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키다리 아저씨> 1990년
<키다리 아저씨>(1955), <키다리 아저씨>(1938), <키다리 아저씨>(1931), <키다리 아저씨>(1919)
고아인 제류사는 열여덟 살까지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생활하다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제루샤 애벗(Jarusha Abott)을 통해 우리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행복’이다.
“그 신사분은 우리 고아원의 남자아이들에게 관심이 많단다. 찰스 벤튼과 헨리 프레이저 알지? 그 애들을 대학에 보내 주신 것도 그 평의원이셨어. 둘 다 열심히 공부해서 그분의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하고 있지. 그분은 다른 보답은 바라지 않는단다. 지금까지는 남자아이들에게만 자선을 베풀어 왔지. 내가 여자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해 봤지만, 아무리 가능성 있는 여자아이라도 소용이 없었단다. 내 생각에는 여자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네요, 원장님.”
이쯤에서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제루샤가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다.
“오늘 정기 회의에서 네 장래 문제가 거론되었단다.”
리펫 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류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열여섯 살이 넘으면 고아원을 나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너는 예외였어. 너는 고아원 학교를 열네 살에 마쳤고, 성적도 아주 좋았지. 행동도 나무랄 데 없었어. 물론 항상 그랬다는 건 아니야. 어쨌든 그래서 널 마을 고등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던 거지. 이제 고등학교도 마쳤으니, 당연히 고아원에선 널 더 이상 맡을 책임이 없어. 사실, 규정보다 2년이상 더 돌봐 줬으니까.” (p22-23)
제가 평의원님에 대해 아는 건 딱 세가지뿐이에요.
1.키가 크다.
2.돈이 많다.
3.여자아이들을 싫어한다.
처음엔 ‘여자아이를 싫어하는 분께’라고 쓸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저 자신을 모욕하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돈이 많은 분께’라고 할까 했는데, 그건 평의원님을 돈만 아는 사람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거기다 돈이 많다는 건 제가 알고 있는 평의원님의 일부분일 뿐이잖아요. 평생 부자로 산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에요. 아주 똑똑한 남자들도 월 스트리트에서 파산하는 일이 많잖아요. 하지만 최소한 키는 평생 변하지 않겠죠! 그래서 전 평의원님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어요. (p32)
수요일
키다리 아저씨께
이름을 바꿨어요.
학적부에는 여전히 ‘제류샤’로 적혀 있을 테지만, 친구들과 선생님은 이제 절 ‘주디’라고 불러요. 하나뿐인 애칭마저 스스로 지어야 하다니 좀 안됐죠? 하지만 순전히 저 혼자 지은 건 아니에요. 프레디 퍼킨스가 제 이름을 제대로 말하기 전까지 절 그렇게 불렀거든요.
리펫 원장님의 아이들 이름을 고를 때 좀 더 창의력을 발휘하셨으면 좋겠어요. 원장님은 전화번호부에서 성을 따오는데요, 첫 장을 펼치면 ‘애벗’이라는 성이 보일 거예요. 게다가 이름은 아무데서나 고르세요. ‘제루샤’란 이름은 묘비에서 보고 지은 거래요. 그래서 전 그 이름이 항상 싫었어요. 하지만 주디는 마음에 들어요. 좀 생뚱맞긴 하지만 말이에요. 저와는 달리 파란 눈동자에 작고 귀엽고,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제멋대로 굴며,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그런 여자아이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이죠. 제가 그런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아무리 결점이 많더라도 가족이 너무 귀여워만 해서 버릇이 나빠졌다는 말은 듣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런 아이인 척하는 일은 무척이나 재미있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 ‘주디’라고 불러주세요. (p42-43)
오늘 아침엔 앨라배마에서 오신 주교님이 아주 감동적인 설교를 해주셨어요. ‘비판받고 싶지 않으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주제였죠. 타인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고, 지나친 비판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저씨도 들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올겨울 들어 이렇게 화창하고 눈부신 오후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전나무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내리고, 온 세상이 눈의 무게로 휘청거려요. 저만 빼고 말이죠. 전 지금 슬픔의 무게로 휘청거리고 있거든요.
이제 그 소식을 말할 차례가 됐네요. ‘용기를 내, 주디!’라고 말씀해 주세요. (p68)
3월 24일 혹은 25일
키다리 아저씨께
전 천국에는 못 가지 싶어요. 여기서 이렇게나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죽어서까지도 복을 받는다면 불공평하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세요.
