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쥬드> 1996년
토머스 하디의 명성을 드높여 준 작품은 <더버빌 가의 테스>(이하 <테스>)와 <이름 없는 주드>이다. <테스>는 가난한 농부의 딸 테스가 도덕적 편견, 사회적 인습 속에서 몰락해 가는 이야기이고, 1895년에 <이름 없는 주드>(이하 <주드>)는 가난한 시골 청년 주드가 인습과 제도에 저항하다 비극적 종말을 맞는 이야기이다.
[1]
주드는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그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면서, 돼지우리 곁에 있는 두엄 더미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안개가 엷어져 해가 떠 있는 지점이 반투명한 안개 사이로 드러났다. 그는 밀짚모자를 얼굴 위로 덮어썼다. 그리고 멍하게 생각에 잠기며 모자의 밀짚 틈 사이로 보이는 하얀 햇빛을 응시하였다. 자란다는 것은 책임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모든 일이 그가 생각한 대로 조화를 이루지는 않았다. 자연의 논리는 그가 좋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끔찍했다. 한 부류를 위한 자비심이 다른 부류에게는 잔인함이라는 사실이 그가 생각하는 조화의 개념을 역겹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시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느끼고, 그러나 그것이 그가 어렸을 때 느꼈든 대로 원주(圓周) 안의 한 지점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그는 일종의 공포의 전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자신을 삥 둘러싸고 무엇인가 눈부시게 번쩍거리고 딸랑거리며, 이 소음과 빛이 인생이라 불러야 할 작은 세포를 때리고 흔들고 뒤트는 것이었다.
자신이 자라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P36-37)
문법 책을 받고 한두 달이 지나자 주드는 죽은 언어가 자신에게 가한 초라한 속임수에 둔감해졌다. 사실 이 언어들의 특성에서 경험한 실망감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크라이스트민스터의 학문을 더욱 숭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살아 있건 죽었건 그 속에 내재된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며, 그렇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특정한 방법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언어를 습득하고 싶은 관심을 더 갖는 것이었다. 산더미 같은 자료 속에 든 사상과 그 사상이 숨어 있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먼지 앉은 서적들이 주드로 하여금 그 사상을 하나씩 서서히 정복하도록 끈질기고 은은하게 유혹하였다. (P60)
석공의 도제로 일하는 스무 살의 주드는 도제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월급의 반만 받고 일을 했다. 처음 그는 시내의 하숙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아내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생각이었다. 수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급한 필요성을 생각해서, ‘갈색 집’과 메리그린 중간 지점에 있는 길가의 외떨어진 집을 하나 빌려 세를 들었다. 채소밭이 있는 이점이 있는 데다, 그녀의 경험을 살려 돼지 한 마리를 치도록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계획한 삶이 아니었다. 거기서 알프레드스턴까지 매일 먼 길을 걸어가고 걸어와야 했다. 아라벨라는 반면 이러한 생활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을 얻게 된 것이며, 그 남편은 좀 겁을 먹고 놀라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 그래서 실질적인 일을 위해 시시한 책을 버리기만 하면, 그녀의 드레스와 모자를 많이 사줄 수 있는 돈벌이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결혼한 날 저녁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할머니 집의 정든 방을 버리고, 아라벨라를 그 외딴집으로 데려왔다. (P105)
그녀는 주드의 주머니에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돈을 좀 더 벌어 와야 한다는 소리까지 했다.
“수습공의 월급은 아내까지 먹여 살릴 만큼 넉넉하지 못해요.”
“그럼 아내를 얻지 말았어야지.”
“그래, 아라벨라!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참 딱하게 되었네.”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자기한테 말한 게 사실이라고 믿었어. 빌버트 선생도 그렇다고 말했어. 지금 와서는 그렇지 않은 게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일이야!”
