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

영화 <노 엑시트> 1962년

by 노용헌

영화 <노 엑시트>(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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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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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이름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전쟁통인 1951년 부산에서 그의 희곡 「더러운 손」이 「붉은 장갑」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라 대성황을 이루면서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사르트르라는 '거장'을 대중에게 친숙한 '작가'로 만든 것은 정작 그의 희곡들이었다. 사르트르는 1940년 겨울 독일군에게 잡혀 있던 포로수용소에서 「바리오나」를 만들어 공연했고, 1943년 출소 후 「파리 떼」부터 1965년까지 두 편의 각색 작품을 포함, 모두 열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1950년대까지 그의 희곡은 '정치 연극'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주요하게 몰두한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그의 작품들을 정치 연극보다는 한 위대한 철학자이자 극작가의 작품으로서 읽히도록 한다.


급사 소설 잘 쓰시네요.

가르생 조용히 해 봐요. 나는 소리 지르지도 않을 거고, 신음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 상황을 똑바로 보고 싶소.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상황이 뒤에서 덮치는 걸 원히 않아요. 소설을 잘 쓴다? 그렇다면 잠을 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겠군요. 잠이 안 오는데 왜 자겠어요? 완벽하군. 잠깐만. 잠깐만. 그런데 그게 왜 고통스럽지? 왜 그게 꼭 고통스럽다는 거지? 알겠다, 그러니까 단절 없는 생활이라는 거군요.

급사 무슨 단절이오?

가르생 (그를 흉내 내며) 무슨 단절이오? (수상쩍어하며) 나를 좀 쳐다봐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당신 눈초리가 견딜 수 없이 거칠고 무례하더니만 이제야 알겠군. 이거 봐, 쪼그라들어서 없잖아.

급사 무슨 소립니까?

가르생 당신 눈꺼풀 말이오. 우린, 우리는 원래 눈꺼풀을 깜빡거렸지요. 눈 깜빡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순간적인 검은 번개, 장막이 한 번 내려왔다가 올라가면 단절이 일어나지오. 눈은 촉촉해지고, 세상은 없어집니다. 그게 얼마나 생기를 돋웠는지 당신은 알 리 없지요. (P15)


이네스 당신이 찾아낸 것이 이게 다예요? 부재를 통한 고문? 그렇다면 실패네요. 플로랑스는 멍청한 계집애였고, 난 그 애가 없어도 아쉽지 않아요.

가르생 무슨 말씀인지요,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네스 당신요? 당신은 사형집행인이잖아요.

가르생 (깜짝 놀라고 나서 웃음을 터뜨린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오해군요. 사형집행인이라, 거참! 당신은 들어와서, 나를 쳐다보고는, 생각한 거죠, 사형집행인이구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아닙니까! 급사도 참 웃긴 사람이네, 서로 소개는 해 줬어야지. 사형집행인이라니! 나는 조제프 가르생이라고 하고, 신문기자이자 문인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같은 곤경에 빠진 처지지요. 부인 성함은......

이네스 (퉁명스럽게) 이네스 세라노예요. 미혼이고요.

가르생 그렇군요. 좋습니다. 자, 서먹함은 사라졌네요. 그러니까 내가 사형집행인같이 생겼다는 겁니까? 어떻게 알아보는 건데요, 사형집행인들은, 어떻게 생겼지요?

이네스 그들은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죠.

가르생 겁먹었다고요? 말도 안 돼. 누구한테요? 자기네 희생자들한테요?

이네스 됐어요. 나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을 봤단 말이에요.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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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 왜 그래요?

에스텔 (눈을 다시 뜨고 미소 지으며) 기분이 이상해요. (그녀는 자기 몸을 만져 본다.) 당신에겐 이런 증상이 없지요. 나는 내 모습을 못 보면 나를 만져 봐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진짜로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죠.

이네스 당신은 운이 좋은 거예요. 난 언제나 속에서 나를 느끼죠.