제루샤 애벗이 교내 잡지 <먼슬리>에서 매년 주최하는 단편 소설 공모전(상금 25달러)에 뽑혔답니다. 겨우 2학년생이 말이에요! 참가자들은 대부분 4학년이었어요. 제 이름이 나붙은 걸 봤을 때 전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드디어 제가 작가가 되려나 봐요. 리펫 원장님이 제 이름을 이렇게 시시하게 짓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여류 작가처럼 들리나요? 아니죠?
봄 연극제에도 배역을 맡았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를 야외에서 공연해요. 전 로잘린드의 사촌인 셀리아역을 맡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줄리아와 샐리와 전 다음 주 금요일에 뉴욕에 가서 봄맞이 쇼핑을 하고 하루를 묵은 뒤, 이튿날 ‘저비 도련님’과 함께 연극을 보려 갈 거예요. (p130)
“그곳에서 우리의 생각은 사방으로 둘러친 철책 안에 갇혀 있었죠. 그 당시엔 제가 어리고 너무 고단한 생활을 했던 탓에 그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에요.” (P145)
“정말 그래요.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고, 가볼 곳도 많으니 자신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붙잡기만 하면 되는 거죠. 비결은 바로 유연한 사고예요.” (P152)
“세상은 수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은 누구나 왕처럼 행복해야 한다.” (P152)
8월 3일
키다리 아저씨께
편지를 쓴 지 너무 오래되었네요. 잘하는 짓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지만, 올 여름엔 아저씨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아서요. 제가 좀 솔직하죠! 샐리네 캠프에 못 가게 되어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물론 아저씬 저의 후견인이시니 무슨 일이든 아저씨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요. 저에게 다가온 최고의 기회였다고요. 제가 아저씨고, 아저씨가 저였다면 전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잘됐구나, 얘야, 가서 재미있게 지내렴.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우도록 해라. 야외 생활을 하며 건강도 챙기고 그동안 공부하느라 지쳤을 테니 푹 쉬다 오려무나.”
하지만 아저씨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록 윌로우 농장으로 가라는, 비서의 무뚝뚝한 글 한 줄뿐이었요.
제가 속상한 건 아저씨의 명령이 너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에요. (p155)
“지난주에 스물한 살이 되었답니다. 저같이 정직하고 교양있고 양심적이고 지적인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다니 이건 엄청난 국가적 낭비라고 생각해요.” (P166)
“정작 중요한 건 엄청난 즐거움보다는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자세랍니다. 전 행복해지는 진짜 비결을 알아냈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에 얽매여 평생을 후회하며 산다거나 미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최대의 행복을 찾아내는 거죠. 순간순간을 즐기고, 즐기는 동안은 제가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할 거예요.” (P175)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늙고 지쳤으며 목표에 도달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전 위대한 작가가 못 되더라도 길가에 앉아 작은 행복을 쌓아 올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저만큼 쑥쑥 성장하는 여류 철학자를 보신 적이 있나요?” (P175)
“제가 은유의 바다를 허우적대는 것 같아 보여도,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죠? 어쨌든 올여름에 제가 할 수 있는 단 하나, 정직한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립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P188)
저비 도련님은 차 마시는 시간에 딱 한 번 보았을 뿐,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어요. 지난 여름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터라 조금 아쉬었어요. 그분은 친척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봐요. 그건 친척들도 마찬가지고요! 줄리아의 어머니는 저비 도련님이 안정을 못 찾고 있대요. 그분은 사회주의자랍니다. 그래도 머리를 기른다거나 빨간 타이를 매지는 않으니 천만다행이죠. 줄리아의 어머니는 그분이 어디서 그런 이상한 사상에 물들었는지 도통 모르겠대요. 펜들턴 가문은 대대로 영국 성공회를 믿어 왔거든요. 요트나 자동차, 폴로 경기용 조랑말 같은 것엔 관심도 없고 분별없이 개혁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데다 돈을 쏟아붓는다나요. 하지만 저비 도련님은 사탕 사는 데도 돈을 쓰시는 걸요! 줄리아와 저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통씩 보내 주셨다고요.