“그런 뜻이 아니야.” 주드가 급히 말했다. “내 뜻은 그 이전에 있었던 일 말이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기 친구들이 나쁜 충고를 했던 건 사실이지. 그들이 그런 충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자기가 그 충고를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속박에서 자유로울 것 아니오? 그 속박이 솔직히 말하면 우리 서로를 몹시 짜증 나게 하고 있지 않소? 매우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P121)
그는 자신을 완성할 수 없었다. 이 옛길 위에 서 있는 한, 자신은 마음속으로 크라이스트민스터와 학문을 처음으로 갈망하는 열성으로 저 언덕 꼭대기에서 꿈을 꾸던 때보다 하루도 더 나이를 먹지 않은 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어른이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내가 있다. 그보다도 그 아내와 뜻이 다르고, 그녀를 싫어하고, 그녀와 싸움을 하고, 그리고 그녀와 헤어졌다. 나는 이제 보다 원숙한 시기에 도달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졌던 지점에서 얼마 멀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은 그가 크라이스트민스터를, 아니 그 도시라고 믿었던 곳을 본 언덕 꼭대기였다. (P131-132)
크라이스트민스터로 가겠다고 결심을 한 궁극적인 충동에는, 흔히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지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 관계된, 더 큰, 이상한 이유가 있었다. 알프레드스턴의 하숙집에 있던 어느 날 그는 할머니를 보러 메리그린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벽난로의 장식대 위에 놓인 구리 촛대 사이에 예쁜 소녀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챙 아래 후광처럼 환히 빛나는 주름 잡힌 천이 달려 있었다. 주드는 그 소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사촌이 되는 수 브라이드헤드이며, 그의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은 친척이라고 말했다. 주드가 더 캐어묻자 할머니는 수가 크라이스트민스터에 살고 있는데 정확히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P138)
밤에 보았을 때 완전하고 이상적이던 것이 낮에는 흠투성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오래된 건축물에 잔인함과 모독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상처 받은 민감한 인간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몇몇 건물의 상태가 그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건물들은 상처 받고 부서져, 세월과 기후와 인간과의 죽음을 건 싸움에서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들 역사적 증거물의 부식 상태는 그가 의도했던 대로 아침을 실질적인 일로 시작하려던 계획을 서둘지 않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일을 하고 그 일로 먹고살기 위해 이 도시로 왔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은 채 아침이 거의 다 가고 말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석조물이 부서지고 있는 곳에는 건물 보수 작업과 관계된 일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매우 고무적인 사실로 다가왔다. 그는 알프레드스턴에서 이름을 소개받은 석공이 있는 공장으로 가는 길을 물었고, 금세 귀에 익은 숫돌 가는 소리와 정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장의 마당은 재생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는 작은 중심부를 이루었다. 작업장에 널려 있는 날카로운 모서리와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물은 그가 벽면에서 침식되고 시간에 마모되어 있는 것을 본 조형물과 똑같았다. 이곳의 조형물이 현대적 산문으로 표현된 사상이라면, 이끼 낀 대학의 그것은 고대의 시(詩)로 현시된 사상이었다. 골동품의 일부도 막 제작되었을 때에는 산문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 작품들은 그냥 세월을 기다리기만 한 것이며 그러는 사이 이들은 시가 되었다. 가장 작은 건물에게도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P151-152)
그는 그녀를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녀를 가족 아닌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할수도 없는 이유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첫째 이유는 그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며 그녀를 여자로서 만난다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두 사람이 사촌이라는 점이었다. 비록 주어진 여건이 두 남녀 사이의 정열을 촉진시키기 쉬운 경우이더라도 사촌끼리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되지 못하였다. 셋째 이유는 설사 그가 결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입장이라 하더라도 결혼이 비극적 슬픔으로 끝나는 집안의 역사를 감안할 때 혈연으로 연결된 친척과의 결혼은 역경을 다시 반복한다는 것을 뜻하며 비극적 슬픔이 비극적 공포로 극대화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P162-163)
그녀는 그에게 이상이었다. 그녀를 알게 되는 것이 그로부터 이 예기치 않은, 그리고 허가되지 않은 열정을 치유해줄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를 알고는 싶지만 이 열정을 치유하고 싶지는 않다고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지닌 전통적인 관념에서 보면 상황이 불륜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수가 나라의 법에 따라 인생이 끝날 때까지 아라벨라만 사랑하도록 허락되고 다른 사람은 탐하지 말아야 하는 남자의 연인이 된다는 것은 주드가 계획하는 인생행로에는 아주 좋지 않은 제2의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P176)
“아, 그는 수에 비해 너무 나이가 많아. 너무 늙었어.” 주드가 가망 없고 불리한 입장에 빠진 사랑 때문에 느끼는 무서운 절망감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의 일에 개입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라벨라의 남자가 아닌가? 그는 그 이상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크라이스트민스터로 발길을 돌렸다. 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을 때마다 절대로 필롯슨과 수가 함께 걸은 길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필롯슨은 수보다 스무 살은 더 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상황에서도 결혼은 행복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주드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사촌과 필롯슨의 관계를 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었다. (P196)
“네가 그 아라벨라 같은 여자하고 결혼한 것만 해도 사내로서는 아주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세상 저쪽으로 가버렸으니 다시는 너한테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매인 몸으로 만약 수를 좋아한다면 그건 더 나쁜 일이 된다. 만약 네 사촌이 잘 대해 주면 그걸로 만족해라. 친척 간의 인정 관계를 넘어선다면 그건 완전히 미친 짓이 된다. 걔가 도시 티를 내고 도를 넘어서면 그건 너의 파멸이다.”