에스텔 아! 그래요, 속에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너무 막연해서 졸음이 와요. (사이) 내 침실엔 큰 거울이 여섯 개 있어요. 내 눈에 그 거울들이 보여요. 그것들이 보여. 하지만 거울들은 나를 못 보고 있어요. 긴 의자와 양탄자, 창문은 비치는데..... 정말 허전하네요, 내가 없는 거울이란. 내가 말을 할 때는, 거울을 하나 둬서 내가 나를 쳐다볼 수 있도록 했었지요. 말을 했고, 말하는 나를 봤지요. 마치 사람들이 나를 보듯이 나를 바라봤어요. 그게 나를 깨어 있게 했죠. (절망하며) 내 립스틱! 분명 삐뚤게 칠해졌을 거예요. 영원히 거울 없이 지낼 수는 없단 말이에요. (P39)


가르생 알아, 나한테도 대답해 주려고 안 했지, 하지만 난 나를 알아. 첫 주자로 말하기가 겁나는 건가? 좋아. 내가 먼저 시작하지, (침묵) 난 그리 멋지지 않아.

이네스 상관없어요. 당신이 탈영했다는 건 알아요.

가르생 그 얘긴 놔두쇼. 그 얘긴 절대 더 하지 말라고.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아내를 고문했기 때문이오. 그게 다죠. 오 년 동안, 물론 그녀는 아직도 고통스러워하죠. 그녀예요. 내가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녀가 보여요, 내가 관심있는 것은 고메즈인데 눈에 보이는 건 아내죠. 고메즈는 어디 있지? 오 년 동안이나, 이런, 내 옷가지들을 그녀한테 돌려줬군. 그녀가 창가에 앉아서 무릎 위에 내 웃옷을 올려놓고 있어. 구멍이 열두 개 뚫린 웃옷. 피, 꼭 녹이 묻은 것 같군. 구멍들 가장자리가 녹슬어 보여, 허 참! 박물관에 보낼 물건이군, 역사적인 웃옷이야. 게다가 그걸 내가 입고 있었지! 당신 울 참인가? 결국 울어 버릴 거야? 난 돼지처럼 취해서 집에 들어가곤 했지, 술 냄새 여자 냄새를 풍기면서. 그녀는 매일 밤 나를 기다렸어요. 그녀는 울지 않았죠. 물론 한 마디 핀잔도 없었고. 눈만 보였지. 커다랗게 뜬 그녀의 눈만. 난 아무것도 후회하진 않소. 죗값은 치르겠지만 후회하진 않소. 밖엔 눈이 오는군. 아니 당신 울 텐가? 그녀는 순교자의 소명을 타고난 여자요.

이네스 (거의 부드러워진 어조로) 왜 아내를 괴롭혔죠? (P47)


가르생 함정이에요. 그들은 당신이 거기에 걸리는지 몰래 지켜보고 있어요.

이네스 알아요. 그리고 당신, 당신도 함정이에요. 그들이 당신 말을 예상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덫들을 거기 숨겨 놓지 않았겠어요? 모든 게 다 함정이죠. 하지만 그래 봐야 나한테 어쩌겠어요? 나 역시도 함정인걸. 저 애를 잡기 위한 함정. 저 애를 사로잡는 건 아마도 내가 될 거예요.

가르생 당신은 아무것도 못 잡을 거요. 우리는 놀이공원의 목마들처럼 서로의 뒤를 쫓을 뿐 결코 못 만납니다. 그들이 빈틈없이 짜 놨다고 믿어도 좋아요. 포기해요. 이네스, 손을 풀고 다 놔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우리 셋 모두에게 불행을 초래할 거요.

이네스 내가 손을 놓을 사람처럼 보여요? 난 뭐가 기다리는지 알아요. 난 활활 불붙을 거예요. 나는 불타고 그것이 끝나지 않으리란 것도 알죠. 난 다 알아요. 내가 손을 놓을 거라 생각하세요? 내가 저 애를 사로잡을 거고, 그녀는 내 눈을 통해서 당신을 보게 될 거예요. 플로랑스가 다른 사람을 보던 것처럼. 당신 불행에 대해서 무얼 말하러 온 거예요? 난 다 안다고 말하잖아요,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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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당신을 놀렸던 거예요. 난 사내들을 좋아해요, 가르생. 진짜 남자들 말이에요, 피부가 거칠고 손이 억센. 당신 턱이 비겁자 같은 것도 아니고, 입도 비겁하게 안 생겼고, 목소리도 비겁자 톤이 아니고 머리칼도 비겁자 같지 않아요. 바로 당신 그 입 때문에, 당신 목소리, 당신 그 머리칼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가르생 정말로? 그게 정말이야?