있잖아요, 저도 사회주의자가 될까 봐요. 그래도 괜찮죠, 아저씨? 무정부주의자하곤 완전히 다르답니다. 사람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짓은 안 하거든요. 전 어쩜 태어날 때부터 사회주의자였는지도 몰라요. 전 프롤레타리아니까요. 어떤 사회주의자가 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일요일에 찬찬히 생각해 보고 나서 다음 편지에 그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p196-198)
“저는 제 의지와 성취할 수 있는 저의 능력을 굳게 믿습니다. 산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이란 게 바로 이런 거겠죠. 제가 위대한 작가가 되는 걸 지켜보세요! 새 소설은 4장까지 모두 끝냈고, 5장도 초안을 마친 상태랍니다.” (P202)
“그 애들은 행복에 익숙해진 나머지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져 버렸지만, 전 매 순간 제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느낀답니다. 그리고 아무리 속상한 일이 생겨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거예요.” (P213)
보셨죠, 아저씨? 전 이렇게 유혹에 굴하지 않고 악착같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답니다. 제발 저 때문에 언짢아하시거나 제가 은혜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지 말아 주세요. 전 항상, 언제나 아저씨께 고마운 마음이니까요. 제가 그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주 쓸모 있는 시민’이 되는 길뿐입니다. (여자도 시민이 될 수 있나요? 아닌 것 같네요.) 어쨌거나 ‘아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가 저를 보면서 ‘내가 세상에 아주 쓸모 있는 사람을 내놓았구나.’하고 생각하시게 하는 거죠. (p217)
“당신이 여기 있어서 함께 언덕을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저비, 당신이 미치도록 그리워요. 하지만 이건 행복한 그리움이에요. 우린 곧 만날 테니까요. 우리는 거짓 없이 진실로 하나가 됐으니까요” (P239)
제가 아저씨에게 어떤 의무감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작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으니, 최소한 노력은 해야 하잖아요. 아저씨 덕에 교육을 받고는 배운 지식을 쓰지도 않고 내버린다면 도리가 아니지요. 하지만 이제는 돈을 갚아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어깨의 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기분입니다. 게다가 결혼을 해도 작가 생활은 계속할 수 있잖아요. 두 가지 일 중 꼭 하나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 문제로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물론 그분은 사회주의자이고 사고방식이 자유로운 분이라 프롤레타리아와 결혼하는 게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두 사람의 마음이 잘 맞고, 함께 있어 행복하고, 떨어져 있어 외롭다면 세상 그 무엇도 둘을 갈라놓아선 안 되겠지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하지만 전 아저씨의 냉정한 의견을 듣고 싶답니다. 아저씨도 좋은 가문 출신일 테니, 동정심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 주세요. 제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지요.
그분을 찾아가 문제는 지미가 아니라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고 털어놓으면 어떨까요? 저한텐 너무 잔인한 일이겠죠? 아마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차라리 평생 비참하게 사는 게 나겠어요.
그 일이 있은 지 거의 두 달이 다 됐어요. 그분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네요. 이제 실연의 아픔에 익숙해졌나 싶었는데, 줄리아가 보낸 편지 한 통이 다시 제 마음을 휘저어 놓았답니다. 줄리아는 아주 태연스레, 저비스 삼촌이 캐나다에서 사냥을 나갔는데 밤새 폭우 속에 붙잡혀 있다가 그만 폐렴에 걸렸다고 적어 놨더군요. 전 금시초문이었어요. 그분이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려 속상해하고만 있었거든요. 그분은 지금 몹시 힘이 들겠죠. 하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주디 올림 (p260-261)
“주디,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걸 정말 몰랐어?”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세상에, 이렇게 멍청할 수가! 사소한 단서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제가 조금만 눈치가 있었어도 충분히 알아챘을 텐데 말이에요. 전 명탐정이 되긴 글렀죠? 이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아저씨? 아니 저비? 그냥 저비라고 부르면 너무 건방진 것 같은데, 전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긴 싫거든요!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절 내보내기 전에 우리가 함께했던 삼십분은 더할 수 없이 행복했어요. 역에 도착해서도 어찌나 정신이 멍하던지, 하마터면 세인트루이스행 기차를 탈 뻔했다니까요. 당신도 꽤나 정신이 없었죠. 저한테 차를 대접하는 것도 잊었잖아요. 하지만 우리 둘 다 너무나 행복했어요. 밤길을 달려 록 윌로우로 돌아오는데, 아, 별이 어찌나 밝게 빛나던지! 오늘 아침엔 콜린을 데리고 우리가 같이 갔던 곳들을 돌아다니며 당신이 했던 말이며 당신의 모습을 떠올렸답니다. 오늘은 숲이 청동색으로 빛나고 공기 중엔 서리 기운이 가득해요. 등산하기 딱 좋은 날씨네요. 당신이 여기 있어서 함께 언덕을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저비, 당신이 미치도록 그리워요. 하지만 이건 행복한 그리움이에요. 우린 곧 만날 테니까요. 이제 우리는 거짓 없이 진실로 하나가 됐으니까요. 제가 마침내 누군가의 사람이 되다니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래도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달콤해요.
앞으로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릴게요.
당신의 영원한 주디
추신: 평생 처음 써보는 연애편지예요. 제가 연애편지를 쓸 줄 안다니 우습죠? (p270-271)