“할머니, 수를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제발요!” (P199)
“사랑하는 수, 무슨 일이오?” 그가 놀라서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운 용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지방에서 제일 큰 강을 걸어서 건넜어요. 그게 네가 한 짓이에요! 오빠와 외박을 했다고 날 감금했어요. 너무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잖아요. 창밖으로 빠져나와 강을 건넜어요!” 그녀 특유의 독립적인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 전에 엷은 핑크 빛 입술이 떨리면서 울음이 나왔다. (P253)
“날 문명의 산물이라고, 아니 그 비슷한 거라고 불렀지요? 기억나세요?” 수가 침묵을 깨면서 말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아주 이상해요.”
“왜?”
“글세, 그런 말은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는, 옳지 않은 거예요. 나는 문명의 부정(否定)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매우 철학적인 말이네. ‘부정’이라는 용어는 심오한 말이지.”
“그래요? 내가 유식한 체하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는 빈정거리는 투가 들어 있었다. (P258)
“이들은 인생을 바로 보아요. 그러나 대학에서는 인생을 바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오빠가 좋은 예예요. 처음 대학이 세워졌을 때 크라이스트민스터는 오빠 같은 사람들을 목표로 삼았어요. 배움에 대한 정열은 있으면서, 돈이나 기회나 친구들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세워졌던 거예요. 그러나 오빠 같은 사람은 백만장자들의 자식들 때문에 길에서 밀려난 거예요.”
“나는 크라이스트민스터가 주는 학위 없이 살 수 있단다. 나는 그보다 더 높은 것을 갈망하고 있지.”
“나는 좀 더 넓고, 좀 더 참된 것을 갈망해요.” 그녀가 열기 띤 소리로 말했다. “현재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는 지성이 한 길로 가고 있는 반면 종교는 다른 길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둘은 서로 대치 상태에 빠져 있지요. 양 두 마리가 서로 뿔을 박고 있는 것처럼요.” (P265)
“난 항상 수를 사랑할 거야!” 주드가 말했다.
“나도요, 오빠는 일편단심이에요. 결점투성이고 성가신, 이 어린 수를 너그럽게 품어주니까요!”
그는 얼굴을 돌렸다. 수의 양성(兩性)적 사랑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사랑이 그 가엾은 논설 위원의 심장을 부쉈던 것인가? 자신이 이제 그 논설 위원 다음의 희생자인가? 그러나 수는 그렇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의 성(性)을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듯이, 그도 그녀의 성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의 훌륭한 동지가 될 수 있을 텐데, 추상적 주제에 관한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일상적 인간 경험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들을 더 가깝게 밀착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시간, 신앙 또는 부재가 그를 그녀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P270)
“뭘 묻고 싶은지 알 것 같네요!” 주드가 황급히 말했다. “교육 대학을 빠져나와 나한테 온 것 말이지요?”
“그래.”
