒤의 그에게 해명하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일이리라.

사람을 맹목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뿐만이 아니다. 사고방식도 사람을 맹목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는 어깨가 왈칵 젖혀지기 전까지 뒤쪽의 그가 쫓아왔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P188)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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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

“아마도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P222)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뉴스를 봤다.

나의 클래스메이트 야마우치 사쿠라는 주택가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인근 주민에게 발견되었다.

발견 후 곧바로 긴급하게 병원에 실려 갔으나 필사적인 치료도 소용없이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뉴스 방송의 캐스터는 무감정하게 사실만을 읽어 내려갔다.

내내 그냥 들고만 있었던 젓가락을 나는 조심성 없이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에는 시판되는 잭나이프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세상을 소란스럽게 했던 묻지 마 사건의 살인마에게 희생되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 살인마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P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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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생각했어,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하지만 네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우리는 분명 둘이 함께하기 위해 살아온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부족했어.

그래서 서로를 보완해주기 위해 살아온 것이겠지.

요즘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없는 나는 혼자 일어서지 않으면 안 돼.

그것이 둘이어서 마침내 하나였던 우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 또 올게. 죽은 다음의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니까 너의 집에 갔을 때 사진 앞에서나마 똑같은 얘기를 해줄게. 만일 듣고 있지 않다면, 내가 천국에 갔을 때 다시 얘기해줄게.

자, 그럼 안녕. (P31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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