에스텔 맹세라도 해야겠어요?

가르생 그렇다면 난 저 위에 있는 자들이나 여기 있는 자들 모두를 무시할 수 있어. 에스텔, 우리는 지옥에서 나갈 거야. (이네스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그녀를 쳐다본다.) 뭐가 문제지?

이네스 (웃으면서) 아니 저 애는 자기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안 믿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 수 있지? “에스텔, 내가 비겁한 놈이야?” 저 애가 속으로 얼마나 비웃겠어!

에스텔 이네스! (가르생에게) 저 여자 말 듣지 마세요. 내가 당신을 믿어 주기 바란다면 나부터 먼저 믿어 줘야죠.

이네스 아, 그럼, 그럼! 그 애 말 좀 믿어 줘. 저 애는 남자가 필요해, 딱 보면 알잖아, 자기 허리를 감싸 주는 남자의 팔, 남자의 체취, 남자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남자의 욕망이 필요한 거지. 그 나머지 것들이야 뭐...... 하! 저 애는 널 하나님 아버지라고도 부를걸, (P73)


이네스 나 때문에? (사이) 좋아, 그럼, 문을 닫자고. 문이 열리니까 열 배는 더 더워. (가르생이 가서 문을 닫는다.) 나 때문이라고?

가르생 그렇소. 비겁자가 뭔지를 알지, 당신은.

이네스 그래요. 알아요.

가르생 당신은 악이 뭔지, 수치와 공포가 뭔지를 알아. 당신도 자신을 가슴속까지 들여다보는 날이 종종 있었지, 그것도 그 생각에 사지가 꺾일 정도로. 그런데 다음 날이면 당신은 더 이상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고, 전날 알아낸 사실들을 해독할 수가 없었지. 그래, 당신은 악의 대가가 뭔지를 알아. 그리고 만일 당신 입으로 내가 비겁한 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원인을 알고 있는 상태겠지, 그치?

이네스 그래요.

가르생 내가 설득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은 나하고 종자가 같거든.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소?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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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 저 여자 말 듣지 마요. 입 맞춰 줘요. 난 완전히 당신거예요.

이네스 자, 뭘 기다리셔? 해 달라는 대로 해. 비겁자 가르생이 유아 살해자 에스텔을 품에 안고 있다. 귀추가 주목되는군. 과연 비겁자 가르생이 그녀에게 입 맞출 것인가? 내가 당신들을 보고 있어, 내가 당신들을 본다고, 혼자서도 나는 군중이야, 군중, 가르생, 군중이라고, 알아들어? (중얼거리며) 비겁한 놈! 비겁한 놈! 비겁한 놈! 비겁한 놈! 도망가야 소용없어, 내가 널 놔주기 않을 테니까. 그 애 입술에서 뭘 찾겠다는 거야? 망각? 하지만 내가 널 안 잊어버릴 거야, 내가. 날 설득해야 돼. 날, 이리 와, 이리! 널 기다리고 있어. 거봐, 에스텔, 그가 포옹을 풀잖아, 개처럼 말을 잘 듣는다고...... 넌 그를 가지지 못해.

가르생 그러니까 밤이 절대 오지 않는다는 건가?

이네스 절대로.

가르생 당신이 언제나 날 보는 거야? (P81)


가르생 청동상.... (그가 그것을 쓰다듬는다.) 그래, 이제 때가 됐군. 청동상이 여기 있고, 내가 그걸 바라보고 있고 난 내가 지옥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겠어. 당신들에게 말하지만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이 벽난로 앞에서 손으로 이 청동상을 쥐고서 모든 시선을 받고 서 있을 걸 예견했던 거야, 나를 잡아먹는 이 모든 시선들을..... (그가 갑자기 뒤돌아선다.) 이런! 당신들 둘밖에 안 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가 웃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에스텔 내 사랑!

가르생 (그녀를 밀치며) 이거 놔. 저 여자가 우리 사이에 있어. 저 여자가 나를 볼 땐 난 너를 사랑할 수 없어.

에스텔 하! 그렇다면, 저 여자는 이제 우릴 더 못 볼 거예요.

(에스텔이 탁자 위에서 종이칼을 집는다. 이네스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몇 차례 찌른다.)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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