“글쎄요.” 주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연적(戀敵)을 제거해 버리고 싶은 파렴치하고 악마 같은 욕구를 잠시 느꼈다. 인생의 다른 관계에서는 가장 존경스러운 사람도 같은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술책을 시도함으로써, 스캔들은 사실이며, 수는 되돌릴 수 없도록 인생을 자신에게 맡겼다고 말을 해서, 필롯슨을 고통과 패배 속에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드는 자신의 동물적 충동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솔직한 대화를 하려고 친절히 여기까지 와주어서 반가워요.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내가 수와 결혼을 해야 한 대요.”
“뭐라고!”
“그리고 난 진심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해요!” (P287-288)
그녀가 담당한 방에 손님이 비자 그는 잠시 생각 끝에 그 방으로 들어가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다. 아라벨라는 잠시 동안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치고 조금 뒤에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에 뻔뻔스러운 장난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럴 수가!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어요!”
“오!”
“당신 소식이 끊어졌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이곳으로 왔겠어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이런 오후에는 무엇을 대접하죠? 스카치와 소다? 아니, 옛정을 생각해서 이 집에서 제일 비싼 걸로요!”
“아라벨라, 고맙소.” 주드가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마신 것 이상은 마시고 싶지 않소.”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의 출현은, 마치 우유를 마시던 유년 시절로 그를 데리고 간 것처럼, 독한 술에 대한 그의 욕구를 즉시 죽여버렸다.
“그것참 안됐네요. 공짜인데.”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약 육 주일쯤요. 시드니에서 석 달 전에 돌아왔어요. 알겠지만, 난 이 장사를 좋아했어요.”
“왜 이 집인가!”
“글쎄, 이미 말한 대로 당신이 저세상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런던에 있다가 이 자리가 광고에 난 것을 보았어요. 어렸을 때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 자란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건 특별히 신경 쓸 문제도 아니지만,”
“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왔소?” (P318-319)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그 성가를 내내 흥얼거렸다. 자연히 작곡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사람이 그 성가를 왜 작곡하게 도었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느꼈다. 그런 곳을 작곡한 사람이면 얼마나 넓은 이해심을 가졌을까! 수와 아라벨라 때문에 황당해하고 괴로워하는 자신,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양심의 가책에 짓눌린 자신! 그는 그 작곡가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 사람이라면 내가 겪는 어려움을 이해해 주겠지.” 충동적인 주드가 중얼거렸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내 속을 다 털어놓을 사람이 있다면, 이 작곡가가 바로 그 사람이야. 그도 고통 받고 괴로워하고 그리워하였으리라. (P342)
[2]
두 사람 사이에 높은 창틀이 있어 그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자 그녀는 가까이에서는 할 수 없던 말을 솔직하게 쏟아 붓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아직도 감정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문명이 우리를 던져 넣는 사회적 틀은 우리의 실제 형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별들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통념적 형태가 실제 별의 모습과는 무관한 것만큼요. 난 지금 리처드 필롯슨 부인으로 불리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 조용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난 필롯슨 부인이 아니고, 돌연변이의 열정과 말할 수 없는 반감을 가슴에 품고 혼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가엾은 여자예요. 이제 더 이상 거기에 그냥 서 있다가는 마차를 놓치겠어요. 다시 오세요. 그때는 내가 실제 사는 집으로요.” (P20-21)
“날 떠나 산다는 것은 혼자 산다는 뜻이오?”
“글쎄요. 당신이 우기면 그래야겠지요. 그러나 내 뜻은 주드와 함께 사는 것이었어요.”
“그의 아내로?”
“내가 원하는 대로요.”
필롯슨은 몸을 한 번 움칠했다.
수가 계속했다. “여자나 남자나 ‘세상이, 자기 몫의 세상이, 자기를 위한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선택하게 내버려두는 사람은 원숭이 같은 모방 기능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J.S. 밀의 말이에요. 내가 마침 읽던 책의 한 구절이에요. 왜 당신은 그걸 실천하지 못하죠? 나는 그런 걸 항상 실천하고 싶은데.”
“J.S. 밀에 대하여 내 알 바 아니오!” 그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나는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오. 결혼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그러나 지금 막 깨달은 사실을 당신에게 한마디 합시다. 당신은 주드 폴리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소!”
“일단 당신이 꺼낸 소리니까 내가 그렇다고 계속 상상을 하세요. 만약 그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내가 그에게로 가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당신에게 부탁할 줄 아세요?”
학교 종이 울려서 필롯슨은 용기를 잃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짐짓 설득력 있는 권위 논증처럼 보이게 하려는 문제에 당장 대답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수수께끼처럼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무어라고 꼬집어서 설명하기 힘들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여, 필롯슨은 그녀의 다른 작은 괴벽과 함께 아내가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요구를 같은 것으로 보기로 하였다. (P54-55)
“내가 드린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필롯슨이 증언하듯 말을 계속했다. “아내가 애인과 떠나겠다고 허락해 달라기에 그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년의 나이를 지난 여자니까, 그녀 자신의 양심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감금해 지키는 간수가 아닙니다. 더 이상은 설명할 수가 없네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질문 당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두 사람의 얼굴에 아주 심각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집으로 가서 필롯슨 선생 부인에게 심각한 문제가 새로 생긴 모양이라고 부모들에게 말했다. 그때 막 의무교육 기간을 끝낸 필롯슨의 어린 하녀가, 필롯슨 선생이 부인이 짐 싸는 것을 도와주고, 부인에게 필요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부인의 젊은 애인에게 부인을 잘 돌보라고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퍼뜨렸다. 이사회의 이사장이 문제는 끝났다고 결론을 내리고, 학교의 이사들을 소집하여 사태를 상의하였다. 필롯슨에게 이사회에 조용히 참석하라는 요구서가 전달되었다. 회의가 길게 진행되었으며, 회의가 끝나고 교사는 보통 때처럼 창백하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길링엄이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였어.” 필롯슨이 의자에 지친 몸을 던지면서 말했다. “고통 받는 아내에게 자유를 준 내 행동이 창피하다고 사표를 내라는 요구야. 그들 말로는 아내의 간통을 묵인해 준 이유 때문이래. 그러나 나는 사표를 내지 않아!”
“나 같으면 내겠어.”
“나는 아니네. 이건 그 사람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야. 그 문제는 내가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데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아. 원하면 날 쫓아내라지.” (P97-98)
“한 가지만은 확실해. 이혼 판결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건, 결혼은 한 번 취소되면 해소된 거라는 사실 말이야. 우리처럼 가난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은 이런 이점이 있어. 이런 일들은 우리를 위한 대충, 그러나 준비된 식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나와 아라벨라의 문제에서도 같아. 난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 발각되어 벌을 받을까 무척 걱정스러웠어. 그러나 그녀의 문제에 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어. 만약 우리가 특권을 부여받은 귀족이었다면 끝없는 시련이 따랐을 거야. 며칠이고 몇 달이고 뒤를 캐는 사람들 때문에 시달리는 시간을 보냈을 거야.” (P113)
“한 대 심하게 맞은 것 같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일지도 모르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소. 아이의 출생일이 아라벨라 말대로 맞다면 그 아이는 확실히 내 아이요.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 만났을 때나 내가 그녀와 같이 여기 왔던 날 저녁에 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지는 이해할 수 없어요! ........ 아, 지금 생각나는 게 있어요. 우리가 함께 다시 산다면 나에게 알려줄 것이 하나 있다고 말을 했어.”
“불쌍한 아이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 같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주드가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내 아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어떤 것일까!” 그가 말했다. “이 말은 해두어야 할 것 같소. 내가 좀 잘 산다면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를 잠시도 쉬지 않고 생각할 것 같다고요, 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기를게요. 부모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것은 초라한 질문이야. 부모의 문제가 결국은 무엇이지? 실제 따져보면 혈연에 의해서 누구의 자식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오? 우리 시대의 모든 꼬마들은 집단적으로 우리 시대 어른들의 아이들이오. 그들은 우리 어른들의 전반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어요. 자기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관심과 다른 사람의 자식에 대한 기피증은 계급의식이나, 애국심이나, 자신의 영혼만을 구하려는 개인주의나 그 밖의 다른 특성과 마찬가지로 그 바탕에는 야비한 배타주의가 깔려 있어요.” (P142-143)
주드 폴 리가 예고 통지서에 서명을 하였다. 수는 그의 어깨 너머로 그의 손이 글자를 따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근엄한 서류에 자기 자신과 주드의 이름이 채워지는 것을 보았다. 서로에 대한 사랑인 가변적 본질이 영원한 것으로 짐짓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의 이름과 성’(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당사자가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신분’(무시무시한 항목이었다.), ‘직위 또는 직업’, ‘연령’, ‘주거지’, ‘거주 기간’, ‘결혼식이 수행될 교회 또는 건물’, ‘당사자들이 각각 살고 있는 지역과 군(郡)’.
“기분을 망쳐버리죠, 그렇죠!” 집으로 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교회의 사무실에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보다 더 흉한 용건으로 변해 버려요. 교회에서는 그래도 시(詩)가 조금 있어요. 오빠, 이제 어서 빨리 해치워 버려야지요.” (P153-154)
두 사람이 살아간 주목받지 않은 삶은 결혼 등록을 중단한 날부터 아라벨라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관찰되고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스프링 가와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수와 주드의 마음과 정감과 입장과 두려움을 대체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이가 느닷없이 나타난 이상한 사실과, 그 아이가 주드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수를 어머니라고 부른 사실과, 결혼 등록소에서 조용히 치르려던 결혼식이 연기된 것과, 법원에서 당사자들이 나타나지 않은 이혼 재판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모두 어울려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해석만을 열어주었다.
꼬마 시간 아범 -아이는 공식적으로 ‘주드’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그에게는 더 적절한 별명이 그냥 붙어 다녔다- 이 저녁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아이들이 낮에 물어본 질문과 질의를 반복하였다. 그것을 듣는 수와 주드에게는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P184-185)
“내가 바보짓을 했어요! 아, 자연의 법칙은 왜 서로 죽이는 거죠!”
“어머니, 정말 그런 거예요?” 아이가 열성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수가 힘차게 대답했다.
“새들은 이제 주어진 기회를 활용해야지. 가엾은 비둘기들.” 주드가 한마디 했다. “경매 계산이 끝나고 우리 돈이 들어오면, 우리는 떠나는 거요.”
“어디로 가죠?” 시간 아범이 궁금해하면서 말했다.
“우린 가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된다. 아무도 우리가 간 곳을 찾지 못하게..... 우린 알프레드스턴으로 가서는 안 된다. 멜체스터도 안 되고 섀스턴도 안 되며 또 크라이스트민스터도 안 되지. 이런 곳을 빼고는 우린 어디로 가도 좋단다.”
“왜 그런 곳은 안 되지요, 아버지?”
“그건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구름 때문이란다. 비록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더라도!’ 비록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더라도.’” (P202)
그러자 주드가 그의 마음속에 있던 것을 고백하였다. 옛날과 연관된 곳을 오랫동안 결연히 피했는데, 지금 그의 결정을 말하면 그녀가 놀랄 것이라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최근 이런저런 일 때문에 크라이스트민트서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수만 괜찮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얼굴이 알려졌다고 왜 신경을 써야 하나?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과민해서 그런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만약 일을 할 수 없으면 케이크라도 팔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창피하게 느낄 것은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곧 전처럼 건강해질 것이며 그러면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 자신의 돌 깎는 가게를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왜 크라이스트민스터를 그렇게 좋아해요?” 그녀가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 “크라이스트민스터는 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가엾은 오빠!” (P222)
“여러분. 그건 어떤 젊은이에게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내가 해답을 찾으려 애를 썼던 질문이고. 수천의 젊은이들이 이 솟아오르는 시대의 이 순간에도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비판 없이 자신이 처한 길을, 그에 대한 재능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고려해서 거기 알맞게 진로를 다시 바꾸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나는 후자의 길을 선택하였으며, 그 선택에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실패는 내 관점이 잘못된 것이었거나, 나의 성공이 그 견해를 바른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요즘 그러한 시도를 이런 각도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내 뜻은 그런 시도를 근본적 건전성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적 결과에 의하여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막 여기에 들어가는 것을 본, 빨갛고 까만 색깔의 가운을 입은 저들 신사 중 한 사람처럼 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저 젊은 사람이 얼마나 영리한지를 보세요! 그는 자신이 타고난 적성을 좇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나처럼 처음 시작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처지에 섰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환상의 변덕을 좇아간 저 바보 같은 친구를 보라!’고.
그러나 패배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의 가난이었습니다. 내가 한 세대 안에 이루려고 했던 것은 대개 두 세대 내지 세 세대가 걸리게 마련입니다. 나의 충동은 -애정은- 결점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회적 이점이 없는 사나이에게 방해물이 되지 않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기회를 잡으려면 물고기처럼 냉혈한 인간이 되고 돼지처럼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대상으로는 아주 잘 맞는 인물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최근 몇 해 동안 내가 겪은 심적 고통을 안다면 나를 오히려 동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안다면 (그는 교수들이 하나씩 둘씩 따로 도착하고 있는 대학을 향해 고갯짓을 하였다.) 그들도 같이 동정을 보내겠지요.” (P232-233)
주드는 시계를 손에 든 채 달걀 삶는 시간을 재면서 주전자 위로 몸을 구부렸다. 그의 등은 아이들이 누워 있는 안방 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수가 지른 비명 소리에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골방의 문 -그녀가 문을 뒤로 밀어젖히자 경첩에 무겁게 매달린 것처럼 보였던 문- 이 열려 있고 골방 안쪽의 마룻바닥에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일으키려고 급히 갔다가 판자 위에 펴진 작은 침대보 위로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거기 없었다. 문 뒤에는 옷을 걸기 위해 갈고리못이 두 개 부착되어 있었다. 이 갈고리못에 두 아기가 목에 상자를 묶는 노끈이 둘린 채 걸려 있었다.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못에는 작은 주드의 몸이 같은 식으로 매달려 있었다. 큰 아이 근처에는 의자가 뒤집혀 있고, 아이의 흐릿해진 눈은 방 안을 비스듬히 곁눈질하고 있었다. 여자 아기와 작은 아기의 눈은 감겨 있었다. (P249)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소.” 그가 대꾸했다. “만사는 그대로 변화가 없고 결국에는 그런 가운데 운명 지어진 지점에 다다를 것이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요!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그녀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그건 <아가멤논>의 합창에 나와요. 이번 일이 일어난 다음 그 말이 계속 내 마음속에 떠올라요.”
“가엾은 오빠........ 오빤 모든 걸 다 잃었어요! 나보다 오빠가 더요. 난 적어도 오빠를 얻었으니까요! 그런 걸 누가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다 읽다니! 그러면서도 가난과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어요!” (P256)
“그 사람이 다시 나와 결혼을 하기로 했어요. 그건 형식적인 것이고, 세상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지요. 세상은 사물을 있는 대로 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난 물론 이미 그 사람의 아내예요. 그 점에 대해서는 변한 것이 없어요.”
그는 격렬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는 내 아내요! 그래요. 자기는, 그건 수도 잘 알아요. 수는 항상 후회를 했소. 체면을 살리기 위해 집을 비웠다가 합법적으로 결혼을 한 것처럼 꾸미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을 말이오. 난 수를 사랑했고 수도 날 사랑했소. 우리는 서로 밀착되어 있었소. 바로 그것이 결혼이오. 우린 아직도 사랑하오. 자기나 나나....... 나는 알고 있소. 수! 따라서 결혼은 취소된 것이 아니오.”
“그래요, 오빠가 결혼을 어떻게 보는지 나는 알아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자신을 억제하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난 그 사람과 다시 결혼할 거예요. 오빠가 말하는 결혼을요. 엄격히 말해서 오빠도. 또 -내가 이런 말 하는 것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오빠도 다시 받아들이세요. 아라벨라를요.” (P294)
“아라벨라. 내 말 들어보시오. 당신은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 당신은 나보다 기운이 더 센 게 맞소. 당신은 나를 나인핀 공처럼 넘어뜨릴 수가 있소. 며칠 전 당신은 그 편지를 띄우지 않았소. 나는 그 일로 화를 낼 수는 없었소. 그러나 난 다른 일에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약하지 않소. 폐에 염증이 생겨 방에만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한 특별한 여자를 만나보고 그 다음에는 죽겠다는 단 두 가지 염원만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빗속에서 여행을 하게 되면 두 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깨끗하게 이룰 수가 있소. 그걸 지금 난 한 거요. 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그리고 내 인생에 끝장을 내었소.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열병의 인생에 종말을 낸 거요!”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